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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국구사우

3] 목조와 목조비의 금구몰니(金龜沒泥)란 명당자리는..(국구사우 부록 3)

3] 목조와 목조비의 금구몰니(金龜沒泥)란 명당자리는....(국구사우 부록 3)

  사람들은 따분한 이아기는 미처 3분을 듣지를 않습니다만 명당이야기라면 아마 대부분 사람들의관심을 끌기에 적합할듯 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평창의 명당을 이야기 하곤 합니다.

물론, 명당이란 주관적 해석이고 미신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럼, 친구들보고 너는 조상님 묘를 저 뼝창(절벽)위에 모실 자신 있는가 하고 반문합니다. 그러면서 평창에는 대 명당이 두개 있는데 넌 어느쪽 갖을래 하면서 말을 이어 갑니다.

 

  평창엔 지관 한분이라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약 20년전 본인은 평창군 민원실을 나오는데 입구 가장자리에 FM같은 명당 모형도가 있길래 다시 들어가서 친구에게 평창군은 무슨 돈이 많아서 모형도 하나에 천만원씩 하는걸 장식용으로 하냐고 물었더니 그 모형도는 그게 아니라 입탄 넘어가는 고개에 대학교 부지의 지형 모형도라 한다.

  그러지 않아 재단 이사장님(광희재단 이시장님) 말씀에 그곳은 명당이라 남동향이니 우리같은 학교가 들어가지 정남향이면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말씀이었는데 그 명당에서 부도가 나다니,,, 현장에서보면 큰 골조만 공룡처럼 나딩굴고 지금도 어쩐다 저쩐다 하는데..

 

  저는 가끔 구글어스로 그곳을 확인해 보는데 향은 남동이 아니 동북향으로 쏠린 천하에 부럽지 않은 명당의 형세이다. 이러한 명당에 명당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수많은 명당들,,,그 터가 진정 대 명당이라면 명당의 힘으로 택할 일이지 사람의 욕심으로 뒷다마를 치는 발복을 한다면 그걸 어찌 명당이라 할 수 있는가??

(물론 금구몰니만 금시발복 명당만은 아니다. 발문이 늦어지는 형국과 빠른 형국의 지세차이로 보는등, 하지만 윗 내용은 일반적인 지관행세가 아닌 본인의 주관임을 밝힙니다)

 

  썩어빠질 지관들,,대 명당이란?? 명당자체의 힘으로 운기가 도래되는 것이지 간악한 사람들의 도둑질이나  욕심에 의한 발복을 들어줄일도 없것도 들어줄일 없겠거니와 그러기에 아쉬운 것은 대 명당은 시간이 도래되어야 한다는데,  무슨 욕심에 양택도 아닌 음택에 그런 크나큰 건물 골조를...지금이라도 다 철거하고 자연상태로 돌아가는게 속시원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남산에 200석띠기 부자가 될 명당의 혈은 발복이 된듯 하지만 지관들이 까막눈인지는 몰라도 금구몰니 형이 하나있다.

 

금구몰리라 함은 금시발복형으로 당대에 자신이 발복할 수도 있는데 발복이란 어떤현상인가는 다음으로 미루고 금구몰리란 최대 명당으로 200석 띠기라고는 표현하지 않는다. 최소한 그냥 500석 띠기 부자가 된다며 여기에 부가적 설명으로 금시발복은 일반적으로 자손 대대로 머리가 둔한 꼴통들만 태어나지만 벼슬길에 오르는 출세형 명당은 발복이 3대~5대 후손에게 발복현상이 나타난다.

 

  친구야 ~  너 어느쪽 가질래하면 모두들 당대에 금시발복할 여러 형세중에 최고인 금구몰리니 형 명당을 갖겠다 할 것이다.후손보다는 자기욕심인지라..부자가 되고나서 돈좀 생기면 중국 지관이라도 불러다가 출세형 명당을 찾아써서 후손에게 발복을 주겠다는 의미도 좋을듯 하지만,,,아마 그 후손도 자신 스스로 금시 발복하겠다고 또 다른 금구몰리형을 찾아 나설듯,,,욕심이 정상이겠지요.

