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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국구사우

펑창의 자연취락적 마을 형태(國舅祠宇터에 배경적 고찰. 별지 1)

 

1] 펑창의 자연취락적 마을 형태(國舅祠宇터에 배경적 고찰. 별지 1)

 

高柱浩 2017.10.23 05:51 

 

저의 글에서 "田"자라는 일제 강점시대의 마을 형태에 관한 생각은 평창의 지형적 고찰이란 점입니다.

이 점에서 우선 평창 옛 시가지에 의한 국구사우터의 배치 이해관계로 이 고찰에서의 문젯점은 일제 강점시 도로와 마을 구분 형태가 조선시대의 자연 취락적 마을형성과 어느정도 관련이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조선시대의 마을 형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금 우리가 보는 일제강점시에서 부터 이어온 취락형태에서 유추해 본다면,,

일제는 대략 1920년대까지 전 국토의 측량화와 지적도면을 만들었으며 30년대까지는 이를 토대로 거대한 토목공사로 제방을 쌓고 그 위에 신작로라는 도로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이때 일인들은 풍수적 이해와 그 풍수는 미신이 아닌 사실적 현실에 적용하는 한 단면을 본다면 그때 쌓은 평창의 제방은 지금까지 수해에도 장맛물은 범람하지 않고 대략 제방의 90%선이 최고의 육박지점인듯하며 지난1973년 수해시 하평재방이 범람하고 종부제방이 유실된 점은 종부교 다리 교각때문에 강물이 제대로 흐르지 못하고 범람할때 교각을 빠져나간 강물은 압력에 의해 유속이 빨라짐이 원인으로 그 힘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그에서 위의 일인들의 토목공사는 어쩌면 강물의 최고범람 용적율도 계산하여 제방의 위치를 설정한듯하며 그들이 이러한 실사의 사실 판단에 풍수도 작용한다면 평창의 지형은 어떤 것일까??

 

과거 대부분의 산간지방의 자연취락은 산을돌아 따라굽는 강물에 의한 개활지. 예로 본다면 정선시내는 조양강이 굽어도는 아니면 우리 주변에서도 도돈초등학교 아래의 강변등 취락은 범람지 위에서 강물의 용수도 편리한 점을 택했다면,,,평창의 지형은 이와는 다른 형태로 쉽게보면 배주(舟)자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상리에서 하리에 이르기까지 평창강을 하늘에서 보는 평면도의 형상인 것이다. 이러한 지형에 가장 이상적형태는 평창은 강릉에서 영월로 가는 신작로와 그중 삼거리에 정선방향으로 가는 축을 깃점으로 "田" 형태의 마을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여만리 여울에 보를 막아 관계수로를 만들어 시내 田자 형태로 용수시설이 되지만 또한 농업용수로 전답이 극대화 되어 생산성도 극대화 되었슬 것이다.

그러기에 이효석의 자전적 글"영서의 기억"에서 가을철이면 평창엔 품평회로 야시장도 열리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공사 이전의 조선시대의 평창의 마을 형성은 어떠한 형태였슬까 가정해보면. 지금 현재도 있는 관계수로의 아랫쪽은 저지대로 장마철엔 강물의 범람이 잦은 저지대일 것이란 점으로 당시 취락지대는 노산아래에 관아를 중심으로 하리의 (구) 읍사무소에서 양조장으로 이르는 중간 도로의 윗쪽이 일제때도 일본식 건물의 잔흔이 남아있는 고을의 중심부였으며 이곳은 진산을 노산으로 잡고 이룬 고장이다.

 

또한 이 고장의 진산인 노산은 태기산에서부터 발원하여 백덕산을 휘어감고 과협과 박환의 힘찬 용오름이 회룡고조형 자태로 향동으로 뻗어내려 관자놀이의 시루목을 건너 맺은 노산의 명당아래로 노산은 곰의 배꼽형으로 중앙부위가 구릉으로 내려앉아 빗물을 머금고 스며들어 관아의 뒷편의 옹달샘과 중학교 뒷 골에 샘은 수량이 풍부하고 물맛 또한 깨끗하여 근자에까지 옹달샘으로 군민들이 즐겨사용하던 샘물이었다.

그러기에 이곳의 마을의 중심지 역활에 지리적 이유도 있지만 식수의 용이한 점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조시대는 유교적 가치관에 한 고장이 성립되자면 향교와 사직단은 필수사항인데 평창은 하평으로 내려가면서 향교와 하평의 서산을 굽는곳에 고을 호장인 군수가 직접 농사를 짓는 사직단 터까지가 확장적 의미의 평창고을인 것이다.

