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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조선고적도보』로 보는 평창읍 유동리 5층 석탑과 동북 5층 석탑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평창읍 유동리 5층 석탑과 동북 5층 석

 

 

후세백작 2018.07.09 18:08

 

1. 유동리 5층석탑

 

左)『조선고적도보』의 평창읍 서남 오중석탑          右) 연재의 유동리 오층석탑

 

 이 탑은 동일한 탑으로 『조선고적도보』라는 책에 실린 유동리 5층 석탑과 현재의 석탑은 동일한 모습이다. 현재의 사진에 탑이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는데 이는 카메라가 삐딱하게 찍은 것이 아니라 탑이 기울고 있다.

 

 탑의 1층 기단석 윈쪽이 떠 있으며 이 기단석은 면석이 아닌 통석으로 보이며 대각선 뒷쪽의 1층 기단석 아래 판석의 깨지는 균열이 있지않나 추정하며, 아마도 3년전 평창군은 동탑의 복구예산을 조성한 것이 이 점의 보완을 하기 위한 것인듯 하다.

 

 아마 보수가 진행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기왕 할때는 탑 상륜부의 양화의 조각을 다시 만들려면 지금처럼 주방장 모자가 아닌 신복사지 탑신석 모양의 단축형 탑신석이 이 시기에 일반적 조각이라 그런 조각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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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라는 책은 15권의 4천점 이상의 우리나라 문화재를 일제 강점기시 일본의 건축사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7~1935)가 1902년부터 1934년까지 30여 년에 걸쳐 조선을 여행하고 답사하며 기록한 역사서이다.

 

『조선고적도보』를 들춰보면 지금은 중국 땅이 된 집안의 고구려 유적에서부터 제주도를 제외한 우리 땅 전역을 아우르고 있다. 내용 면에서도 고구려 고분에서부터 조선시대 궁궐인 경복궁의 전각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처음으로 다루고 있다. 낙랑문화도 여기에서부터 시발된다.

 

 1915년에 첫 권이 나오기 시작해 거의 해마다 한 권씩 진행되어 1935년까지 모두 15권이 발간되었다. 첫 권은 낙랑군 및 대방군으로 시작하여 고구려 시대까지를 담았고, 2권은 고구려, 3권은 백제, 가야, 신라, 4권과 5권은 통일신라시대, 6권에서 9권까지 네 권은 고려시대, 10권부터 15권까지 여섯 권은 조선시대의 문화재를 담고 있다.

 

출처-[Daum백과] 세키노 다다시의 조선고적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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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고적도보』로 보는 동북 오층석탑

 

 

 

左)『조선고적도보』의 평창읍 동북오중석탑            右) 평창경찰서 앞 마당에 있는 오층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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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좌, 우의 사진속의 탑은 동일한 하나의 탑이 아닌 전혀 다른 탑이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 左)의 탑은 기단석이 단층으로 신라 중기의 2층 기단석이후 고려 때로 가며 단층으로 변모하는 시기의 기단석이며, 옥개석은 위로 반전각도가 심한 경향으로 고려시대의 탑이다.

이에 비해 현 평창경찰서의 탑은 3개의 탑이 혼합된 것이다. 맨 아래의 지대석은 새로 만든것인데 이것이 지대석이라면 기단석은 없는 탑이 된다. 이를 기단석으로 본다면 지대석이 없는 것이 된다. 일반적으로 이는 지대석으로 간주된다.

 

(1) 탑신괴임석과 1층 탐신석, 1층 옥개석은 하나의 동일탑의 탑 부재이다.

 

  동 탑은 그 부재들에 조각수법이 신라 하대의 3층 탑이었던듯 하다. 그 이유는 옥개석의 반전이 없고 일자 형태로이 부재의 특징은 옥개석의 낙숫면이 길기때문에 2층 탑신석은 상대적으로 작아져야 하고 그러므로 옥개석의 기울기 값이 현저하게 커진다면 삼층 탑의 부재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동 탐의 조각수법은 위층의 탑재보다 에지가 각지지 못하고 좀 둥그스레한 느낌이다. 이러한 이유는 조각 정(釘)의 쇠가 좀 연하기 때문이다.

