<에조 보고서>( 위키백과/아고라에서 펌)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음8월 20일) 일본제국이 조선을 침략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는 경복궁내에서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가 지휘하는일본 폭도들에게 시해되는 사건이다.
일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젊은 낭인이었던 이시즈카 에조를, 1998년《민비암살》(閔妃暗殺)을 발간한 일본의 저명한 전기작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여사가 자신의 저서에서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라고 설명하였다.
이시즈카 에조는 낭인으로서 명성황후 시해에 참여하기 이전에는 법제국 참사관을 지냈으며, 이 보고서는 현장 총지휘자라고 할 수 있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의 재가를 받지 않고 이전 상관인 씨에마쓰 법제국장에게 보낸 문서로 시해사건에 가담한 일본인 처벌 수위를 낮추기 위해 쓴 것이다(명치 28년 10월 9일부)
에조보고서를 작성한 이시즈카 에조. 그는 ‘일본 암살단이 명성황후를 살해할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젊은 낭인’으로 알려져 있다. 즉 에조는 사건의 목격자였다. 이 보고서는 사건의 원인, 실행자, 사후대책을 기록했고 사건을 주도한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벌 암시내용까지 포함해 있어, 기존의 ‘우치다 보고서’나 ‘히로시마 법정기록’ 등 기존 문서와 달리 은폐·조작되지 않은 유일한 문서로 평가된다.
(*에조는 낭인이라 표시하지만 스크랩 하는 자들도 낭인으로 말하던데 짱구들,,,우리민족에게 그들은 국모를 시해한 낭인이 아니라 폭도란 말씀이다)
(왼쪽) 실제 시해사건에 참여한 일본 낭인군과 한국인 (오른쪽)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공모자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구니토모 시게아키
<에조보고서의 3,4장 기록들>
3.謀議者
推察するに岡本は主唱者たるの如し 大院君の入闕を斡旋したるは正しく同人なり 外に柴 楠瀨 杉村は密議に 參與したりと云う 其他は少しも關知せず 守備隊長馬屋原の如きは命令的に實行の任に充られたるが如し
此荒仕事の實行者は訓練隊の外守備兵の後援あり(後援は或は當からざるが如し)尙ほ守備兵の外に日本人 二十名若あり熊本人多數を占(漢城新報社迹)中に新聞記者數名又醫師商人もあり 隨て洋?和?相混ぜり 岡本は大院君と同時入城し實行の任に當れり 守備隊の將校兵卒は四門警衛に止まらず門內に侵入せり 殊に?次馬連は深く內部に 入입み王妃を引き出し二三個處刃傷を及し且つ裸?とし局部檢査(可笑又可怒)を 爲し最後に油を注ぎ燒失せる茅 誠に之を筆にするに忍びざるなり 其他宮內大臣は頗る慘酷なる方法を以て
殺害したりと云う 右は士官も手傳へたるも主として兵士外日本人の所爲に係るものの如し大凡三時間余を 費して右の荒仕事を與したる後右日本人は短銃又は劒を手にし徐徐として光化門 (王城正門)を出て群集の 中を通り拔けたり 時已に八時過にて王城前の廣小路は人を以て充塞せり
4.실행자
이 막된 짓의 실행자는 훈련대 이외에 수비병의 후원이 있었습니다.(후원은 혹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다만 수비병 외에 일본인 20명쯤이 있었습니다. 구마모토현 출신자가 다수를 차지하여 그들 중 신문기자 몇 명 또한 의사,상인도 있었습니다.따라서 양장, 화장 (일본옷)이 서로 섞여 있었습니다.
특히 무리들[野次馬達]은 깊이 안으로 들어가 왕비를 이끌어내고두 세 군데 칼질을 저질러 (刃傷을 입히고 나서) 나체로 하고 국부검사(우습기도하고 화가 치미는 일입니다(可笑又可怒)를 기타 궁내대신은 몹시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고 합니다. 하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뿌려서 태워버렸다든가 참으로[誠히] 이것을 쓰기 염려가 됩니다.
