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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꼬리를 잡아보며...

지평리 전투 이야기

지평리 전투 이야기

 

후세백작 2015.07.22 17:09

 

<지평리 전적비>

 

지평리는 양평군 지평면 소재로 중부 내륙 깊숙한 산간분지 마을로, 이곳 지평 아래에의 구둔이란 곳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적의 방어를 막기 위해 설치했던 9개의 진지를 뜻하는바 지평리는 중부 내륙의 오지이면서도 양평, 홍천, 횡성, 여주, 원주로 연결된다.교통의 요충지이다.

 

지평리엔 과거 6, 25때에 벨기에의 바스토뉴 사수작전의 일명 벌지 전투와 똑같은 전투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2차 대전의 벌지 전투 이야기는 영화로나마 좀 알았지만 용맹스러운 한국판 벌지 전투가 재현된 "지평리 전투"는 알지 못한다.

벌지(bulge)란 주머니란 단어로 6,  25 전쟁시 지평리에는 9만여 중공군의 포위에 둘러싸인 6,000여 명의 미군과 프랑스 군을 구출하는 한국판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이 전투에서 연합군엔 두 명의 영웅이 탄생되었으며, 약 20여 명이 미 본국의 훈장을 수여 받았다. 이 이야기에 앞서 우선 대략적인 6,25 전사속에 지평리 전투의 용맹성을 이야기 해 본다.

 

6,25 전쟁을 (저는 이를 확전 개념의 국제전인 한국전쟁이라 표현하지 않습니다) 보는 나의 논점에서 맥아더와 아몬드 10 군단장에 대한 나의 촌평은 하편으로 미루고, 때는 1951년 2월 11일 중공군 4차 공세에 지평리 전투는 참으로 국가의 존립에 중요한 위기였었다.

그 유명한 인천 상륙작전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국가의 존망의 기로에서 사활을 걸고 이겨야 하는 목표가 있었지만, 인천 상륙과 다부동 전선을 돌파한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에서 주춤거리는 미군에게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을 요구하고, 일사천리로 국군과 미군은 쟁탈전이라도 하듯 서로 먼저 평양을 입성하였다.

 

중공은 38선을 넘으면 중공은 개입하겠다는 멧시지를 비추지만 통일로 가는길에 무엇이 두려우랴. 인천 상륙작전은 이 전쟁의 개념을 바꾸어 이제 북진과 통일이 전쟁의 목표가 국군과 유엔군은 청천강을 건너 운산까지 당도하며 적유령만 넘으면 압록강까지 통일의 목표를 달성하는 듯 하지만, 이때 이미 중공군은 30만의 대 병력이 북한에 한 달여 매복해 있었다. 중공군 개입으로 미 2사단은 청천강 남쪽 군우리에서 중공군 2차 공세에 붕괴되고 미 해병 1사단은 정전호에서 갖혀 고립되는등 통탄의 아쉬움을 삼키며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하게 된다.

 

  맥아더는 10월 10일 웨이크 섬에서 투르만에게 중공군은 공군도 없고 그들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지만, 중공군의 30만 대군은 이미 그 하루전날 압록강을 넘어 북한에 잠입하였다. 그러나 이 엄청난 전시 사건의 정보도 인정치 않고 작전을 펴는

맥아더에게 찬성을 보낼 수 없는 논점을 쓸 것이다.

 

  6, 25는 낙동강 전선까지 인민군대 국군과 유엔군의 전투였지만, 인민군은 제 기력을 상실하고 이후로는 중공군대 국군과 미군이 주축이되는 유엔군의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맥아더는 원폭투하 후 미주리 함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 영웅이 되고 인천상륙작전으로 神적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 상륙작전에서 서울 진격에 병력을 지원하기 위해서 낙동강의 적 3개 사단을 궤멸시키고 진격하였다.

 

여기에 나로서는 많은 생각의 문제를 하편에서 제기 할 것이고 원폭투하는 미국의 태평양 전쟁 대 일본 본토 상륙전에 미군 100만명과 일본군 1,0000만명이 죽을 것이란 보고에 트루먼은 그 자리에서 그럼 바로 원폭투하 하시오.20만을 죽이고 일본이 항복했으니 경제적이란,,,맥아더에 찬성하여 트루만은 중국에 원폭을 투하결심에 애틀리의 만류와 ,,,

 

  암튼, 국군과 유엔군은 크리스마스에 일본으로 귀한하고 집에 가겠다던 이야기는 무산되고, 후퇴를 거듭하는데. 중국 내부의 많은 문제로 지원과 보급의 애로에 중공군 총 사령관 평덕화는 2-3개월 정비후 서울을 점령하자는 의견에 모택동은 곧바로 참략하라는 주문에 12월 31일에 20만의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서울을 침공한다.

