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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항리(수다)사지

수다사(水多寺) 지명의 기록과 어원적 의미의 고찰

                수다사(水多寺) 지명의 기록과 어원적 의미의 고찰                                                                                                       

                                                                                                     평창역사연구자 高 柱 浩

                                            

 월정사 아래에 수항천을 따라 내려가면 12km지점에 위치한 수항리사지는 절터를 둘러싸고 수항천이 굽어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물[水]의 목[項]이라고 한글학회 지명총람 2 (508쪽, 1967)에 서술되어 있다.
동 절터는 현재 두 기의 옥개석으로 결손된 탑만 남아있는 사원지로 강원도 기념물 제 49호의 평창 수항리사지(平昌 水項里寺址)로 평창군 진부면 수항리에 수항천변에 소재해 있다.

 

수항리사지는 평창군 진부면 수항리 143번지에 위치하는 폐사지로 오랫동안 "수항리사지" 절터로만 알려지다가 1983년 명문기와에서 水多란 명문 기와가 출토됨에 이곳이 수다사지임이 밝혀지며, 또한 “태백곡 수다사”(太伯谷 水多寺)란 명문이 쓰여진 청동촛대를 발견함으로써 이곳이 수다사지임을 알게 되었다.

 

삼국유사의 제 4권의 전설편에 자장정률(慈藏定律)편에서 만년에 자장은 서울(경주)를 하직하고 강릉군에 수다사(水多寺)를 세우고 그곳에 거처하고 있었다라는 서술에 의해서 수다사는 명주군의 등명락가사로 알려져 왔었으나 근자에 동 사지에서 역사적 사료들이 발견됨으로 이곳 수항리사지가 삼국유사 자장정률조편에 기록된 자장율사의 말년의 거처인 수다사임이 확인되었다.

 

 1982년 이곳 수항리사지를 다녀간 신종원 교수팀이 발굴한 와편(瓦片)에 의해 이곳이 수다사임을 처음으로 밝혔으며 또한 1987년 이곳 밭에서 츨토된 청동촛대의 명문에 의해 이곳이 수다사임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 두가지 사료는 다른곳에서 이전 될어 올 수도 있는 유동적인 사료이라면 여기에 필자는 오늘 고지도의 문헌속에 나오는 수다(水多)라는 이곳의 지명을 찾아 발표 합니다.

 

1) 수다사 명문 와편(瓦片)의 출토
1982년 조사때 발견된 「太白谷 水多寺」「ㅇ多寺」등의 명문와편을 근거로 평창군 진부면 수항리의 이름없는 폐사지가 水多寺임을 확인하고 신종원 교수는1983년에 박물관 신문에 2차에 걸쳐 게제하였 수다사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수항리사지「ㅇ多寺」의 출토 명문기와>

 

2) 수다사 명문의 촛대의 발굴
1987년 발견된 촛대의 테두리에 '大定二十八年戊申三月日造水多寺講堂燭臺重一斥六兩第子安序"라고 적혀있다. 이로서 동 절이 수다사임을 재확인하였고 촛대의 제작연대의 대정 28년은 서기 1188년이다.

청동촛대부속구 (평창 수다사지 금속 공예품) <자료제공;국립춘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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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수항리 사지에서 발굴된  두 점의 유물을 통해서 이곳이 수다사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쩌면 위  명문촛대와  와편은 유동성을 가지는  사료이다.

여기에 나아가 필자는 아래의 두 가지 역사 기록릐 문헌을 발굴 공개합니다.

아래에 3,4번에서는 수다사의 구원성의 역사를 입증하는 사료들이다.

 이로서 수항리 사지는 수다사지임을 확인한다

( 일본 식민지시대에 문헌기록에서는 수항리 사지로 표기되어 있는바 구한말에 수다사는 수항리 사지로 바뀌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필자의 " 평창 지명 변천의 이햬" 책에서는 지뱡의 변천동기와 과정등이 그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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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다사의 문헌기록 

 

◈ 세종지리지 강원도(江原道)편에서 부분발췌

<세종지리지/강원도>

금장강(錦障江)은 그 근원이 오대산동(五臺山洞) 금강연(金剛淵)에서 시작하여 진부역(珍富驛) 수다사골[水多寺洞]을 지나 정선군(旌善郡)에 이르러 광탄(廣灘)이 되고, 고을 남쪽에 이르러 대음강(大陰江)에 들어가 두 물이 합하여, 흘러서 가탄(加灘)에 들어가고, 평창군(平昌郡) 동쪽에 이르러 연화진(淵火津)이 되며, 영월군(寧越郡) 동쪽에 이르러 금장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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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錦障江, 其源出自五臺山洞、金剛淵, 經流珍富驛、水多寺洞, 至旌善郡北爲廣灘, 至郡南入于大陰江。二水合流, 入于加灘, 至平昌郡東爲淵火津, 至寧越郡東爲錦障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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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0~1600년 경의 세종지리지에서 "진부역 수다사 골"의 표현기록이 있다.

