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전국문화원 연합회 주체 공모전 논문부분 특별상(국사편찬 위원장상 수상) 논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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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항리사지 탑의 원형을 찾아서
(수항리사지 탑의 재고찰)
2018, 8, 25.
고 주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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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Ⅰ. 수항리사지 서문 ---------- -------------------------------- 1
Ⅱ. 수항리사지의 현재의 이야기 -------------------------------- 3
Ⅲ. 삼층 석탑의 원형을 찾아서 --------------------------------- 4
1. 수항리사지 석탑의 바른 이해-------------------------------- 4
2. 기단석의 문제고찰 ----------------------------------------- 5
1) 기단석을 도해로 보는 이해---------------------------------- 7
2) 기단석을 사진으로 보는 이해 -------------------------------- 8
3. 탑신부의 이해 --------------------------------------------- 9
4. 탑의 의문점 이해-------------------------------------------11
1) 바닥에 있는 옥개석과 탑신석은?----------------------------- 11
2) 바닥에 있는 탑신석과 옥개석의 싸이즈 비교-------------------13
5. 잃어버린 상륜부의 화사한 꽃이란??---------------------------15
6. 수항리사지 탑의 문젯점-------------------------------------17
7. 수항리사지 3층 석탑의 원형(가상)을 찾아서 -------------------23
Ⅳ.나가는 말 -------------------------------------------------25
Ⅴ. 별지부록 (수항리사지의 제 문제들)
부록 1) 수항리사지 가람배치도 --------------------------------1
부록 2) 수항초교에 있는 장대석의 문제 -------------------------2
부록 3) 기단석 별석 1점의 문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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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수항리사지의 서문
수항리사지(水項里寺址)는 평창군 진부면 수항리 143번지에 위치하는 폐사지로 오랫동안 "수항리사지" 절터로만 알려지다가 1983년 명문기와에서 水多란 명문 기와가 출토됨에 이곳이 수다사지임이 밝혀지며, 또한 “태백곡 수다사”(太伯谷 水多寺)란 명문이 쓰여진 청동촛대를 발견함으로써 이곳이 수다사지임을 알게 되었다.
수항리사지는 월정사에서 오대천을 따라 12km지점의 수항리에 위치하며 사지 주위를 휘감는 이곳의 지명이 수항리의 물항재의 뜻으로 수다사(水多寺)란 명문에서 보듯 물이 많은 절이란 의미를 가진다. 수다사는 자장율사의 말년의 수행처로 중요한 사찰이다.
▲ 청동촛대부속구 (평창 수다사지 금속 공예품) 자료제공=국립춘천박물관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종 목 : 강원도기념물 제49호
명 칭 : 평창 수항리사지(平昌 水項里寺址)
분 류 : 사지
지 정 일 : 1982. 11. 03
소 재 지 : 평창군 진부면 수항리 143
소 유 자 : 사유(私有)
관 리 자 : 김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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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1987년 12월 고려시대 대형 금고(金鼓) 1점과 촛대부속구 1점이 발견되었으며, 촛대부속구에 외반된 구연부 뒷면에 대정 28년(大定 二十八年)으로 시작되는 명문이 있어 적어도 고려 명종 18년(1188)에는 이 사찰의 법등이 이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폐사지인 수항리사지는 1982년 강원도 기념물 제48호의 “사지(寺地)”로 등급됨에 이곳을 찾는 학자들은 탑의 위치가 사유지인 밭 가운데 맹지이므로 밭의 농작물이 훼손되기에 경작자와의 마찰에 언젠가는 112 신고에 경찰차도 들어오는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하는등 접근이 용이치 못하였으며 학자들의 연구에 제한적인 면도 가지고 있다.
또한 “수항리사지”는 2013년 평창군과 월정사가 주관한 “평창 수다사지의 재조명”이라는 학술심포지엄*)에서 “수다사지 활용방안”이란 주제 하에 5개 부분으로 나누어 세미나를 가졌으며, 이로써 이곳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수다사란 점을 재확인하였고, 또한 폐사지인 수다사지의 방치상태에서 보존, 활용방안도 강구되길 희망하였으나 아직까지도 별다른 활동이 없는 답보상태로 잔존하는 부재들마저도 시간의 흐름에 농작물에 밀려 더욱 파손이 심하게 되며 소실되고 있다. 특히 석탑마저도 주변 밭의 객토에 의해서 수해에 붕괴할 수 있는 위기의 심각한 상황에 처하고 있다.
6,25이후 현재에까지 사지(私址)는 여러 증언도 이루어지지 않아 그 내용을 알지 못하였기에 연구에 차질이 빚어진 점에대해서 이 논문에서 향토사가의 증언 채록분을 빌어서 증언에 따르는 가람배치도에 각 부재들의 기록과 연구를 통하여 본 사찰의 윤곽이라도 기록을 남기며, 가장 시급한 문제인 붕괴위험을 앉고있는 탑 부분의 문제를 제시하며 정비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수항리사지 탑을 찾아가 본다.
*) “평창 수다사지의 재조명 학술 심포지엄” 강원고문화연구원 2013,11, 23 평창문화 예술원에서 개최. (2013.11.23)평창 수다사지의 재조명 학술 심포지엄
..평창 수다사지의 재조명 학술 심포지엄 자료집.pd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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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수항리사지의 현재 이야기
수항리사지는 증언에*) 의하면 6, 25 이후에도 석탑은 상륜부까지 건재하였던 사실과 동 탑을 90년 초 밀반출하다가 적발되어 다시 쌓을 때 올바르지 못하게 축조된 점으로 이곳을 찾는 답사객들은 이런 비정상적 축조의 탑을 보면서 그것이 정형이란 왜곡된 인식으로 문화인식의 저해에 대하여 올바른 탑의 원형을 찾아볼 것입니다.
수항리사지는 6, 25 전쟁때 폐사지가 된 것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6, 25 이후에 석불 3점이 도괴되었으며, 석등은 마을회관 앞 도롯가에 있다가 도로확장시 유실되었으며, 항간에는 당간지주라고 하는 장대석은 지금도 수항초교 담장 앞에 뒹굴고 있다. 또한 80년대 초 이곳을 다녀간 답사객들의 글에는 주초석이 있다고 기록하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본 장에서는 이러한 내용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속에 밀반출되다 반환되어온 수항리사지탑의 기단석에서 사잇돌 3매가 타 석탑재가 아닌가 하는 의문과 탑 난간석 안쪽 바닥에 있는 3층 옥개석의 문제와 증언에 의하여 탑의 상륜부 문제까지 동 탑의 전반에 걸친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탑의 원형을 찾아가는 고찰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본 논문의 규정이 20p 정도의 한정분관계로 부록에서는 여러 증언채록분을 통해 보는 현재까지의 가람배치도와 수항초교로 옮겨진 당간지주라는 장대석의 제 고찰과 3기의 석불과 주춧돌의 문제 등 사지의 전반적인 문제와 현재에 당면하는 우려의 문제를 제기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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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수다사지에 한점의 의문의 답“ 17.10.11.22:27
http://cafe.daum.net/pcmunin/RDke/35
수항리 김종근옹(86)진부공립국민학교 수항간이학교 12살에(2년제)입학을 하고 수다사 앞 강에서 친구들과 물놀이 하면서 수다사 탑 앞에 석조좌상 2구와 입상1개가 있었고 목과 손이 부러저 있었다고 합니다. 탑 10m 뒷편에 주춧돌이 있었다고 하며 탑 주변에 석재를 한곳에 쌓아두었는데 그곳에 귀신이 나온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곳에 큰 돌기둥이 있었는데 동네 4목도 8목도하여 수항간이학교로 옮겼다고 합니다.