(* 원래 인해전술은 아니라 중공군은 포대전법을 사용하였다)

 

  이때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후임으로 리지웨이 중장이 부임하여 전선을 시찰하고 더 이상 아군의 1. 6사단에 커다란 돌파구를 인식하고 서울을 퇴각하여 한강, 양평, 홍천선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것이 1,4후퇴로 중공군에게 패한것이 아니라 후일을 도모하며 먼저 후퇴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금 평택-안성까지 후퇴할 즈음 대규모 북한군은 3차 서울 공세에 맞춰 12월부터 가평, 춘천으로 함준한 태백산맥을 타고 원주-평창, 영월-단양선을 함략하며 서울 공략에 승부처는 원주가 되었다.

 

  만약, 1, 4후퇴가 없었다면 아군은 전열을 잃고 재기의 기회도 상실되었겠지만, 1951년 1월초 미국은 서울을 다시 내주자 한반도를 포기하고 철수하려고 고려하였으며,중공군이 평택- 삼척을 잇는 37도선 50Km아래인 금강 방어선을 진출할 경우 한반도에서 철수한다는 계획이었으며, 중공군 공세 여하에 따라 한반도의 운명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 철수론은 맥아더의 편향적인 생각이었다. 맥아더는 중공군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하며 핵폭탄만 운운하며, 이 판에 중국 공산당도 부수고 자유 중국을 만들겠다는 폭 넓은 생각이지만, 미 국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보다 더 많은 땅을 지배하겠다는 야망뿐,,, 맥아더의 비 정상론은 하편에서 트루먼과 비교 연구 할 것입니다)

 

  이때, 미 2사단은 곧 원주를 회복하며 군우리에서 패한 설움을 갚으며 이것이 미 8군의 1,4후퇴의 전체의 위기를 수습하며 국군과 유엔군은 안정을 취하며 반격을 위한 힘이 되었다. 1월 15일 미 25사단 1개 연대는 중공군의 위치와 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한 탐색작전으로 일명 울프 하운드(Wolfhound)작전을 오산에서 평택, 수원까지 작전을 전개하였다.

 

  여기에서 중공군은 인천상륙작전 같은 내륙작전으로 허리가 잘릴까봐 한강 이북에 주력부대를 두고 이남에는 소수 경계 병력만 배치하였다는 신비스럽던 중공군 베일이 벗겨지고 중공군은 화력과 보급에 취약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서, 매튜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은 지체없이 반격작전으로 한강을 향해 북진의 선더볼트(Thunderbolt)의 "번개작전"을 단행한다.

 

  서부지역은 한강 남쪽에 진출하였는데, 유엔군이 한강을 건너려면 중부지역도 홍천선까지 끌여 올려 압박하여야 하는데 피아 쌍방이 홍천이 요충지로서 중요성을 간파하고 중공군도 대 부대를 홍천으로 이동시켜 4차 공세가 예상되었다. 이에 홍천을 목표로 "몰이작전"(Round Up)을 전개 하였다.

 

  이 지역은 미 10군단 세터로 흥남부두 철수로 유명한 아몬드 군단장은 미군은 후방에 배치하고 전방에 한국군 사단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3, 5, 8사단과 서측 지평리엔 미 23연대가 담당하여 횡성-홍천의 주공을 공격하였으나 역시 중공군도 삼마치 고개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지금은 200억짜리 터널이지만 당시엔 고개 하나가 전선으로 이를 빼앗기면 눈 앞의 시계 모두가 적의 손에 들어가기에 서로가 사활이 걸린 지점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서도 미군이 담당하는 서부측보다 화력의 열세인 국군 1사단의 칠곡, 3사단의 영천지역을 주 공략했던 것처럼 중공군 사령관 팽덕화이는 조조라, 중공군 주력부대가 배후에 미군이고 전면에 한국군이 나선 8사단을 주 목표로, 이 공격을 놓칠리 없었다.

