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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나리의 문화산책

< 여유당을 찾아서>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 문화 탐방

 

               [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를 찾아서 ] 

 

 18년의 긴 유배에서 돌아온 다산선생은 노자의 말에 여(與)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듯 하고> 유(猶)

여 !! <사방을 두려워 하는 듯 하거라>와 堂자를 붙여 생가에 여유당이란 현판을 걸었다.1800년의 봄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사방을 려워 하고 조심스럽게

살아가고자 하는 의미의 뜻이다.

 

 

 

 

 

 

 

 

 

 아래의 수석은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생가에 손님을 접대하던 사랑채에 장식용으로 사군자 그림이 걸려

있고 왼쪽 국화꽃 그림아래에,  인형에 조금 가려진 것입니다.

좌대의 조각도 시원하고 옛  선인들도 수석을 간간이 장식용으로 운치있게 배치하여 소장한 듯 합니다.

응접실이 담백한 분위기며, 그시절 전화는 없었지만 전화대 같은 장식품과 수석 한점이 옛 선비의 깨끗

고 단아한 기품을 곁들여 주는 듯 합니다.

 

 

 

 

 

 

 

위 한약 장은 아마 다산 선생이 말년에 국정의 모든 일은 다 접었지만 그래도 순조 임금의 와병어의의

부름을 받고 순조의 병을 치료해보시던 때에 약장일 듯 합니다.

그런데 좀 특이한건 산삼 넣어둔 서랍이 제일 큰데 열쇠도 없네요.....왜 그럴까요??

.

 

 

한국의 굴뚝은 여러가지 모양이지만 그래도 소담한 모양을..

 

 사랑채와 안채의 침전. 여덞자 쯤의 공간 배치...좀 작은듯.

 

이 다산 생가의 여유당은 홍수로 유실되고 1986년 다시 복원된 생가는 "ㄴ" 자 두개를 포갠 "ㅁ"형태의 

팔작지붕의 민 도리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하여 사랑채엔 손님 응접실 , 손님침전, 하인방등의 구성이고 안채엔 주인아내의

침전방 사이에 마루 형식인데... 그럼 아이들 방은,,,,,또한 장서의 책과 붓등 놓을만한 공간도 아니였다.

 

나는 다산의 독서와 집필과 사색의 그런 공간을 구경하고 싶었는데...여유당 문집만 집필 할때도 정도

책꽂이로 될수있슬까 하는 의문만...무언가 실 생활에 맞지않는 아마 원형 그대로의 복원공사는 아닌 듯

하다. 그리고 또한 어느 안내문에도 이 가옥이 복원된 것이란 표기도 없는듯 하다.

 

지금의 이 생가는 샘플이지 실 생활을 할수있는 공간이 아니란 점이다.

요즘으로 비교하면 8평짜리 아파트 방 정도인데 아마 대부분의 관람자들은 조선시대의 생활상이나 다산

생가가 이런 환경과 분위기를 기억하고 돌아 갔으리라.

이것은 어패란 점이다.

 

 당산나무아래 옛 집의 위치는 엇 비슷하고 앞으로, 또 옆켠으로 채마밭을 일구었슴도  가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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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박물관을 관람하며,,,,,

 

 

서양엔 마키아 벨리즘<국가를 위해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동원되는>이 있다면 우리에겐 경세유표의

상적 국가론이 있다.

" 클라우콘" ,,,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10편,, 시인 추방과 영혼 불멸설을 보게나,,,,

키케로의 웅변을 선동이라 잘못으로 규정짓고,, 그 결과 중세는 암흑의 길로 들어가는 우<愚>도 하였

지만  또한 자유 방임적 경제론의 애덤 스미드도..루소의 애밀보다 더한 교육론과 인간론도 이곳에 다 있

슴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또한 목민심서의 하민을 살찌우는 방법론과 한국판 형사 콜롬보의 흠흠심서등...

 

<* 클라우콘은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오는  이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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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의 실학 정신은 실용지학(實用之學)·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했다.

 

1800년 정조가 죽고 1801년 순조가 즉위하자 그해 원년에 남인의 벽파가 득세하여 시파 제거작업으로

라 주문모 신부를 끌여들인 역모사건인 " 신유사옥"으로 다산은 포항으로 유배갔으며 이후 백서사건

으로 다시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강진으로 이배된 이것이 그에겐 행운인듯,,,

어찌보면 유배지에서 책을 쓴다는게 그리 쉽지야 않을련만...그에겐 강진에서 멀지않은 해남에 가댁이

으며, 외 증조부는 렘브란트 자화상보다 더 빛나는 자화상의 공제 윤두서, 외조부는 고산 윤선도, 이

가댁녹우당엔 중국과 일본까지 망라하는 어마어마한  장서를 보유하며, 다산은 어렵지 않게 이 모든

들을 구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다산 초당을 짓고 제자들에게 수학하며 모든 분야의 집필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름을 남기게 된 선비들의 대부분,,, 정철, 윤선도, 다산의 둘째 형님 정약전,, 모든분들이 대부분 귀양살

유배지에서 학문의 절정을  이룬 것이다.