 

 아니 그럼 지관은 욕심이 없나요, 천자가 날 명당이라하며 쌀 닷말에 명당자리 봐주는겟 보다 자기 아들이 없으면 조상묘 이장이라고 해야 욕심일텐데...글씨오,,, 지관을 이중 인격자라 하긴 좀 그렇고...어리숙하다기도 좀 그렇고,,,

표현이 좀 그렇지만 어느, 정치인이 출세하자 동네 뒷산이 명당바윌고 뒷덧만 치는,, 왜냐고요?? 그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을때 지관들은 꽥 소리도 못하고,,,어쩜 사이비 종교인들보다 더 산란한 말들을 하죠??

 

 이제, 여기서부터  태조 이성계 선조대를  이야기 합니다.

전주에서 아들 이안사가 전주 관기의 자살로 신성별감에게 몰리자 아버지 양무는 이사를 하게 되었다. 당시는 고려말이라 이의방등의 사병화 시대에 전주쪽의 기록에는 양무를 따라 삼척으로 이사간 무리는 7천여명이란 기록도 잇지만 이쪽의 기록으로는 270여호가 따라라 나섰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양무는 처가 삼척으로 이사와 사망하고 후일 이를 준경묘라고 알려지는데 그곳이 명당이라고 그곳이 명당이라 태조가 왕이 되었다고들 하지만. 그런데 준경묘에는 지관들이 한문좀 섞어가며 구사하는 명당론 스토리는 없기에 우리는 그저 명당이란 그런가 할 뿐입니다.

 

 

 

 평창의 국구사우에 대하여 가장 궁금한 것은 태조 이성계는 고조 할아버지 목조의 장인, 장모에게까지 사당을 짓고 일년 3명절에 영세토록 제를 지내라고 준엄한 명령을 하였슬까요?? 무엇때문에 목조의 국구에 대해서 이렇게 이조 400여년간 군수가 제를 드리는 보답을 하는가 하고 의심스럽다는 듯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안사의 장인 천우위장사 평창이씨 이숙공의 평창의 국구사우에 관해서는 이안사의 활약상의  일대기가 좀 필요한듯 합니다. 그것은 요즘 구글로 보아도 삼척의 좁은 골에 양무를 따라 이사한 식솔 270여호가 먹고 살만한 경작지도 모자랄듯,, 그래서 혹시나 이안사의 장인인 평창의 이숙공이 그 사병들의 일부를 평창으로 데려와 같이 농사를 지으며 식량도 구해 주는것은 아니었슬까 의문도 해 봅니다만,,

(삼척의 미로면 골짜기와 평창읍내의 개활지...주진뜰, 후평, 평창읍내,하평, 종부, 천동, 도돈등 사행천이 굽애돌며 만든 개활지로 당시로서는 넓은 버덩으로 모두 산이 접하기에 천수답도 유리한 지형으로 이는 영월, 정선, 단양등의 좁은 농토의 산간지와는 대조를 이루는 지형이다)_

 

 

 이안사는 강원도로 이주 2년만에 산성별감이 강원도로 부임하게 되자 그는 다시 배를 타고 함흥으로 야밤 도주를 합니다. 그는 함흥으로 이주하여 많은 私兵들과 함께 원나라의 쌍성총관부로 올라가 관리가 되었으며,이로서 휘하의 식솔들도 굶주림이 없게 되엇던 것입니다.

 

  이안사는 사후 두만강 건너 향각봉에 그와 부인 효공왕후의 묘가 있었다 한다.

 

이후 그의 묘는 경흥의 赤地坪이란곳에 사방이 늪지여서 사람이 들어가기 힘든곳에 중앙엔 33보의 圓峰이 솟아 올라있었는데 여기다 묘를 쓰면 제왕이 나온다는 대 명당이라 하여 이장하였다 한다.(안릉)

풍수지리술에 능동한 백충신이란 地師는 지나다 이곳을 보고 분명 자손가운데 왕조를 이룰 자가 나온다 하였다.

 

 

 이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후 태종 방원은 눈물을 머금고 이 명당을 다시 함흥으로 이장하여 현 함흥 주변에 목조와 목조비 효공왕후의 묘는 모셔져있다.(덕릉)

 

방원이 이 묘을 이장하게 된 동기는 여진족과의 경계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언제라고 급습하여 묘에 유해를 파헤쳐져 나쁜 행위를 가하여 왕조가 추락될지도 모를 걱정에 이장하게 된 것이다. (엄기종님의 까페 부분 인용)

 

 

 

 이러한 예의 하나로 명종당시 이괄의 난에 명종은 수원성까지 피신가고 이괄이 경복궁을 보름간 보름간 장악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양평에 있는 이괄의 부친 묘에 불찜을 하게되는 사연과 또 하나 웃지못할 일도 벌어지는데, 그것은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하자 오베르트는 통상ㅇ을 위해 프랑스 함대에 한국인 신부들을 태우고 해미 앞바다에 도착하여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묘가 있는 수덕사 뒷산넘에 가야사 자리에 가서 남연군의 묘를 판다.