 

  만리길의 연안장정을 돌은 중공군대는 어느 목표를 향하기에는 약한곳부터 덤벼먹는, 즉 시간에 구애없이 상대 흔들기가 목표였지만, 맥아더는 그와 반대로 9,28서울 수복후 평양입성도 서둘고, 압록강까지 진격도 너무 서두른듯,10군단이 장진호를 빨리 넘어가라고 통일을 서둘다가 중공군에 포위당하는,,,맥아더는 승리한게 없고 싸우지도 못하고 후퇴만하는..

 

  중공의 마오쩌둥(毛澤東)은 “화력이 좋은 미군을 피하고 철저하게 한국군을 공략하라”는 명에 따라 아몬드 장군의 전방에 한국군과 그 후방에 미군을 배치하는 전술을 파악한 듯,

중공군 주력부대 4개 사단은 역으로 2월 11일밤 한국군을 타켓으로 4차 대공세를 감행하여,

횡성과 홍천을 잇는 공격로의 좌익에 위치한 국군 8사단을 횡성 서북쪽에서 괴멸시키고, 그 우익인 국군 5사단과 지원군인 국군 3사단 역시 재편된 북한군 2, 5군단과 중공군의 공세에 밀리면서 상당한 타격을 입는다.

 

 

국군 사단의 패퇴함에 따라, 후방의 미 2 사단은 원주로 후퇴하고, 아몬드 장군의 10군단 중, 동부전선의 마지막에 지평리의 미 2사단 23연대만 돌출되어 있었고, 자연 중공군의 다음 목표는 지평리를 공격할 것이다.1개 연대의 지평리만 손에 넣으면 지평리와 여주의 남한강 선을 손에 넣고 아군을 동, 서로 분리한다는 계획이다.

 

 

  좌, 우익이 모두 붕괴된 상황에서 돌출된 형태로 남아있던 지평리는 미군 프리먼 대령의 23연대 전투단과 예하 미군 3개 대대와 몽클라 중령이 이끄는 프랑스 대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지평리가 무너지면 대한민국도 끝이라는 것을 중공군 사령관 평덕화이나 리지웨이나 너무도 잘알고 있었던 것이다.

 

 

 중공군의 지평리 공세가 성공한다면 미국은 대한민국을 포기하고 철수했을 것이라는 내부계획도 수립되어 있었다.이때, 23연대장 프리먼 대령은 아몬드 10군단장에게 지평리가 고립되어 중공군에게 포위될 것이란 보고와 여주- 원주선으로 철수를 건의하자, 아몬드는 릿지웨이 사령관에게 철수를 보고하였다.

 

 

  이렇게 되면 여주, 장호원으로 중공군이 진입하게되고 한강으로 진격하는 국군 1사단과 미 8군의 주력부대는 측방이

무너지면 포위될 수 있는 여지가 있어서, 리지웨이 사령관은 23연대가 지평리 현 진지를 고수하라는 엄명을 내린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연대가 끝까지 남아서 싸운다면, 꼭 구원군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고, 리지웨이 장군에게 지평리는 중공군 대군을 끌어들이는 미끼였다.

 

 


  바스토뉴 벌지전투를 명령한 공수군단장 리지웨이는 한국판 벌지전투를 감행하며 여기서 중공군의 우세한 병력을 우세한 화력과공군력으로 분쇄하는 새로운 전략을 실험할 생각이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프리드먼 중령은 높은 고지를 포기하고 평지로 내려와 지평리역을 중심으로 직경 약 1.5㎞의 둥근
호를 파서 방어진지를 구축한 후 부대를 배치했다.

  2월 13일 밤 10시 예상과 다름없이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공세의 칼끝은 지형상 수비가 취약한 남쪽과 프랑스군이 지키는 서쪽으로 집중됐다. 중공군이 피리와 나팔 등을 불면서 일제히 몰려오자, 프랑스 군은 수동 사이렌을 울리며 기세를 꺾었다. 중공군이 진지 안으로 몰려 들어오자 몽클라르 중령 이하 모든 장병들이 철모를 벗고 붉은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총검과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육박전을 벌였다. 이 모습을 보고 겁먹은 중공군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다음날 저녁 7시에 다시 중공군이 공격을 시작하자 몽클라르 중령은 어제처럼 "20m 앞까지 올때까지 기다리라"고 지시한 일제히 사격해 전멸시켰다. 사방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지평리 상공은 조명탄, 예광탄, 신호탄으로 불야성을 이루며 밤새 백병전이 벌어졌다. 새벽이 되자 중공군은 수많은 시체를 남기고 철수했다. 이 틈을 타 B-26경폭격기들이 날아와 야산으로 후퇴하는 중공군에게 폭탄을 쏟아부었다.

