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이여.. 정말 어디로 가시나이까..
2018년 10월 8일 '평창신문'의 기사를 인용합니다.
* 임진왜란 당시 권두문 군수가 지사함. 이인서, 우응민등과 합심하여 왜적과 맞서 싸운 격전지이다.
* 이후 그곳에 성황당이 세워져 군민의 안녕과 백의의병의 넋을 비는 성황제로 이어졌고~중략.
* 매년 노산문화제에 앞서 여는 충의제는 임진왜란당시 노산성에서 항전한 권두문 군수를 비롯한 여러 관군과 백성들의 넋을 기리는 행사다.(중략~)
이러한 기사를 요약해보며 신문으로서 가장 큰 이미지를 부여하는 헤드라인 글자에 <임지왜란 격전지 '노산성'>이라고 임진왜란의 철자가 두 번 틀린것은 고사하고 글체의 문맥의 흐름이 유연하지 못한점도 충분히 이해하며 이 기사를 재고해 봅니다.
위 인용부 기사에서 권두문군수가 지사함등과 합심하여라고 했는데 이를 합심이란 문구는 상대방의 팀과 함께 할때의 표현이고 합심이란 분열과는 상반되는 단어이기에 종속적인 지휘체계내에서는 가급적 사용치 않는게 더 좋은 표현이리라,
임란당시의 노산은 격전지라는 사실이 오류임이라고 본인은 밝힌바 있으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임란후 노산에 성황당이 세워져 군민의 안녕과 백의의병의 넋을 비는 성황제를 드린다는 기사에서 참으로 기고만장한 이야기이란 점이다.
임진왜란 후 노산에 성황단이 세워졌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아마도 성황사는 임란 이전에도 있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성황당은 유교국가에서 고려의 불국토의 호국불교의 빈 자리의 공백을 메우는듯한 인상으로 성황사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염원을 기리는 행사를 주관하던 곳이란 점으로 전국 각 군, 현에 사당을 둔 성황사를 두고 고을의 수장이 제를 지내며 각 향리의 마을에서는 성황제(서낭단)으로 수해. 가뭄등의 각 재해에대하여 기우제의 양상과 각종 질병의 전염병등과 마을의 화합을 하는 정월 대 보름제로 이어졌던 것이다.
여기에서 "국태민안"이란 국가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다는 말은 임금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에 국가의 지향점과 백성을 위하는 뜻이기에 각 군, 현의 고을에서는 군수나 현감은 임금을 대신하는 제례를 지내는바 이를 제사장이 일임한 것이다. 그러기에 이 성황제는 신성하게 치루어져야 하기에 본인의 "노산 국행 성황사"의 글에서 제사장은 자시경을 기디려 치제시에 호랑이가 다녀간듯하여 우리가 신성시 여기는 호랑이도 이 성황제에선 부정을 탈까 염려하여 후일 다시 제를 올렸다는 이야기를 제사장 김학수옹의 子 택용氏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황사-사당이 없이 제단만 있을 경우 성황단이라하며 사당이 있슬경우 성황사라 합니다. 노산의 성황단은 사당의 당집을 가지고 있기에 성황단이라하면 오류인데, 노산의 성황단이란 표기는 성황사라야 옳은 것입니다)
정월 대보름날에는 마을의 서낭단(고목나무나 돌 누적단이 서낭단이고 사당의 당집은 서낭단이 아님) 에서 한 해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를 시작으로 농악대 사물놀이. 마을 대동계 윷놀이. 부스럼깨물기. 망우리 돌리기등 다채로운 행사를 하였으며 이 대보름제는 일년중 마을의 화합을 다지는 가장 다채롭고 큰 행사였는데 이를 미신으로 취급만 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아는 마를의 서낭당에 무당 박수들이 찾아와 개인적 염원을 비는 것이 마을의 공동행사는 아닌 것이다.
우리가 조상분의 제를 지낼때 신위를 모신다 하듯 마을 제례에도. 모든 제례는 인간이 아닌 신위를 모셔야 하기에 그 동리에서 역사적 자취를 남긴 어른이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남근상이나 여러 형태의 일반적 신위를 모시는 것이다.
