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의 국행성황인 "노산의 성황사 (魯山 城隍祠)
후세백작 2018.03.03 04:48
1, 평창의 국행(국사)성황사와 성황제
1) 조선시대에 성황제의 개요
조선시대에는 전국 각 군에 성황사를 설치하고 지방 수령인 군수(종 4품)가 임금을 대신하여 매년 새해를 맞이하여 국가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해지길 바라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신성한 성황제를 올렸으며, 이러한 성황제는 백성을 통솔하는 지방 행정관의 기강을 나타내는 연례 행사였으나 이제는 미신이란 미명으로 성황제의 이러한 역사속에서 우리문화의 찾아보기 힘들어 정체성을 잃어가는 실정이다.
또한, 정월 대 보름날엔 각 부락마다 가뭄, 홍수, 전염병등을 예방해달라는 서낭신에게 소원을 빌며 기원하는 제를 올리며 마을 주민의 화합으로 대동계, 윷놀이, 더위팔기, 부스럼 깨물기, 오줌싸게 소금 얻어오기, 달밤엔 망우리 돌리기 등의 일년에 필요한 부분들의 동리 주민들의 기원행사로 이어졌다, 이러한 정월대보름놀이는 우리민족에게 일 년중 가장 큰 축제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각 마을의 서낭제(*서낭당은 성황당과 동일한 의미이다) 를 지내기에 앞서 군 성황제는 마을 단위의 서낭제보다 차 상급으로 선행하여야 하기 때문인듯, 설날을 지나 정월 보름날 사이의 길일을 택하여 부락의 서낭제보다 먼저 날을 잡아 신성하고 엄숙하게 치렀다 한다.
2) 평창의 국행 성황제
평창의 진산은 "신동국여지승람"엔 노산성(魯山城)으로 표기되어 있듯이 노산성 (평창읍 산 1번지)에 평창의 국행 성황사가 위치하며, 1872년에 제작된 지방지도인 "평창군 오면지도"엔 노산성의 정상 아래에 고목 두 그루와 돌담으로 동그랗게 쌓아 올리고 그 안에 당집에 위판을 모셨던 노산성의 국행성황사가 표기되어 그림으로도 잘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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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이곳에서 평창의 국가행사인 성황제를 올렸다. 해방이후 70년대 초까지 평창군 성황제는 제사장으로 김학수 옹이 주관하며 평창의 노산성에서 "평창군 국행 성황제"에 올렸다 한다.
이에 대하여 증언으로 살펴본다.
김택용(하3리)氏의 증언에 따르면, 부친 (故)김학수 옹은 성황제에 제주로 위임되어 성황사에 딸린 둔전을 받아 농사지으며 평창의 성황제의 제사장으로서 매년 음 정월 보름날 전에 제일(祭日)을 잡아 국태민안의 "평창군 성황제"를 지냈었다 한다.
성황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제일(祭日) 오후에 몇 분의 제사장들과 다수의 장정이 전물(奠物)을 싸들고 노산에 올라, 추위에 모닥불을 피워가며 해가 지기를 기다려 일정시간이 되면 (증언자가 중학시절까지의 모습이라 이 부분은 아마 새 날이 밝는 자시(子時 ; 11시~ 익일 1시)에 제를 올린 듯 하다.
매년 참석하신 분은 황완택(하리 38번지, 농업)씨는 조부님이 한학에 밝으신 유림으로 그런 영향으로 매년 참석하신듯 하다(*주- 필자는 황완택씨 옆집에 살았기에 어린시절에 조부님도 잘 기억하기에 필자의 견해임)
성황제를 지내기에 제례행사에 처음 순서는 부정을 없애고 神에게 염원을 빈다는 소지(燒紙)를 하는데 이 祭는 평창군 관제의 행사로 1번의 소지(燒紙)자는 當군의 군수로서 그의 이름을 종이에 써서 불사르고 이하 여러 명의 소지를 한 후 진배(進徘)를 하여 제를 지냈다 한다.
김택용씨의 증언중에는, 어느 해엔가 성황제를 지내는데 뒤에 호랑이가 있었고 그래도 제사를 마쳤지만 제사장인 부친 김학수 옹이 생각해 볼때 호랑이로 인하여 부정을 탔슬듯 하여 다시 제일(祭日)을 잡고 제수(祭需)용품의 전물(奠物)을 다시 장만하여 올라가 작헌(酌獻)을 올리고 다시 치제(致祭)를 하였다 한다.
이렇듯, 국행성황제는 한 해동안 郡의 평안과 군민의 안녕을 위해 신성하게 지내는 즉, 성황사는 서낭당의 차 상급적인 모체로서, 신성한 장소로 그 제(祭)도 엄숙하고 신성하게 지냈음을 볼 수 있다.