  이렇게 3일밤을

프랑스 대대가 중공군의 주력의 발목을 잡고 있는 동안에 후방의 유엔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격전이 벌어진지 사흘째인 2월 15일 드디어 리지웨이 장군은 지평리에 고립된 프랑스 대대 구출의 명령을 내린다.미8군 예하 5기병여단에 소속된 크롬베즈 중령에게 그 임무가 부여 되었고, 그래서 결성된 특수임무부대(TFT)가 구성되었다. 탱크 23대와 보병 160여명(1개중대)로 구성된 크롬베즈 특임대대는 지평리를 향해서 출발하였습니다.

 

 

  곡수리등에서 중공군의 거센 공격에도 불구하고 구슬고개를 통과하며,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지평리의 23연대 전차부대와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미 공군의 폭격이 재개되고 증원군이 도착한 것을 본 중공군은 꽁지를 빼며 철수하기 시작했다. 23연대의 6천여 유엔군을 잡으러 9만여명의 중공군이 몰려와 5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중공군은 후퇴하게 된다. 이때, 23연대의 손실은 전사자 52명, 전상자 259명, 실종자 42명이었다. 즉 50여명대 5천여명의 사상자가 발생되었다.

 

  이 지평리 전투의 결과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2차대전의 노르망디 영웅들의 미군은 징과 꽹과리의 중공군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하며 맥아더는 만주에 핵 폭탄 투하를 요구하지만, 이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철군하겠다는 으름장속에서 릿지웨이는 노르망디의 바스토뉴 벌지전투의 공수 군단장으로서의 용맹을 유감없이 발휘한 한판승이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중공군을 맞아 연전연패하던 유엔군은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되찾았다.

지평리 전투에서 나타난 것처럼 "중공군은 보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3일 이상 공세를 취하지 못한다"는 것을 간파했다. 이렇게 해서 유엔군은 승세를 타고 2월 21일을 기해 전 전선에 걸쳐 공격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3월 15~16일에는 서울을 탈환하고(1,4후퇴 이후 한강 부교를 통해서 국군 1사단이 서울을 재 수복을 함). 3월 말에는 38도선까지 북상했고 이후 백마고지 전투로 이어진다,

 

  릿지위이가 스스로 가장 훌륭한 전투로 꼽는 지평리 전투에는 두명의 영웅이 탄생되었다.

프랑스 군의 대대장 몽클라 중령(프랑스 3성장군)과 부상을 당하고도 끝까지 싸운 미군 23연대장 폴 프리먼 대령이다.

 

 

  지금까지 아몬드 소장의 10군단은 미 8군의 지휘체계가 아닌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의 직속체계였지만 이 지평리 전투시부터 지휘체계가 미 8군으로 이전되어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의 명을 따르는 지휘체계로 변경되었다.

이때, 만약 지휘체게가 이전되지 않았다면 아몬드 군단장은 프랑스 대대도 원주로 후퇴를 명했슬 것이고, 그 결과 중공군은 내륙 깊숙히 파고들어 서부전선으로 우회한다면 한강아래서 서울 재 수복을 노리던 미군, 한국군 1사단은 양수겹장에 고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서울 재 수복은 어려워지고 맥아더는 당장 철수론을 또 틀출 수 있었을 것이다.

영국 노동당의 애틀리 수상은 미국으로 날아가 트루먼에게 한국전 휴전과 맥아더의 만주 원폭투하론에 트루만의 성은 아시아존의 확전을 불러오고 여기에 미국이 발을 못 빼면 소련은 유럽을 넘겨다 볼 것이라는 논리로 트루먼에게 한국전에서 발을 빼라고 강요하지만 트루먼은 우리는 공산주의에 상대하여 자유를 위해 싸울것이라 하는데,,맥아더는 자유 대한의 전투 사명감은 없었다고 표현해도 좋을까??

 

  하지만, 이러한 6,25에대한 세계의 부정적 시각속에서 철군 운운할때 릿지웨이는 사령관으로 부임하며 1,4후퇴를 하고서 두달만에 이 지평리 전투에서 먹잇감을 던져주는 척하는 지평리 전투로 중공군의 덜미를 잡고 서울 재수복과 당시의 철군론을 종식시키는 名將임과 동시에 智將으로 부각된다.