또한 수항 출장소 옆(현 노인회관)에 석등이 있었는데 도로 확장공사하면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6,25동란 휴전후 군인들이 큰절에 가지고 간다며 석불을 트럭에 싣고 갔다고 하며 1979-1981년경 탑을 밀반출하다가 동리 주민에게 붙잡혀 수다사 탑을 다시 올려쌓았다고 합니다. 주춧돌은 삼단 둥근형이었으며 그 위치는 다음에 자세히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 다음에 전한다는 뜻은 주초석의 유실 경로와 어디쯤 묻혀있는가 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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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삼층 석탑의 원형을 찾아서
(현재의 수항리사지 석탑임 2017,10. 촬영분)
1. 수항리사지 석탑의 바른 이해
수항리사지탑은 *) 현재로서는 석탑 일부 부재가 결손되어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언제 보아도 간결한 느낌에 사뿐히 내려 앉자서 명쾌한 기분을 자아내는 듯, 마치 엇그제 만든 현대적의 모던하고 단순한 이미지의 수작(秀作)의 탑으로 도형의 이상적 분할과 통일성에 힘입어 안정적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하지만, 동 탑은 천년의 인고의 세월속에서 지난 ‘79년 밀반출의 수난을 당하며 이젠 그 원형이 무엇인지 찾을 수 없을만큼 파괴되고, 변형(탑을 양식에 맞지 않게 잘못 쌓아올린점)이 되어버리고 있으며 현재에도 여러 위기감에 봉착해 있지만, 아직 그 내용도 재대로 파악하기도 힘들어 손길이 닿지 않아 방치상태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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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수다사”라고도 하며“수항리사지”라고도 검색되지만 본 글에서는 현재 법정명인 “수항리사지“의 표기에 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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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항리사지의 내력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중기부터 폐사지가 되고 근자에 기록들엔 탑과 주초석이 남아 있었다 하는 기록을 가지고 있으나 이곳은 사유지로 경작을 하기에 주초석도 없어지고 이제는 단 한기의 탑만 남아 전해지는데 동 탑은 몇 층 탑이었슬까 하는 의문에서부터 탑의 전반부의 이해를 하고자 합니다.
2013년 11월 23일에 평창군과 월정사가 주관하여 “수다사지 활용방안”이란 주제의 세미나에서 단국대 박경식 교수는 “평창 수다사지 3층석탑및 석조유물“ *이란 리포트를 남기고 있다. 이 리포트에서는 사잇돌 3매및 여러문제를 제시하며, 또한 조각 수법에서 안상을 시대순의 비교로 탑 조성의 제작연대 파악등의 중요한 연구에 치중하였다.
여기에 본 논문은 동 탑이 지난 ‘79년 밀반출되다가 동네 주민에게 붙잡혀 다시 제 자리에 쌓아질때 잘못 축조한 오류의 바른 이해와 탑신부. 상륜부까지의 조형적 작도의 도형을 통하여 본 탑의 원래의 모습을 찾아 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분석과 연구들은 앞으로 수항리사지 연구의 자료가 되어 이를 통하여 수항리사지의 부재들이라도 더 이상 소실되어 완전한 폐허가 되기 이전에 가능한 한 복원되고 잘 손질되어 역사에 보존되길 바라며, 또한 평창의 문화자원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합니다.
2. 기단석의 문제고찰
현재의 수항리사지 탑은 2개의 옥개석과 3매의 사잇돌이 들어간 탑으로 인용부에서 보듯 동 탑은 지난 “79년 밀반출되다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 탑으로 초층 기단석에는 사잇돌이 1매이나 2층 기단석에는 3매의 사잇돌이 끼워져 있다.
3매의 사잇돌이 학자들에게 논란의 대상이 되는 곳이다. 3매의 사잇돌에 대하여 위 리포트에서도 타 석탑의 부재가 아닌가 하는 의혹의 대상이 되어있다. 여기서 우선 탑의 각 부재들의 기능면을 고찰해 본다면 문제를 풀어보도록 합니다. 기단석 아래의 받침석은 여러 장으로 구성된 기단석이 평탄면 자리와 아래로 하중의 차이를 균등하게 잡아주는 역할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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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평창 수다사지의 재조명” 주제발표 자료집. 주제발표 “평창 수다사지 삼층석탑및 석조유물” 강원고문화연구원 2013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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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기단석의 덮개로 일반적으로 갑석이라고 하며 갑석의 작용은 여러 장의 면석을 누름으로서 결속시켜 하나로 묶여지고 고정되어 이탈방지의 기능면도 고려할 수 있다. 그러기에 받침석이나 갑석은 제 각각 하나의 기능이란 점에서 두 장씩 끼워 넣는다고 더한 효과가 없기에 모든 탑은 사잇돌의 생략은 있어도 사잇돌 2장이상 끼워 넣은 탑은 한 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나라 1,200여 기의 모든 탑에서 한 부분에 사잇돌 3매가 들어간 탑은 이곳 수항리 탑이 유일하고 그 이유는 재 축조시 잘못 축조한 점이다. 그러기에 이 탑의 오류는 한 눈으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수항리 사지 탑의 기단석은 2중 기단석으로 아래 초층 기단석의 상단에는 사잇돌이 1매 끼워져 있다. 이것은 위의 3매의 사잇돌과는 균형이 맞지 않는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1매가 아닌 2매가 끼워져야 초층 기단 갑석과 중층 기단 면석의 제 균형을 찾을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잇돌 1매를 더 추가해야 하는 것이다.
(도표 1) (기단석의 실측 사이즈. 21017년10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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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 두가지 문제에 규명에 앞서서 위 논문에서는 3매의 사잇돌중 맨 위의 연화문양이 그려진 사잇돌(옥신괴임, 또는 별석받침)이 타 부재라는 견해를 피력하지만 이 부분을 아래의 도표에서처럼 자세히 관찰하면 아래의 도표 1의 아랫변(옥신괴임 부연)이 98cm이고 별석 3의 상단(상대 갑석)의 부연이 102cm로 상대 갑석이 4각의 각 변이 2cm씩 더 크지만 이 두 부분이 접해야 됨을 알 수 있다. (모든 탑에서 기단석이나 옥개석의 접합 부분에서는 한 쪽의 석 부재보다는 다른쪽의 석 부재가 1~3cm 정도 크게 되어있다. 이것은 이 부분의 접합과 반대쪽 부분의 접합에서 균형을 찾기 위함이다. 또한 위, 아래 사이즈가 딱 맞게하면 조금만 틀어져도 한 쪽이 밖으로 튀어 나가기에 이러한 점의 보완을 위한 점으로 밑의 부재가 좀 더 큰점이 정상의 치수이다)
(1) 기단석을 도해(圖解)로 보는 이해
탑의 사진에서 사잇돌 3매중 중간의 사잇돌이 빠지게되는 점을 이해하였다. 즉, 사잇돌 3매의 일반적 명칭으로 맨 위의 사잇돌은 탑신을 받치는 옥신괴임과 3매중 가장 아래의 면석이 상대 갑석임으로 중간 사잇돌은 빠지게 되어야 축조가 정상인 것이다.
(도표 2) (기단석의 수정 전, 후의 비교차이) (월정사 8각9층석탑 기단석)
左) 왼쪽의 사잇돌 3매의 기단석 그림에서 중앙의 부재를 빼 내어야 하고 그 부재는 2층 기단석 아래에 기단석 받침(상층석받침)으로 들어가야 위, 아래의 모든 부재가 제 싸이즈이란 점이다.
아래에 끼울때엔 부재를 위,아래 방향을 바꾸지 않은 상태 그대로 끼워야 싸이즈 가 맞는 것이다.