‘80년대쯤에 이렇게 노산성에서 전통으로 이어 제를 지내던 국행 성황제를 걷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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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고, 국행 성황사 자리를 헐어버리고 그 자리가 역사에서 알 수도 없는“노산성에서의 임란 전투비”라는 큼직한 전적비를 세우고 그 옆에 사당격의 당집을 지어 오늘날까지 충혼제를 지내고 있다. 또한, 이곳이 노산에 우뚝솟은 명당인듯 매년 임란비 앞에서 새해 아침 맞이 행사를 한다.
이 장에서, 본인은 예전에 어느 누구도 못다쓴 “평창의 임진왜란사”를 쓰면서도 시중에 확산된 왜구 1~200여명을 죽였다는 평창의 임진왜란사의 이야기나 노산성의 전투를 하였다는“노산성 임란전투비”에 대하여 그 기록의 출처도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임란당시 권두문 평창군수가 직접 쓴 자신의 일기인“호구일록“에 왜병이 동촌쪽에서 평창으로 진입한다는 사실에 군수일행과 수백 명의 군민들은 모두 응암굴로 피신하였다. 여기에 평창의 무관들도 함께하고 응암굴 전투에서 다수의 무관이 전사한다.
그러기에 같은 시각에 노산성 전투는 당연히 없어야 타당성이 있고, 더군다나 왜구 100여명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근거도 없는 루머이지 역사가 아닌데 이를 기리고져 노산의 노산성에 큼지막한 “노산 전투비”를 세운것은 바른 역사의 사실을 알았기에 이러한 전적비는 그 내용을 달리 역사를 소명하여 기록하여야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각 군 소재지에 군사는 대략 34명으로 정하는데, 이러한 군사들은 모두 군, 관민의 보호를 위해 함께 응암굴에 갔던 것이다. 한 해 오백 명을 선출하는 무과시험에 300등으로 합격한 지사함 장군(장군의 호칭은 지방 군수가 명명)등 무인들 모두 응암굴에 있었는데 언제, 누가 왜군과 전투를 하였단 말인지 본인은 알지 못한다. 물론 힘찬 기상은 좋은 일이나 그렇다고 역사를 오도하여 거만을 자랑하는 것은 위선이고, 역사를 통하여 반성과 자주정신을 함양하는 것이 더욱 아름답고 현명함이리라.
위의 이야기에서 보듯 국행성황사는 각 마을의 성황단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마을의 성황제는 마을의 홍수, 가뭄등과 전염병등으로부터의 예방과 안녕을 빌며 또한 개인적으로 주술등의 힘을 빌여 소원을 빌지만 군의 국가 성황사는 국태민안의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안전, 행복을 기원하는 제례로 신성하게 치러지는 장소이다.
이러한 郡의 국행성황사의 파괴는 일제가 민족 문화를 말살시켰다고 핑계잡지 말고 그래도 남아있던 당집과 돌담, 고목나무등 그 자리를 보존시키지 못하고 역사에 -3-
있지도 않은 노산성의 임란대첩비로 유령문화를 만들지 말고 역사의 전통성아래 정체성을 통하여 오늘의 역사를 재조명하여 미래를 도전하여야 아름다울 것이다.
3) "국구사우"와 "노산성황제"의 상관성의 세미나 기록
"국구사우"와 "노산성황제"의 세미나 기록중에 "3"국구사우"와 "노산성황제"*주의 상관성의 세미나 기록의 글에서 노산의 성황사에 대한 기록은 본인의 견해와는 무척이나 다르기에 이에 대하여 서술해 본다.
*정장용 원주-강릉대 교수 "평창문화" P142 평창문화원
이 책에서 노산의 성황제는 읍치(邑治)성황제라 칭하는데 본 성황제는 평창읍을 다스리기 위한 성황제가 아니라 군 단위의 평창군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郡治성황제이다.
또한 본 책에서는 성황단에 모신 신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신 동국여지승람」에서 노산의 성황제는 조선조를 개국한 이성계의 목조인 전주이씨 이안사의 부인 효공왕후를 신격으로 모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장 교수는 이에 지금으로선 모신 神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오히려 효공왕후의 아버지 이숙공과 어머니 정씨는 이곳 평창에 살았기 때문이 이분들이 神으로 모셔지지 않았는가 추정하며 중리 암 서낭신에 노산성황단은 숫 성황신으로 상호 연관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평창의 서낭신은 원래 여서낭신인 효공왕후이다. 효공왕후는 이태조의 고조의 목조의 부인(평창아씨)으로 사후에 암 서낭신이 되었다 한다. 효공왕후가 암 서낭신이 되었다면 그의 남편 인 목조가 남 서낭신으로 좌정되었슬 것인즉.,.(중략)
목조와 효공왕후의 신은 평창군 신임에 틀림없다.
*駐: 동책 P143 註에서『평창읍 민속놀이의 발전방향』김선풍 평창읍 민속놀이 학술세미나. 2008.
* 김진백씨의 면담내용 2008
노산 성황제에선 효공왕후를 제사지낸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친 이숙공과 부인 정씨를 목조의 장인이란 의미로 국구(國舅)에서 모셨습니다. 여기에 그 사우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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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사시지 않은 목조와 효공왕후를 성황신으로 모시는 것보다 국구사우에서 모신 목조의 장인 이숙공과 부인 정씨, 그리고 그분의 따님 효공왕후 세 분을 간이 모시는 것이 괜찬은 것으로 보입니다.