 

  23연대는 미군과 프랑스 군 1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이하게도 프랑스군의 몽클라 대대장은 1차대전, 2차 대전에 무공을 세운 중장인데 한국전 참전을 위해 스스로 강등하여 중령 계급장을 달고 대대 병력을 이끌고 한국전에 참여하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외인부대로 참전, 모로코와 인도차이나 전선에서 활약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엔 프랑스군이 독일군을 상대로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노르웨이의 나르비크 전투(Battle of Narvik)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와 드골 대통령은 나치스 항전 때 같이 싸우다 영국으로 망명한 전우다. 그 뒤로도 조국의 광복을 위해 힘을 합쳐 함께 싸웠다.

 

 6,25가 발발하자 프랑스도 군대를 지원하자는 여론도 있었으나 2차 세계대전의 전 후 복구에 많은 문제가 산적하자, 지원군만 받아 500 여명으로 1개 대대를 편성하여 미 2사단에 배속 파견하게 되었다. 이때 프랑스 전사에 혁혁한 공을 세운 베르느레는 중령으로 지원서를 제출한다.

그의 본명은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이며, 나치 치하 레지스탕스 활동 때 암호명으로 쓰던 랄프 몽클라(Ralph Monclar·892~1964)로 개명(改名)을 하고 자청하여 중령 계급장을 달고 프랑스 대대를 이끌고 한국전에 참전한다.

 

다음싸이트 관리자들눈 있으면 똑바로 보라 

당신네들이 블로그 디자인 전면 혁신이라하며 프레임 조정을 하여 아레 사진이 가로형 3매가 무조건 세로형으로 내려갔기에 그 아래 설명도 이상하게 되었다.

본인 블로그 모든 글들이 이 모양이 되었고 이 글도 본문 2체로 회색으로 되어 있었다.

단추눈깔들  똑바로 보라.

 

 

 

           리지웨이 중장과 뒤에는 몽클라 중령.

         몽클라 중령은 본명이 베르르네 중장이었으며 훈장을 받은폴 프리드먼 대령.2차대전 당시 18번의 부상과 18개의 훈장을 받은   부상을 당하고도 끝까지한국전 참전 이전에 프랑스의 영웅이었다                  

 

     몽클라르 중령과 함께 지평리 를 승리로 이끈   폴 프리드먼 대령. 부상을 당하고도 끝까지 부대를 지휘해 미 육군의 모범이 되었다

 

<길어져도 더 놀다 갈까요> 

 

  위 사진에 몽클라 중령은 짚팡이는 짚는 노병이지만, 그는 곧 태어날 아들에게 유엔군의 일원으로 싸웠다는 명예를 선물하기 위해 참전했다고 합니다.

(당시 58세이며 이후 외동딸은 한국을 다녀갑니다)

그리고 옆의 리지웨이 중장은 양 어깨에 수류탄을 한발씩 매고 다니는 마스크의 인상으로 유명합니다. 아마도 생과 사는 하나인듯, 무언의 용맹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마스크 입니다.또한, 23연대장의 프리먼 대령의 산위의 고지를 버리고 평지로 내려와 1,6km의 호를 파는 전술개념은 미 웨스트 포인트의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하며 이후 프리먼 대령은 5성 장군으로 유럽주둔 미군 사령관을 역임한다.

 

  리지웨이는 2차대전때 바스토뉴의 벌지 전투를 명령내린 공수 군단장으로 기갑에는  패튼 장군이 있다면 공수엔 리지웨이 장군이있다한다.월랭턴 묘지에 육군 대장으로서 리지웨이 묘보다, 중장 아몬드의 묘는 더 화려한 듯 합니다만, 아몬드 장군은 장진호 전투에서 물론, 본국의 명령이지만 빠른 통일과 조기 철수한다는 성급한 생각인지 무리한 북진에 중공군이 양 협곡위에서 후미를 봉쇄당하여미 해병 6천여명이 장진호 계곡에 갖히고, 당시 미국 뉴스엔 내 자식 구하라 연일 대서특필 보도되는 등 6,25 참전에 부정적인 시각도,,

 

 