차마 쓸 수 없습니다. 위는 사관도 도와주기는 했지만 주로 병사 외 일본인들이 저지른 짓인 것 같습니다. 대략 세 시간 여를 소비하여 위 막된 짓을 저지른 후,일본인들은 단총 또는 도검을 손에 쥐고 徐徐히 광화문을 나가 군중 가운데를 뚫고 나갔습니다.그 때가 벌써 여덟시가 지났고 왕성앞 대로(廣小路)는 사람으로 充塞했습니다. (*주- 10월 8일 오전 8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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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조 보고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원인과 발단을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에조 보고서>의 분량은 각 2쪽씩을 차지하고 있는 목차와 서문을 포함해 모두 12쪽이다. 에조 보고서는 (1)발단, (2)명의, (3)모의자, (4)실행자, (5)외국 사신, (6)영향 등의 소제목이 붙어 있는 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에조 보고서가 간단히 요약된 어느 글을 보면,,
"스에마쓰 장관님,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 건청궁 옥호루에서 민비를 시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보고를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낭인들이 20명 정도 궁에 쳐들어와서 고종을 무릎 꿇게 하고 이를 말리는 세자의 상투를 잡아 올려서 벽에다 던져 버리고 발로 짓밟았다
민비는 강제로 저고리가 벗겨져 가슴이 훤히 드러난 상태로 머리채를 잡혀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낭인 하나가 거센 발길로 민비의 가슴을 밟고 짓이기자 또 하나의 낭인이 민비의 가슴을 칼로 베었습니다. 일은 그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왕세자를 불러 죽은 여인이 민비임을 확인한 낭인들은 모두 민비의 주위에 몰려 들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가장 고귀한 여인을 앞에 두자 갑자기 숙연해졌습니다. 왕비를 시해했다는 기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조선 제일의 미녀를 앞에 두어서였는지.
그리고 명성황후를 발견하자 옆구리 두 곳과 배에 칼을 꽂은 후 시녀들의 가슴을 다 도려내고 낭인들은 민비의 하의를 벗겼습니다.한 낭인이 발가벗겨진 왕비의 음부를...숫자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몇몇 낭인이 결국은 바지를 벗고 성기를 꺼내 왕비의 희고 깨끗한 몸에...정액으로 얼룩진 조선 왕비의 시체를 앞에 놓고 낭인들은 대일본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20명이 강간을 했다. 살아 있을 때에도 하고 한 6명 째에서부터는 죽어 있었는데도 계속했다(*주-윤간을 했으며 시신에 강간을 하는 시간도 자행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뜯어말리는 충신의 사지를 다 잘라버렸다. 도대체 그 어떤 이가 한 나라의 황후를 그렇게 대하는가. 이 경우는 고대에도 근대에도 절대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한 후 너덜너덜해진 명성황후의 시체에 얼굴부터 발끝까지 차례대로 한 명씩 칼로 쑤셨다. 물론 이미 명성황후는 죽은 후였다. 그 다음에 명성황후 시체에 기름을 붓고 불로 활활 태웠다.
일본 사학자가 이 문서를 발견하고 수치스러워서 공개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 사건에 가담한 범인 중 상당수가 지식인들이었고 그중에 여섯 명은 유학파였다.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 러시아 공사관은 진상을 알았으며, 곧바로 일본 정부는 폭도들의 낭인들을 불러들였다.그러고는 시해사건의 죄를 사건에 참여한 조선인들에게 덮어 버린 후 일본 낭인들은 무죄로 풀려났다.일본에서 "에조 보고서"라는, 편지 형식으로 된 정식 보고서가 있는데 에조라는 사람이 명성황후의 시해 장면을 아주 정밀하게 묘사해 놓았다.