여기서 남근상을 상징하는 것은 예를 들면 삼척 원덕의 바닷가 마을에 바다에 많이 사고가 나는 지역에서의 일이기도 하겠지만 고대 희랍의 디오니소스 축제는 여자들이 먼저 모임이 발전된 것이기에 겨울철 밀을 파종하고 난 다음의 겨울축제에서는 전통적으로 남근상을 깍아 치켜들고 축제를 하는 것처럼, 동서고금에 이러한 표현은 유희 이전에 출산과 연관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질병, 각종 사고로 마을의 인구가 격감되기에 시루목의 서낭당이 불근당이란 것과 같은 유사한 점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본인의 글 "노산의 국행 성황사"라는 글에서보면 郡의 수장인 군수는 임금을 대신하여 국가의 존위와 마을의 무사평안을 위하는 것으로 군수나 현감을 대신하여 제사장이 연초에 제를 지내던 의례인 것이다. 그러기에 백의 의병의 넋을 기리는 충혼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리고 백의의병이란 임란때엔 평창에 의병이 없었으며 동학과 갑오의병과 정미의병에 제천의 이강년과 춘천의 유인석 의병장의 부대들에 의하여 평창지역이 주 루트가 되며 또한 평창사람들도 이에 의병으로 나아가며 평창지역에서 많은 전투를 하였다. 그러나 동학이나 의병의 역사에 정선, 영월, 강릉, 횡성등 인접군에서는 이 역사기록이 서술되지만 유독 평창군에서 의병의 활동역사 서술은 찾아볼 수 없다.
특히 그 한 예로 정미의병당시 대화 남산으로 도주하던 의병 40여명이 일본군의 총에 사살되었다 하는데, 아마 이는 이강년의 제천의병들이 이곳에서 크게 와해된듯하지만 이런 역사에 대화의병에 증언은 단 한줄의 서술도 없다. 대화의 남산이란 당시의 대화는 3, 4리가 중심이었기에 지금의 시내 뒷산이 당시 대화쪽을 보면 남산이 된다. 그런데 더 이상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기에 어쩌면 제천 남산에서의 의병 활동아닌가 의심도 되지만 이를 세밀하게 짚어 보았으나 이 두 사안은 분명 다른 것이며 대화의 결정적 증언도 요망되며 이러한 증언을 통하여 의병 활동의 그곳에 충혼의 넋을 기리는 비석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
동학에서부터 내려오는 의병은 일부의 양반들도 참여하지만 대부분 천민이나 노비의 민초들로 정미의병 이후 1910년 일제에 강점되자 그들은 독립군 휘하로 유입되어 대부분 독립군의 모체가 되었으며 또한 일제 강점이후 우리는 지금까지 친일파란 구분을 하지만 일제 강점이전의 양반계급과 노비들의 구분은 없어졌다. 그것이 일제 강점시의 왜인들의 노력이라고는 볼 수없다.
왜구들은 임진란이전에 약 50여만명의 동네의 부녀자를 붙잡아 포루투갈, 네덜란드 등지에 노예로 인신매매하여 조총과 화약을 구입하였던 바, 심지어 자기 딸도 성 노비로 팔아서 화약을 구하는 쪽바리들이 우리의 양반과 노비를 평정해준 것은 아니다.
민초들은 동학에서 평등사상을 주창한바 이것이 의병들의 노력에 의한바 부조리가 심한 평창의 군수도 처형되는등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평등사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기에 평창의 의병전투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알았으면 위 신문기사에서 백의의병의 넋을 성황단의 성황제에서 비는것은 큰 오류란 점이다. 또한 노산성에서 임란당시의 전투는 없었다고 본인은 기록한바 동학의병들이 제천, 영월등지에서 몰려와 평창인들의 세를 부풀려 강릉 선교장을 치러 가는 길목에 후평리에서 왜병과 접전이 붙었다. 물론 동학의병들은 무기도 없이 전투를 하였다는 표현은 무리일듯 왜병을 비켜 도망가는데 이 대부분이 노산성으로 올라 피신하였슬 것으로 추정합니다. 동학의병은 일천 명이라 하지만 관아쪽의 기록에는 일만여 명이라고 표기하였다.