  아마 이것은 애치슨 라인등에 한반도와 대만은 제외되었는데, 2차대전을 겪은 미 국민들의 한국전 개입에 찬성하지 않는 부정적 시각이 커지고, 그래서 미국은 6,25에 대하여 조급해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흥남부두를 철수한 아몬드 장군은 지평리에서 프리먼 연대장에게 원주로 퇴각을 결정하고 8군 사령관 릿지웨이가 결재하였다면한국군과 미군의 주공세력은 한강 이남에서 후퇴도 못하는 진퇴양난을 겪는다면, 아마도 이 지점을 모택동과 팽덕회는 놓칠리 없고 그로하여 서울 재 수복엔 큰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었던 것으로, 미군은 곧바로 철수 결정을 내릴 수도 있었슬 것이라 가정도 해 본다.단, 미국의 사정 중 선거가 코 앞이었다면 바로 고우 홈 하는,,, 또 사정을 달라졌슬 것이다.

 

만약 아몬드 의견대로 원주로 철수하였고 이러한 영향을 받는다면 미군은 이땅에 무엇하러 왔던가??2차 세게대전에 노르망디 상륙과 레마겐의 철교를 부수고 바스토뉴 사수 작전등을 펼친 미군의 영화는 고작 징과 꽹과리만 가진,전차도, 비행기도 없고 우마차로 보급하는 30만의 중공군을 못이기는 미군이라면 그들의 2차대전 명장들은 차 상급부대의 전술에 문제가 있음을 시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맥아더의 비판은 다음장에서 더욱 가혹해야 하는 것이다.

 

 

후세백작은 인천의 맥아더 동상을 부수자는 좌파는 아니다. 그렇다고 보수도 아니올시다.이 글을 씀에는 어떤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정치인이나 사상가는 아니다. 그렇다고 어느 편향적 자세로 앵무새처럼 웅변을 하여 관객을 구걸하려는 똘마니도 아니다. 다만 우리의 역사를 정론으로 바라보고 앞으로도 전사를 통해서 내 자신의 일이나 우리의 난제들을 비교,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모습이다.戰史라는 것은 취미나 혹은 미화가 아닌 과거사이지만 그 현실을 직시하고 분석적이고, 돌파구를 찾는 능력을 배양함이 있어 또한 좋치 안은가??

 

 

  그럼 맥아더의 연기력의 마스크 한번 평 할까요??맥아더 선글라스에 중후한 인상의 꽃미남 이미지를 잘 기억들 하실 것이다. 철모를 눌러쓴 불독인상의 워커장군과는 대조적인데, 누가 더 군인다운 패기의 모습일까요??미주리 함에서 일본 외상의 항복을 받고 맥아더는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서 그는 神의 존재가 되었다 한다. 그러지만, 이 후세가 간파하는 맥아더는 神적인 위치는 그렇지 못하다는 평이다.

 

 

  미국이 진주만을 공격당하고 반격으로 오끼나와를 공격하고 일본 섬 본토로 올라갈 작정이다.당시 미국은 전 일본 70여개 도시에 3개월간에 걸쳐 융단폭격을 감행하였는데,, 일본의 기능은 마비되었도 항복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본군 동남아 진지를 차례로 폭격하며 오끼나와에는 미군 50만이 투하되고 1만이 사망하며 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이때 원폭이 완성되고, 트루먼은 일본 본토 작전에 보고를 받는다.

 

 

  만약 일본 본토를 제압하자면 100만의 사상자를 낼 수 있고 일본은 천 만의 사상자를 추산한다는 보고에 그러면 원폭으로 끝냅시다.원폭 두방에 20만 일본인을 죽이고 그들은 항복하였으니 경제적이다.

후일에 사가들이 만약 원폭이 있으며 정말 본토 상륙전에 백만의 사상자가 난다면 이건 비 경제적이라고 트루먼을 한탄할 수도

있지 않을까?

 

  트루먼은 1차 대전에 소령으로 참전하였으며, 이후 그이 고향 미주리주에서 주 방위군으로 예비역 대령출신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는데.그는 철저한 반공의식과 과감한 결단력의 소유자였다.

 

 

  6,26일 새벽 이승만은 아무래도 북괴군이 전면전으로 내려왔다는 생각에 새벽 3시에 일본의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에게 전화로

전면전의 양상과 실탄 부족등 상의한다.자다가 전화를 받은 맥아더는 6,25 남침에 대하여 트루먼의 명령으로 이미 알고 있었슬 것이다.