<이 대목에서 그냥 갈 수가 없다. 후세백작의 怒>
이 쪽바리들은 인류역사의 망나니이다. 누구든 이 장면에서 욕이 않 나올수가 없다.한 나라의 국모에게 윤간을 하는자들에,,,죽은 후에도 시신에 손을 대는 놈들,,, 인간의 탈을 쓴 희대의 악마들이다.후세백작이 을미사변 후 유길준대신 내무대신이라면 이 자들을 거세하고( 요즘의 방법이 아닌 옛날 내시들 하는 방법으로 식칼로 몽땅 자르고 솜으로 처박아 3일 후에 숨을 쉬게하는 방법) 그리고, 불가에서 말하는 명계의 철 멧돌보다도 종신형으로 화장실 변위에 항상 밥먹고 서 있어야 하는...종신형으로..
인류 역사를 보면 대부분 원시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간다. 그런데 일본은 도꾸카와가 전 일본을 통일할때까지 하층민들은 모계사회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원래 쪽바리들은 섬의 골짜기 부족들이 서로 노획해 먹는 야만인인데...가정을 이루는 것은 여자이고 남자들은 그저 여행도 아닌 방황하는... 그러다 어느 마을을 지나다 빨래하는 여자랑 뽕나무 밭으로 들어가는,,,
일본인들 성씨가 뽕밭에서 다나까,,, 산 속에서 하는 식의 유머는 유머가 아니라 아무나 막 하는 그래서 지어미 하고도 하는 개새끼들과 다를바 없는 쌍넘들의 미개문화란 점이다. 요즘 아베신좆 이하 무리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조 안하는 이유도 그들에게도 쌍넘의 피가 흐르는 듯 하다. 이것이 그냥 우스게 소리가 아니라 음미해보면 왜넘들의 똥개와 같은 성 문화의 난잡한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다.
서간용 두루 마리에 먹으로 씀(명치28년10월9일부)伊東 백작가 문서
번역출처 http://blog.naver.com/neko772/10007322832
<에조 보고서의 이해>
실제로 시해장면을 묘사한 에조보고서를 뒷받침하는 증언과 자료는 많다.
"일본인 흉한들은 왕비를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내리 짓밟고 칼로 찔렀다"(왕세자 이척의 증언)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살해범들은 수 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은 뒤에 칼로 거듭 왕비를 찔렀다(영국 영사관 힐리어가 북경의 오코너에게 보낸 보고서)에도 나타난다.
또한 에조 보고서는 명성황후 시해현장의 참혹한 모습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지만 이 보고서만으로는 전체적 성격을 파악하기 힘들고 러시아 보고서를 보면 그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이상 에조보고서는 을미사변에 있어서 명성왕후 시해의 단면을 지켜본 가장 정확한 역사적 기록으로 가치가 있으며 이 에조 보고서만으로 나머지 역사를 모르고 추정하는 낭인들의 거사쯤으로 이야기하는 인터넷의 곡해의 글들을 바로잡기 위해 시해현장과 일본군 진입과정의 증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 군대의 출동및 만행은 일본정부의 계획된 시나리오의 음모에 의해 진행됨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또한 이 보고서의 당사자 에조는 시해 과정의 움직임을 정확히 따라다녔고 모든 현장을 구경하고 있었슬까?? 어쩜 에도 그 자신도 폭도들의 무리의 한 사람이었고 그는 이후 자신에게도 내려질 중벌을 회피하고자 이런 탄원적인 보고서를 쓴 듯한 점도 읽을 수 있다.
<러시아및 일반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보는 시해사건의 전 과정>
러시아측이 보관하고 있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문서는 당시 서울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가 외상 로바노프-로스토브스키에게 보낸 보고서 그리고 당시 고종을 위시한 여러 목격자의 증언서 등이다.
러시아 건축기사 세레딘-사바틴이 서울 러시아공사관에서 쓴 증언서에서 사전 사건모의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증언하고 있다.
“궁궐경비병은 총인원 1500명에 장교가 40명정도가 경비하며 외국인 경비원 당직으로는 미국인 다이 장군(*예비역 대령출신)과 나 세레딘-사바틴이 있었다.”
사건일 전날밤인 6일밤 12시경 사바딘이 근무중 광화문쪽에서 조선군이 시끄러웠고 그 뒤에 일본군이 대기하고 있었으며 궁궐 별군관(당직 사령)의 설명으로는 며칠 전 조선군 훈련대가 경찰대와 싸웠기 때문에 이 두 부대를 해산시킨다는 소문이 돌아 훈련대가 궁궐 앞에 모여 청원시위를 벌였으나 일본군 부대가 도착해 해산시켰다고 했다.
