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의 장릉도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이 되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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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후세백작
지난 26일 스페인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이조 왕릉 40기가 등재되었는데, 그럼 이 세계속의 점 하나, 우리가 잘 아는 단종의 장릉도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이야기로. 이에 아직 반응이없는 영월인들은 박수를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 낮잠 잤다면 저녁이라도 알 수 있는데 워느ㅡ 통 반응이 없으니,, 영월인들,,, 뭐하나.. 우선 이에 감사를 보내며 글을 씁니다.
조선의 왕릉은 42기중 (쌍분, 3 쌍분은 하나의 기로) 태조의 정부인 한씨의 묘<제릉>과 3년간 왕을 하다가 동생 방원에 물려주고 개성으로간 겁쟁이 정종의 쌍분 후릉. 이 두개는 개성에 있기에 나머지 40기만 세계 문화유산으로,,, ( 한씨 부인은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죽고 중종때쯤 복원, 종묘에 신위 위패 모심)
이번 일로 우리나라에선 총 9건의 유네스코 관장 세계 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에 장릉도 앞으로 타 릉과 동일한 시스템 구조를 가질것이며 단종제도 세계 문화 유산이란 이름으로 거행되게 될 것이다.
이번 이조 왕릉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의 등재엔 왕릉의 석물에 대한 제반시설의 격식과 풍수설에 의한 묘의 꾸밈새와 제례에 대한 문화양식( 복식및 제례 방법, 절차) 이 모든게 통괄적으로 문화유산에 중재되었다. 그러므로 단종제는 이제 세계 문화유산이란 타이틀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조의 왕릉이란 이성계의 동구릉에서부터 비롯되는데 그 양식은 원나라의 방식을 도입 <국조오례의>에 의한 무덤양식으로 지하 석실과 지상 석물등으로 이런 방식의 묘에는 총 7,000품이 들어간다. 그래서 과다한 지출을 막기위해 세종도 유언으로 석실을 하지 말라 하여 지상 석물만,,,그래도 지상의석물만도 3,000품.이후로 아마 2/3의 묘는 지하 석실을 생략하게 된다.
제일 빼어난 모습의 왕릉은 장조릉<사도세자릉>으로 최고의 미적 감각의 석물과 앞산의(주작)의 시원한 맛을 보여주나 원찰 용주사는 현판글씨 이외엔 보잘것이...원찰로는 신륵사가 제일 시원하죠, 득과 파 사이에 굽어지는 강물도 시원하고, 뒷산 언덕에 올라가면 나옹화상과 그의 제자, 무학의 종형부도가 일품이죠..... 마치,우리네 뒷뜰의 장독대처럼.
지관들이 제일 명당이라 함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쌍분 형식의 광릉이라는데, 그냥 보기에도 멋들어지는 풍치를 지녔고, 빼곡한 수목사이로 용이 내려와 앉은 곳에 날아갈듯한 쌍분의 묘가 인상적이다. 또한 왕릉중에 제일 무게감과 고즈넉히 보이는 것은 세종의 영릉이죠, 헌인릉에서 우여곡절 끝에 여주로 이장 하였는데,,,그 영릉은 깃품있고 점잖은,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 냅니다.
제가 본 곳중엔 고종의 조부님을 대원군이 이장한 덕산의 남연군묘는 우백호 형상이 겁나도록 무시무시한 느낌에 반하여 (아마 그를 용의 힘찬 맥박정도로) 이 모든 왕릉들은 아름다운 미를 창출하고 있습니다.(서 오릉과 서 삼릉은 금지구역이라 사진만 보았죠)
그중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이조 제 6대왕 단종의 추존릉인 영월의 장릉은 먼 옛날 궁노루 (꽃 사슴}뛰어놀던 양지바른 언덕위에 ,,,그래서 차창으로 바라보는 장릉은 아직도 궁노루 울음소리 들릴듯한 ,,,,
애련의 미를 더욱 가중시키는 그래서 왕릉중엔 모든이들에게 가장 애수를 느끼게 하는.... 용이 굽에 내려앉는 그곳에, 가장 먼저 해가 따사로이 내리쬐는 산허리에 ,,, 누가보아도 가히 명당자리란, 그곳에 장릉이 위치하는 것입니다. 항간의 이야기로는 영월 호장 엄홍도가 야밤에 시신을 메고 오르다 쉬는곳에 궁노루가 있던 자리라 눈이 녹은 곳이라 하건만,,지도를 살펴보면 이곳은 원 줄기에서 돌아난 지류라 올라가면 다시 원산줄기로 올라가는데왜 이쪽으로 굽어 오를까 하는 의문이...
그것은 이곳은 영월 엄씨의 종중산으로 엄홍도는 산길을 모르고 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을 생각하고 올랐어야 옳은 이해란 점이다. 그리고 그 기록을 어디다 남길때도 어떤 표식을 하지않아도 위치 설명이 쉬운 곳이라 생각한다.후일 단종이 복원되며 이 릉이 단종능이란 표식도 찾겠끔 엄흥도는 만반의 준비를 하였슬 것이다.
