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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꼬리를 잡아보며...

오대산 전투와 군사 작전권의 諸 문제.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62&articleId=64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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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주소는 나의 블로그에 올라있는 이름을 검색하니 아고라 광장에 떠 있는 글이다.

나는 지금껏 블로그를 하며 아고라에 처음으로 가 본것인데,,,  인터넷이란 기본적으로 각 개인의 생각이

므로 오류가

많길래 나는 그런곳도 거부 하였었는데 아고라 광장의 이 글도 뭔 얘기가 길기만 하고 작전보다는 일 개인의 비방이랄까?? 제목의 군사작전권에 대한 얘기는 맞지만 그래도 일 개인만의 잘못은 아니니 제목이 이상함을...

 

그럼 요즘 다시 뉴스에 오르는 군사작전권에 대한 나의 생각을 피력해본다.우리의 군사 작전권은 50년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군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격퇴하기 위해 국군휘권을 유엔군에 통합하도록 하는‘작전권 이양에 관한 서한을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보냈고 사흘 후인 7월 17일 맥아더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그날부터 유엔군, 다시 말해 유엔군의 지휘권을 가진 미군에게 작전지휘권넘겨졌었다.

그러나 멕아더 유엔군 사령관과 미8군 사령관의 워커, 리지웨이, 벤플리트는 우리나라 육군이 전선의 일독자적으로 담당하는 분담형식으로 전쟁을 치렀다. 우리 국군의 군단도 육군을 경유하여 작전지휘권을 행사

함으로써 이양받은 지휘권을 융통성있게 행사하였다.

그런데 이 독자적 작전권은 1951년 중공군의 6차공세는 수도권일것이란 예상을 뒤엎고 미 10군단과 국

3군단의 접전인 소양강 상류를 건너 국군 7사단과 9사단 사이를 뚫고 내려왔다.(중공군 2차 춘계공세)

 

이에 3군단 소속의 국군 3, 9사단은 오마치고개를 점령한 거대한 중공군에 맞서 결전을 못하고 후퇴하여 뿔뿔히 흩어지고 이로서 위 사단의 유일한 후방 보급로인 인제~진부간의 도로 허리가 차단되고 중공군은 진부까지 밀고 들어와 강릉이 코 앞에 노출되었다.

 

강릉은 해상으로 들어온 물자 보급기지로 강릉 비행장에서 출격 평양폭격까지 하는 군사요충지인데 이곳의 중공군의 손에 들어가면 비행장에 야적된 수많은 물자랑..그보다 국군은 삼척아래로 내려 밀릴것이기에 무조건 방어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대산 전투이며 미군은 우선 중공군이 3,9사단이 버린 물자를 노획할까봐  횡게에서 하진부의 3군단 사령부까지의 버려진 장비부터 폭격을 가하였고 강릉주둔 백선엽의 1군단의 한신연대는 대관령 방어전투에서 10여명의 사상자를 내며 인민군은 천여명 넘게 죽이는등 치열한 전투의 공방속에 중공군을 물리친 것이 오대산 전투이며 이 전투에 이후 곧바로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강릉의 국군 1군단에 방문하여 비행기에서 내려 그 자리에 선채로 “제너럴 정, (정일권 육군 참모총장) 이것으로써 한국군 3군단은 폐지합니다. 또 육군본부의 작전통제도 없어집니다

.

3군단의 붕괴는 결국 육군의 자존심에 치명타를 가하는 것이 되었다. 이로서 우리의 군사 작전권은 모두 미국에 이양 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작전권 무조건 환수를 원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

우리나라 군대의 기본 목적이 "본토방어"와 "자주국방"이라는 것은 군대 제대한 사람의 상식이고, 자주국방

본이 "군사작전권 확보"라는 것 역시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미군의 앞잡이로 사는 것을 "창피않다"고 생각하는 것뿐 아니라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설쳐대는 또라이가 있다.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 온 1945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주둔하는 목적이 "자기 국가의 이득 지키기" 위함인 것히 알면서도 주한미군 주둔하는 것에 대해 우리나라가 분담금까지 바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똥별 새끼들(국뻥부), 퇴역 똥별의 놀이터인 성우회와 재향군인회, 세계 여기저기에서 온갖 침략과 만행까지 저지르는 국을 "은혜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종미 사대주의 반역세력(이명박근혜 일당과 반역 언론들), 여중생 2명을 탱크로 깔아 죽이고도 사과하지 않는 미군을 하늘의 군대라는 의미의 "천군"으로 표현하는 개신교 세력들, 등등 이다. 이 또라이들은 "우리나라가 작전권 환수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떠벌이면서 작전권환수를 계속 연기하고 있다.