* 중리 농악대의 증언
과거 노산 인근에는 세곳에 서낭이 있었으며 중리 농악대에 이수복, 이만년, 김진환씨의 증언에 의해 과거 포교당 뒤의 암 성황신으로 여신의 화상이 있었고 정월 보름에 중리 농악대가 암 성황당에가서 축문을 읽고 신을 모시고 각종 천을 단 신목을 모시고 노산의 남 성황당(숫 성황당)에 가서 성황당 문을 열고 빈 다음 내려와 집집마다 걸립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김진백씨나 중리 농악대의 여러 증언은 중요한 점은 다소 객관화 되지 못한 점도 있으며 또한 증언 모두가 논리적 사고일뿐 정확한 증거나 물증은 갖지 못한 상태이기에 재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나 생생한 구체적 증언은 그 기록성에 참으로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중리 성황당은) 암성황신이고 노산성의 성황신은 숫성황신으로 장교수는 이 상태를 합신과정이라 설명한다.
그러나 필자 본인의 이해로는 노산성황제는 군 단위의 성황제이고 중리 포교당 뒤의 암 성황당은 자연 부락중 하나의 성황제이다.
이 격식의 차이를 위의 김택용씨의 증언에서 보면 밤에 성황제 치제시 호랑이가 있어서 부정을 탄듯하여 날을 다시 잡고 새로 치제하였다 한다. 이렇게 노산성황제는군의 엄숙한 기강속에 안정과 군민의 번영을 기원하는 제(際)로 언제부터인가 군수를 대신하여 제사장이 제례를 행하는 성황제로 군과 민에게 혹시 부정이라도 탈까봐 이렇게 엄격하고 신중을 기하였다.
여기서 이런 엄격한 노산성황제를 올릴때 중리 암 성황신과 합일이라면 이때도( 군 성황제) 당연히 중리 암 서낭당에 찾아가 제를 올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보면 국가가 행하는 노산 성황당과 마을중 하나인 중리 서낭당은 당연히 접신의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론으로 이해해 본다면, 당시 조선사회는 지금의 여성 보장의 미투나 페미니스트(여성운동)이 아닌 남존여비 시대에 정월 보름날 중리 암 서낭에서부터 서낭제 시작은 어패이고 노산의 郡治서성황제에서부터 시작되어야 정상이었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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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
여기서 노산성황제는 국격차원으로 대보름에 지내야 마땅하겠지만 대 보름에는 마을마다 대보름 행사에 분주하지만 각 부락 서낭제를 지내기에 앞서서 격식상 상급의 국행 성황제를 먼저 지내야 하기에 지정된 날자가 아니라 매해에 손없는 편리한 택일을 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노산 성황제를 지내고 중리 암 서낭제때 합신과정이라는 중리 한 부락의 서낭제와 군 성황제를 동일의 품격으로 놓은 것은 필자로서는 이해하기 곤란하다는 생각이며, 또한 노산 성황제때도 중리 농악대의 참석이 있어야 합신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 아닌가 생각에 합신이란 비약적 논리는 모순이고, 그러기에 조선사회의 성황제를 잘 모르고 이야기 하는듯 하다.
또한 중리의 암 서낭에 모신 신이 누구인지 명확한 기록도 없이 노산성황단과 같은 암, 수의 성황단으로 분류하는것도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노산성 바로 아래의 시루목에 하리쪽 서낭당은 블근당인데 국사성황당이 꼭 중리와 합일하며 블근당과는 남근당과 남근당이기에 서로 관계가 없다는 이해가 되며 군내 모든 마을의 서낭단과는 관게가 없다는 논리가 되기에 이러한 논리는 국행성황단의 군 성황단으로서는 모순을 가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김선풍씨의 효공왕후와 목조의 좌정설, 또한 김진백씨의 효공왕후와 부친 이숙공와 모친 정씨의 세분을 모셨다는 설의 여러 견해는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여러 입장의 표명으로 이해력에 구하기에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만 이 분류는 어디까지나 주관적 해석이고 객관화된 기록은 갖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 본인은 노산 성황사에 모신 신은 누구였던 관계없이 다시금 제를 부활한다면 「신 동국여지승람」기록에 나온다는 추존 왕후의 격이 높은 효공왕후 한 사람으로 모셔야 원래의 기록을 따르는 것이 역사와 결부되는 것으로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중리 농악대가 노산에 올라 군 성황사에 찾아가는 행사는 다만, 보름날 중리 암 서낭제때 중리 농악대등 활성화된 모습을 보이는 중리에서 부락의 서낭신을 모시고 차 상급 격의 군 성황당에 올라가 부락의 서낭제에 소원을 기원하는 인사를 올리는 차원으로 이해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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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평창의 향토사학자인 정원대님의 증언 글에서보면 시루목 언덕위의 고목나무는 불근당이라 한다.