右) 오른쪽의 수항리사지에 사잇돌 3매는 탑재의 크기 순서로 조적한 것인데 왼쪽의 월정사 8각9층 탑의 기단석 부분 사진을 보면 2번의 받침석보다 1번의 갑석이 상대적으로 큰점을 볼 수 있다.
모든 석탑에서는 받침석보다 갑석이 크기의 역순으로 되어있으며 이것이 탑의 조성양식인데 수항리 사지 탑은 도괴 후 다시 쌓아 올릴때 비 전문가가 쌓아올려 이러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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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초층 기단석의 사잇돌은 위의 도표에서 하대 갑석으로 윗변이 124cm이다. 여기에 아래 도표2의 (상층 중석 받침) 밑변의 131cm가 마주 붙게되면 상층 중석 받침의 태두리가 3, 5cm 크게됨을 볼 수있다. 이유는 하대 갑석보다 위에서 낙숫물이 갑석 안으로 타고 들어감을 방지키 위함이고 또한 하대 갑석 부연이 조금 올라오고 그 아래는 1cm 깊이의 낙수 홈을 두고 있다.
(2) 기단석을 사진으로 보는 이해
(도표 3)
左) 사잇돌 3매중 중간의 판석의 부연(附椽)이 아래의 초층갑석 부연과 치수가 맞음을 볼 수 있다.
右) 사진에서 1번은 탑신석 받침의 옥신괴임의 아래 부연이며 이것는 중간 면석을 빼내면 4번의 2층 기단석 부연과 사이즈가 같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왼쪽사진에서 중간 면석의 2번의 윗 부연은 1번의 옥신 괴임석보다도 크게 나온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제 싸이즈(치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3번의 부연도 아래 4번의 부연보다도 큰 점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연구는 일전 “수다사지 활용방안” 세미나에 “평창 수다사지의 재조명”
주제발표 자료집(강원고문화연구원) 내에 “평창 수다사지 삼층석탑및 석조유물”*) 편에서 초층 탑신부 받침(옥신괴임)이 다른 부재라는 논지와는 상반되는 견해를 제시하며 문제 제기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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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식(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평창 수다사지의 재조명” 주제발표 자료집. 강원고문화연구원 자료집
주제발표 “평창 수다사지 삼층석탑및 석조유물” p76.
(본문내용)
"갑석의 상면에 2매의 판석의 부재를 두었다. 이에 강원학교의 보고서에서는 이 부재들이 원래부터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후 조사에서도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3단 받침부중 가장 상면에 받침 길이가 102센티인 점을 보면 초층 탑신부 받침부의 길이가 97센티여서 이 부재가 다른 석탑재의 것이 분명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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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탑신부의 이해
본 수다사지 활용방안의 리포트에서 박경식 교수는 “수다사지 3층석탑‘이란 주제로 이야기 하는데 이는 아마도 1943년의 조선총독부 발행의 「조선보물 고적도보」에 수항리사지에는 한 기의 탑과 한 기의 당간지주, 그리고 3기의 석불이 있다는 기록은 있다고 하였다며 여기에 기인하여 3층 석탑이라 하는듯 하다.
하지만 본인은 일본의 건축사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7~1935)가 1902년부터 934년까지 30여년에 걸쳐 조선을 답사하며 기록한 「조선보물 고적도보」에서 1915년 월정사 가는길에 평창읍을 다녀가며 평창 동북오중석탑(五重石塔)과 유동리의 서남오중석탑(五重石塔- 당시의 표기)의 사진을 각 1매씩 남겼으나(조선 보물고적도보 6권. 1918년 출판) 목록별로 분류되어 있지 않고, 또는 당시에는 수다사지는 아니였슬테고, 명칭이 수항리사지도 아닐까봐「조선보물 고적도보 3권의 백제, 고구려, 신라의 4~5편의 통일신라편과 6편의 고려편의 사진을 일일이 점검해 보았지만 현 수항리사지*) 유리건판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다
이러한 당간지주와 삼존불에 대해서는 별지부록에서 거론할 것이며 삼층석탑은 “고적도보”의 기록은 있다 하지만 본인의 검색으로는 찾을 수도 없어서 정확한 고증이 없기에 수다사지 석탑이 원래 3층 석탑이었는가 하는 의문의 과제 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
3층 석탑의 도형상 논제는 아래에 4장에서 입증할 것이며 이 장에서는 옥개석과 탑신석이 3층 탑으로서의 제반 문제를 고찰하겠습니다.
지난 가을 본인은 이곳을 다녀가며 탑을 실측하던 중 이곳을 찾아온 한 분이 돌아가면서 탑위에 화려한 꽃 조각은 없어졌나요 하는 물음에 탑신석 위에 양화는 꽃 조각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동 수다사지 탑의 원래 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그간 수다사지 탑에 가해졌던 수난사를 증언을 통해 이해하여야 수다사탑의 원형을 찾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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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지난 가을 본인은 이곳을 다녀가며 탑을 실측하던 중 이곳을 찾아온 한 분이 돌아 갈때 그 탑 위에 화려한 꽃 조각은 어디 갔나요 하고 묻길래, 그 점에 대하여 물어보니 어린시절에 보았다는 기억에 3층 옥개석 위에 상륜부에는 양화석으로는 꽃 조각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성명 미상, 이 고장 출신, 동부그룹 직원이라고만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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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표 4)
본문 p4에 인용부를 다시 보면 1979~1980년경 탑을 밀반출하다가 동네 주민에게 붙잡혀 제 자리로 돌아와 다시 축조 시 엉터리로 올려 쌓았다고 한다는 증언 채록분을 다시 상기해 보면 현재에 남아있는 옥개석 두 개의 본 탑은 도괴범들의 소행에 의해 파손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들이 반출하다 다시 원상복귀한 부재들의 분량상으로 보아도 3층 석탑임을 알 수 있다.
위의 그림을 설명하기 전에 우선 본인이 몇 년 전에 월정사 9층 탑의 논제에서 제시했던 하나의 단순한 원리 가설 하나를 설명합니다.
탑의 생명선은 옥개석과 옥개석이 맞물리는 코너의 전각을 꼭짓점으로 하여 각 층의 옥개석 전각의 앙각의 임의의 사선에 정렬해 있어야 수작의 탑의 기본인 것이다. 만약 옥개석 전각의 코너가 임의의 사선에 정열치 못하고 들죽날죽하면 분망스러운 졸작이 되는 것으로. 그러기에 이 임의의 사선을 탑의 생명선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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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주호.필자 본인의 블로그“후세백작의 지평” 제목“(2) 탑의 제작기법의 생명선(임의의 사선)과 월정사 탑에 적용” http://blog.daum.net/kkks1/709 2013.06.1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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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표 4)의 (2, 3층 옥개석 제작시 비교) 그래픽에서 왼쪽의 2층 옥개석의 탑 그림이 현재의 탑으로 오른쪽 그림에서 보듯, 여기에 가운데 2층 옥개석을 만들어 끼워야 한다는 논리도 있지만(가운데 중회색 그림의 옥개석을 신규로 제작)
이것은 3층 석탑은 가운데 중회색 옥개석을 제작하여 끼우는 것으로 이 제작시에는 1, 2층의 옥개석 전각의 임의의 사선에 맞게 제작하는데 이때에는 전각의 코너의 임의의 기울기값은 (앙각) 81°가 됨으로 3층이 아닌 다층석탑이 된다.
또한 2층위에 올려져있는 복발은 옥개석 임의의 사선 안쪽에 위치하게 되어 노반의 체감율은 기울기 값의 사선 안쪽에 놓이게 되므로 그 위에 다시 한 층이 올려져야 한다.