 

4)고지도에 의한 필자의 발표

  해동지도, 여지도, 광여도, 지승의 4개의 지도에 강릉부 편에서 구한말 이곳의 지명의 수다(水多)라고 표기됨을 볼 수 있다.

이곳이 고지도에서 수다(水多)라는 지명으로 명기되며 있는 바 이는 삼국유사 자장 정율조편애서 자장은 말년에 명주군 수다사에서 거처하였다는기록에 현 평창군 진부면 수항리는 과거에 명주군이었으며 자장율사(590~658)는 1,400여년전 인물로 당시에도 이곳 지명은 수다(水多)였음을 볼 수 있으며 구한말을 지나 일제 강점시에 우리나라 지형과 지역 이름이 개편되는 경향에 이곳 수다(水多)도 수항리로 개편된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현 사원지만 남아있는 이곳 수항리사지는 옛 표기로는 수다사지로서  자장율사의 말년의 수도처로서 오대산 불교권과 인접하여 있기에 오대산 불교권의  문수신앙 성지론도 바로 이곳에서 출발하였음의 불교적 계통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수다사지가 중요한 의미는 선덕여왕 당시 당나라를 유학하고 돌아와 대국통으로 황룡사 9층탑을 창건하는등 자장율사는 한 사람이 가장많은 10개의 사찰을 창건한 인물로 자장율사의 편력을 간략하면 선덕여왕은 마지막 성골 출신으로 진골에게 피살되며 정치적 불안정으로 진골시대를 출발하며 교종의 득세로 하루라도 계를 파하고는 살 수 없다는 계율종의 자장은 화엄종주로 종파에 밀려 말년에는 신라의 변방인 이곳 수항리 계곡으로 찾아들게 되었다.

 

이로서 삼국유사 자장정률조 편에는 간단하게 자장은 말년에 명주군 수다사에 거처하였다고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자장의 문수신앙 성지로 알려진 오대산은 자장이 수다사지에 거쳐하면서 대송정(오대산)은 딱 한번 일주일간 다녀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수다사는 자장율사의 말년의 수도처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후 수다사를 거쳐간 고승으로는 지광국사 혜린등 고려시대에는 국사. 왕사의 자리에 거론되는 스님들과 연관을 가지고 발전하였다.

 

수다(水多)라 함의 어원적 의미에 물이 많은 지역임을 알 수 있듯이 수항리골은 오대산 비로봉에서부터 정선 나전까지에 이르는 골로서 수항리 일대에는 가리왕산에서부터 시작하여 해발 천여 m가 넘는 산이 다섯개가 넘게 솟아있다.  그중 수다(수항리)지역에 다다르서는 앞산인 잠두산과 건너편의 두타산이 기까워져있기에 수항천 골을 따라 오대산 비로봉으로 북상하던 구름은 그 부피가 클수록 무거워져 산을 넘지 못하고 산허리에 걸려서 비를 뿌리는 폭우지역이기에 옛날에도 이러한 의미로 水多란 지명을 쓴 듯 합니다. 

 

위의 1, 2, 3항의 역사 사료로서 현 수항리사지는 원래의 이름인 水多寺址로  그 이름값을 복원하여 삼국유사 기록에서 자장율사가 말년에 수도처로서의 명예를 회복하여야 한다. 이러한 개명작업은 현 강원도 기념물 제49호로서 문화재청에 신청하여서 변경되어야 함에 이는 개인이 할 수 없으며 군내 역사단체인 문화원등이 군 의회에 신청하여 승인을 얻어 도 의회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하여 문화재청에서 심의 허가로 변경되는 과정이기에  평창군 문화원이나 역사 유관단체의 노력이 있어야 함이다.

 

하지만 일전 본인은 "수항리 사지 탑의 원형을 찾아서"라는 논문으로 전국 문화원 역사논문 공모전에서 국사편찬위원장 상을 수상하였는데 당시 당시 평창으로서는 또 한편이 전국문화원장 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하였으며 이 논문들은 같은해 평창문화원의; "평창문화"란 책에 수록하며 문화원 연합장상은 큰 타이틀로 수상작이라며 책 첫페이지를 장식화였지만 필자는 그보다 위의 상인데도 그런 수상작이란 타이틀도 없이 권말에 70페이지 분량이 실렸다.

