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백작 2017.10.22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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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김병연과 아들 김익균의 묘(추정) 답사기/정원대. 2017.10.14. 21:20
평창읍 천동리에서 영월 공기리로 넘어가는 도마치 양지바른 이름 없는 야산(산방산 끝자락)에 김삿갓 의 김병연의 묘(추정분)와 아들 김익균의 묘를 답사하면서 주변을 정리하여 봅니다
1. 천동리에 대대로 거주하는 지*한(66) 의하면 부모님 살아 생전 김익균의 묘 벌초를 5년 동안 하였다고 하며
2, 천동리 향토사학자 이*영(75)증언에 의하면 본인도 공직생활을 마치고 벌초를 계속하다가 고령인 관계로 벌초를 하지 않았다고 함
가, 김익균의 생애
김익균은 천동리(정동) 샘터(현 천동리 낚시터) 옆 양지바른 곳에서 살면서 서당을 하였다고 하며, 주민들과 술을 즐겨마셨는데 지*한 증조부님과 같이 마지에서 음주 만취하여 현 은고개(오면지도에는 鞍峙) 넘어 천동리 평창강 섶다리 건너 귀가 하다가 실족하여 사망하였다고 함
평상시 김익균은 내가 죽으면 아버지 산소 밑에 묻혀 지기를 바란다고 하여 동리 주민들이 김병연 산소 밑에 김익균의 묘를 안장 하였다고 함
나. 증언
지*한 증언과 향토사학자 이* 영 증언 일치하고 있으며 벌초를 하였다고 하는 부분은 현장 답사결과 김익균의 묘는 벌초 흔적이 있으나 3m 위에 있는 김병연 묘(추정)에는 주변 소나무등을 보면 불명확한 점이 노출되어 있음
다. 주변 상황
작은 실개천이 있고 영월 공기리 너머가는 옛길(도마치)이 있으며 이름없는 야산 6부 능선에 있는데 묘 앞 안산은 文筆峰이 솟아 있음 (옛날에는 주변이 화전밭이었다고 함)
# 참고사항
김병연의 연고(후손)가 있는 분이 영월 김삿갓 행사를 마치고 방문하기도 하고 미국에 살고 있는 후손들이 산소에 禮을 올리고 갔다고 함
# 후세백작님의 발표한 자료와 지역 주민의 증언등을 참고하였으며 후세백작님의 명징한 재답사등 조사가 절실하며 차량 지원과 함께 동행한 **기관 과장님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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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백작 00:36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여기서 앞으로 지*한씨의 몇가지 고증에서... 김익균이 42~3세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그 시기는??
그러면 김삿갓의 출생년도에 결혼한 나이와 1차 외유후 둘째인 익균의 출생년도가 계산을 하면 김삿갓의 사망연도에서...그러면 화순에서 김삿갓의 유해를 찾아와 천동리에 묘를 쓴 년도가 나올 수 도 있고, 여기에 익균이 영월에서 평창 천동으로 온 시점을 알 수 있다면,,,이 시기의 구분에 의해 김삿갓의 묘가 앞으로 주장할 평창의 천동리 도마치 입구가 맞는지 영월 와석리가 맞는지 관건 사항입니다.
어렴풋하게나마 이런 시간을 계산도 해 보아야 할진데, 일반적으로 볼 때 익균이 천동리로 이사하고 이후에 화순에서 김삿갓의 유해를 모셔왔슬 것이란 점으로 추정합니다.
◆ 김삿갓에 대한 일전 본인의 글에서 의문사항을 간추려 보면..
http://blog.daum.net/kkks1/1289 영월은 김삿갓을 어찌하고 있는가??(김삿갓은 죽어서 천동리를 다녀간듯,,)
* 영월 동헌에서 백일장을 치렀다는 기록은 어디에 있는지??
* 또한 백일장에서 김병연이 장원급제한 기록도 어디에 있는지?
* 김병연은 대역죄인 후손으로 과거급제의 길이 막혔을텐데.. 대 역죄인의 후손들은 호패를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인지?? (당시 과거급제가 되면 외조부 호패까지도 확인을 한다)
만약 이러한 확인이 없다면 형제들이나 친구들 대리시험으로 과거급제자들이 무척 많이 발생할 것이다.
