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의 왕방연 시비(詩碑)
후세백작 2017.06.23 14:20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
* 임을 두고 가려니 마음은 어수선하다.
냇가에 앉자 흘러가는 냇물을 보며 잠시 쉬려고 하니 임을 두고 가야만 하는 죄책감 등으로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냇가에 앉자 흘러가는 냇물 소리가 마치 사람이 우는 소리처럼 들려 마음은 더욱 심란해 진다
저 물도 내 안같다. 울어 밤길 녜놋다’라고 하였다.
예놋다는 흘러 가는구나의 표현으로 냇물의 영원한 흐름 속에 씻을 수 없는 죄책을 흘려보내고 싶은 슬픔을 말하고 있다
* 이 시조는 단종 유배 160여년 후인 1617년 병조참의 김지남이 영월 순시중 아이들이 이를 노랫가락으로 부르는 것을 듣고 이를 한시로 적어 전하게 되는 것이다.
『청구영언(靑丘永言)』,『해동가요(海東歌謠)』,『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등에 실려 있으며, 시조집마다 표기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한다.
<청구영언>에 의하면 왕방연은 세종 때 사람이고, 금오랑(金吾郞)으로 노산군(魯山君, 단종)을 영월까지 압송하고 돌아오면서 냇가에서 방황하다가 느낀 바 있어 시조 1수를 지었다. 이 노래에서 그 사람이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 금부도사는 종 5~6품으로 현감급 정도로 의금부 서열이 악 5~6번 정도이다
향토사학자 박영국 옹은 이렇게 왕방연은 단종을 유배지인 청령포로 압송해온 금부도사가 아니라 세조의 명을 받고 단종에게 사약을 가져온 금부도사로 바로 잡았다 한다.
바로잡은 내용의 원문은 찾아 볼 수 없어 어떠한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세조 3년 정축년(1457년)에 일어난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에 노한 세조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10월 24일 관풍헌에 당도하였으나 차마 사약을 강제로 마시게 할 수는 없었다. 그때 공명성에 눈이 먼 종놈이 뒤에서 활 시위로 잔인하게 목을 졸라 사망케 하였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 부분은 세가지 유형의 설은 있으나 공통사항은 사약은 마시지 않았으며 실록의 기록에서는 스스로 올가미에 목을 졸라 죽었다 한다.
*1457년 여름 8월에 장마가 지고 홍수가 나서 청령포에 물이 넘치자 단종을 영월시내 관풍헌으로 옮겨 모셨기에 관풍헌으로 가져왔다는 설이다.
여기서 필자인 본인은 이 시조가 박영국 옹이 밝힌 사약설의 역사적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유배 3년후에 금부도사가 세조의 어명으로 사약을 가지고 와서 집행하는 행동과는 시조의 인상은 감이 멀다는 느낌으로 거리가 먼 얼밸런스적인 시조라 생각한다.
왕방연이 호송때 책임자로 청령포를 건너 돌아가는 길에 고운 님을 여의옵고 인간적인 고뇌의 표현이라면 곡진하게 표현한 시조가 누구나 공감을 줄 수 있는 정말로 합당한 이야깃 거리이며 또한 청령포 임금이 계신 곳이 강 건너 바로 보이는 방절리 언덕의 풍상에 얽어진 작은 소나무 몇 그루와 어울리는 시비는 어울리는 시조라 생각한다.
그러나, 금부도사 왕방연이 임금의 명으로 사약을 가져고 내려와 집행하고 올라갔다면 시신은 강물에서 떠 올랏다 하는데 아뭏튼 시신의 뒷정리도 없이 팽개치고 올라가는 사람이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라고 고운님을 여의옵고라고 시를 쓸 수 있습니까??
이러한 게임 즉, 사약을 가지고 내려왔다는 설은 필자로서는 이해하기 곤혹스럽다.
