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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국구사우

[평창의 임진왜란사에서 노산편] 국구사우 별지 2

[평창의 임진왜란사에서 노산편]- 국구사우 별지 2


高柱浩 2017.10.23 20:19


"국구사우 치폐전말" 세미나 레포트에서 박도식 교수는 평창임란사에 조금 언급이 있었으며 이 부분은 국구사우와는 관련이 없습니다만 그래도 후일 당시 권두문 군수는 성황신으로 모셔질 가능성이 있기에 고찰한다.


"국구사우 치폐전말"의 정장룡교수편에서 노산의 성황당 신을 목조의 장인인 평창이씨 중시조 이광의 6세손 천우위장사 이숙 공이 아닐까 하는 추정에 기실 이후로는 평창에는 큰 인물이 없었던듯 합니다만 임진왜란당시 평창군수(종 4품)의 권두문 군수는 비록 왜군의 중과부적으로 패하였지만 정선, 영월은 왜의 항복문서를 가지고 온 사신앞에 굴하였지만 권 군수는 그의 일기(호구록)에서 臣은 임금의 신하로 죽음을 불사하고 항전하겠다고 평창군민들과 함께 뜻을 같이하였으며 이에 모든 군 관민은 힘을 합하여 왜구에 항전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임금의 신하로 평창군은 항전하는 평창의 제1의 기상으로 지금도 남는데 혹 당시에도 이러한 뜻이 神으로 모셔질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서 평창군 임란사를 조금 언급하겠습니다.

모리 요시나리 (모리길성)은 4번대 일만 사천의 병력을 끌고 강원감사 자리를 배당받아 쳐들어 옵니다.

그는 부젠국의 다이묘로 자신의 병력 2천명에 큐수의 사스마 번의 시마즈 가문(일본 최남단의 가고시마)의 병력 만여명을 데리고 4번대 총대장으로 강원도를 정벌합니다.

왜구의 본대는 고니시 유키가와(소서행장)의 1번대에서부터 모두 서울의 관문인 조령(문경새재)을 넘어 서울쪽으로 진격하여 4번대는 서울 목전에서 강원도로 우회합니다.


박도식 교수의 말씀대로 왜구들은 강원도로 첫발을 디딘 김화공격시는 잔인했습니다. 춘천 조방장 원호는 김화로 달려가 방어를 하고자 하였지만 왜구들이 먼저들어와 매복에 당하였으며 원호의 머리를 베에 시내에 장대로 걸어놓는등 잔인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이 시마즈 부대는 춘천을 접수하고 간성으로 진출하여 그곳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양양, 강릉을 거치며 태백의 투타산성을 제압하고 백봉령을 넘어 항복한 정선을 접수하고 성암령을 넘어 평창으로 들어오며 일부는 미탄에서 먼저 영월로 간듯 합니다.


시마즈 부대는 요소 요소에 병력을 잔류시키는듯 평창으로 넘어올시에는 약 4천여명의 부대인듯하며 미탄 삼거리에서 영월로 일부가 간것은 아마도 영월군수도 항복한듯 하지만 평창으로 항복하라는 倭書를 가지고온 조선인 청년의 목을 베고 항전을 다짐하자 영월쪽보다 평창쪽에 더 많은 군대를 보낸것인듯 합니다.

 

(일만사천명의 4번대 부대에서 원주 강원감영을 입성하여 영원상성(치악산)을 공격하는 왜병은 대략 4천명 선이고 아군은 원주시장 김제갑옹과 그이 아들 이하 3천명이라는 기록에 기인한 숫자 입니다. 그리고 4번대 14,000여명이 원주 강원감영을 쳐들어가기 위해 주변을 모두 제거하며 쳐들어가는 라운딩전법을 쓰며 필요시 모든 방향에서 공격할 수 있는 전법을 구사한듯하다)


왜병은 멧둔제를 넘어 상리에서 종부쪽으로 들어가 약수에다 본대의 진을 치며 양수, 천동등지에 진영을 친다.

이미 군관민 100여명은 응암굴로 피신하고 텅빈 시내와 관아도 왜인이 접수하였지만 인척이 없자 이를 찾고자 온 동네 산을 뒤지는듯하며 가파른 응암굴 아래에도 왜구 두명이 두리번 거렸다.


여기서 부터 당시 평창군수 권두문의 원주감영 탈출후 일기체 형식의 날자별로 기술한 "호구록"(호랑이 굴에서 살아나온)에서 인용하여 서술합니다.

 

(평창 임란사에는 "응암록"과 '호구록"이 전하는데 응암록은 후일 기록된 것이고 "호구록'은 전쟁 당사자의 기록으로 날자별로 정확히 알 수 잇는 점이 있다)


평창은 倭書를 가지고 온 조선청년의 목을베고 권두문 군수이하 군, 관민은 모두 결전의 의지를 다집니다.

권두문 군수의 글에 의하면 임금의 신하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워야 함이 도리이기에 나아가 왜를 무찌르자는 항전의 의지를 표하였으며 왜구의 숫자가 중과부적이기에 우선 피하자며 동촌으로 가자하니 장수들은 남쪽 천연동굴 요새인 응암굴로 가자는등 의견이 분립되다가 권군수가 응암으로 가기를 결정하니 비로소 군수는 8km를 배로 이동하지만 관민들도 뒤따라 나선 것이다.


(아마도 이 일대 마지, 응암, 천동에는 지씨들의 집성촌이라 지사함 장군이 이쪽 출신인듯 하며 그래서 이쪽 지리에도 능통하였슬 것이다)

그래서, 노산에서 항전의 제를 올렸다는부분도 좀 석연치 못하지만 윗글의 우선 피하자는 원문으로 볼때 노산성에서 전투는 결코 없었습니다.