김병연이 25세에 과거 준비차 한양에 올라와 과거를 좌절하는 이유는 바로 방랑의 점이 아니겠는가??
당 시대의 신석우의 "해장집"에서는 김병연이 나이 20대에 공부를 하려고 서울로 올라갔었다는 기록도 있다 한다.
(* 신석우는 순조대의 인물로 영월신씨로 당시에는 강릉 도호부 봉평(현 평창군)에 거쳐 하였르며 子 신범선생은 유학에 화서학파 이항로의 문인으로 "봉서유고"에서 전한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대역죄인 가문이라 3족이 절문이 되어야 함에 안동김씨의 세도시 세도가문이라 그나마 폐족으로 김익순의 자손들은 목숨은 부지하였지만, 세도가문에 폐족으로 양반들의 사대부 사이에 소문이 오르내리면. 당시사회는 양반들이 법이고. 양반들이 린치가 가혹하여 가평에서 평창 율치로 해서 인적이 끊긴 실오라기같은 영월 와석리로 다시 이사하여 산간 사이에 살았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전 글에서 구한말의 양반들은 종과 노비들의 눈알을 잡아 뽑는 린치가 빈번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김삿갓혹 불안한 마음에 그는 방랑을 하며, 마음 한구석을 달래는듯 구한말의 기울어져가는 양반제도에 반항이라도 하듯 양반들을 질타히는 詩들을 그리고 있다.
평민들이나 하층에서 볼때 통쾌한 재미에 방랑시인 김삿갓은 더욱 알려지는 것이다.
*김삿갓의 첫번째 부인은 결혼 8년만에 이곳 와석리에서 사망하였건만 그의 묘는 어디에 있는지??
1982년 여름 강원신문에 게제된 기사중에 어느 학계에 박영국 당시 영월문화원장이 김삿갓 묘소에 대하여 여러 번 건의하고 질의한 바 현 영월의 김삿갓묘 소는 학계가 맞다고 인정해 준 것이지, 김삿갓 후손들은 가타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
어떤 학회인지,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지만 학계가 인정했다는 사실은 1982년도 8월쯤 강원일보 기사에 의한것 임.(여기엔 평창출신 역사 소설가 황원갑님은 당시 박영국 옹과 영월군청 짚차로 이곳을 방문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어느 학계인지 이런 부분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또한, 김삿갓 묘에는 이러한 일화 한 쪽의 사실이라도 기록하고 있는 역사적 증명 사료는 없다.
*익균은 와석리 집으로 가는 노루목에 아버지 김삿갓의 묘를 쓸 정도로 아둔했슬까??
당시 사회는 양반계층의 부조리, 횡포가 만연된 사회에 안동 김씨가 폐족이라면 점잖은 양반계층의 사대부들도 가만히 있지않고 린치를 가할 것이란 점에서 이런 깊은 골에 숨어 살면서 그 입구 삼거리 노루목에 우리집 여기요 하고 아버지 김삿갓의 묘를 쓴다면,,그곳이 명당도 아닌데,,,청개구리 아닐까?? 지나가는 소도 웃겠다. 익균은 그렇게 무식했슬까??
익균은 천동리에 기거하면서 서당의 훈장도 하였는데...
이러한 의문사항 때문에 본인으로서는 김삿갓 유적지를 다녀가고 싶지 않다. 그것은 왜냐하면 김삿갓 유적지를 놀러 간다는 것은 속는 기분에 본인은 그래 무식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본인은 언젠가 말한대로 평창 주변에 영월 김삿갓 유적과 정선 아리랑, 봉평의 메밀꽃 놀이 이 3곳에 모두 속는 기분이 들어 이곳들에는 어디든 앞으로도 가지 않을 것이다. 본인은 속이는데로 속는 그렇게 바보는 아니올시다.
*영월은 본인의 이러한 의문사항을 포괄적으로 답을 주어야 발전적인 문화로 미래가 보장될 것이다.
다음으로 평창으로 이사한 익균의 천동리 집은 응고개를 내려와 휘어지는 여울을 건너 땅콩밭을 지나가면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데..약 50여m엔 친구 지씨네 집이 있다고 증언하는데..