(*주- 군대 해산은 내일, 7일날 을미사변의 난을 일으키는 준비적 단계로 이해된다)
이범진(李範晋)은 그의 증언서에서 당일 밤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본군대와 조선군이 궁궐을 포위했다는 급보(急報)를 받고 고종은 나에게(*이범진) 시간을다투어 미국공사관과 러시아공사관에 뛰어가 도움을 요청하라는 어명(御命)을 내리셨다. 나는 서쪽 담으로 기어올라가 밖을 보았더니, 정원은 군인들로 온통 가득 차 있었다. 남쪽에 있는 광화문(光化門)쪽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어 동남쪽 담의 구석에 있는 작은 탑에 올라가보았다. 그곳에도 밖에는 2명의 일본군인이 순찰을 하고 있었다.
나는 순찰병이 좀 멀리 간 틈을 타 약 4~5m 높이에서 밑으로 뛰어내려 궁궐을 탈출했다. 미국공사관에 도착했을 때 대궐 쪽에서 첫 총성이 들려왔다.”
고종이 이범진을 러시아공사관에 앞서 미국공사관으로 보낸 것은 당시 조선에는 궁내부 고문(宮內府 顧問)으로 미국인 레젠드르 장군, 군사교관으로 장군(퇴역 대령 출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가 150여 명이나 활동하고 있었고, 미국공사관에서 앨런(중국과 조선에서 의료선교사로 근무한 후 서울 미국공사관에 채용되었다)이 왕실에 의료봉사를 하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고종은 위급한 상황에서 제일의 구원자로 미국공사관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이범진은 아무튼 미국공사관을 거쳐서 러시아공사관을 찾아가 궁궐이 일본군에 포위되었다고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궁궐 포위 앞뒤로 발생한 사건은 러시아인 세레딘-사바틴이 증언하고 있다. 세레딘-사바틴(당시 미국과 러시아의 외교관들은 고종에게 일본은 유럽을 두려워한다면서 유럽인 경비원을 궁궐에 채용하도록 건의했다. 세레딘은 그중 한명이다)은 서울 러시아공사관에서 쓴 증언서에서 사전 사건모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현흥택 정령은 증언서에서 경복궁 포위 시각을 말하고 있다.
“8일 새벽 2시 별군관(궁궐경비 당직 사령관)에게 고종의 호위경관 2명이 달려와 삼군부(광화문 앞 경비실)에 일본군과 조선군 훈련대가 운집해 있다고 보고했다. 시간이 지나 새벽 4시 조선군 훈련대 대대가 춘생문(春生門,경복궁 동북문)과추성문(秋成門,경복궁 서북문)을 포위하였다.”
갑자기 8일 새벽 4시에 궁정경비대 소속의 이학균 부령의 보고에 당직사령인 다이 장군과 나(사바틴) 둘이서 추성문에 다가가자 대문틈으로 번쩍이는 총검을 착용한 일본군 병사 40~50명이 도열해 있는 모습이 달빛에 환히 보였다. 다음엔 춘생문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그쪽에도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약 250~300명이 일본인 교관 4~5명의 인솔을 받으며 뭔가 상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경비병이 뛰어와 보고하기를 일본군 폭도 60여 명이 서쪽 담으로 침입하고 있으며, 그중 30명은 군복을 착용하고 나머지는 사복을 입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이상의 대담으로 미루어보아 고종은 이미 새벽 4시 반 전후로 궁궐이 소란함을 알고 있었으며 민왕후는 위험한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를 떠나 어떤 피신처에 은신한 것으로 보인다.
이학균 부령이 왕가에 도착했을 때는 고종이 벌써 외국인 접견실과 회랑으로 연결된 별채에 앉아계셨다. 그리고 주위에는 경호원이 분주히 내왕하며 고종을 호위하고 있었다.