불근당이란 의미는 남근의 성기를 상징하고 노산 성황당은 장군당이라 한다. 김택용씨의 증언에서도 시루목 고개의 서낭당은 불근당이라하고 노산성의 국행성황단은 장군당을 불렀다 한다.
그렇다면 이것도 처음에 효공왕후를 보실때는 암, 수의 관계가 있을 듯도 하지만 장군당이라고 부를 시기에는 양자 사이에 연관성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근당은 하리 동네의 서낭당이으로 이 양자 사이에도 관련성은 기지지 못한다고 보아야 옳은 것이다.
그리고 김택용씨의 증언엔 장군당내에는 남신의 신상 그림은 없고 "國泰民安"이란 세로형 글씨의 위판만 있었다 한다. 이곳을「신 동국여지승람」에서 효공왕후의 신을 모신다 하였는데 아마 왜정 이후 다시 성황제를 부활하며 신위를 바꾼듯 하지만 이후 언제부터인지 남신을 모시게된 연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본인이 남신을 주장하는 것은 아래의 내용에 연유한다.
김택용씨는 위패만 모셨다 하는것은 윗글에 조선의 군, 현 성황당에 신상대산 위패로 하는 방침과는 맞으나 아마도 다시 성황제를 부활할때 남신의 신상 그림을 설피한것 아닌가 추정하며, 본인의 4년 후배들이 초교시절(1970년 전후) 이곳에 놀러 올라가 그중 카톨릭을 믿는 한 후배가 미신이라고 남신상의 액자를 들고나와 짓밟았다고 한다.
본인은 이런 일이 있기보다 먼저인 초교 3학년때쯤 (67년쯤) 네명의 친구들과 노산성에 올라가서 성황단을 본 기억도 또렷하다. 당시로선 큰 고목나무 아래 둥글게 돌담이 쌓아져 있었고 그 안에 당집이 있었는데 어느 친구왈 옛날에 노성장군이 살았고 하며 문을 여니 삐그적 소리가 나는데 정면 벽에 신문 2절 크기정도의 남자 의 그림이 있었다. 가슴까지 대략 흑색, 회색으로 그린 흉상은 무인은 아니고 투구나 갑옷은 아니엇지만 인상은 좀 무서웠다. 이 점으로 유추해 보아도 장군상인듯 한 점을 알 수 있다.
(*노성장군이란 표현은 역사적 사실의 인물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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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성황사 魯山 城隍祠/정원대
~ 중략.
노산성황사 魯山 城隍祠 : 평창군 평창읍 하리 산1번지
8자(가로세로2m30cm)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었으며 평창군을 수호하는 성황사로(魯城城隍之神)위엄이 넘치고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형국으로 김학수(1906-1972) 옹이 짐꾼5명 제사장3명 정월 초하루에서 대보름 사이에 길일을 택하여 엄숙하고 근엄하게 제祭를 지냈다고 하며 김학수옹 돌아가시면서 맥이 끊어졌다고 함
노산성:신증동국여지승람 제46권
노산성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3백 64척 높이가 4척이다 안에 우물이 이있다. 지금은 반 정도 퇴락하였다
출처: 평창군 오면지도(1872)
평창군 평창읍 하3리 김학수 옹 子 김택용
조선시대 평창군 : 군내면,남면 ,북면. 미탄면. 동면( 현 정선군 신동)
무속인들은 노산 성황사:장군당 . 포교당 뒤 서낭당:수근당 . 시루목 고개 신목:불근당 이라고 칭하였다고 함
*******<인용 끝>*****************************************
3. 맺음말
여기서 보면 우리가 알 수 있는것은 지난 역사에서 서낭신과 우리민족의 상관관계이다. 성황단은 고려 후기부터 나타난바 조선시대는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적 이념의 국가에서 그 지역의 수호신을 받들고 고을의 수장은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 국왕을 대신하여 정부차원으로 국태민안의 제를 드린 곳이다.
또한 각 향리마다,,, 평창읍으로 본다면 시루목 고목나무, 포교당뒤, 천변리 고목나무, 향동, 여만리, 주진, 약수등의 고목나무, 또한 특이한 점으로는 여만리 강변에 두 개의 정형으로 된 큰 돌 누적단의 서낭단의 이 모두 각 마을의 서낭제 신앙의 대상이었으며 불교를 대신하는 신앙으로서 각기 수호신을 정허고 정월 보름날 서낭제를 지내어 한해동안 마을의 평온, 즉 가뭄의 기근과 홍수, 전염병등의 예방을 기원하며 수호신에게 이를 빌어 소원하는 민속신앙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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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정월대보름의 민속놀이이지만 당시로선 마을의 안녕을 비는 서낭제를 지내고, 대동계의 윷놀이 잔치의 이웃과 화합, 그라고 더위 팔기, 부스름 깨물기, 망우리 돌리기등 한해에 필요한 내용의 소원을 비는 기원제로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우리민족의 활동적인 모습의 큰 명절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시 1936년 대동아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일본은 정월 대보름 축제가 우리민족의 단합의 기회로 항일적 행동을 두려워하여 대보름날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후 해방이 되며 전통성을 가진 각 마을의 성황제는 다시금 부활되지만 크리스천 인들에 의해 서낭당은 미신으로 종지부 찍게되는 것이다. 그 예로 윗 글에서 인용한 본인의 후배들이 초교시절 노산성에 놀러가 그중 한 친구가 성황단의 당집 안에 들어가 신위의 그림등 여러 기물을 들고나와 미신이라 짓밟고 네동뎅이친 점도 크리스쳔의 미신타파란 일환인 점이었다, 그는 크리스쳔이라 초교시절에도 이러한 미신타파의 교육을 받은듯 하다.
