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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꼬리를 잡아보며...

사릉( 思陵)----哀憐(애련)의 정순왕후(단종비)

 

 

   [ 사릉( 思陵)----哀憐(애련)의 정순왕후(단종비) ]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묘, 사릉은 금곡에서 진건으로 들어가는 길옆에 노송의 숲으로 쌓여있다.

 

나는 진건의 그곳 도로를 지날때마다 처진 노송들이 잘 가꾸어지지 않코 헝클어진 느낌으로 아마 단종비 정순왕후는 한많은 세월을 살고서 죽어서도 몹시 쓸쓸한 느낌을 받곤 하였다.

 

 

 

그런데 언젠가 도로 옆에 세계 문화유산이란 폴싸인을 볼때, 그래, 이젠 세계 문화유산의 왕릉인데 입통제가 풀렸을테지?? 

 

그런생각에 정문엘 갔더니 아직도 정문은 굳게 잠겨있고 측문으로 가서 출입카드에 주민번호도 정확히 기재하고 왕릉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런 지기랄 !!

 

측문의 표지판에 <전통수목 양묘장> 이란 안내판이 있으며 위 사진의 싸립문 열고 들어가며 묘판이 보이는데...

최소한  유네스코에 등재된 일국의 왕비의 무덤인데,,,,

아직도 정순왕후에겐 가혹하군,,,무슨 멍에를 졌기에 이런담...

싹 접어치우고 세계 문화유산으로 한 나라의 가장슬픈 왕비의 이야기에 관람하는 나로 하여금 눈물이 나오도록 다시금 그 분위기를 조성하여 슬픈 정순왕후에게 예를 표하여야 할것 같다.

               

 

전국의 좋은나무 샘플을 구하여 이곳에서 식재하여 금강송, 춘양목등 기른다는데,,,,

내 눈으로 보기엔 그런 시설이 약하고 그런 기술력 준비도 않 된듯하다.

이 능은 사람이 관리 안한듯

헝클어진 분위기를 이제야 알겠다.

 

 

 

이 사능의 묘역에 소나무들 중에 곱게 자란 놈들은 다른 능이나 문화재 시설에 차출당하여 뽑혀가고 나머지 찌끄레기 소나무들만 엉켜있단 이야기를 들을 때 내가 만약 정순왕후 당사자라면 하는 기분도...

그렇게 베어가고 미안한 마음에 묘목장이라고 만들어 씨앗 몇 개 뿌려주고,,,,

 

 

여기서 나의 마음속엔,,, 묘판을 다 걷어 치워야 한다,,,

땅이 그래 모자라서 왕비의 무덤에서 그런 행위를 하는가??

 

최소한 유네스코 등재의 문화재임 정도는 자부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제 더 이상 사릉의 소나무를 타 문화재의 목재로 벌채 하여서는 아니 될것 같다.

사릉의 소나무 균형미도  이젠 한계에 다다른듯 하며, 또한 세계 문화유산으로서의 권위도 지녀야 함이 좋을 듯 하다.

 

 

다시금 보충 설명을 하면 위 사진에서 보는 소나무가 자라는 곳에 춘양목이 자라길 바라는 묘판들..

 

한국의 소나무는  계,문,과,속,종의 모두 하나의 하나의 종자이다. 그것이 기후와 토양과 수질에 따라 조금씩 변한 것일뿐인데. 이렇게 걸레자루에 메달리듯한 소나무들이 있는곳에 수직의 곧은 춘양목이 자라길 바라고그러는 것일까??

소나무는 모두 동일한 하나의 종자이고, 그곳의 환경, 바람, 토양, 수질등의 외부 환경요인에 따라 다른 형태로 자라는 것이다.

             

 

               

 

 

 

             

 

 

 

 

 

 

 

 

 

 

 

 

 

                  

 

살문을 통하여 들어가니 묘역엔 그 규모가 미니 싸이즈로 아담하다고 좋게 평해야 할것 같다.

 

좀 투박한 장명등이 중앙으로 하고 문인석과 석마 한쌍 그리고 곡장 뒤로 석호 한쌍도 있다는데,,,

 

원래 약식에서는 12지신상을 줄궈서 석양,석마의 한쌍씩 해야 함이 보통인데 영월 장릉의 추존릉 예를 따라 석마만 한쌍이라..

말보다 양이 더 온순한 표현일텐데 장릉에 단종이 백말타고 태백산에 올라 神으로 되었단 이유에서 양보다 말을 채택하였슬까??

             

또한 이곳 분위를 아주 좀 지나치게 이야기 하면 곡장 안쪽이 봉분과 약 1m미만의 마뜨( 여분공간)도 없어 답답한데 벽돌  몇장 덜 들어가게 해서  곡장까지 뒷쪽이 봉분을 꽉 끼운 형으로 되어있다.

물론 왕실 무덤의 양식의 "국조오례의"에 이러한 기준은 없을  것이지만 우리가 보아주는 시각에 안정을 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좀 이상한것은 이 비각의 비문위에 두기의 묘가 보인다.

 

왕실묘 묘역내에 개인의 묘가 있슬수 있던가??  보이는 즉시 이장할터인데 왜 그럴까??