“이학균:왕후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고종: 왕후는 안전한 곳에 피신해 있으니 염려 말고 안심하라. 그리고 경비병은 유혈사태를 예방할 모든 대책을 강구하라. 짐은 이미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궁궐 경비병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다.”
“8일 새벽 3시경 경복궁 동북쪽 춘생문에 사복을 입은 일본인 수명과 그 뒤에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훈련대 200여 명이 일본인 교관 4~5명의 지휘를 받으며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훈련대 대장 홍계훈 정령(1882년 임오군란 때도 왕후를 구출하였으며, 이날 밤에 전사했다)이 춘생문으로 급히 가서 그들에게 왜 이곳에 훈련대가 집합해 있느냐고 물었으나 대답이 없자, 홍계훈 정령은 즉시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은 우리의 상관이 아니고 일본인 교관이 상관이니 참견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이때 경비병이 뛰어와 보고하기를 일본군 폭도 60여 명이 서쪽 담으로 침입하고 있으며, 그중 30명은 군복을 착용하고 나머지는 사복을 입고 있다고 전해주었다.이학균 부령이 왕가에 도착해 고종을 만나서 왕후소식을 물으니 고종은 왕후는 안전한 곳에 피신중이니 안심하라.고종의 말에는 왕후는 옥호루를 떠나피신처에 은신한 것으로 이해된디
일본군의 궁궐 난입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사바틴의 이야기로는 새벽 5시경 춘생문에서 조선군 무리의 큰 구호소리와 함성이 들렸다. 사전 행동을
모의한 듯한 느낌이었고 이어 담을 넘은 일본 폭도들이 궁궐 경비대에 발포하자경비병은 무기와 군복 상의를 벗어 던지고
도망가 버렸다.
궁궐 경비병 1,500여명중 남아있는 사병은 250~300여명뿐인데 다이 장군은 경복궁 외곽 문의 방어에서 후퇴하여 왕가 출입문에
배치 하였다.
궁궐경비병들은 난입자들이 첫 집중사격을 한 뒤, 한 발도 응사하지 않고 총과 군복상의를 벗어던지고 어디론가 도주해 버렸다. 이렇게 하여 폭도들은 내궁 북쪽을 점령했다.
이학균 부령도 궁궐수비대가 무력하게 폭도들에게 저항 한번 못하고 총성에 놀라 도주한 사실을 자인했다.
춘생문 쪽에서 침입한 폭도들은 이학균 부령이 수비한 작은 문을, 추성문 쪽의 난입자들은 다이 장군과 세레딘-사바틴이 지키고
있던 대문 수비를 거의 같은 시간에 무너뜨렸다. 최후의 제2 방위선이 무너지고, 5~6명의 사복을 입은 일본인은 칼로 무장하고
고종과 그 가족이 거처하는 곤령합(坤寧閤)으로 몰려들었다.
이때 추성문을 지키던 사바틴은 폭도들이 왕의 침전인 곤령합과 왕후의 침전인 옥호루 담 안으로 들어서며 울린 총성에 궁노들
300여명이 도주하여 숨을때 사바틴은 70m를 떠밀려가다 침전 정원에서 혼자남아 폭도들의 만행을 목격하게 되었다
명성왕후 시해의 만행
사복을 입은 일본인 폭도 5명이 긴 칼을 들고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 앞뒤로 뛰어다니고 있었으며 그외에도 일본인 폭도 20~
25명이 단검을 들고 있었다. 출입문 2개는 각각 일본군 2명과 장교 1명 등 도합 5명이 차렷자세로 서서 지키고 있었다.
조선군 훈련대 소대는 왕후의 침전 옥호루를 약간 등진 채 세워총자세로 정렬해 있었다. 이 소대 옆에는 풍채가 당당하고
양복을 잘 입은 한 일본인이 유럽식 긴 칼(사바틴은 일본도를 유럽식 긴 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을 빼어 오른손에 들고 있었다.