이러한 다층탑을 만들 경우 동탑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 올려져 있는 노반의 크기 비율이 맞지 않는 점과 신규로 만들어야 하는 2, 3층 탑신석의 체감 비율이 맞지 않는다. 그러기에 본 탑은 3층 탑이어야 하며 가운데 그림에서처럼 3층 탑신석과 3층 옥개석을 신규로 2층 탑신석과 비례가 같은 체감비율로 만들 수 있고 그 기울기 값은 앙각 76°의 범위 이내로 삼층석탑에 균형을 찾을 수 있기에 본 탑의 작도(作圖)를 그려봄으로써 탑신석에서 2층 옥개석이 분실된 것이 아니라 3층 옥개석과 3층 탑신석, 2층 탑신석이 분실된 점을 알 수 있다.
이로써 기존의 연구서에서 2층 옥개석을 만들어 끼워야 한다는 점에 반하여 3층 옥개석을 만들어야 한다는 연구를 발표합니다. 이것이 수항리사지 탑이 3층 탑이란 해석입니다.
4. 탑의 의문점 이해
(1)조형의 구도적으로 확인하는 삼층탑
현재 두 개의 옥개석만 남아있는 동 수항리사지 탑에서 선행될 문제는 우선 3층탑이었슬까 혹은 5층이나 다층탑이었슬까하는 과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수다사지 탑은 1942년 조선 총독부 발행의「조선 보물 고적 조사자료」에 3층탑이라고 출처를 찾을 수 있지만 그 외의 다른곳엔 아무런 기록이 남지 않으며 본인은 이 1942년판 고적도보는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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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p8에서 언급한 1918년판 세키노 다다시의「조선 보물 고적 조사자료」6권에 수록된 월정사 부근엔 수록되지 않았으나 동 책은 총독부 농산과 식산국에 남아있는 자료를 모아서 발간한 것이라 하는데 동 책에선 아래 설명은 모두 일어로 설명한듯하며 그것은 2차대전 전해에 사기가 충전된 일본이 조선을 위해 발간했기 보다는 일본인들이 조선 문화재 노략질의 안내서 같은 인텍스는 아니었슬까?? 그래서 아래의 일어 설명은 더욱 확인해 보고 싶었던 이유도 있다.
동 책에서 수항리사지의 언급에 3층탑과 석불 3점과 당간지주도 있다고 기록하엿다는데 기실 이번여름 다시 답사한 이유중 속내는 석불 3점은 그 크기등으로 미루어 볼때 논산 개타사의 석불 3점과 너무도 같은 인상이었기에 위 증언자 김종근옹이 혹시 기억할까 하는 마음에 이 석불 3점과 비교되는 석불등 약 열장을 프린트하여 찾아갔으나 연루하셔서 기억력이 좋지 못하다는 전갈에 포기했었지만 개타사 석불이 보살상의 초기 조각이라면 월정사 보살상과의 고리 작용에 무언가 있슬듯 한 점에 관해서는 분량상 본 논문외에서 기록할 것이며 또 하나 당간지주의 기록은 그 위치터나 잔존 부재가 없다는 점등에 본 책은 좀 미혹스럽다.
그러기에 본인은 남들따라 수다사지 탑은 3층탑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주창하는 탑의 생명선이란 탑의 조형론의 구조적 이론에 의해서 동 탑이 3층 탑임을 알 수 있었다.
(도표 5) 수항리사지 탑이 삼층탑이라는 비교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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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볼때 오층탑의 오층 옥개석과 복발이 안정적으로 이어짐을 볼 수 있으며 또한, 7층이나 보현사 13층까지 다층탑에서는 맨 위층 탑신석과 복발의 가로 폭이 등차 비율인 점을 볼 수 있지만 오른쪽의 3층 석탑은 3층 옥개석에 비해서 복발의 가로 폭이 현저히 줄어서 2중 사선 구조임을 볼 수 있다.
모든 삼층탑들을 보면 이와 동일하게 복발의 가로 폭이 작은 비례구조를 갖기에 삼층 석탑의 그래픽이 정답임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 논제의 성립을 위해서는 다수의 탑을 실측하고 그 비례관계의 비율을 따지는등 지면이 6~7p는 소요되기에 본 논문에서는 제외하며 추후 게시하기로 한다.
이로서 본 논문에서는 삼층탑의 예를 적용하여 논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지금까지의 탑의 학문이 역사적, 고고학적인 면의 발전을 가져왔지만 지금껏 규명하지 못했던 사안들은 미술학적인 조형론의 구조비레등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기에 이 부분의 “조형적 구조론”이 계통적 학문체계를 이루지 못한 단점에서 보완하여 탑의 학문에 한 분야로 대두시켜야 할 것이다.
(2) 바닥에 있는 옥개석과 탑신석은?
현재 바닥에 놓여있는 옥개석과 탑신석 각 1점은 왜 바닥에 놓여 있을까?
인터넷 글들을 보면 바닥의 부제를 3층에 주워서 올리면 된다. 또는 2층 옥개석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도 있지만 이러한 여러 이야기에 정확한 답은 실측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기에 아래에 정확한 실측 도표를 작성하였습니다.
아래의 도표의 탑의 그래픽(작도)방법으로는 옥개석 전각의 앙각을 76°로 설정하여 아래의 (도표6)의 그림처럼 임의의 사선에 잃어버린 2층 탑신석과 3층 탑신석 및 옥개석을 가상으로 그려서 그 실거리 값을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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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0의 “(2) 탑의 제작기법의 생명선(임의의 사선)과 월정사 탑에 적용”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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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표에서 보면 초층 옥개석 상부 부연의 폭이 73cm이며, 2층 탑신석의 아랫면이 73cm로 1층과 2층의 탑신과 옥개석은 같은 양식의 하나의 석탑의 부재인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탑은 3층 옥개석과 3층 옥개석이 유실된 점을 파악할 수 있다.
(도표 6) (기단석의 실측 사이즈. 21017년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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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닥에 있는 탑신석과 옥개석 각 1매의 비교
우선 위 3장의 사진에서 보면 바닥의 옥개석은 찰주공이 있으나 동 탑의 상륜부에 있는 노반에는 찰주공이 없다. 그러기에 바닥에 놓여있는 옥개석은 다른 탑의 부재이므로 한 눈으로 여러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으로 동 탑의 원형을 찾아보기에 아래에서 그 실 싸이즈(치수)의 값을 구하여 봅니다.
(바닥에 있는 탑신석) (바닥에 있는 옥개석) (현 탑2층 옥개석 위의 노반)
위 사진에서 바닥에 있는 탑신부 사이즈는 54×13cm이며, 옥개석은 85×26cm이다.
또한 (도표5)에서 그래픽상에 신규로 제작해야 할 3층 탑신부는 57×14cm이며, 옥개석은 88×20cm이며 2층 탑신부는 65×17cm이며, 탑신부 최대폭은 107×24cm이다.
이 수치로 볼 때 바닥에 있는 옥개석의 폭이 85cm이고 현존 2층의 옥개석 107cm이기에 바닥의 옥개석은 3층에 올려야 하지만 두께는 26cm로 현존 2층 옥개석의 두께가 24cm이므로 바닥의 옥개석은 3층 옥개석이어야 함에도 현 2층 옥개석보다도 2cm가 더 두껍기 때문에 본 탑의 탑재로서는 맞는 싸이즈임을 알 수 있다.
리포트에서는 이 탑재들이 3층 탑재로 판단된다 하지만 사진 2에서 옥개석은 찰주공이 잇지만 현 탑위에 옥개석 위에 올려지는 복발에는 찰주공이 없다. 그러기에 이 탑재는 다른 탑의 부재들임이 확인된다.
(도표 7) 출처 ; 구글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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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본 사지의 탑은 쌍탑이나 두 개의 탑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에도 아래의 위성사진에서도 탑은 법당앞에 중앙에 위치하기에 한 기임을 알 수 있다.