 

그런데, 군사 작전권 환수받을 준비가 완료되는 완벽한 시점이 도대체 언제라고 생각하냐? 전세계에서 완벽

작전권을 가진 나라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냐? 원정 침략 군대인 미군의 작전권이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다

생각하냐? 어느 나라든 자기 나라의 군사전략과 실정에 맞도록 작전권을 수정해가며 운용하는게 상식 아니냐?

 더구나, 북한보다 30배가 넘는 천문학적인 국방비를 해마다 사용하면서 작전권 환수도 즉시 못 하는 수준이

면, 국방부를 해체하고 다시 만드는게 낫지 않겠냐? 망국적인 미국 똥개(똥별)놈들아, 니들에게 "자주국방"

의지가 코딱지만큼이라도 있기는 한 것이냐?

http://blog.daum.net/dandakhan/16573156

 

글씨다.

이런 표현이 결코 옳은것만은 아니니라. 그러기에 이런식의 생각만으론 만약 다시 전쟁이 난다면 제자리에

코박고 죽을 수 밖에 없슬 듯하다.

 

미군이 이땅에 들어오게 된 것은 6,25발발 5일만에 미24사단의 스미스부대이며 이는 트루먼이 휴가지에서 

북한의 전면전 도발이란 AP통신 뉴스를 접하자 곧바로 3시간 비행기로 백악관으로 돌아오며 곰곰히 생각하

고 유엔군을 창설 하는 기간중 일본주둔 미 보병 24사단의 스미스부대가 먼져 오고 24사단은 대전에서 선전

하였기에 낙동강 전선에서 준비를 위해 3일간 지연시킨게 우리나라 전복위 위기에서 벗어나는 큰 힘이 되었

던 것이다,

이로서 24사단은 외해되고 사단장 딘 소장은 길을 잃고 옥구쯤에서 인민군의 현상금 몇 딸라에 주민의 신고

로 3년간 포로가 되었다.

전쟁이 나면 시민들도 군인을 도와 대항을 해야지 광주사태땐 시민군이란 단어가 있지만, 6,25는 군인만

우고 시민들은 피난가야 됩니까??

나치 독일시절 프랑스는 지하 레지스탕스가 있었는데 울 나라는 북한이 쳐 내려온 지역에선 시민들을 몰아

물자수송등 노역과 정치보위부들이 민재판이라는등 만행등이 무서워 한 부락 전부가  인민군 노역자들로

변절해 버렸고 우리는 노곡리 사건만 알고 인민군의 만행이나 딘소장의 신고자를 찾아 재판에 회부하려는

노력은 없었다.

 

아마 6,25동란에 인민군에 부역이나 동조를 한 자들을 파 헤쳐 본다면 일개 부락이 전부 동조한 곳도 적지

않으리라. 우리는 지금 노곡리사건이나 이러한 모두를 그때 당시의 여건과 시각이 아닌 지금의 잣대로 가

하는 것은 문제이리라

 

2대전후 프랑스는 나치에 협력한 자들을 끝까지 색출하여 약 7,000명 정도 재판에 회부하였다 한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또한 6,25당시 우리는 겁만먹고 3일만에 서울을 내 주었는데 이도 의정부에서 서울 진입도로 폭이 작아

인민군 차량들끼리 엉켜 하루 반을 까 먹은 탓이다. 그들이 속전속결 했더라면 최후의 보루 낙동강 방어

전선도 준비를 못한채 유엔군은 일본서 전투를 하려는 계산도 했는데,,, 우리는 베트남 전쟁의 사이공 함

락을 잘 알고 있다.

 

6,25당시 00연대 연대장 "계00"대령은 부대원들을 이끌고 인민군에 대항하여 싸울 생각이 없었고 부대를

이탈하여 처자식을 대리고 일본으로 도망가려고 부산으로 갔다 한다.

이렇듯 군도의기강도 없었고 제대로 대처를 못하였으나 군인 전부가 그런 모양새는 아니었다.

 

또다른 군인들은 전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죽음 앞에서 자유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또한 미군들에선 워커 초대 미 8군 사령관은 그의 아들은 대위로 보병 중대장으로 참전하였고, 처음으로

중공군을 박살내어 훈장을 아버지가 직접 달아주었다.