제사장 김학수옹 사후에 평창의 국행성황제는 그 맥이 끈겼지만, 당집과 주위를 둘러싼 돌담, 고목나무는 그대로 보존되었으나 이러한 평창기강 일번지의 군수가 군민을 위해 제를 지내던 역사의 장의 당집을 철거하고 이 자리에 역사에도 없는 노산성에서 임진왜란 전투비라는 큰 비석을 세우고 노산성 전투에 사망한 군민 모두를 기린다는 충위제를 지내고 있다.
하지만 역사에도 없는 노산전투에 이곳에서 순직한 선열들도 없는데 이런 가식을 잘 알면서도 밝히지 않는 것은 지역 역사 향토사학자들의 기만이고 직무유기란 점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성황단과 성황제는 미신이라고 새로운 종교인 크리스쳔인들의 타도대상인가 묻고싶다. 성황단은 과거 우리 역사에서 민족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이상을 추구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국왕을 대신하여 군, 현의 수장이 호국의 국가수호와 백성의 편안한 행복을 위하여 국가적 이념의 호국을 기원하며 또한 마을의 무사안일과 태평세월을 소원하였던 기원제를 드리던 곳이 그리 나쁘단말인가??
이것이 평창 행정의 지표 일번지로서 군정 방향을 밝히고 있다. 요즘시대에 고을의 수장이 만 백성을 위해 이러한 노력을 해봤던가??그러기에 일년중 정월대보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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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다른 명절과는 다르게 기원제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이를 미신이라 한다면 그것은 무식의 소치란 점이다.
지금 우리는 대학 입학시험에 자식 합격하라고 100일 불공드리고 교문에 엿가락 붙이는 등 치졸한 행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치졸함 이전에 미신이 아닌 소원을 비는 마음인것처럼 우리 선조들은 정월 대보름제에 이웃과 함께 공동으로 합심하고 같이 밝은 마을을 이루기 위해 소원을 빌던 서낭단을 마냥 꼬운 눈으로만 바라본다면 이는 잘못 이해하는 것이란 점이다.
정월 대보름날은 성황제는 민족과 마을의 화합과 기원제였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정월 대보름날 소원풀이, 이웃과 단체 윷놀이 문화등 다채로운 유형의 문화를 전승하고 발전시켜 보다 융성한 사회를 이룩함도 좋치 않으련가??
4. 부제- 성황신앙의 일반적 배경이론
조선시대 국조오례의에서 사직(社稷)은 대사(大祀)로, 여제(厲祭)는 소사(小祀)로행해졌으며, 주현에서는 국왕을 대신해 지방관이 사직, 문묘, 여제 등의 제사를 지냈다.
성황단(城隍壇)은 사직단, 여단과 함께 각 군현마다 설치되어 있는 삼단(三壇) 중 하나로 각 지역의 수호신을 받드는 곳으로 성황신앙은 본래 중국 북제(北齊)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송대에 이르러 크게 활성화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성황신의 내력은 고려 문종때 신성진(新城鎭)에 성황 신사를 설치하여 위엄있게 숭배하였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그후 성황신은 마을공동체를 지키는 동신(洞神)으로 자리 잡으면서 토착신앙인 천신신앙, 산신신앙과 복합되고, 마을을 개척한 입향 시조신과 복합되어 골매기 서낭신이 되기도 했다. 성황의 음도‘서낭’으로 변하였다.
고려시대에 성황제는 향리층 주도로 주로 단옷날 거행되었으며, 국가에 공인된 제사였다. 성황제 안에는 신상이 설치되고,성황신과 소통할 수 있는 무격(巫覡)이 치제(致祭)를 주도하는 등 토속적 의식으로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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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신으로서의 성황은 조선시대에도 널리 신앙되었는데, 조선시대의 성황은 국(國行) 성황과 민간에서의 성황으로 나누어진다. 조선시대는 지방의 각 군현에서는 수령이 주재하여 사직단 제사와 지역 산천에 대한 제사, 성황단 또는 성황사 제사, 여단(厲壇)에 올리는 제사등을 행하였다.