또한 왕의 능들은 곡장과 무덤뒤로 12지간의 석물과 문인석, 무인석, 장명등이 장엄하게 버티지만,,,,, 고종과 순종의 황제의 릉인 홍유릉은 이 12지간이 곡장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묘 앞으로 2열 종대로 차렷자세를 하고 있지만 영월의 장릉엔 곡장도 단아하고 무인석도 배제되고 또한 12지간의 석물을 약식으로 할때는 순한 양과 말을 양쪽으로 두쌍씩 하는데 아마 말만 한쌍이 보이는... 어찌보면 가련한 왕의 표상같지만,,,,
그것이 오늘 우리의 가슴을 더욱 울릴수 있는 세계 문화 유산입니다. 지구촌의 문화 유산이라는 것 입니다. 이제 장릉도 세계화 시대에 우리의 문화의 표상입니다.
이번 문화유산등재의 뉴스나 제 내용들은 일반 블럭이니 싸이트에 모두 있기에... 그리고 검색란에 조선 왕릉을 검색하면 자세한 내용들이 있어서 그 부분은 생략하고, 그외의 부분들과 저의 느낌의 글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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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한기 조성에 7,000 품이 들지만 고구려 광개토 태왕의 왕릉인 장군총은 280평 면적에 아마 요즘 4층 높이 건물 규모 같은,, 11톤의 돌을 1,200개나 40여리 끌고와 쌓아올린 릉입니다. 어느 사가의 견해로는 3만 오천품정도라는데 저의 생각으론 7만~9만품 규모의 릉입니다. 이건 돌궐,말갈이나 흉노등중에 전리품 노예 없이는 불가능하단 저의 판단이죠.
또한 지금 컴의 구글로 중국 시안이나 함양의 지도를 내려다 보면 사각 스퀘어가 장방형이란 입체감을 나타내는 피라밋들...이집트의 기자 피라밋이 높이 150m 이지만 이 피라밋들은 300m 높이가 다수이며 총 1,000기가 존재합니다.
중국은 동북이고 서북공정에 혈안이 되지만 이 규모와 방대한 피라밋은 아직 개봉금지 구역입니다. 쓰레기도 다 팔아 돈 만드는 중국이 이 큰 장사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삼황오제이후 처음으로 중국을 여는 하나라 이전에 철기문화와 김치와 한글의 모체인 가람토 문자가 출토되기에 함구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대사엔 고조선의 진짜 세계를 제패하는 문명과 찬란한 문화가 그 속에 있습니다.
중국은 이제라도 발굴 착수하고 지구인들은 세계 문명의 시원을 확인하여야 할 것입니다. 유네스코는 종이 호랭이인가..... 지금이라도 세계최대의 문화 발굴 착수에 나서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후세백작
관속이나 땅 속에 표식을 해두고 아마 문중에도 비밀스런 자료를 남기고 멀리 함경도 쯤으로 도망갔단 생각입니다.
이후 200년 지나 스스로 반정으로 왕의 보위에 오른 중종은 그간 역사의 규명과 재조명 사업을 하였는데 이에 단종의 묘를 찾으라는 어명에 그 확인 절차에서도 엄흥도의 노력이 나타나지 않았슬까 하는 생각입니다.
엄흥도는 엄씨 문중산에 단종의 묘를 쓸 계산으로 야밤에 썼던 것이며, 그 산에선 그 위로 더 올라야 그만한 자리가 없슬 것이란 점이 엄흥도는 이곳에 묻으려는 게산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한 후일에 복권되고 무덤을찾을 수 있는 정확한 표식을 어떤방식인지 사전에 정확히 해 두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를 후일에 사가들은 자기 편리 사고만 하는 것인지??? 09:50
장군총이 3만5천품이란 어느 사가의 논지와 저의 생각을 다음에 쓰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약8, 9만품이란 광개토 태왕, 장수왕 시기엔 다른 부족의 전리품 노역 아니면 국력소모라는,,, 세종도 칠천품의 묘를 삼천품으로 줄게 하라는 왕명이 있었는데....아마 광개토 태왕의 시기엔 그런 노예 전리품의 찬란한 문화였으리라 생각되는데 우리의 사가들은 아직도 역사의 사명감 보다는 자기만족 상태인지 알수 없군요.
고조선이 있었던 것인지, 없었던 것인지 애매모호한 것보다 분명한 물증의 정확한 제시를 하시는 사가들이 되길 바랍니다. 아마 이것이 우리 역사의 과제들이라 생각 합니다.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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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죽음엔 세가지 설이 있지만 왕방연에 의해 사약을 받으라는 어명에 단종은 내가 왕인데 감히 누가 그러더냔식에 향교의 졸개가 뒤에서 활의 시위로 단종의 목를 졸랐다는 설이 유력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