 

 

 

이곳은 원래 단종의 누이의 시댁 해주 정씨네 종산이었고,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영월로 유배되자 정순왕후는 부인으로 강등되어 한양의 4대문 밖에서 후손도 없이 홀로  살다 82세에 승하하시고, 친정도 멸문하고 후사가 없었으니  양주 남쪽 군장리에 있는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시가인 해주 정씨의 종중산으로 가족 묘역에 안장하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1698년(숙종 24) 11월 6일 숙종에 의해 노산군이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자 부인도 정순왕후로 복위되었으며, 이때 이 사릉엔 정씨네 묘 일곱기중 위 사진의 두기는 그동안 200년간 정순왕후에 제사를 지내준 공덕으로 그 자리에 머물게 되고 앞으로도 왕실에서 관리를 하여 준답니다.

 

또한 나머지 묘들도 제곳에서 각 묘들마다 그 공간만 개인의 땅으로 존재 하게 되었답니다.

 

정순왕후에게  묫자리를 빌려주고 벌초도 해준 해주 정씨네의 아름다운 선행이,,,

 

살아서 공덕이 죽어서 천년간 그것도 왕실의 잿밥을 먹는 아름다운 이야기 입니다.

 

숙종 24년에 단종이 복원되며 나머지신위는 창경궁에 모셔져 있다가 종묘에 안치 되었으며, 정순왕후는 단종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 하여 능호를 사릉(思陵)이라고 붙였다. 그후 1986년부터 사릉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후 왕후는 궁궐에서 나와 영월의 단종이 묻힌 장릉을 바라보기를 소원하여 동대문 밖(현 숭인동)에 작은 초실(草室)을 마련하여 거처하면서 소복과 소찬으로 평생을 마쳤다.

이 곳에는 왕후가 동쪽을 향해 땅 한번 치고 가슴 한번 쳤다는 동망봉,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는 영도교, 세조가 내린 영빈전을 거부하고 초막을 짓고 살았다는 정업원터, 왕후를 동정하여 몰래 채소시장을 가장 하여 채소를 파는 척하고 왕비에게 가져다주었다는 금남의 채소시장에 관한 유래가 전해져 내려온다.

단종을 강제 폐위한 삼촌 세조는 당시 조정에서 민심이 악화될 것을 우려해  주변에 영빈정을 지어주었지
만 그를 거절하고 이곳 초가집에서 18세부터 80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곳 초실은 한양의 내사산 중의 좌청룡인 낙산.

 

이곳에 열다섯의 어린나이에 단종의 비가 되어 열여덟에 영월로 유배가는 단종과 청계천의 영도교에서 이별한 후 다시는 만나지 못한 단종을 그리워하며 살았다는 정업원터인 청룡사와  1771년 영조 47년에 영조임금이 이곳을 방문해 정순왕후를 추모하는 직접 글을 써서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각을 세워서 이 비각이 정순왕후의 흔적을 갖고 있다

 

             

 

  또한 자주동샘(紫芝洞天)은 “단종비 송씨가 비단을 빨면 자주빛 물감이 들었다는 슬픈 전설이 적혀있다.”

 

청룡사 - 고려 태조 5년(922)에 도선국사의 유언에 따라 왕명으로 창건, 연산군때는 폐사되고 정업원터로 단종이 영월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되자 정순왕후는 청룡사 정문 옆에 작은 초가집을 짓고 희안, 지심, 계지 세 시녀를 데리고 이곳에 머뭄. 아침 저녁으로 봉우리에 올리 영월을 바라보면서 단종의 명복을 빔 (東望峰) 조선의 왕비중 제일 슬픈 사연을 지닌 정순왕후,전체의 물결에 의해 개인적인 삶이 완전히 버려진 생애에서도 그녀는 80평생을 한결같이 단종을 그리는 思慕의 마음으로 생을 마감 하였답니다.

 

 

우리는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가의 비운을 잘 알지만 우리의 가슴에 꽂힌 哀憐(애련)의 정순왕후는 알지 못했었다. 지금이라도 이 사릉에 추모의 못다핀 哀憐(애련)의 꽃 한송이 피어났으면,,,,

 

 

                                                  --------------------    終    ---                 후세백작                    

이 사진은 광릉내에 소재한 봉선사 앞 뜰 연못이다. 문정왕후의 어명으로  선종엔 교선 통합의 정일사상의 "보우"스님으로 유명한 강남의 봉선사를 원찰로 하고 교종의 원찰로 이곳 양주의 봉선사가 지정 되었다.  

태릉에 묻힌 문정왕후는 봉은사에서 밤낮없이 백일불공드리니 장안의 소문엔 "보우"스님과의 로맨스로...

그리하여 보우스님은 제주도로 귀양가고 인조의 죽이라는 어명에 제주목사 "변협"은 잔꾀를 내어 보우스님을 타살시킨다.

이 이야기를 다음으로 하고 파장을  하겠사와요,

 

동창마님들,,,

오늘은 쉴사이 없이 쥔종일 비가 추적거리니

 

 

다음장날  다시 오겠사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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