물론, 이 시조는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영월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김지남이 시조로 역어 만들었다 하지만 그 내용이 단종을 유배지 청령포까지 호송후 인간적인 고뇌를 표현한 것인가 아니면 사약을 가지고 내려온 금부도사의 안타까운 마음을 그려낸 것인가 문제에 금부도사 왕방연은 이 시조와는 상관없이 어느 쪽을 다녀갔슬지는 모르지만 이 시조는 후일 영월에서 불리어졌다면 사약을 가져올때 왕방연은 아니란 생각이다.
그런 이유는 왕방연이 어명으로 사약을 가지고 내려왔다면, 단종은 사약을 거부하고 다른 방법으로 죽였다하지만 단종의 사체를 강물에 유기(내다 버림) 하였으먀 3일뒤 청령포 물위로 떠오른 시신을 영월 호장 엄홍도가 건져서 야밤에 지금의 장릉자리에 묻었다 한다.
여기에서 어명으로 사약을 가지고 와서 사약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집행하였고, 시신을 강물에 버리는 행위는 물론 어명에는 없는 행위일 것이다. 어명에 이러한 단서나 후족 조치사항은 없었슬 것이다. 사약 집행자의 임무는 어느 범위까지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를 집행하면 명령은 끝난다.
일반적으로 사약을 내린후엔 사망만 확인하면 현장은 그대로 두고 어명의 종료가 되는 지 어쩐지는 알 수 없지만,,,어명에 단종을 물에 던져버리라는 명령은 있었던가??
그러면 강물에 버리든 묘는 아니더라도 흙에 묻던 명령외의 사항으로 만약 묘를 만들어 주었다면 문책을 받을 것이란 상식적인 느낌이지만 강물에 던져버리는 행위도 강물어 버리는 것도 규정밖의 비 인도적 행위이다.
강물에 버릴려면 차라리 인간적 모습으로 흙으로라도 덮고 갔다면 세조가 이를 탓하였겠는가?? 그러기에 그의 인품을 이해할 수 있겠으며. 활의 시위로 당기던 사약 이외의 방법을 택했고 강물에 버린 점은 그 잔인하고 난폭성이 모두 금부도사의 책임일것이다.
물에다 시신을 던져버린것은 참으로 성의없는 행동이다.
물론 졸개들이 한 행동이라도 금부도사는 명령권자로서 전적으로 모든 책임을 져야한다.
따라서 후일 영월인들이니 제 3자가 지어 부르던 가사를 다시 김지남이 각색하여 시조로 하여도 왕방연이 사약을 집행한 왕방연의 인품도 아닌 못난 성품에 어울리지 못하기에 이것이 미화된다면 우리네 정서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위 시조는 왕방연이 유배 호송후 돌아가는 길에 강 건너 청령포들 돌아보며 애석함을 그리는 시조라야 알맞은 표현이다.
그러기에 이 시조도 사약때의 시조라면 감도가 떨어지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슬 것이라 생각하기에 본인은 왕방연은 사약을 가지고 온 자가 아니라 단종을 귀양지 청령포로 호송하였던 인물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박영국 옹이 밝힌 역사내용과는 다른 생각이다.
사약은 관풍헌 자규류에서 행하여진 일이기에 관풍헌에서 사약을 내리고는 영월 삼거리로 빠져서 한양으로 오르는길에는 강이 없다. 이 비문의 위치는 청령포 입구에 있으며, 마치 청령포에서 사약을 내리고 강을 건너 쉬며 읊은것 같은 혼돈의 여지를 가지게 하는 것이고, 유배지 청령포로 압송후 돌아가는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라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으로 유배시의 이야기를 읊은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또한 박영국 옹은 향토사학을 한 것이 아니라 김삿갓 문화에서도 평창에도 유적이 있다하여 다녀갔다. 당시 평창군청 산업과장님은 박 옹에게 관용 찦차를 빌려주어 천동리를 다녀간듯 하다.