 

 

  6,25일 아침 9시 휴가차 미주리에 있는 트루만은 AP통신에 타전된 북괴군의 도발의 짤막한 뉴스를 보고받자,그자리에서 바로 이는소련을 등에 엎고 남침하는 공산세력에 단호하게 응징해야 한다고 곧바로 백악관으로 돌아오며 곰곰히 생각하고 유엔군 창설과 이에조금 시간이 걸리기에 맥아더에게 미군을 먼저 한국에 파견하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트루먼은 이렇게 빠른 통찰력의 소유자이며, 아마도 프랭클린같으면 이해 2월에 얄타회담에서 보듯 스탈린에게 속을 수도 있었겠으나 트루먼은 스탈린과 히틀러는 믿을수 없는 자로 도장 찍고 있었기에 그는 6,25발발에 누구보다도 발빠르게 대처하였던 것이다.소탈하며 결단성이 과감한 그가 신속히 대처하지 않았다면 우린 낙동강 전선 방어도 없이 함락되었슬 것 같다.

 

 

  미국은 진주만 습격당한 후 대 일본전을 구상한다.

그리고 남 태평양 일때의 쪽바리들을 잠재우고 일본 본토로 상륙한다는 구상에서 일본 아래의 오끼나와 전쟁은 치열하고 참혹하기만 하다. B29기의 전 일본 융단 가격으로 조ㅈ댕가리 밖에 안 남은 일본넘들,,그래도 항복을 하지 않는다.

 

 

 

  이러자 원폭을 투하하고 맥아더는 미주리 함에서 일본천왕의 대신 외상으로부터 항복을 받는다..

실지 멕아더가 대 일본 전투에서 승자가 된건 아니고, 오끼나와 전투에서 미군 만명, 일본군 3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도 끝이 없는 판국에 전 일본 융단폭격에도 아랑곳 하지않턴 일본넘들이 원폭 두방에 항복한 것이다.

당시는 원폭이라고 알지도 못하고 큰거 두방인데 이를 비교환산하면 큰거 100방이면 전 일본쪽바리들이 씨도없이 몰살할거란 생각이 들었는지 그제서야 항복한 것이다.

맥아더는 태평양의 미군 사령관이었지 태평양전쟁에서 미군이 화려하였던 것은 아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이란 세인들이 말하길 명 승부라 하지만,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큰 성과를 올렸는지 나는 모른다.

인천으로 6만의 한미 연합군이 상륙하여 인천, 김포 비행장을 접수하고 서울로 들어온다. 이것이 9,28 서울 수복인데...인천 상륙하기 위해서 반경 40km이내에 함포사격등 인민군의 대 부대는 얼신도 못하게 하고 다만 반경내에 있던 잔류 인민군들의

산발적, 저항만 있었슬 뿐, 외부 인민군의 유입은 없었고 대체로 무난하게 서울 입성을 한 것이다.

 

 

무난하단 표현이 한계가 없지만 인천상륙작전 전개에 아마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어려웟던 점들을 고려한 모양이다.

노르망디 상륙 첫날에 낙하산 부대 6천명이 노르망디에 낙하하여 절반이상의 3천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렇게 힘들었던 상륙작전을 연상하고 우려했던 모양인데 실은 인민군부대는 낙동강 전선만 돌파하면 적화라는 생각에 후방 견제를 등한히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손자께서 병법서를 펼쳐들고 하는 말이 왈,,,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싸웠다면 이는 병법에도 없는 가치없는 행위라...가치없는 행위란 다행이 상대가 약해 이긴 것이지, 상대가 만만하였다면 혼란이 야기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 낙동강 전선의 교착상태는 융단 폭격이 해결한 것도, 인천상륙작전이 허리를 끊어서 돌파한 것은 아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과 그에 합류하기 위해 한, 미 연합군은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 3개 사단을 전멸시키고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그렇다면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낙동강 전선을 주춤거리고, 또한 이로 인민군을 유인한 효과도 있겠지만, 인천상륙작전을 위해서 한, 미 연합군의 능력을 붙잡아 놓았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6, 25가 발발하고 국군은 적 탱크를 수류탄으로 파괴하는등 방어를 하지만 여러 진지에서 실탄부족으로 후퇴하는 수난을 겪고, 국군 1사단의 경우 개성, 판문점에서 후퇴하며 서울 후퇴시 한강교의 폭파에 의해 차량 150대, 사단의 모든 포 등은 내버린체 한강을 도하하여 전투력이 상실되고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의 개입에 의해 교착 상태이긴하나, 인민군은 미군의 세터가 아닌 약한 국군의 방어지역만 노리고 공략하였던 것이다.