밴플리트 3대 주한미군 사령관2대 독자인 그의 아들도 아버지를 도와 공군 중위로 한국전에 참전하여

B29로 황해야간 폭격시 전사하였다,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의 아들은 3번이나 부상을 당하고 병사 하였다.

 

그보다 아이젠하워는 미 대통령 당선자가 되었는데 그의 아들은 당시 동두천에서 보병 대대장이었다.

아버지의 고민은 아들이 포로가 되면 대통령직 수행에 차질이 생긴다고 아들에게 말 하였다 한다. 이 말인

즉 포로가 되면 자결하란 뜻이다.

그들은 이렇게 자유수호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천안함 사건을 자작극이라 하던 사람들. 아들까지 데려와 전쟁을 하던 미국인들을 전쟁광이라고 할 것인가?그런말 하지도 말아라. 그들은 자유와 평화의 정의를 위해서 알지도 못했던 이국땅에 사랑하는 자식을 묻고 간 것이다.이러고도 미국이 자기이득만 취한다고 생각할 것인가??

 

일전 북경 올림픽이 끝난 3일뒤 시카코 트리뷴지에 한국발 기사 두건중 하나는 앞으로 전면전이 있다면 그

초기전은 몽금포 앞의 북한군 호버클리프트 부대가 6,25때처럼 3일이 아닌 30분이면 행주대교를 넘어 서울

로,, 게릴라 전이란 글에서 이에 대항하는것은 비행기로 김포와 의정부 미군이 약 60대 재빠르게 출격해야

한다는데..

우리는 미사일이고 이런 말보다 우선 이러한 준비도 착실히 하여야지 작전권 이양안한다고 무례한 욕설만

부을 것인가??

이참에 나는 6,25를 한국전쟁이라고 하는 생각자체부터 거부한다.

아마 좌파정권시절쯤에 6,25를 한국전쟁이라 명명했는가??

한국전쟁이라 표현함에는 6,25당시의 북괴를 한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다.

 

 

만약 미국의 남북전쟁, 게티츠버그에서의 처절한 전쟁을 그들은 국가의 전쟁이라고 부르던가?? 동란도 아

그냥 남북전쟁이라 명시한다.

우리는 6,25 동란이 아마 북한과 유엔에 동반 참가하며 좌의 정부들이 6,25 민족의 동란을 그 지위를 격상

시켜준듯 한데 당시 북한은 국가가 아닌 괴뢰 집단이기에 이는 이는 큰 오류란점이 나의 생각이다.

 

요즘 2015,12월에 작전권 환수와 연기설 두가지가 뉴스의 각을 이루는데. 올해는 정전(7,27) 60주년이라 떠들썩한데 우리는 6,26 동란에 당사자이지만 우리는 정전의 자격이 없습니다.
만약 작전권 이양이후엔 북괴의 정전 위반사항을 우리가 무어라 그럴것인가??
정전은 백지장으로 만들어질 것입니다.

 

개0도 모르는 인간들이 쌍소린 잘 썩어서...천안함을 자작극이라 떠벌이던데 ... 이 지구상에 자기 군대를 이유없이 상해하던 폭군 있던가??여중생 사망에 촟불 시위 했다면 금강산 관광객 피격에 북한에 대해서도 촟불 시위 했던가??우리의 좌의 무리들이 균형있는 생각이라면 나도 동참하련다.

 

 

이 후세백작은 작전권의 오늘의 현실에 맞게 수정으로 이땅에 평화가 정착되는그날까지 작전권

환수가 미뤄져서 북괴에 대항하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나는 평창사랑의 일환으로 워커장군이 12월 의정부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3일전 아직 중공군도 쳐 성

에서

내려오기 이전에 오대산의 월정사 소각명령을 내린 이유를 알고싶어 6,25전사의 책들을 뒤척거려 보았다.

 

패튼 대 전차 군단의 패튼의 스타일,,,

어쩜 패튼과 같은 질주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점등. 워커의 의중의 생각과 실제 인민군들의 만행,그리

고  월정사 소각명령의 해답을 찾았다.

2부에 그 기록과 나의 블로그에 "월정사"편에 소각명령을 내리고 3일만에 워커장군은 사망하였고 또한

그 명령을 하달한 김백일 1군단장도 51년 5월에  서울 재 수복(1,4후퇴이후)과정에서 리지웨이 장군의

소집회의에 여주 강변의 미 8군 야전본부에서 돌아가다 기상 악천후로 대관령에서 추락 사망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두 장군은 월정사 소각명령후에 사망한 것이다.

 2부에서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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