 

다산의 근본 사상은 주자학의 자연과 인간사이의 천일 합의의 태극이 고난통함을 주장하고 있슴에 비해

산은 천도<天道>와 인간세계가 각각 존재와 그 당위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주자학의 계급성과 불 평등한 인간관을 비난하고 인간세계의 질서는 변화 가능한 으로 여기며 ,

한편 그는 천인분리를 상정하면서도 절대적인 천의 존재를 별도로 언급했다.

이때 천은 모든 인간과 개별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모두 존엄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둘째, 기질에 따른 인간성의 차등설을 비판하고 우수한 능력자는 특정 신분에서만 배출 되는 것이 아님을

조했다. 그의 능력주의는 신분제에 입각한 국가의 교육, 과거, 인사제도에 대한 개혁론으로 연결되었다.

 

셋째, 욕망관[人心道心說]에서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되 적절한 통제가 병행되어야 함을 말했다.

무제한적으로 욕구를 인정하는 것은 특권층의 입장과 통하는 것이라 본 그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외적 환경

좌우된다고 보아 구체적인 사회제도의 정비를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주관적 심성 문제에 치중한다거나 도덕적인 호소에의한 해결방안을 내세우는 주자학과 대별되는 주

이다. 그는 전통적 관념론에 몰두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론적 세계관을 지향했다.

이에 따라 천문·기상·지리·물리등 제반 자연현상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이를 적극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

 

그의 자연과학 사상의 기초는 우주관에서 비롯되는데, 전통적인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을 논박고 서학

지리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지원설(地圓說)에 관해 논증했다. 물리학적인 현상의 질을 규명하는

도 관심을 기울여 실천적 실학사상의 이용후생을 가져옴을 그 모체로 하였으며 이 모든 학문의 주 요점

건제도의 타파의 근본적 개혁을 주장한 것이다.

 

 

 

 

 

 만약 다산초당을 과노< 과천노인> 김정희가 직접 썼다면 어떤 글씨체였슬까 하는게 이 현판 글자를 볼때

마다 나의 의문으로....

 

 

 한문이 더 어렵다고 미국사람들이 말 하더구만,,긋도 사실이라...

 

 

왼쪽 아래의 작은글씨의 에필로그는.....

[ 다산 정약용 선생이 61세가 되던 1822년 자신의 생애와 업적을 묘지명이란 문체를 빌어 사실대로 적은

것이 자찬 묘지명이며, 문집에 넣기위한 집중본과 무덤에 넣기위한 광중본이 있는바, 소개한 글은 집중본

의 명이다. ]

 

 

 

원추 기둥의 책꽂이에 책의 오브제를 통한 이미지 구성의 이 조각의 제목이 걸작입니다.

" 꺼지지 않는 불"

다산선생의 시대를 초월하는 학문의 불이란 뜻이겠죠.

 

 

이 동상 옆에서 한참동안 다산선생의 인품을 느껴보는데

어느 학생들이 발랄한 아이디어,,,,,, 책을 같이 들고 기념사진을,,,

재미있는 장면이라 누구인지 모르지만 나도 찰깍.

아마 책을 보며 ,,, 책을 소품으로 기념사진 찍을곳은 이곳인가 하노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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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박물관에 소개되는 실학파들.

 

 

 

 

 

위의 뒤석인 해와 달의 저자 최한기는 구한말 실학의 마지막 승계자라 하여어할까??

그는 한양의 이름있는 부자로서  청의 또한 서양의 신지식 서적 구매에 그의 전 재산을 사용하였다.

 

역사의 가정< 假定>은 금물이라지만,,

만약 봉림대군<효종>보다  소헌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하는 가정엔..

효종은 10만 대군을 양성하고 이완으로 하여금 북벌을 준비하고 우암을 다시불러 경제 발전을 이룸

하였지만,,,이보단 청의 문물을 더 공부하고 준비한 소헌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이용후생의 실은 왕

권으로 보호되었슬까??

 

이완의 첩의 지략으로 10만의 군대를 승병으로 위장함보단 우리가 일본보다 현대식 무기를 준비하진 못했

슬까?? 효종의 업적은 위대하지만 그 이면엔 곪아터지는 사색당파가 외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생각해 본다면,,,, 차라리 청과 유대의 소헌세자가 보위에 올랐다면 하는 가상은 이만 줄여봅니다.