즉 성황사(城隍祠)는 군현 단위에서 국가의 평안과백성의 안녕을 위하여수행하는 제사로서 조선시대 내내 존재해 왔으며 이는 중앙집권화의 한 방식으로 성황(城隍), 풍운(風雲), 뇌우(雷雨)등 여러 명칭으로 부르던 민간신앙의 단(壇)들을 하나의 성황사(城隍祠)로 통합하여 주·부·군·현의 행정 단위마다 하나씩 설치하여 지방관으로 하여금 봄·가을로 제사지내게 하였다.
지방에서 성황신을 모시는 장소로는 단(壇)과 당(堂), 사(祠)가 있었다. 단은 건물이 없이 제단만 있는 경우로, 간혹 비를 막을 수 있도록 지붕을 설치하는 경우도있었다. 문제는 ‘당’과 ‘사’의 구분인데, 이것은 주로 건축이 사제(私製), 즉민간의 주도로 이루어졌는가 아니면 관제(官制)로 이루어졌는가의 차이였다.
마을 어귀나 고갯말, 산허리 등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돌무더기는 종종 수목과 함께 서낭당의 한 형태를 이루지만 이러한 서낭당 형태는 점차 사라져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물다. 이보다는 오래된 나무에 당집이 결부되어 있거나 당집 단독으로 서낭당을 삼아 이것을 마을공동체 신앙의 수호신으로 섬기는 사례가흔하다.
그런데 돌무더기로서의 서낭당과 마을 제당으로서의 서낭당을 신앙양상에서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본다. 즉 전자는 서낭당이 주로 개인적인 기원(祈願)과 관련된 신앙이라면 후자인 당집 형태의 서낭당은 마을공동체 신앙과 연관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서낭당은 마을의 수호신을 섬기는 마을 제당이라는 점에서 마을신앙에 포함되는 반면에 때로는 무당이나 주부들의 기도처이기도 하여 무속신앙과 가정신앙에 포함될 수도 있다.
중부지방에서는 서낭당·선왕당·경북 영천 등지에서는 천왕당이라고 부른다. 누석단(돌무더기)과 당나무 형태의 서낭당을 평안도 지방에서는 국수당, 함경도 지방에서는 국시당이라고 각각 부른다.
우리의 신앙은 원천적으로 천신을 모태로 하여 점차 분화한 것으로 본다면 서낭신앙은 몽골의 오보신앙이 전래되면서 그 전래 시기는 우리나라와 몽골이 문화적·정치적으로 관계가 깊던 고려 후기인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중반쯤으로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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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무더기에 돌을 던지거나 나뭇가지에 천이나 비단조각 등을 걸어 놓는 현납속은 개인적인 기원을 할 때 나타난다. 돌이나 천, 비단조각 등은 본래 신에게 바치는 공헌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서낭당에 대한 현납속은 마을공동체 신앙의 대상이 되는 서낭당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에 따라 현납속은 개인제와 연관된 것임을 나타낸다.
김태곤은 서낭당의 형태를 신목에 잡석(雜石)을 쌓은 누석단이 복합되고 이 신목가지에 백지나 오색의 견포편(絹布片, 비단조각)이 걸려 있는 형태, 잡석만 쌓여 있는 누석단형태, 신목에 백지나 오색 견포편이 걸려 있는 형태, 신목과 당집이 복합된 형태, 입석 형태의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서낭당의 독특한 형태적 특징으로 잡석을 쌓은누석단과 신목에 백지나 오색 견포편이 걸리는 현납속의 두 가지를 지적하였다. 서낭신 역시 단순한 자연신이나 마을에 처음 들어온 조상신, 역사와 관련된 인물신 등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만큼 산신의 변용은 다양하다. 서낭당의 고유한 형태는 돌무더기와 수목이 복합된 것이다. 이는 서낭당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서낭당은 대체로 당집 형태를 이루고 있다
제일(祭日) 일주일전부터 금줄을 걸어 놓는다서낭당과 같은 마을 제당은 주민들의 종교심성을 공유할 수 있는 신성한 영역이다. 마을의 수호신을 섬김으로써 역사의식과 심적(心的)유대, 연대감을 강화할 수 있다는 데에도 의의가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며 향리 주도의 공동체적 성황제를 사전(祀典)의 국가기본제도의 하나임을 명시하고 지방관은 위판을 설치하고 봄과 가을에 제사할 것, 성황제사는 지방 수령이 거행할 것 등을 규정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공적성황제는 지방관 주재 하에 봄, 가을 두 차례 거행되었고, 신상 대신 위패가 설치되었으며, 전물(奠物), 제기(祭器), 작헌(酌獻)등의 의식은 홍무예제에 규정된 것을 따랐다.
이 공적인 성황제는 소수의 제관만이 참석하여 유교적 의식에 따라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그러나 지배층의 뜻과 달리 민간에서는 무격(巫覡)이 주도하는 제의방 이 전승되었으며, 음사로 간주된 향리층 주도의 성황제는 점점 약화되거나 소멸되어 갔다.
일제(日帝)가 당산에 있던 당집 자리에 신사(神社)를 지으면서 헐리었고, 당집이 헐리자 1년에 두 번 지내던 산신제도 폐지되었고, 지금은 어디에 있었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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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및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그외 일반론
◈ 임진왜란시 평창 노산성의 임란대첩은??