일본인 폭도들은 10~12명의 궁녀들을 왕후의 침전에서 2m가 넘는 창 밖의 뜰에 내던졌다. 놀랍게도 궁녀들은 한 사람도
달아나거나 소리 지르거나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궁녀들은 옥호루에 있었으며, 뜰에 내쳐진 궁녀들은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보였으나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칼을 든 일본인 폭도 5명(3명은 사복을, 2명은 양복을 착용하고 있었다)이 붉게 달아오른 흥분한 얼굴로 눈에 살기를 띤 채
야수처럼 왕후 처소 이곳 저곳을 뒤지며 왕후를 찾고 있었다.
사바틴은 옥호루 건물에서 폭도들의 눈에 띄자 그는 도망가는 환관들에 밀려 이곳에 있게되었며 신변 보호도 부틱하였다.
순간에 일본인 두목이 나타났다.
그들은 나를 놓아주고, 두목에게 아주 공손한 태도로 나와 나를 알고 있는 조선인을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두목은 그들의
말을 신중히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와서 아주 엄격한 어조로 물었다. ‘우리는 아직 왕후를 찾지 못했다.
왕후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가?’
두목은 나를 지키던 2명의 조선군인에게 나를 옥호루 밖으로 내보내라고 지시했다. 두 명의 조선군인 호위를 받으면서
광화문까지 나오는데, 여러 장소에서 많은 일본군을 보았다. 그리고 특히 한 곳에서는 150여 명의 일본군과 장교가 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 그곳에 고종이 계시는 것 같았다. 광화문을 나온 시각은 아침 6시였다.
중국 지부 러시아공관에서 그가 쓴 증언서에서는 제물포(인천) 외항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해군함정 2척 중 1척이 10월10일
밤 제물포에서 사복을 입은 일본인들과 군인을 태운 뒤 몰래 일본으로 떠났다고 말했다. 그는 이밖에도 10월9일 저녁으로
예정된 일본행 정기여객선이 9일 새벽, 예고 없이 제물포에서 일본인 승객들을 태우고 떠났다는 증언도 했다.
명성왕후의 최후
세레딘-사바틴이 옥호루에서 떠난 이후 상황은 한 무명 상궁(尙宮)이 증언하고 있다.
현장에 있던 무명 상궁은 명성황후의 최후를 이렇게 증언하였다.
“일본 폭도들은 왕후와 궁녀들이 있는 방쪽으로 왔다. 이때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이 일본 폭도들에게 왕후가 있는 방
앞에서 양팔을 들어 가로막고 궁녀들뿐이니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이 순간 일본인 폭도들은 칼로 이경직 대신의 양팔을
내리쳐 그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이경직은 이날 밤 사망했다.)
일본인 폭도들은 괴성을 지르며 방에 난입해 왕비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왕후와 궁녀들은 왕후가 이곳에 있지 않다고 대답했다.
왕후는 갑자기 회랑(궁궐내 복도)을 따라 급히 달아났다. 그 뒤를 한 일본인 폭도가 쫓아가 왕후를 잡고 마룻바닥에 넘어뜨린 후
왕후의 가슴을 세 번 발로 짓밟고, 칼로 찔러 시해했다.
나이 많은 한 상궁이 수건을 꺼내 왕후의 얼굴을 덮어주었다. 그후 얼마 지나 일본인 폭도들은 왕후의 시신을 가까운 숲속으로
운구(運柩)해 갔다. 더 이상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나, 궁궐의 한 환관(宦官)을 통해서 일본인 폭도들이 왕후의 시신을 화장
(火葬)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말을 들었다.”
위의 무명 상궁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인 폭도들이 왕후의 침전에 난입했을 때, 왕후도 처음에 궁녀들과 같이 왕후는 이곳에 계시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왕후는 갑자기 복도를 따라 결사적으로 그곳에서 빠져나가려고 시도했다. 이 때문에 폭도들은 왕후로 짐작했던 것이다.