평창의 임란사는 평창군지등 여러 자료에서 종합적이고 전체적이지 못한 국지적 이야기들만 그려져 있는데 이 대부분에 수 많은 오류가 있습니다. 왜구는 대굴령(대관령)을 넘어 왔다는것과 또한 왕세자를 잡으로 함경도로 올라간 기요사마의 부대의 대장급인 모리길성이 강원도로 내려왔다는등,, 이것은 오류적인 말들 입니다.


이와 아울러 노산 전투에 장군이 죽었다. 노산성 어느 골엔 관민이 수도없이 죽어 피맛골이라 한다는 것은 호구일록의 기록에서 보면

왜구는 4일간 이동하여 왔으며 이후 이틀만에 은암굴에서 발각되었고 약수의 본대진영에 투옥되었다가 총 9일만에(본대가 나간 시간임) 영월로 빠지는 것으로 보아 정선, 평창, 영월은 원주 강원감영을 치러가는 길목에 항복만 받으면 주둔할 시간의 지체도 없이 그들의 관건은 강원강영이 눈 앞에 목표라 총 9일만에 평창을 빠져 나가고 있다.

 

그러기에 노산성 전투는 기록도 찾아볼 수 없고 또한 평창임란의 시간대 상황으로 보아도 노산성 전투는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읍내거주의 군민의 숫자가 그리 많았던 것도 아닙니다.

 

평창의 관병중 일부는 조정의 명에 의해 문경새재의 신립장군 부대에 파견되고 당시 호구록에서 권 군수는 군, 관민 100여명이 응암굴로 숨었다하면 이때에 시내엔 피난가지 않은 사람이 남았다면 목숨이 건재할 수도 없었지만 남겨두고 가면 피신처가 알려지기에 놔두지는 않았슬 듯 합니다. 그러면 당시 군민은 100여명 안팎의 숫자란 점으로 인식함이 옳을 듯하다.

 

 

임란 이전에 양사언은 평창군수로 부임하여 민가가 49호라 조정에 군이 아닌 현으로 (현감은 종 6품)을 두자고 건의한 바와도 별 다른 차이가 없는 인구 숫자인듯 합니다.


평창에는 임란후에 쓰여진 응암록이 있는데 호구록과 비슷한 내용을 가지지만 호구록은 전쟁 당사자의 눈으로 보는 정확성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종부에서 관노 나수천이 왜를 죽이고 조총 한정을 포획하였는데 호구록에서는 응암글에서 군졸들이 요즘으로 보면 대항군식같은,,

왜를 처치하자는 기상으로 일개 부대를 형성하여 천동강을 건너고 유동 강을건어 종부에서 강을 건너야 평창시내로 들어오는데 종부에서 왜병을만나 죽인 사건으로 호구록에는 기록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응암록은 그 정확성이 없어 큰 전승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어느 논문엔 100여명 사살하였다는데 민,관군 전부가 100여명이 왜구 1~2백병을 죽인다는,,,그것도 무기 자체가 뒤져있으며...그것은 말로도 성립이 않된다.

언젠가 행주산성에 대한 박사논문을 통쾌하게 읽었는데 적 3만에 관군 2,600명이 이기는 장면입니다. 도원수 권율이 지휘하는 관군이 아런숫자로 이기지만 평창은 1개 분대가 1개 중대를 모두 죽인다는것은,,이렇듯 평창의 임란사는 수 없는 가식이 붙어 있습니다.


저는 지금 책한권 없이 언제나 그랬듯이 순서도 없이 막연하게 쓰지만,,이 임란사의 왜곡은 아마 열장은 써야 할듯하지만 이만 합니다.

평창의 임란사는권 군수의 기록에 적병이 나흘간 들어왔고 포로로 잡혀 약수 임시 진영 감옥을거쳐 영월을 경유 원주로 이송되는데 평창은왜병이 9일간에 걸처 빠져나갑니다.


정선 관리도 인질로 끌려다니며 정선서 곡식이 않 올라온다고 보챔을 받는 장면도,,

뤈주 도영을 접수하러 갈길이 바쁜 왜병들은 영월은 그대로 접수한듯 김화에서처럼 악랄한 모습까진 비치지 않았으며 권 군수의 기록에 둘째아들 주도 같이 포로로 잡혔는데 왜병들은 글자를 아는자도 없고 주를 잘 대하여 포섭하려 했다는데 원주를 들어가며 선발부대가 약 열사람의 머리를 잘라 바위위에 올려 두었다 합니다


원래 모리부대의 남쪽 사스마번의 시마즈 부대가 악랄하여 정유재란때는 전라도로 진출하여 코와 귀를 베어간 자들로 시마즈 번주는 토쿠가와의 미움을받아 원정길에 참전도 못하며 그의 졸개들은 도쿠가와에게 충성을 보이자는 것인지 원래 잔인한 성격인지 알수는 없지만 고려 태조의 말을 빌리면 훈요 7조인가 차령 이남은 인재를 등용하지 말아하는. 이것이 일본 큐수는 일본판 전라도이고 미국의 오하이오도 같은 뜻을 가지는..


이상으로 볼때 평창의 임란사에선 국구사우 사당이 전화로 파괴됐다는 것도 의심이 갈 정도로 왜구들은 갈길만 재촉할뿐인듯 하였다.

임란전 양사언이 평창군수로 부임하여 보니 머리는 삼발에 얼굴은 그을린듯 하며 옷은 헤져서 옷안의 신체가 다 보일듯하여 이를 보는 양사언으로선 눈물이 흘럿다 하는데,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일시에 전환될 일이 아니라면 ...

물론 전후 사회는 더욱 붕괴되며 픽밥스러움에 마치 사회적, 문화적 공황인것처럼도 보이지만 이를 돌볼 겨를이 없었던 둣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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