 

 6,25에는 2차대전의 영웅들이 몰려왔다.패튼 대전차 군단의 오른팔인 20군단장의 워커장군, 후임 미 8군 사령관에 벌지전투 명령을 내린 매튜 릿지웨이 공수단 군단장,레마겐의 철교를 짖접 들어가 지휘한 장교도, 프랑스 남부 상륙의 밀번 장군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영웅들이 날아왔고, 6,25에 참전한장교들이 후일 4성장군에 빛난 캘리 전차부대장, 프리먼 대장, 워커장군의 이들 샘 대장등 만은 영웅을 배출하는데...

 

  낙동강전선에서 미군은 인민군에게 달릴게 하나도 없는 상태였고, 패튼방식의 보병과 전차와 포병, 공군의 공습의 정면 공략이라고어려울게 없었던 것은 아닌가?? 오히려 인천상륙작전의 군인과 화력을 보탠다면 더욱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슬 가정이다.이러한 가정이 중요한 이유는 다름아닌 모택동의 전략회의 소집과 중공군 개입이 늦어지고 우리는 통일하고 압록강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슬 가정이다.

 

 만약 낙동강 전선에서 정공으로 공격하고 진격했다면, 인천상륙작전보다 빠르게 북진할 가능성과 중공군이 개입하기 전에 북을 통일하고 한반도, 즉 한 국가의 통일에 중공군의 개입은 부당하다는 세계 인식의 전환은 가능했슬까??안천상륙작전은 반경 40km까지 함포를 퍼붓고 하는등의 외부에서 인민군 지원세력이 못 들어올 정도의 포 사격등 마치 독, 소 전쟁에서 독일군이 들어온 소련지역은 반경 60km까지 모든 주택들을 불 살라버리는 듯한 개념으로 인천 상륙당시 인민군들의 대항 공격은 국지전이고 이러한 큰 작전에 비해서는 미미한 편이다.

 

  물론 낙동강 전선에서는 국가 수호가 목적이었다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진과 남,북 통일을 위하는 전쟁 개념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북진에서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에 대하여 오판을 한다. 그럼 하편에서...

 

  지평리 전투는 인해전술의 중공군 개입으로 서울도 내 주고 또 다시 후퇴하며, 수원선에서 당장 휴전하라는 압력과 금강선까지 후퇴한다면 철군한다는 계획등 암담한 기로에서 리지웨이의 용맹스럽고도 명석한 두뇌의 지장으로서의 한판승으로 중공군 퇴치는6,25전에서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며 주도권을 가지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나는 20여년전 지평리 문화원장님 댁을 다녀가며 알게된 지평리 전투를 이제서야 조금 쓴다.벨기에 벌지 전투지엔 바스토뉴를 구출한 미 기갑의 셔먼 탱크를 전시하고 있다한다.아마 요 근자엔 프랑스와 미군의 전승 추모비가 제작되고, 기념관도 건립도 있지만, 이 지평리 전사는 앞으로 청년들에게 불굴의 투지와 용기의 학습의 장으로 태어나길 기원하는 마음에 이 글을 쓰는 것이다또한, 당시 바스토뉴를 구출한 에이브럼즈의 중령의 이름을 따써 현 미국 주력 탱크의 이름이 에이브럼즈이듯, 이 지평리 戰勝의 용맹성은 그들 당사국의 기념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이땅의 우리가 배우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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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에는,,몽클레르 중장만큼이나 투지를 불사른 한국계 미국인 김영옥의 이야기를 그려본다.그는 성웅 이순신의 23전 23승처럼 2차대전과 6,25동란에 참전하여 한번도 패한적이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이탈리아 전투에서 미군으로 참전해 연합군 승리에 혁혁한 전공을 세워 최고훈장인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와 로마 탈환의 주역으로 이탈리아 십자무공훈장·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또한 한국 정부로부터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38선보다도 중부의 휴전선은 더욱 올라 있는데 이는 바로 김영옥대대장의 승리에서 다가온 것이다.이렇게 역사상 3개국의 최고 무공훈장 수여자는 김영옥 단 한사람뿐.

 

이렇게 3개국에서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받고 미국인이 선정하는 역대 명장 13인 대열에 조지 워싱턴장군, 리 장군(남군), 그란트 장군(북군)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아마도 세계 최고의 전사 김영옥 미군 대령,,,기대하시라,,, 고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