 

아래의 책은 [ 아언각비]....잘못된 용어, 관행에 대한 바른 의식으로 고치자는 다산의 낱말 해석책  

 

 

              

                                            

 

 

 다산의 아들도 유배지인 강진까지 두번을 다녔는데...

 그때마다 다산 선생은 아들에게 밤이 깊도록 공부하는 법을 가르쳤답니다.

 자식 사랑도 또한 남다른 면모를 보입니다.

 

 

 

 

 

 

 

 

 

 

 

 목민심서,,,

이 책은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의 위정자들,,,

또한 내일을 준비하는  위정자들에게 진실을 말하여 주고있다.

 

 

 

 

 

 

 

 

이만 다산 선생의 생가 마현마을을 뒤로하고 돌아오는길에 멀리 보이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하는 합수

머리에 넒은 호연<浩然>의 마음으로 백성을 걱정하고 지금의 나까지도 생각하여주는 옛 선비의 세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내 가슴속에 한가득 넣고 돌아옴이 오늘 또한 기쁘지 않이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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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자신의 아들에게 들려준 말을 통해 다산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무엇일까?

어떤 곤경과 고통속에서도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산 자신이 그랬듯이 불굴의 정신으로 현실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말과 생각과 행동을 바르게 가지라는 것이다. 마음과 언행이 바르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높은 기상과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비천하고 저속한 일에 골몰하며 인생을 낭비하거나, 편협한 마음으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괴롭혀서

는 안된다는 것이다.

독립적이고 당당하라는 것이다.
비굴하거나 남에게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근면하고 검소하라는 것이다.
부지런히 살고 딱 필요한 그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는게 사람의 도리라는 것이다.

전심전력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선함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 [다산의 마음] 정약용 산문 선집 박혜숙 편역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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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이 글을 보는 순간 나로선 다산선생을 얘기함이 더 이상 필요치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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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매화의 시 중에 가장 잊지못할 시 한편 소개합니다..

<치마폭에 매화를 그리다> 
                                                                                                                                                                                                                                                                                                                                                                                                                                                                정 정약용

가볍게 펄펄 새가 날아와
우리집 뜰 매화나무 가지에 앉자쉬네

매화꽃 향기 짙게 풍기자
꽃 향기 그리워 날아왔네

이제부터 여기에 머물러 지내며
가정 이루고 즐겁게 살거라

꽃도 이미 활짝 피었으니
그 열매도 주렁 주렁 앉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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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시는 그 시상보다 스토리에 감동이 나의 가슴을 울립니다.
다산 선생께서는 1801년 영일만쯤으로 유배를 떠나셨고 백서사건으로 2차 유배로 강진으로 유배를 갔지요.

당파싸움의 회오리속에 셋째형 정약종과 매형인 평창출신의 이승훈등은 신유사옥에 순교를 하며 다산 주변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노론벽파의 음모속에 다산선생은 이러한 위험속에 두 아들과 어린딸

고향에 두고 전라도 강진유배의 기약없는 이별이었습니다.

그래도 긴 이별의 시름을 잊고자 강진에서 100 여리에 다산의 외갓집인 고산 윤선도 집안이 자리하며 당시로는

고산집안에는 울 나라에 최대의 장서를 가져다 모조리 섭렵한듯 합니다.

능내리에서 강진까지 천리길에 20년 유배에 두 아들이 두번 다녀갈때 부인께서 몇벌 보내준 치맛자락에 위의

시를 써서 안스러운 부인에게 보낸 것입니다
아마 이때는 유배 17-8년째의 일입니다.
긴 세월 만나지못한 부인과의 애틋한 정과 그리움이 사뭏치는 詩이랄까??

다산선생의 두 아들은 대역죄인의 집안이라 조정의 과거시험의 출세길은 막혔으나 편지로 두 아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그는 편지에서 귀양살이에 번것도 없어 유산으로 물려줄 것은 없으나 특별히 勤과 儉을 물려주겠다고

이 두자를 적어 보냈다 한다.

 

첫째아들은 명의가 되어 정적 노론벽파의 실권자들도 노환등 죽음에서 의술로 살려주는 은인이 되었으나 아버지

다산은 의술을 폄은 좋으나 구차한 구명운동은 말라 하였지만 "학연"에 감동받은 그들은 다산의 금에 도움을

주었고 둘째 "학유"는 교과서에 실린 농가월령가의 지은이이다.


이렇듯 떳떳한 두 아들을 홀로 기른 부인 홍씨에 대한 고마움속에 정약용은 멀리 능내리 마현마을의 집안을

는 부인에게 유배지에서 표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마움의 표시가 위의 치마폭에 써 내려가는 매화의 시인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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