아마도 앞서 세레딘-사바틴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폭도들은 이곳에서 궁녀들을 하나씩 밖으로 내던지며 극도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후는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폭도들에게 당하는 것보다는 탈출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신을 운구하여 화장했다는 말은 현흥택 정령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현흥택 정령은 진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 폭도들은 왕후의 은신처를 말하라고 사정없이 나를 때렸으나, 끝내 모른다고 했다. 폭도들은 고종이 계시는 곤령합으로
나를 끌고가 왕후가 있는 곳을 말하라고 했다. 이때 갑자기 곤령합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렸다. 나를 잡고 있던 일본인 폭도들은
곤령합으로 급히 뛰어갔다. 그후부터 일본인 폭도들은 더 이상 왕후의 피신처에 대해 묻지 않았다.
나는 곤령합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궁금해 그리로 가보았다.
곤령합에는 왕후가 피살된 채로 누워 계셨다. 나는 주위에 일본인 폭도들이 아직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서 나왔다.
후 왕후의 시신을 동쪽 정원에서 화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급히 그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화장장에 있는 시신의 의복이 여자옷인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였다.”
고종의 증언
누가 왕후를 시해했는가는 고종의 증언서에서 밝혀지고 있다. 이 칙서는 고종이 국내부 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레젠드르의 통역관을
통해 발표한 것이다.
“짐(朕)의 면전에서 전 조선군부 고문 일본인 오카모토 그리고 스즈키, 와타나베가 군도를 들고 침전(寢殿)에 난입해, 오카모토와
스즈키가 왕후를 잡아 넘어뜨리고….” 여기서 고종은 실신해 더 이상 말을 계속하지 못했다.
다음에 왕세자의 말로는 왕후가 밖으로 피해나가자 오카모토와 스즈키가 왕후의 뒤를 쫓아갔다고 말했으나 아마도 피신에 성공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종은 후에 와타나베가 칼을 들고 왕후의 뒤를 쫓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시해 당일 밤 궁궐경비대는 새벽 2시에 이미 일본군의 수상한 동태를 파악했으나 안이하게 경비하다가 4시30분경에야 고종에게
급보를 전했다. 고종은 왕후가 안전한 곳에 피신했다고 답변했으나 당시의 급박한 정황으로 보아 마땅한 피신처를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을 것이다.아마도 고종은 등잔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왕의 침전만은 감히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으로 왕후를
침전인 옥호루에서 고종의 침전인 곤령합으로 부르고,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왕후를 일반 궁녀와 같은 복장을 하고 궁녀들과
함께 앉혀 폭도들의 눈을 피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 이렇게 일본은 구체적 계획의 음모로 군대를 동원하며 세계적인 여론의 질타를 피하기 위해 극악무도한 낭인이라는
폭도들을 면전에 세워 강압적이고 또한 성 도착증 환자들처럼 명성왕후를 시해하며 국권을 유린하며 우리 민족사의
수치인 국모시해(國母弑害)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고종의 증언서(1897년 대한제국선포 이후에 고종은 황제로 호칭. 민왕후도 이후부터 명성황후로 추존)
▲시해 현장에 있던 무명 상궁의 증언서
▲전 농상공부 대신 이범진(李範晋) 증언서
▲조선군 부령(副領, 중령) 이학균(李學均) 증언서
▲조선군 정령(正領, 대령) 현흥택(玄興澤) 증언서
▲러시아인 궁궐 경비원 건축기사 세레딘-사바틴의 증언서
▲가톨릭 서울주교 프랑스인 구스타프 뮤텔(Gustave Mutel)의 증언서
▲10월8일 서울 일본공사관에서 서울주재 서방 외교대표(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가 모여서
미우라 일본공사에게 항의하며 나눈 대담록(영국 총영사가 기록)
▲조선 외부대신(外部大臣) 성명서
▲서울에서 일본인이 발행한 한성신보(漢城新報) 기사
▲일본군 궁궐 침입로 도면(圖面)
이 사건은 조선의 분쟁에서 일어나 일본 낭인들이 개입한 사건이라 하지만 당시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을미사건
두달뒤 작성하여 일본 천황이 결재한 보고서가 2005년에 공개되었다.