다시 신문기사를 보면 백의의병의 넋에 이곳에서 성황제로 이어졌다하는 표현이 무척이나 잘못됨을 이제 알 수있다. 그러면 이런 역사적 오류가 후일에 어떤 파장을 가지고 올까하는 의심의 실증적 예를 하나 들어봅니다.
본인은 예전에 율곡학회의 율곡과 신사임당 년표를 비교하여 율곡의 고향은 평창입니다라고 글을 쓴 적 있습니다. 아마 부동산 관련의 업자들도 이 글을 읽은듯 지난번엔 봉평서 부동산을 하는듯한 친구왈 판관대란 율곡을 잉태한 장소로 천혜의 명당이기에 이 주변에 땅을 사서 모텔을 짓고 신혼 부부들이 이곳에서 잉태한다면 좋은 의미일 것이라 자기 아이디어라고 자랑하길래 속으로 웃고 말았지만 기실 그 이야기는 당시 판관대 비석의 명문을 다시 써야한다는 본인의 글에서 독자들의 재미를 위하여 적나라하게 쓴 글이란 점이다.
만약, 지금 율곡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하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의 답은 오죽헌이라 합니다. 그러면 신사임당 고향은 어디입니까 하고 다시 물으면 그도 오죽헌이라 합니다. 그러면서 뭔가 잘못되었단 느낌을 표현합니다.
물론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외가의 2대째 외가로 신사임당은 최응헌의 외손의 외손에 딸입니다. 그러기에 신사임당의 부친 신명화공은 서울 사람으로 40대에 진사에 합격하여 양반반열에 오르지만 사화에 꼬리가 물려 멀리 처가인 오죽헌으로 내려가 살다 말년에 서울로 올라와 서울서 사망합니다.
그러기에 신사임당이 결혼시 부친의 3년상을 강릉에서 지내고 하는 표현도 오류이며 기실 사임당 신씨는 신공의 둘째딸로 서울 집에서 만 2년의 부친상을 지내고 봉평 백옥포리에 장만한 신혼집으로 내려가 살림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 부분에 본제를 넘어서는 이야기가 좀 길어지지만 신공은 사위 이원수공에게 신사임당에게 가르칠 것도 많으니 멀리(한양)까지는 시집을 못보내겠다 하였다. 어쩜 신공은 이원수공의 직업이 조세를 징수하여 수로로 운반하는 계절적 한직이란 점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단서를 달지는 않았슬까 합니다만, 기실 이원수공은 말년에 덕수 이씨 문중의 힘에 의해 종 5품의 판운수운에 오르는데 판운수운이란 오직 한강수계를 오르내리며 조세를 받아 마포까지 운반하는 직책이며 그러기에 신혼초 수운직에 종사할시 봄에는 각 고을의 파종현황으로 세수를 잡고 가을철 수확후엔 징세하여 한강으로 실어 나르는 직책이라 겨울철엔 농한기란 점으로도 이해가 가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원수공의 직책을 간파한 신공은 고명한 딸을 가까이 두고 아들잡이로도 생각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명주의 끝으로 한양이 가까운 봉평 백옥포리에 신혼집을 장만하여 준 것이다.
그래서 율곡년표에 보면 신사임당은 신혼시부터 18년간 백옥포리에 생가를 두고 살았으며. 결혼 12년차에 율곡을 출생하였기에 결론적으로 율곡은 백옥포리에 6년 살았던 것입니다. 율곡이 오죽헌에 더 많이 살은것도 아니고 부친이 한직인 겨울철에는 이곳 백옥포리 집에 살았지 이원수공이 오죽헌에 살았단 기록은 없다. 율곡에 출생지는 외가인 오죽헌이지만 율곡이 지금처럼 주민등록이 있다면 판관대의 평창이란 점 입니다.