김삿갓의 둘째 아들 익균은 앞이 산이고 뒤로 돌아보아도 숨이 막힐듯 지척에 산이 가로막는 와석리의 고립된 생활에서.. 정말 밭 한 뙈기도 못 붙일 공간속에서 이제 세월은 조금 지나자 조부의 참변의 홍경래 난은 조금 잊혀지는 듯하여 조금 한숨을 쉬며 양반들도 없는 조그만 천동리란 마을로 이사를 하게되고 그는 화전민들이나 민초들 사이에서 한문도 알고 학식이 있어 동네 훈장도 하게되며 조금의 노잣돈도 마련할 수 있어 아버지를 찾아 대구, 진주등지로 서너 번 찾아 나서게 될 수 있었던 것이지 와석리에서는 농토도 없이, 재원마련도 어려웠슬듯 싶다.
물론 익균의 평창 천동리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그렇게 보면 익균이 35세 이전에 이곳으로와 최소한 5년정도는 살았다면 고개너머 진도리에 대포 한잔 할 친구까지 있었는 듯 하기에 어쩌면 익균의 더 젊은 시절에 평창으로 이주하게 된 것일듯 하다..
위 증언기록에서 익균은 천동리 동네 친구들에게 내가 죽으면 아바지 (김삿갓)묘 아래에 묘를 쓸것이라한 점은 아마도 우리의 이해로 볼때에 그는 아버지(김삿갓)를 찾으로 경상도등지로 소문을 듣고 먼 곳등을 찾아 헤메였고 두세 번은 아버지를 만났지만, 그때마다 데리고 오지 못했으며, 이제 시신이라도 찾아 동네 뒷산에 묘를 쓰니 마음이 가벼워진 듯 친구들과 대포 한잔하면서 말하길.. 이제 나는 할 도리를 다 하였으니 내가 죽으면 아버지 밑에 묘를 쓸 것이라고 진담어린 농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슬까??
그래서 갑작스레 지병도 아닌 익사와 동사를 하게되자 어린 자식들대신 동네 친구들은 그를 정말 아버지 묘 아래에 친구의 묘를 쓴 것이라 생각한다. 동네 친구들과 참으로 오랜 벗이였기에 그의 묘를 쓰고 이후 친구들의 문중에서 벌초를 하고 증 손주들인 위 본문의 지*한님과 향토사학자 이* 영님에게도 벌초를 당부하였고 그분들은 지금까지도 150여년된 묘를 벌초하고 있었다.
여기서 보면 유언 중에 친구를 위해 자식에게 벌초를 해 줄것을 부탁하는 참 별난 유언이지만 이러한 친구의 우정의 아름다움은 어느 고사에도 없고 다시금도 없슬듯 하다. 분명 이 점도 빛나야하는 아룸다움인 것이다. 아마 10년지기 친구라야 이러한 우정이 가능하다면 익균은 서른 이전에 영월 와석리에서 이곳 천동리로 이사 하였슬듯 하고 익균은 부친의 시신을 찾아서 이곳 천동리로 모시고도 남을 시간일듯하다.
그런데 그는 여기 살며 약 7~8십리 떨어진 와석리의 산간의 빈집앞에 아버지의 묘를 썼다면 그리고 매년 벌초를 다닐까 하는점에 논리상 이해가 어렵기만 하다.
* 김삿갓의 첫째아들 학균은 형 병호에게 양자를 보냈지만 형이 일찍 사망하게 되고 또한 학균도 사망하여 둘째인 익균이 김삿갓 김병연 집안의 가업을 잇게된다.이렇게 익균의 천동리 생활은 조금 경제적 여유속에 자유로운 생활이었던듯 하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엔 친구들과 진도리에서 술이 만취되어 응고개를 내려와 집으로 오는도중 얼어붙은 섶다리에서 미끌어져 물에 떨어져 친구들은 술이 취해 건져 올리지 못하자 동네에 장정을 부르러 갔었다 한다. 이후 다시와 보니 얼어서 사망하였다 한다. 나는 죽으면 아버지(김삿갓) 묘 아래 묘를 쓰겠다는 농담말에 정말 그의 친구 지헌조 옹(사망)의 부친들은 익균을 익균의 묘를 쓴 곳이 정말 김삿갓 묘(추정분) 3m 아래에 썼다 한다. 익히 알고 그곳에 썼을듯 하며 우리말에 농담이 진담이 되었다는 이야기처럼 된 듯 합니다 (지*한씨의 증언에 정원대님의 채록)
당시 익균은 젋은 나이에 42세 전후일듯 하며 두 아들 택진(20세)와 작은 아들 영진이가 있었는데 택진은 영진이 서당 공부를 위해 나무도 해다 팔았다 하는데, 당시엔 천동 앞이나 하평의 미륵땅에 신작로란 길이 있기 전이라 나무를 해서 지게에 지고 읍내까지 오기란 강을 두서너 번 강을 건너야 했기에 아마도 동리에 허드레 일이라도 닥치는데로 하여 영진의 뒷바라지를 하였을 것이다.