낭인이라면 잡쓰레기 건달들을 지칭할텐데 위의 에조보고서에서도 구마모토현 출신자가 다수를 차지하여 그들 중 신문기자
몇 명 또한 의사, 상인도 있었습니다.라고 보고하며, 이들 50여명중 군인이 10명, 낭인이라 지칭하는 폭도들중 상당수가
지식인이었고 6명은 유학파 학생신분인데 우리도 이 폭도들을 낭인이라 말하는가??
당시 3개월전 부임한 미우라 공사는 중장출신이고, 명성황후 시해자 구마모토는 소위의 군인이었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보고서등으로 세게 여론에 몰리자 미우라 공사등 50여명은 히로시마 감옥에 투옥되며, 현역 군인들은
히로시마 헌병대에 투옥되어 재판을 받고 사실상 다음해 초에 모두 풀려나고 고속승진등 출세가도를 달린다.
그리고 을미사변 후에 유길준은 어용 내무대신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마무리에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했다.
그는 아마도 개화기의 인물중엔 친일파 목록에서 교묘하게 빠져 있지만 국모 살해의 가담자의 누명을 벗을 수는 없다.
내무대신으로 당시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서 일본넘들을 모조리 구속했어야 하는데 한국인 3명만 사형시키는 우를 범한다.
여기엔 죄도 없는 두 사람이 억울하게 죽는다.
여기서 시해범 구마모토 소위는 혹시나 여론이 불거질까봐 융숭한 대접보다 멀리 대만주둔 일본군에 보내고 전투중
사망한다. 그가 없어자는 것이 일본의 바램인지도 모르지만 혹이나 무리한 전투를 유인해서 그를 죽였는지도,,,
또한 그는 전사자 군인으로서 전몰자들의 묘인 야스쿠니 신사엔 묘가 있어야 하지만 야스쿠니엔 그의 묘는 없다한다.
일국의 국모를 강탈 시해한 자로 신사에 묻힌다면 이는 후일 큰 모순을 야기할까봐 그 자는 일본을 위하고도 신세 조진넘이
된 것이다.
국모시해 한인 가담자 3명은 일본으로 망명 잠적하며 유길준은 다시 섬으로 유배 피신되지만 히로시마에서 일본 여자와
살던 우범신은 끝내 조선인의 저격으로 죽는다. 이 저격자 고영근은 사형의 언도가 떨어지고,,,
한국인을 한국인이 죽였는데 3국 일본에서 사형언도라..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요즘 불거지는 야스쿠니 폭발물 투척사고에 아직은 용의자 선상이지만 그 자는 한국에서 재판을
받아야 할게 아닌가??
지금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120년 지난 지금이지만 분명한 것은 야스쿠니 신사에 뭍혀있는
폭도들이 있다면 그 폭도들은 하루속히 정리되어야 하는 것이다
2부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여우사냥"이라는 일본의 공작으로 그 책임은 천황이 져야 할 것이란 내용과
몇년전 동창들과 검단산행에서 베트남 참전비 길로 내려오는데 운산친구는 도랑 건너 큼직한막 어느 가족묘에가더니
유길준 묘란다. 옆의 유길준 동생은 타이틀도 있는데 유길준은 이름 석자뿐이라 의아해 한다.
그래서 난 그자는 친일파야 햇더니 모두들 의아해 하던데...
할 수 없이 일장연설엔... 그는 친일파 목록에 들어있지않는 친일파란,,
그래서 그는 유언으로 비석엔 아무것도 쓰지말라 유언을 남기는데, 그는 후일에 역사의 심판을 잘 아는듯 하다.
그사람은 명성황후 시해의 가담자이고, 이 사건 종결에 일본 어용의 꼭두각시 내무대신이라 그의 친구 윤치호는 시해당일날
유길준의 청으로 일본넘 한놈과 셋이 저녁식사를 했다는데 후일 윤치호는 이 저녁식사는 유길준이 명성황후 시해에
알리바리를 성립시키려던 행위로 유길준은 시해사건의 가담자라 낙인 찍는다.
이러한 유길준의 인생에 양단을 걸치며 친일엔 빠지지만 당시 제일 많이 배운자로 배짱없고 소신없는 행위들 발가볏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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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log.naver.com/bhjang3/222569763464 아사히 신문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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