위의 2010년 사진에서 보면 아래의 원안에 사각 모양이 탑 난간석 범위이고 그 안에 점이 탑이며 2010년 위성사진에서 보듯 10m 위에 법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법전 앞 중앙에 한 기의 석탑이 있었다는 이야기로 만약 쌍 탑이라면 법전 양쪽을 넘어서서 있었어야 한다.
그러면, 왜 본 탑과 사이즈가 엇비슷한 탑신석과 옥개석 각 1기의 부재들이 이 탑 난간석 내 바닥에 존재하는 것일까??
이 점에 여러 사람이 3층에 올리면 된다고 하지만 위의 싸이즈 설명에서나 또는 찰주공이 있는 관계로 본 탑의 부재가 아님은 분명하게 드러났다면 쌍 탑도 아닌 다른 탑의 부재가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정답을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가상적 추정치의 가설로 본다면 여러 경우 중 가장 확률이 높은 경우를 가상해 보기로 한다.
동 석탑의 최근 수난사의 인용글을 다시 보면 지난 79~80년 사이에 내부 거래자가 있었고 (성함은 인용부에서 생략) 전문 조직범들이 밀반출하려고 탑을 해체하여 차량에 싣고 떠나다가 마을 어귀에서 주민에게 붙잡혀 다시 원 자리에 복귀하여 이후 현재 모습의 탑을 다시 쌓아 올렸다 한다.*)
이 부분에서 가설로 아마 트럭 두 대에 실려 나갔다고 가정하면 3층 기단석과 옥개석 등을 실은 차량은 먼저 마을을 빠져나갔으며, 나머지 부재를 실은 차량은 후발로 나오다 주민들에게 붙들려 밀반출되던 탑의 부재들이 다시 원상 복귀될때, 먼저 마을을 빠져나간 차량 속에 실린 탑의 상단부분은 추후에 외부에서 가져와야 했으며 이때 탑의 부재를 혼동하여 가지고 온 것이라는 가상 방법 이외엔 현재로서는 이를 검거하였던 김순영옹의 사망으로 더 이상 알 길이 없다.
만약 이 탑재가 본 사찰 경내에 다른 탑이었다는 가정엔, 다른 탑의 나머지 탑재가 더 많이 존재해야 하고, 또한 추정의 탑은 2층 옥개석까지의 탑이 잇어야 했다는 점이 모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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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은 김순영氏 (61세인 1994년 사망)로 미망인 김정숙 여사(79세)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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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것중 하나는 현존 2개의 옥개석과 탑신부의 3점의 사잇돌을 넣은 것은 그들 재 조적하였다는 점이다. 이 조적 현상으로는 각 층별 탑신석과 갑석등 탑 부재들을 동서남북의 원래의 방향을 맞추지 않아서 사이가 불균형적으로 들뜨고 또한 탑신 중아에 맞추어 정열되었던듯 하다.
그러므로 사잇돌 3매도 크기 순서대로 올려놓은 것이지 정확한 도형에의해 조적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본문의 기단석의 제 문제 고찰에서 이미 고찰하였다.
5. 잃어버린 상륜부의 화사한 꽃이란?
p10의 인용부에서 현지 주민의 이야기로는 상륜부에는 꽃장식이 있있다 하기에 그의 증언에 의해 연상되는 이미지를 밝혀 봅니다. p12에 수항리사지 3층 그래픽한 탑에 의해서 동 탑이 3층탑으로서 높이는 약 3,6m에 달하며 이 치수는 삼층석탑의 일반적 탑 크기에 해당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래의
(사진 1)에서 2층 옥개석의 현재의 탑으로 그 위에는 p15의 (도표 6)에서 노반의 크기는 30cm(상단), 52cm(하단), 높이 16cm의 얇고 납작한 약식의 노반이 올려져 있다.
(도표 8)
사진1) 탑 전체의 모습중 상륜부 사진 2) 탑 상륜부의 노반 모습 사진3 ) 신복사지 탑 상륜부 모습
또한 현재의 탑 전체의 모습에서 상단의 옥개석과 노반을 비교해보면 노반이 작아서 3층 옥개석을 (도표 8)에 의거 옥개석 전각의 앙각을 76°의 가상적 치수로 그래픽 하여 본 탑의 원형을 찾아보았으며 그 원리는 p13의 인용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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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블러그는 카카오로 돈을 벌더니 다음싸이트에서는 블로그가 장사가 안되는지 폐쇄하고 히스토리라는 곳으로 이전하더니 그것도 프레임이 워드의 기능이 안되게 만들어서 현재의 프레임에 원글이 많이 변경되었으나 이하 분량은 수정은 없이 살펴 보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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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반은 이중형으로 상단에 복발을 나타내고자 사각 둥근 라운드형(사진2) 2단형 조각으로 복발을 나타냈고 그 윗면에는 X형으로 작은 요철들이 연속되게 조각하여 양화의 밀리는 현상을 막았다.
(사진 3)은 신복사지 3층석탑의 상륜부에는 하나의 부재에 노반과 하현의 둥근 복발하고 있으며 증언자의 표현대로 그 위에 꽃장식이 올려져 있었다면 연화문양 속에 둘러싸인 양화로 (사진 3)에서와 같은 신복사 탑의 상륜부 이미지를 연상해 봅니다. 이 점에서 양화의 아랫변이 둥글기에 복발의 윗변도 매치가 될 수 잇도록 둥글고 납작하게 만든것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6. 수항리사지 탑의 문젯점
평창군청 홈피나 여러곳에서 본 수항리사지는 6, 25의 전란으로 손실되었다 한다. 하지만 6,25때 월정사 당우 22채를 전부 소각되었지만 유일하게 화강암의 8각9층 석탑은 건재하였듯이 본 수항리사지 탑은 6, 25 이후에도 3층 석탑이 상륜부까지 존재해 있었으며 79~80년 사이에 도난 사건으로 지금과 같은 두 개의 옥개석만 남게 되었으며 또한 중층 기단석과 탑신석 사이엔 3매의 사잇돌이 들어갔으나 하층 기단석 사인엔 사잇돌 1매만 재축조하여 지금까지도 잘못된 탑으로 전하고 있으며, 이젠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잘못 쌓아 올린 탑이 탑의 전형으로도 비춰지는 오류를 낳고 있다.
현재의 탑을 잘 보면 옥개석 전각의 코너 4면이 모두 두드려 깨어져 있다. 그리고 바닥에 있는 다른 석탑의 부재인 옥개석도 동일하게 깨져있다. 그러나 탑신석이나 탑신석의 코너는 멀쩡하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옥개석 전각의 코만 깨져있는데, 이것은 인위적이지만 이러한 선별적 행위는 화난 사람의 소행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가상치의 추정으로는 주술적으로 전각 코너에만 집착한 행위는 아니었슬까?? 바닥의 3층 옥개석 부재도 깨진 점으로 보아 최소한 79년도에 밀반출 사건 이후에 소행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관리도 소홀한 점이 드러났다.
이러한 파손을 괜스레 조선때 폐사지에 떠밀어서는 안된다.
동 리포트에서 학자들은 80년대부터 이곳을 왕래하며 이곳을 사적지로 지정까지 하면서 관리가 부족했던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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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만이 아니라 동 탑이 앞으로 존폐까지 닥칠지 모르는 위기봉착이란 점입니다.
수항리사지는 밭가운데 맹지이며 이 밭은 구글어스로 보면 35,000㎡로 약 1만여 평의 밭인데 80년대에는 돌밭으로 채산성이 낮은 작물을 경작하였으나 그간 객토로 수익성 높은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객토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탑의 주변의 높이가 차이가 줄어들어 홍수떄엔 붕괴 우려도 예상되는 점이다.