임란당시 평창군수 권두문의 "호구록'은 임란을 격은 당사자이면서도 평창군 수장이 기록한 일기체 형식의 당시의생생한 기록이다. 그리고 또한편의 평창임란사로 "응암록"이 전해지는데 이는 호구록의 내용 발췌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호구록을 재 편집한듯한 임란사이다.
호구록에서 전하는 평창임란사 초기 내용중에 왜장의 항북권유문서를 가지고 온 조선인 청년의 목을 베고 항전의 기치를 높이지만 왜구들이 멧둔재를 넘었다는 소식에 왜구들은 중과부적의 숫자라 일단 피신하였다가 후일을 도모하자고 한다.
그리하여 군, 관민 모두는 이미 병기와 식량을 준비해둔 응암굴로 피신한다. 이러한 시간적 공백이 없는 행동으로 보면 노산성에서 전투란 그럴 시간도 없고 그에 싸운 장수들도 없이 호구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장수가 다 응암굴에 같이 피신하였슴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노산 북쪽에서의 전투 운운하는 것은 전투할 시간도 없고 어느 기록이 전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만약 노산성에서 전투가 있었다든가 또한 왜구 수백명을 무찔렀다면 평창군수는 전시엔 도원수자격으로 지방 사령관으로 관노가 조총 한정을 포획한 사실도 기록하며 그러한 엄청난 전황은 기록하지 봇했을까??
이러한 엄청난 전승이 군수에게 보고도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상식의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응암굴에서 우리도 대항군으로 왜구와 맞서 싸우자며 분발하여 일부 소수 군사가 굴을 나가서 전투를 하였는데 아마 종부서 관노 나수천이 왜구를 죽이고 조총 한점을 포획한것이 이 일인듯 하다.
그러기에 노산 북쪽에서 알수도 없는 장군이 전투를 했다던가 또는 수백명의 왜구를 죽였다는 이야기들은 전설적인 픽션이지 사실은 아니란 점으로 해석된다. 고로 임란시 노산에서 전투란 없었으며 왜장의 무리는 군청의 동별당, 서별당을 소굴로 변하였고 본영은 약수에 진을 치고 천동이등에 흩어져 진을 치고 왜구들은 4일간 평창을 지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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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평창읍내엔 개미 한마리도 없어서 왜구들은 군수이하 군민이 있는 곳을 찾기위해 수색을 나간것이 하필이면 약수, 천동의 왜구 진영과 가까운 응암으로 피신한것에 운이 따르지 못한 듯 하다.
본인은 史家는 아니기에 일전 본인의 평창임란사에서 노산대첩이란 노산성에서의 전투라는 역사적 사실은 알지 못한다. 만약 노산성에서 전투가 있었다든가 또한 왜구 수백명을 무찔렀다면 평창군수는 전시엔 도원수자격으로 지방 사령관으로 관노가 조총 한정을 포획한 사실도 기록하며 그러한 엄청난 전황은 기록하지 못했을까??
이러한 엄청난 전승이 군수에게 보고도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상식의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해 화순에서 김삿갓이 6년 살았다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김삿갓 문화를 창출하려하자 화순의 향토사가 한 분은 그런 기록은 없고 그런 역사를 알지 못한다고 선을 그어 김삿갓 문화창출에 선을 그었듯이 평창에도 향토사가님들은 아닌것은 진정으로 아니라고 얘기 할 수 있어야 한다.
봉평이 이효석의 출생지가 아니고, 정선 두문동이 아리랑 진원지로 그곳에서 미탄으로 아라리가 전파되었다는 정선인들의 고의적 역사왜곡이나 김삿갓 스토리에 영월의 기만적인 모습으로 속이는 역사처럼 노산의 임란대첩비도 그러한 아류문화의 대열에 속하는 것이다.
후일 후손들에 의해 다시 이 점에 거론 된디면 우리는 무엇이 될까?? 그러기에 역사는 정직한 정도로 가야하는 것이다. 이로서 자주 말이 많아지기 이전에 노산 임란대첩비에대한 재 고찰의, 평창에서 자주 사용하는 세미나라도 개최하여 정확성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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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9,3,3;40
이 글을 이제 교정시 추가합니다.
본인은 증언자 김택용氏와는 막역한 친구라 윗글에서 본인이 성황사에서 또렷이 본 장군상이나 언 후배가 그림을 들고나와 짓밟았다는 이야기를 당시 친구들이랑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였는데도 이에 대한 기억은 없는 듯 神位에 글씨로만 써서 모셨다고 하는것은 아마도 장군당 초상화의 액자사건 이후에 사용한 듯 추정 합니다.
이조 초기에는 효공왕후 한 분을 모셨다고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장군당으로 남자 한 분을 모셨다. 만약 두 분이고 세 분을 모셨다면 한 분의 神像만 그리지는 않았슬 것이다. 그러면 남자로서 한 분만 모신다면 효공왕후를 놔두고 목조만 모실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느 분이었슬까??