 

이렇게 공정성을 저버리고 평창의 "추존 목조비 국구사우"에 편애하는 평창문화원에서  수항리 사지는 홀대받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되지만 이조 왕들의 국구(왕의 장인)은 무려 60여명이 넘으며 평창의 추존 목조비의 국구사우는  아마도 추존 왕이기에 그 서열이 상위가 아닌  문화란 점으로 추정되는바 이도 중요하겠지만 수다사지로 그 이름을 찾아야 하는 노력도 경주하여야 하며  "2003년에 평창군괴 월정사가 주관한 수다사지 세미나에 11명 이상의 학자의  연구가 진행된바 있듯이 수다사지에 많은 제반 문제를 해결하며 사원지로 정립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여기에 문젯점들은 다음 편으로 게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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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항리 사지의 제반 문젯점]

< 현재의 수항리 탑 전경>

 

<수항리사지의 제반 문젯점>
현재의 법정명 수항리사지는 위의 사료들이 밝혀짐으로 수다사지(水多寺址)란 점이 확인되며, 당시 2013년 평창군과 월정사의 주관으로 평창예술회관에서 “평창 수다사지의 재조명”이라는 명칭으로 학술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주제발표에서는 좌장으로 지병현(강원고고문화 연구원장)을 비롯해 평창 수다사지 문화 유산적 가치(신종원 교수). 강원 영동지역 불교문화와 자장율사(남무희 교수). 평창 수다사지 출토 금속공예품의 특징과 명문(최응헌 교수). 평창 수다사지 삼층석탑 및 석조유물(박경식 교수). 평창 수다사지 정비 및 활용방안(최태선 교수) 와 토론자등 11명의 학자들의 심포지엄을 개최한바 있으며, 또한 당시의 리포트에 의하면 현재의 수항리 사지는 삼국유사 자장정률조에 기록된 자장율사가 만년에 거처하던 명주군 수다사였다는 문제에 모든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이러한 "수다사지(水多寺址)"라는 역사를 새롭게 규명하는 사료의 발견과 세미나 내용으로 볼때 이상으로 현재의 법정리명의 이름을 딴 수항리사지는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역사책 삼국유사에 거명된 "수다사"란 원래의 이름으로 바꾸어야 함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러한 세미나 개최가 이미 7~8년이 경과되어서 개명의 시간은 충분하게 지났지만 아직 무소식이다. 수다사지를 밝히기 위해 열 명의 학자들이 평창에서 심포지엄을 한 자체로만 보아도 수다사지는 자장율사의 말년의 수행처로 역사에 중요한 점을 인식할 수가 있다.
그간 평창에서 개최된 여러 세미나에서 어떠한 역사적 사실이 논점이 되고 규명되어 정비된 점은 단 한 점도 없다. 세미나 자체가 하나의 역사 발전에 목적과 목표는 아니다. 세미나를 통하여 규명된 역사를 정립하고 그에 따르는 문화발전이 그 목표인 것이다.


하지만 수다사지 명칭의 변경이란 개인이 문화재청에 신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재 신청, 변경등은 역사의 유관 단체가 군 의회에 문화재 정정을 신청하여 심의 승인후 연대적으로 도 의회에 승인을 얻어 문화재청에서 심의를 받아야 하는 사항이다.


평창의 역사 문화 단체로는 대표적으로 평창문화원을 들 수 있다. 평창문화원의 취지 및 목적의 설명으로는 첫째가 향토 문화의 발굴과 보존을 그 목표로 한다고 명시하였듯이 수다사지 명칭의 개정은 평창의 향토문화 발굴과 정체성 확립의 재단인 평창문화원의 몫인 것이다. 또한 조계종이나 산하 사찰인 월정사가 단체적 성격으로 군 지자체에 심의를 신청할 수 있는 것이다.

<수항리사지 탑의 문제>
필자로서는 조용하기만 산중의 수항리사지(현 법정명)에 대하여 논문을 쓰게 된 동기는 수다사지 세미나에 삼층석탑편의 리포트를 보면서 미비한 점에서 필자로서는 현재 수항리사지 탑의 조성 양식에 오류인 점과 학자들이라고 과연 동탑의 원형은 어떤 근거나 논지도 없이 함부러 3층석탑이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해답을 구가하고 있다.