지금 현재로서는 탑의 초층 기단석 한 면에선 기단석이 통석이 아닌 면석인데 30cm이상 부서져 버린 곳도 있고 또한 밀반출 사건 이후 비전문가들의 축조에 의해 받침석과 기단 상부의 갑석의 기단석을 결속시킴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단의 받침석과 갑석의 기능은 기단석이 통석이 아닌 면석일 때 받침석은 기단석의 정열을 나란히 해주며 갑석은 분할한 기단석의 틈이 벌어지지 않게 기단석을 내려누르며 고정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당시에는 석재를 기계에 의해 면을 켜는 것이 아니고 정(釘)으로 쪼아서 면을 다듬을 때 약간씩의 차이점을 보완하며 축조하였는데 (일반적으로 기단석 안쪽의 면석의 면은 고르지 못하다) 재 축조시에 방향을 잘못 맞추면 사각 중 한 면이 들뜨는데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못한 부분이 보이고 있다.
동 탑에서 나비장의 결속은 세군데 있으며 나비장은 아마도 탑의 크기로 인해 기단석이 하나의 통석이 아니라 몇 개로 분할 될때 기단석의 나란한 정열을 위해 아래 면석을 동일하게 깔아야 되는데, 이때 받침석도 여러 매로 분할하여 깔기에 기단석과 받침석은 같은 방향이 아닌 엇방향으로 얹어서 결속시키며 또한 기단석을 잡아주는 갑석도 엇방향으로 잡아주어야 기단석의 틈이 벌어지고 이탈되는 점을 잡아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때 엇방향의 기단석이나 갑석이 충분한 기능을 못할 때 나비장의 쓰임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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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대 “평창문학카페” 제목;“수다사지 탑 기단석의 제 문제” 17.12.30. 18:48
http://cafe.daum.net/pcmunin/RDke/370
1985년 진부에 근무하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당시 수항리 절터을 방문하였는데 절터(탑)주변은 돌자갈 밭이었으며 탑신 하층은 구멍이 나 있었고 알 수 없는 탑신 조각이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 주민들은 **출장소 근무하시던 지역민이 탑을 팔다가 붙잡혀 엉터리로 복구하였는데(중요부분 사라짐) 그부분을 생략하고 세미나등으로 운운하였다는데 후세백작님의 명징한 답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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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유로 볼때 사잇돌 3매는 기능상 필요성이 없고 초층 기단석에 1매의 사잇돌은 불충분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 두가지 사실은 모두 탑의 조형에 있어서 불 균형적 요소란 점을 이해할 수 있으며, 탑을 조적할 당시 무언가 맞지 않고 벌어지는 느낌엔 다시 부재를 내려서 나비장을 조식하였슬 경우이다.
탑의 기단석은 통석이 아닌 면석으로 탑 전체의 수 톤의 무게를 (화강암은 70㎤당 1톤임) 받치고 있는데 현재 아래 기단석 한 면중 1/2정도가 파손되어 없어졌기에 좀 불안전한 곳으로 드러나며 아래의 그림같은 홍수 상황하에서는 유실되는 흙의 압력으로 더욱 감당키 어려울 듯하다.
위 사진은 약 10여년전의 상황이고 아래에서 지난 2017년 10월 촬영분의 사진을 보면 많은 객토에 의해 위기감의 문제를 직면하고 있슴을 볼 수 있다.
사진1) 2017년 객토가 중단된 사진임
사진2) 재 시공시 각 부재들의 방향을 고려치 못해 탑의 조적상태가 틀어지는 점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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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에서 보듯 경작지 1만여 평의 밭은 몇 번 객토가 되었는 듯 토양이 이미 탑의 지대석과 같은 높이로 올라가 홍수가 아닌 비만 오더라도 위쪽의 경사지의 토양이 내려 흐를때 물이 찰 수 있는 지점까지 도달하게 되었고, 이미 지난해엔 객토에 의해 빗물에 토양이 유실되어 받 아래 새로 지은 민가 마당에 몇 트럭분의 흙이 유입되자 현재는 평창군에 이 문제가 제소중인 것으로 이야기 한다. 이렇게 볼때 홍수로 탑이 흙에 밀리는 사태를 당한다면 사진 2에서 보는 불안전한 탑의 각 부분이 붕괴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이다.
1) 올 여름 답사에서 드러나는 문젯점
이번 (8, 18일)에 증언 채록자인 정원대님의 안내로 수항리사지를 다시 다녀왔습니다. 본인의 글에서 수항리사지 탑의 위기봉착의 예감은 적중하고 있다는 생각을 넘어서는 본 탑에는 한시라도 긴급 대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느끼고 이 글을 씁니다.
(탑 상륜부 함몰의 문제)
위의 사진은 지난 2017년 10뤌에 다녀온 후 오늘과 10개월만에 2층 옥개석이 문제가 생기도 노반은 삐딱하게 일그러진 점을 (북쪽방향)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래의 사진에서 탑 자체의 붕괴위기를 밝힙니다.
(중층및 하층 기단석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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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 서쪽방향의 초층기단석이 2/3정도 파손되 없어진 상태이다.(현재는 시멘트 물을 발른 얇은 막으로 보강되어 힘을 받을 수 없는 상태이다)
右) 동쪽 방향의 상층 기단석의 한 변이 9cm이상 뒤로 함몰되어 있다. 이 기단석은 면석으로 두께는 13cm이고, 북쪽 방향 기단석은 두께 16cm(면석13cm두께+우주 13cm두께임)이다. 이로서 동, 서 양쪽의 기단석에 힘의 중심이 북쪽방향으로 쏠려있는 점을 볼 수 있다.
(중층 기단석 동편쪽 함몰문제)
왼쪽 사진에서 탑의 동측쪽 벙향 2층 기단석의 함몰에 의해 그 반대편인 서측에서 보면 위의 사잇돌 부재들이 힘에 경사로 함몰되어 높이의 공간이 작아진만큼 눌려서 한쪽으로 내려앉은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사잇돌 오른쪽을 확대해 보면 전부 들떠있다.
동 탑은 아래엔 두께 13cm 사각 2중 기단석위에 탑신석의 부재들은 통석으로 라가 있기에 힘의 중심은 윗부분에 있는데 현재로서는 약 3톤 이상의 무게가 중심이 흐트러지고 한 방향으로 내리 쏠리고 있다.
이때 하부 탑신석이 안정적이지 못하기에 조금의 힘이 가해지면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다면 아래에 게시할 본 사찰의 가람배치도에 의하여 일전까지는 있었다는 불전 법당의 3중 주초석을 찾아 이에 적당한 범위에서 방벽이나 배수시설을 만들고 흙이 유입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할 대책이 시급한듯 합니다 (주초석과 가람배치도는 별지의 가람배치도상에 다시 이야기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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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수항리사지 3층 석탑의 원형(가상)을 찾아서
(실거리 비례에 의한 가상 그래픽임)
본 수항리사지 탑은 고려초기에 건립한 것으로 그 시기적인 예는 장엄조식에 의한 기록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이곳엔 원주 법천사의 지광국사 헤린이 10년간 주석하였다 하는데 당시 고려초엔 개성의 헌화사 다음으로 원주권 불교 문화가 가장 융성하여 지광국사등 4명이 왕사와 국사로 나아가는등 고려초 불교계의 중심의 축으로 전개되는데 수항리사지에도 그 영향이 미치는듯 하다.