평창에 김삿갓에 대한 유적은 단 한 곳뿐, 천동리에 김삿갓의 아들 익균이 살았으며, 대부분의 천동리 사람 들의 증언에는 익균의 집터위치나 서당에서 훈장을 하였기에 천동리 서당터, 도돈리 서당터 그리고 길도없는 야산에 익균의 묘를 답사하였슬 것이다. 그럼 익균의 묘 5m 위에 동일한 모양의 묘가 또 하나있는데, 익균의 묘에서 그대로 잘 보이는바 현장을 가서 보았다면, 못봤다는 이야기는 논리부족일 것이다.
즉, 왕반연 시비의 문제 재기는 학술적 면은 고려되지 못한 영월 향수자로 보이는 바 왕방연 시비에서도 논리 부족의 상태를 가지는 듯하다.
<1994년 영월 청령포 건너 방절리 언덕에 세운 왕방연 시조비 앞과 뒤의 전경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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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엎고 장릉으로 가게 된 사연은??
엄홍도는 영월 엄씨로 호장(이장쯤)으로 단종의 시신을 염습하여 동을지산에 암장하고 후환이 두려워 그길로 함경도로 잠적하였다 한다, 청령포라는 지명은 1763년(영조 39년)에 세워진 단종유지비에 영조가 직접 ‘단묘재본부시유지’라고 써서 내렸고 이때에 단종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어느 문서를 보고 엄홍도가 암장한 장릉을 찾게 되었다 한다.
청령포에서 사약을 내리는 설과 그 해에 홍수로 노산군(단종)의 처소를 청령포에서 시내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겨서 이곳에서 사약을 내려지고 시신은 처리가 않되고 그대로 방치되자 후일 엄홍도가 몰래 시신을 염습하여 장릉에 암장하였다는 설의 두가지가 있으며 이 두개 모두 사약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관풍헌 설은 좀 미약한듯 한데..10월 말에도 홍수의 피해로 청령포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긴 겨울동안 이곳 관풍헌에 외부로 부터 침입하여 들어올 수 있는 세력에 대한 경비가 힘들어 진다는 점과 또한 관풍헌에서 사약이 아니기에 피살되어 그대로 방치되었다면 여섯명의 궁녀들과 주변인들이 겁 먹고 그대로 달아났다는 이야기로 좀 미약한 설이 되며, 좀 더 이해력있는 이야기는 기록에 의한 청령포에서 사약설은 3일후 청령포에 떠 있는 시신을 엄홍도가 건져 수숩하여 야밤에 시내를 가로질러 동월지산에 암장하였다는 설이다.
영월이 호장(이장쯤 호칭단위) 엄홍도는 3일뒤 물에 떠오르른 노산군(단종)의 시신을 염습하여 메고 방절리 양옆이 야산인데도 2~3km쯤 떨어진 영월읍내 초입의 동월지산에 올라서 지금의 장릉자리에 암장하였다.
장릉에서 산줄기는 조금만 더 올라가면 본 산줄기와 만나는데 그는 어디쯤 올라도 본 줄기로 오르지 왜 굽어 돌아가는 쪽으로 올랐슬까? 영월 엄씨의 종친산인데 산 지리, 지형을 모르고 마냥 오른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럴려면 본 줄기로 오르던가?? 아니면 청령포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야산도 많은데 목적지도 없이 왜 장릉까지 힘들게 왔슬까?
동월지산은 영월엄씨 종친의 선산으로 엄홍도는 아마도 이곳 산길에 밝았지 전혀 모르고 오른것은 아닐것이다.바로 그 자리를 택하고 오른것 이라고 보아야 타당성을 가지는 것이다.
또한, 동월지산의 장릉쪽 자락을 오르다 눈속에 풀이 보이길래 그곳에 잠쉬 쉬며 보니 노루가 머물다간 자리라 그곳에 묘를 썼다고 전래된다. 하지만 사약을 가지고 내려온 날자는 10월 24일이고 3일뒤면 27일인데 그곳에 눈이 녹았다니..