물론 신라의 경주일대의 석탑은 빼어난듯 조각하였지만 그 조각에 사용된 정과 끌의 강도는 그리좋치 못했슬 것이고 어쩌면 청동 합금의 정이 사용되었다면 무척이나 힘든 조각이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주철을 완전히 녹인것은 고려시대의 송나라이다.

철의 용융점은 1,580도인대 화력으로는 약 200도가 모자라서 역사에 삼한시대의 철기는 불을 부채질하고 나무가 숯으로 되면서 더 높은 화력으로 녹일수는 있으나 용융점에 도달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들을 다시 달구어 단조를 입혀도 완벽한 주철재품과는 비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정으로 쪼아 조각한 것은 각지지 못한점으로 보인다.

(* 이러한 주철의 이해도 예전에 발표한 본인의 설명이고, 학계에는 그림자도 없는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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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층과 3층의 옥개석은 또 하나의 석탑의 탑재이다.

 

  이 두개의 옥개석은 위로 향하는 곡선의 반전각도가 최대한의 값을 가지는 탑으로 고려시대의 탑니다. 그러나졸작인 것은 3층 옥개석의 두께는 양호하나 2층 옥개석의 전각의 폭이 들죽 날죽 얇아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층 탑신석은 많이 부식되고 부셔저서 완전한 모양을 가늠키는 힘들지만 1층 탑신석에 보이는 우주도 없는 듯 하며 일층 옥개 2층 옥개석과 같은 탑의 부재로 보기에도 1층 옥개석 위에 셋팅되기에는 가로 폭이 좀 큰듯하여 1층 탑재는 아니기에 2층 옥개석과 동일한 탑이라 보는 것이다.

 

(3) 4층의 옥개석과 5층의 탑신석

 

 4층의 옥개석은 위로 반전의 곡선이 없이 직선이며, 위 아래 볼륨이 두터운 정형의 신라탑이다.

이렇게 동 탑의 탑신부는 세가지 유형의 탑 부재들로 구성되어 있다. 동 탑은 탑신이나 옥개석의 가로의 폭을 보면 대부분 5층 석탑은 아니고 3층 석탑중에서도 작은 유형의 탑들인 듯 하다.

 

 동 탑에서는 기단석이 없고 탑신석만 5층으로 올려 얼핏 하나의 탑의 크기처럼 보이지만 아래에 기단석을 놓으면 더욱 가늘어지게 보이기에 이 3개 유형의 탑재들 모두 3층탑 이었던듯 하다.

또한 4층의 옥개석 아래의 부연의 싸이즈는 현 새로 만든 4층 기단석보다 싸이즈가 커서 맞지않게 물려 있는데 마치 큰 모자 내려 쓰는듯한 느낌으로 이는 탑신석과 옥개석 사이즈가 비슷하기에 3층을 넘어 올려 쌓은 듯 하다.

 

2) 위 사진의 두탑의 비교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탑과 현 평창경찰서의 오층도 아닌 가짜 오층석탑과는 전혀 다른 탑이다.

두 탐이 전혀 다른 탑이란 점은 옥개석 전각의 비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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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오층석탑의 전각은 아랫부분이 안으로 파고드는 경사도 값을 가지는데 현 경찰서 탑의 2, 3층 옥개석의 전각은 수직으로 조각되어 있다.

 

  조각에서 이 차잇점 발생이유는 전각이 사선으로 마감된 옥개석은 밑변에 물받이 낙수 홈이 없슬 것으로 사선의 전각 끝에서 빗물이 그냥 떨어 지겠지만 전각을 직각으로 자른 탑은 빗물이 옥개석 아래의 부분을 타고 탑의 기단석으로 흘러 들어갈 것이다. 그러기에 옥개석 밑변 3~5 cm이내에 물밭이 홈을 조각하는 것이다.