수항리사지의 탑을 보면 정교하고 수준급의 역작이란 점과 또한 도괴된 석불 3점은 논산 개타사의 고려 왕건이 후삼국을 제패한 기념으로 세웠다는 석불 3점과 그 모습은 일치하지 않앗슬까 하는 의문속에 조그만 암자인 이곳은 당시 고려초 불교 중심권과 연관의 고리가 있지 않았슬까 하는 추정을 자아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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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찰 월정사 탑을 보노라면 그간의 인고의 세월동안 무수한 풍상을 다 겪은
듯 비바람에 풍화되어 천년의 수명을 헤아려볼 수 있지만, 이곳 수항리사지 3층 석탑을 보고 있으면 관리 부실의 파손은 빼고는 탑이 주는 인상은 마치 엊그제 만들은듯 사뿐한 정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한 정감은 탑이 주는 인상이 심플하고 명료하게 느껴지는 것은 조각수법으로 탑의 전체적인 하모니(조화)와 리듬감(비례)의 안정적 매치(어울림)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려탑은 신라양식에서 이탈하여 이형탑으로 다층탑을 모색하지만 사각 삼층탑의 경우에는 신라 정형탑에서 차츰 그 형식을 넘어서는 변형을 볼 수 있다.
동 탑에서는 비례의 균형속에서 마치 관습에 도전하듯 모던한 조각 수법도 가미되고 있는데, 이는 2층 기단석 받침으로 올겨야 하는 사잇돌 3매중 중간 사잇돌을 보면 아래에는 2중 턱이 아닌 안쪽으로 굽은 라운드형(역 반원형)의 조각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P12의 도표 5)에서 보면 이 사잇돌은 중충 기단의 받침석으로 이전 되어야 하며 이때에는 받침석 아래에 라운드형이 아닌 2중 기단일 경우 초층 갑석의 윗면 2중 부연과 만나게 되면 이 부분이 잔주름 4개가 가며 이는 탑 전체적 균형에 복잡하고 어수선한 느낌이 되기 때문에 2중 돌기가 아닌 라운드형으로 마감한 것이다.
이러한 예는 다른 탑에서는 없는듯 한 것으로 요즘들어서는 몰딩재(굽돌이)에 이런 반전형 곡선재를 흔히 사용하지만 아마도 탑에서 이러한 수법은 전례없는 일로 현대적의 모던기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점과 대칭으로 맞물려서 상륜부의 복발도 신라 정형탑의 직선으로 된 2중 사각박스를 높이를 작게하여 얇게 곡선으로 감아 넘겨서 이 두가지 수법의 변형이 탑의 전체적 조망 균형에 부드러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신라의 정형탑에서 보면 직선으로 된 탑에 마치 도도한 느낌마져 들지만 수항리사지 탑은 옥개석 전각까지도 수직의 직선으로 떨어지면서도 마치 탑의 교범같은 정교한속에 부드러운 인상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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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장엄석탑만이 아닌 사방탑(사면탑)으로 모두 사방을 향하는 사방위의 그래픽으로 동 탑의 전체를 조망해 볼때 탑신석 아래의 별석 받침석(옥신괴임)의 상면에 연화무늬 조각이 은은하게 눈에 들어온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는 사리탑의 경외스런 표현으로 장엄석탑의 한가지 유형이지만 조형적으로는 탑의 격조를 높이는 것으로 상륜부의 양화의 꽃 장식 문양과 탑 중간의 별석받침에 연화대자 문양의 조식의 균형 문제에 하층 기단 중석에 삼산화 문양의 안상을 조식하여 탑의 조화와 균형을 이룬 점도 동 탑의 조각자의 정성스럽고 기품있는 탑을 만들고자 노력한 점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엔 단순성의 조각을 통하여 탑의 전체적 美의 감각을 살려주기에 우리나라 1,200여 기의 탑 중에서도 조형적 리듬의 안정감으로 부드럽고 생동감 넘치는 아름다움으로 종교적 성찰의 구현을 표출하고 있는 수작이란 점이 본인의 감상입니다.
이러한 장엄조식은 9세기 이후의 탑에서 나타나는 바, 본래 탑이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는 것이기에 탑신 아래에 연화대좌를 만든것은 초층 탑신에 사리함의 장치가 있는데 이런 특별한 부재를 두어 연화대좌를 조식하는 것은 사리신앙의 조형적 표현*)
이란 점이다.
이러한 연화대좌 조각문양은 전국적으로 약 10개의 탑에 나타나는바 그중 강원도 지역에 밀집하는 현상을 가지고 있는데, 원주 용곡리 삼층석탑, 홍천 쾌석리사자 삼층석탑, 강릉의 등명락가사의 모든 탑이 이러한 부재를 두고 있다고 한다.
Ⅳ. 나가는 말
지난 2013년 “수다사지 활용방안”의 세미나에서 이곳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자장율사가 말년에 거처한 수다사지임이 재확인되었고 와편등 많은 자료의 연구보고가 있었지만,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이 이제는 폐사지로서 잔존하는 미결구의 석탑 한 기마저도 붕괴의 위기에 처해지고 있으며 이곳이 사유지로 경작지인 관계에 '80년대까지는 있었다는 주초석도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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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27호 / 2018년 2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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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재 이러한 폐사지인 수항리사지에 대하여 그간 잘못 알려지는 사실들에 대해서 증언을 통하여 그간 몰랐던 사실들을 이해하여 3층 석탑에대한 논란을 해결해보며, 또한 수항리사지 전체의 윤곽을 이해함으로써 앞으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본인의 주관적 견해로 탑의 생명선이라는 옥개석의 전각 코너의 임의의 사선과 그 기울기 값이 보편적으로 3층 석탑일 경우 13~15°이며 다층탑일 경우 7~9°임에 이에 맞추어 3층 옥개석의 문제와 상륜부의 그래픽적인 이해로 3층탑을 재현해 보았으며 그간 풀리지 못했던 별석 3매는 탑 부재들의 기능적 이해와 탑의 면밀한 사이즈 그래픽으로 해결해 보았습니다.
본인은 조소 전공자로 지금까지 자영업만 하였으며 학문과는 좀 거리가 있었지만 인터넷의 발전에 본인의 블로그 “후세백작의 지평”에서 두고온 고향 평창에 관한 역사인식의 재조명에 많은 글을 게시하던 중 과거 월정사 중창시 8각9층 석탑의 시야를 가리는 2층 난간석과 그로 인하여 난간석 내에 묻히는 석조보살상을 좌대를 높임으로서 탑이 가려지고 탑과 보살상의 주객이 전도되는 양상의 중창의 허실이란 이해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이때에 수항리사지의 두 개의 옥개석만 남은 탑은 과연 3층탑이었슬까 아니면 5층탑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서부터 수항리 사지에 관한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수항리사지 탑의 연구에 기존 학문의 탑의 부재들의 연표에 의한 조성시기를 벗어나 석수 스님들이 탑을 조각하는 과정상에서의 각 부재들의 필요한 기능적 이해. 탑을 만들기에 앞서 어떻게 만들것인가 하는 전체적 균형과 구조적 안배등의 조형적 이해를 해보면서 답을 찾아보는 노력으로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현재 국보 403개 중 가장 많은 부분이 28개의 석탑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국보로서 제일 많은 가치를 부여받은 석탑은 우리에게 중요한 문화재로서 이 자료에서 보듯 도형적, 기능적 면으로 그 이해를 넓혀가야 할 것이다.
언제나 그러했듯 이 글도 두고온 나의 고향, 평창사랑의 하나인 것입니다.