16세에 영진은 불문에 입적하여 건봉사(강원도 고성)에서 4년간 공부끝에 서울 인근의 절로 옮겨와 수도중에 궁월의 어느 나인이 (그 절의 신도로) 준수하고 영민한 젊은 스님이 김삿갓의 손주라고 고종 임금님에게 이야기 하였다.당시의 고종은 아리랑을 즐겨하였으며 또한 이야기를 즐겨듣는 편인데 김삿갓의 일화들을 재미있게 들었던 바 김삿갓의 손주를 데려오라 하였다.그리고, 고종은 영진이를 보자 그 자리에서 불가 입적호적을 파내어 주며 또한 증조 할아버지로 인한 대역죄인의 폐족을 삭제하여 사면을 시켜 주었으며 궁내 관리로 임용한다.처음엔 궁내부 주사로 있었으며 고종이 시종을 거쳐 홍천군수와 경흥부사까지 오른다.
이후 일제 강점기라 고향 양주에서 사업에 양주장과 목재, 산림사업에 전념하여 그의 아들 경한이는 부자가 되어 춘궁기엔 동네에 곡식도 희사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한다.경한이는 죽고 그의 아들 김삿갓의 증손이 양평에 거주하며 2년전엔 아마도 4세손까지 집안 식구들이 도미에서 천동리를 찾아와 큰 절을 올렸다 한다(증언의 채록에 의함)이제, 문제는 영월의 김삿갓 묘역 유적에 김삿갓 유골이 없다면, 김싯갓은 살아 생전에만 방랑한 것이 아니라 무슨 변고에 죽어서도 근 100여년 그의 유골은 사회로 부터 멀리 운둔하여 아직도 방랑을 하고 있는 것일까??
김삿갓은 죽어서도 방랑이 전말의 운명이었던듯 자신은 비록 슬프지만 한줄의 詩를 넘어서서 일상의 쓰림도, 당 시대에 몰락하는 양반들의 횡포와 부조리에 대항해서 풍유와 해학의 詩로 민초들의 마음속 구멍을 뚫어주던 詩仙으로 다시금 우리 곁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그의 후손들은 도미하여 묘소 참배도 어려운 실정에 내왕자도 없이 발길도 끊기어 죽어서도 외로움속에 있는 그의 묘소를 이제라도 알았다면 우리의 답답한 속을 긁어주는 詩仙으로 다시금 다가올 수 있도록 발걸음도 총총히 그곳으로 돌려봐야 하겠다
너브산장 03:18
#이*한 증언은 김익균 거주하던 집은 천동리와 마지리 연결하는 응고개 섶다리 건너면서 강변 모래밭 있는 주변이라고 하며 #이*해 증언은 샘(현 천동리 저수지)옆 옛 서당 자리라고 합니다.
나머지 질문은 다시 만나서 정확하게 문의한후 답 하도록 하겠습니다.그리고 추운 겨울 날 섶다리에서 실족(음주 만취)하여 사망하였다고 합니다(서당은 천동리와 마지리 두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
(이 모든 증언은 아디 너브산장의 정원대님이 채록한 것입니다)
* 또한 다음 언제인가 이 글에 준하여 천동이의 감삿갓과 그의 아들 김익균의 묘에 기록을 샅샅히 뒤져 연구하여 다시 게제할 것입니다.익균이 죽고 약100년이 넘게 벌초도 않하여 방치 되었슬듯한 묘는 묘가 아닌 것처럼 초라하게 보일듯 합니다.
http://blog.daum.net/kkks1/1509천동리 도마치골에 김삿갓묘(추정분)와 아들 익균의 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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