 

 옥개석의 전각을 비교하면 『조선고적도보』의 탑에서는 안으로 파고드는 사선의 전각을 가지지만, 현 경찰서에 있는 탑에서 2,3번 옥개석이 비숫하지만 이들의 전각은 수직으로 내려온다. 이것이 가장 큰 차이이며 옥개석 전각이 사선으로 된 것은 그 전각끝에서 빗물이 바로 떨어질 것이기에 옥개석 하단부에 빗물받이 홈이 없을 것이나 전각이 직각인 경찰서 탑은 하단부 3~5 cm이내에 홈을 파서 빗물이 탑 내부로 스며드는 것을 차단시키는 홈이 4각 전체에 파저 있는 것이다.

 

 이 두가지는 탑신석으로 차잇점 모두는 흘러드는 빗물을 방지하여 탑의 내부세계는 공기는 통하지만 물은 흘러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와같은 낙수 홈은 모든 탑에 있는 것이다

 

3) 『조선고적도보』 사진으로 보는 탑의 감상소견

 

  동탑은 기단석이 상판이 장식적 조각이 없이 넓은 상판이기에 이는 단층 기단석으로 보이며 탑신석의 조각은 신라탑의 장중미보다는 경쾌한 연속성으로 균형잡은 고려 탑 계통이다. 또한 옥개석이 위로 곡선을 그리며 반전된 탑으로도 고려탑임을 알 수 있다.

 

 동탑의 특징의 하나는 옥개석이 4층 구조를 지닌 점이다.신라의 탑은 옥개석이 5층이며 고려 양식에서는 3층이다. 그리고 4층의 옥개석은 그 사이로 신라 말에서고려 초기에조각되는 양상을 나타낸다.

이렇게 보면 이 탑은 라말여초의 조성된 것을 알 수 있으며 탑의 리듬과 하모니 (균형과 비례)는 잘 맞혀지고 상륜부의 복발은 정사각형의 일반적인 것인데 복발 맨위는 몰드재처럼 턱을 가진 굽도리인데 위 고적도보의 사진엔 그곳이 원형이란 점이 특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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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형 그대로 천여 년이 넘게 그대로 제 기능을 발휘해 온 탑으로 이 탑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느 절의 탑인지 알지 못한다.

이 사진은 세키노 다다시가 1915년 월정사 가는 길에 평창을 다녀가며 찍은 사진인데 (고적도보 6권, 1918년 발행) 사진의 제목은 평창 동북오중석탑( 五重石塔으로 되어있다.

 

  혹시나 고적도보 편찬에 오류일까 아니면 타 탑과 사진이 바뀌었슬지 몰라 책의 사진 전부를 뒤져보았다. 그리고 위 사진뒤의 배경은 어디일까?? 탑 주변에 풀이 무성한 점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폐사지인듯 싶고,,,

사진명에 평창읍 동북방이라고 하였기에 이곳이 노람뜰의 노암사 탑이 아닌가도 보았지만 사진속 탑의 뒤 배경의 산은 맞아떨어지는 곳이 없다

 

  일제시 쪽바리들이 도괴하여 일본으로 밀 반출했슬까?? 원주의 지광국사 현묘탑은 일본 장사치들 손에달려 일본까지 갔다가 총독의 명에 의해 제자리로 복귀중 서울에 떨어져 현재는 국립 중앙 박물관 야외 뜰에 있다.

경복궁 서측 문으로 들어가면 있으며 화강암으로 세밀하게 조각할 수 있다는 감탄보다 그런 조각을 하겠다는 의도가 더욱 감탄할만한 조각이기에 쪽바리들도 탐냈던 것이지만 평창 동북 오층 석탑은 그 정도는 아니고 아마도 도굴꾼들이 도괴하였슬듯 하다.

 

4) 노론리 절골의 탑과 노암뜰 노암사의 탑

 

(1) 평창경찰서 오층탑이 노론리 절골의 페사지에서 탑을 옛 주재소로 이전하였는데 현 경찰서 신청사로 다시 옮겼다 하며 지금도 노론리 절골에는 절터의 주초석만 남아있다 한다.