이로써 저의 글을 마치며 지면 관계상 탑 이외의 수항리사지의 내용은 별지 부록으로 기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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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에서는 그간 증언기록에 의한 수항리사지의 가람 배치도와 당간지주의 존재 여부와 3존불이 아닌 3점의 석불과 이곳에 10년간 주석한 지광국사 혜린과의 관계적 이야기 다시금 고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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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항리사지 탑의 원형을 찾아서 (부록)
부록 1) 수항리사지 가람배치도
부록 2) 수항초교에 있는 장대석
부록 3) 기단석 별석 1점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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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1) 수항리사지 가람배치도
(2010년 위성 사진에 의거 하였음)
(석불 3매의 위치는 증언자님들의 증언에 다소 부정확할 수 있음을 양지 바랍니다)
위의 가람배치도는 수항리 마을의 여러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여 작성한 바의 기록으로 다소 정밀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본 폐사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를 기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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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람배치도상으로 볼 때 탑 뒤로 10m뒤에 불전이 있었던 주초석이 3단형으로 10여 개 있었다고 답사객들의 기록도 있지만 증언으로도 확인되는 바 증언자를 통해서 주초석이 매립되었는지 반출되었는지 확인은 가능한 듯 하며, 또한 측후방에는 요사채(승려들이 거주하는 집) 이 있었고 뒤에는 좌측편으로 고인돌 1기가 있었는데 도난 당하였는데, 이번 (8월 18일) 증언에서도 밭 주인 김삼수 씨는 일을 하면서 약 10명 정도가 고인돌 위에 둘러앉아 식사했다는 정도의 크기를 증언합니다.
부록2) 수항초교에 있는 장대석
인터넷상의 개인 글들엔 무수히 많은 글에서 수항초교에 당간지주가 옮겨져 있다고 하며 위 “수다사지 활용방안“*)
세미나에서는 당간지주 난간석 아닌가 추론하지만 본인이 밝히는 것이 이 이론과는 상이 합니다.
『조선고적도보』에 근거하여**) 수항리사지의 석불 3점과 수항리사지 탑, 당간지주가 있었다 하지만 원본인 1918년도 출판된『조선고적도보』책 6엔 수항리사지의 사진은 한 장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그 책은 목록에 순서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저기에 실리기에 『조선고적도보』전체를 확인하였음)
하지만 3층 석탑은 그 일부 탑이 현존하고 석불 3점은 위에서 밝혔듯 김종근 옹의 증언과 6, 25 이후 군인들이 큰 절로 가져 간다라며 트럭에 싣고 갔다는 증언에 의해 석불 3점의 존재는 확인할 수 있었지만 당간지주의 존재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곳을 휘감는 여울은 그 앞이 산으로 막혀있어서 옛날부터 수항리사지를 건너오자면 증언들에 의하면 아래쪽 현 다리가 세워진 위치로 건너다녔고 하지만 엊그제 답사 시(8월 18일)에도 그곳을 건너기엔 7~80cm 이상 깊이를 건너야 할 듯 하며, 진부쪽에서 수항천(오대천)을 건너 구릉을 넘어오는 곳도 깊이는 만만치 않은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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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식(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평창 수다사지의 재조명”
주제발표 자료집. 강원고문화연구원 자료집 주제발표 “평창 수다사지 삼층석탑및 석조유물” p76.
**)『조선고적도보』에 의하면 평창읍의 오층석탑 두 기와 월정사의 여러 사진을 1918년 『조선고적도보』 6권에 수록하며 이는 1915년도 이곳을 다녀갔지만 월정사에서 오대천을 따라 12km 아래인 이곳은 방문하지 않은 것으로 추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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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간이 존재했다면 본전불의 정면인 남쪽은 수항천이 깊고 강을 건너서는 산이 가로막고 있기에 이 방향을 제외한 동, 서, 북의 모든 방향에서 수항천을 건너올 수 있으므로 당간지주 위치도 이곳 경작지의 남쪽을 제외한 모든 방향의 어디인가엔 당간지주 석물이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수항초교 앞에 방치된 장대석 2점. 사진에서 보듯 안상무늬가 가로형으로 새겨져 있다)
수항초교로 옮겨진 장대석은 30×38×290cm와 154cm로 당간지주 부재이기엔 가늘어 부재가 아님을 알 수 있고, 앞의 증언자 김종근 옹이나 이번에도 김정숙(79세) 여사의 증언에서 위 두 개의 장대석은 수항초교 입구에 세웠으며 나머지 서너 개의 장대석은 계단용으로 사용하다가 그 위치에 묻고 시멘트 계단을 하였다 한다.
이 장대석 부재는 5~6개로 당간지주가 아님이 명확히 확인되며 당간의 난간석으로 사용되었다기에는 현 우리나라 당간 50여개 중 난간석을 만든 당간은 하나도 없으며 5개 정도는 당간지주 고정용으로 익산사지 당간지주에서처럼 당간지주를 잡아주는 통석으로 된 것은 찾아볼 수 있다.
그러기에 이 장대석들은 2중 기단형으로 그 안에는 안상을 조각하였으며 가로형으로 안상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당간지주라면은 세로로 세우기에 안상이 부적합하다. 그보다 당간지주용 장치의 조각을 한 것이 아니지만 으로 두께가 당간지주용엔 부재로서는 굵기가 가늘게 보인다. 또한 당간이 세워진 곳의 난간석도 아니다.
석조물에서 안상이란 시대적 구분의 척도는 되지만 그 문양자체에 불교사적이나 어떤 중요한 의미는 갖지 못한다. 다만 안상의 역활은 그림에서 면 분할시 무미한 곳에 힘을 가하는 장식적 기교로 나뭇잎의 문양기법은 좀 틀리지만 동양이나 서양에서도 옛날부터 공히 사용하는 장식 그림으로 벽지나 화폐에서도 나타나는 일종의 굽도리나 띠장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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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문화재 검색사진)
80년대의 사진에서 보면 그때까지도 탑 위쪽에 장대석이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중앙의 큰 장대석은 다른 사진에서 보면 탑의 난간석과 평행함을 볼 수 있는데 이로 유추해 본다면 아마도 법전의 난간석이 제자리에 있음을 추정해 본다.
이런한 불법전 난간석은 원주의 법천사지에서 잘 나타나 있다.
(수항초교에 있는 작은 장대석으로 용처를 알 수 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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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에서 작은 장대석에는 아래의 사진에서처럼 사선으로 자르고 안쪽으로 원형 홈에 한편에는 사각의 혼을 파서 아마도 사각은 쐐기를 고정하는듯 하며 이 석재의 용처는 파악하기 힘들다.
부록 3) 기단석 별석 1점의 문제
수항리사지 탑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 발견된다. 사진으로 보면 검은 부분의 공간이 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줌 브라우저(밝게하기)로 아래 사진으로 작업을 해 보았습니다.
탑의 중간 별석 1매(중층 기단 갑석으로 이전되어야 할 부재)는 남쪽에서는 이격이 없는데 북쪽 방향에서는 16cm의 이격공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양 끝의 절단면이 잘 절단되고 다듬어진 점으로 보아 아마도 제작당시에 어떠한 결함 때문에 이격시키고 그 안에 오각형의 별석 부재를 끼워 넣은듯 하다. 이때에 입구의 16cm보다 안쪽이 사다리꼴로 좀 더 크게 만들어 빠져나오지 않도록 하였을 것인데 지금은 플래스틱 재에 시멘트를 입혀 메워서 안쪽 크기를 계측하지 못하였습니다.
(별석 이격 사진/북쪽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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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자장율사의 말년의 수행처인 천년고찰 수다사를 잘 가꾸어 보존치는 못하고 우리 시대의 이름으로 이렇게 역사에서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역사기행으로 찾아오는 답사객들에게 천년을 넘어서는 수다사지로 거듭나길 희망합니다. 그리고 또한 지난 세미나에서 이곳이 학자님들이 명백히 밝힌 “수다사” 였던 바 명칭도 또한 자장율사의 “수다사”로 개정해야 옳은 것이며 신종원 교수가 언급했듯이 이곳의 寺地터는 약 90여평이란 추정에 이를 근거로 본 논문이 도움이 되어 하루속히 잘 정비된 페사지로 거듭나기를 희망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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