영서지방의 기후로 보아 그렇게 눈이 녹는것은 1월도 아닌 2월쯤이라냐.. 사람들을 속이고 본인도 여기에 기억력 테스트를 당한 기분이다.
역사를 아름답게 가꾸고 재미있게 쓰려는 미화는 가능한 일이나 어디까지나 역사를 왜곡해서는 않된다. 왜곡한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 픽션(허구)가 되기 때문에 그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게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엄흥도에게 물어볼 수 있다면, 엄홍도는 지금의 장릉 바로 그 자리에 묘를 쓰려고 했다고 한다면 이후 역사서들은 자기 마음대로의 오만의 넌픽션이 되는 것이다. 넌 픽션이란 역사서가 아니라 오락물인 것이다.후대인들은 마냥 자기 관점에서 생각밖엔 못한다. 이러한 문제에 역사는 이러한 관점이 아니라 엄홍도의 역사이기에 엄홍도의 관점에서 풀어 나가야 정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영월인들은 후덕한 마음씨라 엄흥도의 비석이 집보다 더 높다. 약 10톤의 돌을 깍아 글을 써 만든 비석과 또한 김삿갓 생가와 묘를 발굴하였다는 영월의 향토사학자 (고) 박영국 옹의 비석은 이보다 더 크고 김삿갓의 수 많은 비석을 앞도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또 하나 곪아버린 문제는 김삿갓묘는 박영국옹이 무연고 묘를 학계에 의견을 개진하자 학계가 인정을 해준 묘로서 당시에 반대의견도 있었다 한다.
어떤 학회인지는 모르지만 역사학회라도 남의 묘에대한 역사 사실을 다수결로 인정해주는 것은 해괴망측한 일이다.
이것을 왜 해괴망칙하다고 말하는가 하면 인터넷 어느 글에는 난고(김삿갓) 선생의 후손들은 평창의 어느 골에서 선친 난고선생(김삿갓)의 묘를 발견하고 직계 종손분들은 이제 영월 행사에 안 가겠다고 선언하였다는 글이 있다. 그리고 방계 종친회장님들만 가는 행사가 되었다면 참으로 우스운 모양새이다.
이제라도 선친묘소에 대하여 정확히 알았다면 지금 와석리의 김삿갓묘는 무연고 묘일것이고 이러한 곳에 후손들이 선친 묘라고 찾아가 잔을 올리고 절을 할 수 있슬까??
그래도, 만약 뒤에서 김삿갓 묘가 명당이길래 이러한 기념사업회에 많은 관객이 모여드는 것 아닌가 하고 이야기 한다면 다시 반문의 답을 드리겠습니다.
명당은 무연고 묘가 누구인지 명당이란 점이올시다. 김삿갓의 허울을 쓰고 매일 술과 떡에 알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절을 한다는 사실,,참으로 명당 아닌가요??
언젠가 본인의 글에서 영월은 자라나는 세대의 학습의 장으로 전국 일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들이 견학하는 박물관도도 30여곳에 밤이면 천문대에서 신기한 별빛을 바라보고 꿈을 키우는 아이들의 학습의 장으로 영월에서의 1박은 학부모들로서는 알뜰한 교육으로 단연 전국 일등이란 점이다.
이러한 테마의 시작과 기초는 단종과 장릉, 김삿갓 생가와 묘에서부터 출발하였다. 하지만 이 두가지 이야기에 역사적 사실과는 상이한 면을 볼 수 있다.
역사를 잘못 해석하고 타당성이 결여된 이야기를 달면 극것은 역사 왜곡이 된다. 그러기에 이제라도 영월은 이러한 사실이 역사에 正으서 부합되게 다시 노력하여야 할 것이며 아니면 역사를 배재한 놀이 공원이라든가 상식적 기초에 모순이 되지않는 이야기로 다듬을 때 역사는 더욱 아름다워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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