 

* 주재소는 아마 옛 경찰서를 경무대하 하며 여기서는 경무대 주재소를 이야기 하는듯 하다

* 현재로서는 절골의 절의 이름도 모른다

 

(2) 또 다른 이야기로는 평창경찰서의 5층탑이 상리 노람강변 안쪽 (엣 포도밭 옆)에 노암사(魯庵寺) 라는 폐사지에서 옮겨 왔다 한다., 이에 증언을 정확히 분석하면 당시 노암사에서 옮긴 것이 아니라 증언자는 이미 페사지에서 하리로 옮겨져 있던 탑을 그 자리에 건축을 위해 경찰서 (현 농협앞)로 옮겼다는 증언이고 당사자의 증언에 상리 노암사 절의 탑이라고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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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이를 발췌한 정원대 향토사학자님은 이 증거의 확실성을 가리는 당시 절의 탑에서 찍는 사진을 채록한바 사진에 탑은 비껴가고 뒷 배경은 여만리 산이 있다 한다.

물론 탑옆에서도 앵글속에 인물을 담기위해 탑을 못 찍을 수도 있겠으나 언제인지 옛날에 사진기가 귀할때에 좀 서투른 점을 감안 하더라도 탑에서 기념촬영에 탑이 안 나왔다는 부분도 탑의 진위에 고려 대상이다.

 

5) 위 두개의 증언에 의한 하나의 가설을 제기한다.

 

  *평창경찰서의 오층탑은 위의 두 곳, 중리 노암사와 노론리의 절골의 탑임을 공유하는 것이다. 절골에서 주재소롤 옯겼다는 것은 그 옮겨지는 과정이 생략된 이야기이다.

 

  가설로 이해해 보면 절골의 탑은 위 경찰서 탑의 1층 옥개석과 1층 탑신석위에 2층 이상이 노후되어 결이나고 깨지게 되자 이후 고려쯤 2, 3층 탑을 재 축조하기에 이른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정책적으로 쇠퇴하게 되고 노론리는 평창의 북동쪽은 산악지형에 벌판이 협소하여 가장 농토가 빈약하여 낙후된 경제기반에 대를 잇을 스님들도 없게되어 폐사지가 된듯 하다.

 

  * 역사에서 어떤 충돌에 의해서 폐사지가 된 것이 아니라 자연적 추이로 낙후된 지역이라 노론리 절골은 폐사지가 되고 탑은 중리 노람뜰의 노암사로 이전되었다.고 가상 추정해 봅시다.

노암사도 페사지가 되자 일제 강점시기에 하리 사거리에 큰 여관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노람사 5층 탑을 화단 장식용으로 이전한 것이다.

 

 

  이 두가지 이야기중 가장 분명한 것은 증언자가 직접 동 탑을 경찰서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라기에 동탑은 이 두가지 사실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고 이후 경찰서에서 보존되며 파손되거나 아니면 하리로 옮겼슬 때도 파손된 부재들을 타 탑의 부재로 바꾸는등, 그래서 기단석 자체는 없고, 아니면 탑에대한 상식 결여로 그것은 버리는 등 하였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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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분명한 것은 1층과 2,3층은 다른 양식이거나 아니면 보수로 개축할 수도 있지만 4층옥개석과 5층 탑신석은 다른 부재이다.

4층 옥개석의 아랫부분의 폭은 현 탑에서보다 넓고 상단의 탑신석의 가로 크기는 작다. 그러면 옥개석의 경사도의 기울기 값의 폭이 커지는 것으로 그것은 삼층탑이란 점을 의미한다.

 

  기록에 의하면 동 탑은 천동리나 도돈리에서 가지고 온 부재들로 맞췄다고도 한다. 평창읍엔 또 하나의 폐사지로 대상리 안장말사지에 탑은 상륜부에 찰주공이 있는 석탑부재도 있다. 현재도 무너진채 방치되는 동탑의 부재는 아닌것이라 보인다.

 

*조선고적도보』에 평창군에 관해서는 평창읍의 두개의 탑의 사진 각 한장씩과 월정사 전경및 탑 사진과 여러 점의 자료들 중에 아마도 지금은 없는 국보급 문화재도 있는듯 합니다. 이는 아마도 6,25 동란시 화재에 불탄것은 아닌가 하는 점은 다음에 게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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