 

지금 2층의 옥개석만 남은 탑이 삼층탑이었는가 오층탑이었는가 하는 논리적 문제 해결에서부터 탑파양식에 기존의 학설로는 부족한 이해에 앙각에 의한 탑의 조형론의 공식을 만들어 삼층탑임을 확인하며 지금 현재 비정상적인 양식으로 쌓아올려진 탑을 보면서도 이중 기단석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도 하지 못한 오류들의 문제와 궁극적으로 본 탑의 원형은 어떤것일까 하는 논리적 추론까지 연구하였다.

 

이러한 본인의 조형론은 10년전 월정사 중창에 허실이란 다수의 글을 쓰기위해 많은 연구를 하였기에 어려운 점은 없었다. 본인의 논문에서 밝히는 동탑의 현재의 조성양식은 6,25 전란의 파괴가 아닌 '70년대에 도괴되어 밀반출시 적발되어 반환되고 잘못 쌓아올린 것으로 이 탑의 양식은 탑파 조성양식의 일반론에 위배된다. 이러한 오류를 밝히며 수다사지 탑의 원형까지 추론하였지만 본인은 세미나를 할 위치에 있는 학자도 아니기에 이를 알리기위해 전국문화원 연합회의 공모전에 출품하여 순위 3등의 국사편찬위원장상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수순으로 동 탑의 원형을 찾기에는 미약하며 본인이 주제 발표로하는 전문적인 심의가 있어야 한다. 분명한것은 우리나라 국보 약 410개 정도가 있는데 이 중에 석탑이 28개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국보의 한국적 양식의 석탑은 우리 문화에 가장 큰 보물이다. 천년을 넘게 들판에 존재하여도 분실이나 인위적 훼손도 없는 보물인 것이다.

 

하지만 이에 전문학자들의 세미나에 미비되거나 잘못 논한 부분들에대하여 필자는 밝히고 있는데 이러한 필자의 논문에서 밝히는 현 수항리 탑의 조성양식에 대해서 심의가 있어야 하며 보고서가 다시 작성되어 조형적으로 오류의 탑 (2중 기단의 문제)을 바른 양식으로 다시 쌓아 올려야 하는 것이다.

 

   1. 강원대학교 박물관 「평창의 역사와 유적」 1987, pp68~69
   2. 강원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적 분포지도-평창군」2004, p363
   3. 강원고고문화연구원 「평창 수다사지의 재조명」2913, 주제발표 Ⅱ. 평창 수다사지

  삼층석탑및 석조유물. 박경식(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위 두 곳(1과 2)의 연구에서는 갑석의 상면에 2매의 판재로된 부재를 두었다.이 부재

   가 본래부터 있었는지 동일한 의문을 제시한다.
3.에서는 이 부재는 상층기단 갑석과 이의 상면의 별석으로 조성된 초층탑신 받침석이

   묘하게도 비례가 맞아 본래의 부재로 착각하기에 충분한 여건을 지니고 있다.(중략~)
     그러나 판석형 부재의 상면에 조츨된 낮은 각향 1단의 받침 길이가 129cm인 반면,

    초층탑신 하단의 길이가 97cm인 점을 고려할때 이 부재는 다른 석탑의 갑석일 가능성

    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주;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석탑을 구성하는 부재의 수치를 보면, 받침부의 너비에 맞추어서

    상면에 놓인 부재를 치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29cm의 너비를 지닌 받침 상면에

    97cm의 너비를 지닌 받침부가 놓일 경우 불균형을 초래할 것 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상층 기단 갑석 상면에 조츨된 호각형 3단 받침부 중 가장 상면에 조츨된 각

    받침의 길이가 102cm 점을 보면 탑신부의 받침부의 길이가 97cm여서 이 부재가 다

    석탑재일 것이 분명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석탑에서 이탈된 탑신석과 옥개석이 있다. 이 부재들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각각 3층 탑신석과 옥개석으로 판단된다. 옥개석의 상면에는 일변 9cm, 길이 18cm의

    찰주공이 있다. (인용 끝)

 

위의 3곳에서 설명하는 논제에 본인은 다른견해를 가진다. 동 탑의 기단석은 월정사 8각9층탑과 같은 2중 기단석으로 되어 있으며, 월정사 탑은 지반석 아래에서 송대 주화 두닢이 발견되자 조계종은 12C의 탑이라고 현재 학계의 추정 연대를 수정하였다. 여기서 수항리사지 탑도 팔각구층 석탑과 비슷한 고려 중기에 탑에 2중 기단석의 특징을 보인다.