 

여기애서 국구사우의 사우터는 노산에서 흐르는 두개의 샘물중 중리쪽의 평창중학교로 흘러내리는 도랑의 중리쪽 윗편이라는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 사직단 터는 아직 평창사람들이 잘 알 수 없는 것으로 정원대님이 평창 지역분들의 증언등 사료에의해 채집 발굴한 곳으로 아마도 내년쯤 정원대님의 평창 향토사 책에 발간 예정이라는데 그곳에 실릴 예정인듯 합니다.

 

2] 노산의 풍수적 고찰

위에서 잠시 언급한대로 평창의 진산인 노산은 저 멀리 태기산을 조산으로하여 회룡고조형으로 향동골을 넘으며 중계소쯤은 남산 송학정 위치에서 보면 힘찬 과협과 박환의 용트림을 하며 관자놀이 시루목의 고개를 만들며 노산은 방형으로 힘차게 찍는듯한 자태로 내려 앉은 지형으로 산이 물을 갈라 평창강은 수태극으로 굽어돌며 천혜의 맑은 고장을 만들었다.

 

우선 여기서 시루목이란 어떤이는 시루떡 함지 형상이라는데 풍수에 시루봉이란 있어도 솥과 시루함지를 연결하는 그러한 둔탁한 형상이란 있슬까 하는 생각과 시루란 일제강점시대에 쓰루(鶴)이 파자로 변한것은 아닌지요??

 

다른 이해로 남산엔 송학정이 있는데 옛날엔 학이 소나무에 날아들었다 서산으로 가는,, 그러한 서정적 풍경에 사람들은 송학정이라 하는듯 하지만 지명 이름엔 풍수적 단어가 먼저인듯 한다면 송학정에 올라 진산인 노산의 왼쪽, 시루목쪽을 보면 학의 형상이라 그래서 이곳을 송학정이라 이름 지은것이라야 옳을듯 하다면 또한 시루목은 송학정에서 보면 향동서부터 과립과 박환의 힘찬 요동으로 학의 긴 목을 빼들고 넘어가는 형상으로 연유하는듯 하다면 마지막 길목의 시루목 고개는 쓰루(鶴)의 형상에서 마지막 관자놀이인듯 目이란 형상의 단어가 붙어서 된것은 아닌가 합니다.

원주에는 지명상 학다리가 있는데 시루목은 학이란 용어의 쓰루가 한글로 전환되기 이전에 시루로 발음상 변형된듯한 추론입니다.

 

시루목에서 노산으로 오르는 상수도 공무소 위의 첫번째 봉우리는 석회암 돌이 잘게 부서지며 있는데 그곳엔 왜인들이 철항을 박아 정기를 끊겠다는 논리이며 이제 노산을 그 옛날 왜인이 쓴 풍수서에서 조금 보았던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노산을 동물에 비교하여 타원으로 둥근 노산의 복판의 함몰 구릉지에 노산은 곰의 배꼽형이라 합니다.

 

정상부의 성황단에서 5~60m 내려오면 두 기의 쌍분묘가 있는데 이는 공화달 시절의 (고)이우현씨의 선친 묘소이며 아래로 구릉지는를 보며 이를 곰의 배꼽 형상이라 표현한 것이며 그리고 노산의 동북쪽 끝은 야산으로 흐트러지는데 이 부분을 개의 앞발이라 표현하였습니다.

지금도 이 일대는 공동묘지인데 조선시대에도 이곳이 공동묘지인듯하며 그래서 오면지도에 여제단은 중리쪽 마지막에 표기되고 있는 것이라 추정합니다.

 

그리고 노산 아래에서 관아로부터 약 4~500m 동쪽의 뼝창은 아니지만 가파른 산세아래의 포교당 터는 일제 풍수책에서는 누워서 적을 먹이는 돼지의 젖꼭지 형이라 하더군요. 이것은 아마 여러사람에게 도움과 구제를 베푸는 기능이라면 절터로도 명당인듯 합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포교당은 1950년대에 월정사 주지 이종옥 선사가 세웠으며 그분은 포교등의 활동단체를 조직하고 평창 제헌 국회의원도 역임 하였는데 포교당 이전에 이 자리는 전답이었는지 어떠한 시설이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어떤 곳인지는 아직 증언은 가능할 것이나 아마도 이곳이 여럿을 구제하는 기능의 형상이라면 마치 명당이란 스스로 여제단이 있지는 않았슬까 추론도 해 봅니다.


목조와 목조비 효공왕후의 묘가 금구몰니에 있는데 이것은 다음장에서 다시 거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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