조선시대 평창군의 역사에 돌출된 부분은 임란에 대항하는 항전사와 항전의 기치를 높였던 권두문 군수외엔 이렇다할 인물은 누구일까. 그렇지만 평창에선 임란시 항전사의 기상을 그렇게 중시 여기진 않는 듯 하길래 그럼 장군당에 장군상은 누구였을까?? 효공왕후의 부친 천우위장사 이숙공이었슬까??
아마도 왕의 국구라고 별도로 지칭하여 모시진 않는데 이성계는 목조비의 국구의 사당을 짓고 제를 지내라 하는 명에 특별한 사연은 무엇일까??
역사에는 없지만 본인의 추론으로 생각해 본다면 양무는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사당시 170여호의 사병이 따라왔다 한다. 삼척에는 평야도 평야도 넓지 못한곳에 악 500여명이 넘는 식솔들을 삼척의 외가에서만 감당키 어려웟을듯 하고 아마도 이숙공은 장인으로서 이 부분에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듯하여 사병의 이탈을 방지하고 더욱 굳건한 사병 집단을 챙겨주었으면 가장 큰 공훈일 것이란 점이다.
그렇다고 노산 성황사에 효공왕후를 神으로 모시다 그의 부친으로 바뀌었다면 그 의도는 무엇일까? 하지만 이런 기록은 남지 않아 이런 일은 없었던가 또는 알지 못한다.
또 하나의 경우는 위 본문에서 본인이 초교 저학년 시절 성황사를 오를 때 친구들은 장군이 왜구를 무찔렇다고 하는 이야기는 당시 평창의 저변에선 모두들 노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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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 노성장군이 임란시 왜구와 전투를 벌인 격전지로 한켠 골짜기는 평창읍민들이 숨어있다 왜구에 맞아 죽어서 피맛골이라는 등 평창군수의 임란 역사인“호구일록”이 알려지기 전의 임란사에 어느 논문은 왜구 1~200여명 사살했다는 막연한 이야기들이 팽배해 있던 시기에서 보듯 임란에 항거했던 권 군수를 장군으로 보며 그래서 가상의 노성장군을 추정하는 것은 아닐까,,, 응암굴에서 포로가 된 권 군수는 부하나 압송되는 많은 시민들 앞에서 왜구에게 심문을 하지 말고 죽이려면 얼른 본인의 목을 베라고 왜구에게 추상같은 명령을 하는, 죽음을 넘는 그의 항전의 용기와 인품에 이런 연유에서 將軍像으로 권 군수를 모셨던 것은 아닐까 의문도 해 본다.
어찌보면 이러한 神位에 효공왕후에서 남신으로 바꾸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중대한 사유는 아닌듯 알 수 없기에 지금으로서 성황사를 재현한다면 다시금 효공왕후를 모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상--------------
노산 성황단 내부는 사방 8~9자 정도의 크기이고 바닥은 목재(송판 두께 약5㎝정도)로 되어 있고 벽은 회로 미장이 되어 있었으며 위패를 모시는 곳은 사각으로 벽체 안으로 사각으로 만들어 있었다. 당시 내부에는 그림같은 것은 없었으며 국태민안이라고 쓴 위판은 없었으며 기억에 노성성황지신위(魯城城皇之神位)라고 적혀 있었는데 노성산인지 노산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그리고 본 글에서 노산 성황단은 장군당이라 불리지만 모신 신위는 누구인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또한 중리의 암 서낭당의 신도 누구인지도 부정확하다. 정확하여도 군 전체를 관장하는 국행성황단과 하위 부락의 서낭신과 접신을 하면 옳치 않다는 점이다. (이는 부분집합이 다시 역으로 진부분 집합의 환원이 않 된다는 점이고 그외 부락과 중리 서낭신은 차등이란 점에서 연결고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견해 입니다)
* 불근당은 송각시(여자)를 위해 목경물(木莖物)을 만들어 놓고 제를 행하는 신당. 옛사람들은 처녀 죽은 귀신을 무척이나 꺼려 각 당마다 거의 모셔져 있고 이들을 일괄해서 송각시라고 한다
이는 삼척 원덕 앞바다에 해신당. 바다에 나간 부군들이 바다 사고에 돌아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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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고 그레서 바닷가 마을들엔 과부들이 많아지게되자 남근상에 굿거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는 동양이나 서양이 비슷한 경향을 가지는데 고대 그리스에 디오니소스 축제의 연유는 여자들이 먼저 시작하며 남근상을 깍아 치켜들며 축배의 잔을 드는 쾌락의 유희란 점이다.
이런 이해로 본다면 시루목고개장상에 고목나무는 불근당이라 하는것은 아마도 그 아래 굽어도는 여울에 빨래하다 멱감을때 빠져죽은 여자들이 많아서 그 혼을 달래주기위해 남근상의 불근당이라 하지 않았슬까 유추 추정해 봅니다.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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