2중 기단석의 탑상의 공통적 조성 특징은 상층, 하층 기단석에 모두 상대 갑석과 하대 면석이 받치게 하여 4매의 판석을 끼우는 것이다. 그런데 3매가 한 곳에 들어가면 절대적 오류임과 또한 상층과 하층 사이에 부재로는 상층 받침석과 그 아래에 하층 갑석의 2매로 구성되어야 하는데 여기에 1매만 들어간 것은 논고조차 없다. 또한 비례가 맞아서라고 하는 문구도 필자로서는 오류라고 이해한다.


기단석에서 갑석과 받침석의 비례는 역비례이다. 즉 하나의 기단석에서 갑석이 면석보다 크다는 것이다. 기단석이 2중으로 조성되면 그 크기는 하층갑석 > 하층받침석 > 상층갑석 > 상층받침석의 크기 순이 된다.
또한 탑신아래에 옥개석과 탑신석이 1개씩있다.

 

이 부재들은 탑신석에서 이탈된 것이 아니다. 현 2개층중 상층의 옥개석 두깨가 20cm인데 탑신 아래의 옥개석 두깨는 22cm이다. 그리고 찰주공 깊이 센티는 맞창날 쎈티로 잘못되었으나 현 탑신석 위의 노반에는 찰주공이 없다. 그런데 3층 옥개석에 찰주공이 있으면 이것은 다른 부재이며 상층(2층) 옥개석과 바닥의 3층 옥개석은 면 비례가 맞지않고 또한 2층 옥개석 상면과 3층 옥개석 하면의 크기가 틀리다. 이러한 모든 논지는 필자의 "수항리사지 탑의 원형을 찾아서 논문에 잘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박경식 교수의 수다사지 삼층석탑의 리포트는 이외의 여러문제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본 탑에 맞는 연구는 단 한점도 하지 못하고 논리적으로 맞지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의 "수항리 사지 탑의 원형을 찾아서“라는 논문은 공모전 출품작이었기에 타인의 의견을 반박하는 바로 이러한 문제는 집중 서술하지 못하였지만 탑의 전문학자의 논고이지만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평창 역사의 재 조명과 나아가서 한국 탑 양식의 조형적 구성이론을 다시 더욱 정확하게 밝히며 또한 박경식교수의 단국대 스승 고, 정영호 박사는‘70년 월정사 8각9층 석탑의 해체복원의 보수공사 감독관으로 남긴 리포트에 의하면 물론 신라 삼층석탑은 ”정형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고려의 팔각탑은 “이형탑’이란 용어로 구분하는 자체에서부터 정영호 교수는 월정사 구층탑을 고구려 복고풍이라 구분하는 논고에 본인은 10년전 이에 반하는 글과 팔각탑은 송나라 선진문물의 유입이란 학계에서 논치도 않는 글을 쓴바 있는데 2년전 경찰 임용직 기출시험에 팔각탑은 송나라 문화의 유립이 정답이란 문제가 출제되었다.


10여년전 월정사 중창의 허실이란 여러 글을 쓰며 마지막으로 월정사 8각9층 석탑의 미학을 쓰겠다 하였는바 그것은 형용사의 미사어귀가 아닌 2중 기단석의 문제등 여러 가지 문제를 파악 이해하며 종교적 신앙심을 넘어 과학적, 창의적의 걸작품이란 미학적 글을 이젠 쓸 수 있슬 것 같다. 이것이 10년간 본인에겐 숙제로 남았던 것이다. 필자는 불교나 크리스쳔에 신앙심이 깊지 못한 무교이지만 불교 문화를 쓰는 것은 종교적 신앙심을 넘어 우리 역사의 이해와 우리 역사속 우리문화가 발달되어온 과정이란 점에 민족의 삶의 궤적을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정체성의 문제와 민족 사상과 지향점의 이해인 것이다.
                                         

* “ 판관대의 바른 이해” 논문은 평창문화원으로 하여 강원 문화원 연합회에 논문 공모전에 출품하였으나 어제 영월서 주제발표에 부득이 불참하게되어 기권하였으며 하지만 용평면에서 판관대에 대한 율곡의 고향이란 점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기위한 주민들의 성원속에 추진위원들을 구성하는 새로운 문화의 출발에서의 세미나를 위해서 공모전에 오죽헌의 연관성을 극도로 절제하였지만 무엇이 문제이고 앞으로의 문제에 대하여 논문을 조정하기 수항리사지의 2부 “정비방안”은 다음으로 기고 합니다.

 

<해동지도 강릉부 진부면>편

 

<해동지도란?>
해동지도는 1870년대에 제작된 지도로 작자는 미상이며, 군현지도의 내용은 대체로 1748년에서 1750년까지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해동지도』의 제작은 이 지도집을 위해 새롭게 그려진 것이 아니라 이전에 비변사에서 제작한 지도를 참고하여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