 

 이는 남연군의 유해를 볼모로 잡고 대원군에게 개방정책의 압력을 가하려던 행위였으나 이 묘는 이장당시 회를 200여포나 섞어 넣었다기에 땅이 파지지 않게되자 드릴로 구멍을 뚫고 불찜인지 똥물을 부었다 하는데, 좀 과장된 것이고  옛날 "터'라는 책에서 이 이야기가 시중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책은 오류가 10군데 이상의 어는 지관 마음데로 쓴 책이다.

 

  그 책에서는 정만인이란 동네 농부가 대원군에게 이곳이 2대의 천자가 나올 명당이라고 설명하는데 어찌 농부가 천자가 나올 대 명당론을 갈파할 수 있었슬까??  아마도 가야사란 절에 주석하였던 어떤 스님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함이었슬지도...

 

오베르토 일행은 밀물, 썰물의 간조시간까지 남연군묘에 시신을 꺼낼 작업을 마쳐야 할텐데..당시 아산 관헌에 신고가 들어가고 아산 관헌까지는 걸어서 4시간 걸리니 관리들의 출두시간까지는 여덟시간쯤이라면 간조시간보다 이 시간내에 오베르토는 작업을 마쳐야 할텐데. 대원군은 이 묘에 회를 200여포 다져서 곡괭이질이 않된다. 이것이 지관의 지략으로 남연군묘 시신을 파기에는 이렇게 실패하였는데 사람들은 드릴로 뚫었느니. 똥물을 부었는니 하는데 드릴이라면 수동기어드릴로 1m가 넘는 길이 날이있어야 하며 똥물이건 불찜은 구멍을 뚫은 다음에 문제이지만 이렇게 깊은 곳에 불찜은 온도차이러 실패하리라.

 

 

 

 그러나,  오베르트는 통상을 하기위해 남연군 유해를 담보로 쇄국을 풀고 무역을 하기위한 촉매의 역활을 의도한 것이지 똥물을 붙고 불찜을 해서 풍수적 발상의 이러한 과보상 행위로 왕조를 추락시키겠다는 의도는 아닌 것이다. 옛날 어느 지관의 책엔 주관적 오류의 해석이 열곳도 넘는데 이 책이 유행되더니 이 부분도 사람들은 정확히 의식하지 못하는듯,, 컴에는 오류들이 난무하는 진흙탕 속 같다.

 

 

 

 이렇게 금시발복, 명당의 반대의 예를 보았는데, 이와 비슷한 우를 겪을까봐 방원은 눈물을 머금고 적지평이라는 금구몰리의 명당자리의 묘를 파내어 다시 이장하게 되었다.

 

러한 이야기는 아마도 본 국구사우가 문화재로 등재되면 관광의 주안점에 두가지의 홍보성 설명이 필요한듯 합니다.

 

 

 

 그 하나는 우선 국구사우의 제례의 재현에 평창이씨 종약원에서 사손이 제를 들여야 하는데 이는 과거엔 정 1품이 지내는 방식이었다 함에 그것은 국조오례의에 왕족의 예의 방식이므로 세인들에겐 왕족의 제례란 점을 홍보하는게 인상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이 사우의 건축엔 삼척의 준경묘 사당도 참조하는게 좋으리란 생각이지만 삼척에선 준경묘를 PR하여야 하겠지만 평창의 국구사우는 추존 목조와 목조비 효공왕후의 장인 천우위 이숙공과 부인 돌산 정씨의 사당이기에 진짜 명당은 준경묘가 아닌 목조와 목조비의 묘의내력을 알리어야 하는것도 과제는 아닐까 합니다.

 

  위에 설명대로 이러한 이야기가 세인들의 관심중 재미있는 부분의 하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지난"국구사우 치폐전말" 세미나 리포트에 박도식 교수는 치폐전말의 단어처럼 모든것을 망라하고 있는데 정작 치폐전말의 가장 상직적이고 처음부분이 잘 나타나지 않아 이 부분을 지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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