(서울로 이사간 집은 오죽헌의 외조모가 율곡에게 제사를 지내줄 것을 부탁하며 서울에 있는 집을 주었으며 네째 딸의 아들 권화에게 벌초하여 줄것의 답례로 오죽헌을 유산으로 준 것이다)
이 긴글은 여기서 멈추고 그럼 판관대가 율곡을 잉태한 장소라 한 점은 무엇때문일까?? 이러한 궁금중은 우리나라의 걸출한 인재는 모두들 총명한 신동으로 태어났다고 하지만 율곡은 이를 넘어서 잉태지란 수식단어를 가진다. 잉태지란 세계 역사에도 그런 유래가 없는 남의 신상까지 역사에 동원해야 하는 우스운 이야기에 그 이유는 무엇일까??
율곡이 고향이 판관대로 이곳은 당시로서는 강릉부 소속이었고 외가도 강릉으로 율곡은 자연 강릉사람으로 생가니 외가니 하는 구분도 필요가 없었슬 것이다.
그러나 1904년 행정체제의 개편으로 봉평, 진부등은 강릉에서 평창군으로 이관되었다. 그리고 이곳 평창땅이 율곡의 생가라 하기도 전에 일제 강점기를 맞이했으며, 해방이후에 오죽헌쪽의 강릉사람들은 9선 장원급제의 대 학자 율곡가 강릉사람일텐데 하느 느끼에 강릉이 고향이란 이야기는 못하고 다만 오죽헌이 출생지라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 봉평사람들은 율곡의 고향은 평창이요라고 주장하지를 못하고 오죽헌이 출생지라고 하는것에 감정적으로 그럼 판관대는 잉태지요하고 출생지에 반박을 한 것으로 유추해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이 율곡이 고향을 상실하게 되는 과정상의 이야기로 이해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점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평창인들은 이곳이 고향이라고 못하고 오죽헌에서 출생지라 주장하니 이 말에 과민하게 잉태란 단어로 대응했기에 이로서 봉평은 율곡의 고향이란 주장도 못했슬뿐 아니라 율곡의 고향고 상실케 한점입니다. 스러기에 역사는 바른 정사로 초연하게 해ㅆ어야 하는 점입니다. 이것이 본인의 주관적 생각이지만 이렇듯이 위 신문기사에서 성황단에서 백의 의병의 넋을 기리는 제를 지낸다는 어패는 먼 후일 율곡의 예에서처럼 후일 어떠한 피해를 줄지 알 수 없습니다.
위 신문의 이러한 어패와 오류의 기사는 기자의 잘못으로 치부하면 안 됩니다. 중앙신문은 각 분야의 전문 기자들이 제 분야를 논하지만 지방신문의 기자는 전방위적으로 모든 기사를 전문성있게 취급하기에 어느 누구도 불가능할 것이고 다만 지역 화제의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하여 기사화 하였기에 위 신문의 잘못이 아닌 노산축제의 집행부의 오류이란 점입니다.
노산이 성황사에 올라 백의 의병의 넋을 기리는 성황제가 있겠습니다하고 식순을 멘트했슬 것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러한 전문성, 성황사와 성황단의 구분도 특이한 전문성을 요구하는바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고 또한 평창의 역사서에 여러 부분에서도 이런 용어나 이해의 오류들이 나타난다.
과거의 역사란 현재와의 대화입니다. 역사는 잘났다고 숭앙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이 지방의 고유의 칼라는 무슨 색이며 우리는 어떠한 유니폼을 입고 있는가에대한 물음에 역사는 필요한 것이고, 더 나아가 오늘을 미래로 가기위한 도전의 준비에 항상 역사는 인용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위의 노산 문화제만이 아닌 평창의 모든 부분에서 역사인용은 문제를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에를 하나 더 들어 봅니다.
요즘, 평창에선 평창군지를 만들기 위해 이장님, 체육회장님 각 면장님들 모두 수고하시고 계십니다만 어떤 분은 저에게 평창역사를 좀 써달라는데 본인은 그간 평창역를 많이 정정하였던 바 정정의 새 역사관을 간단한 글로 서술하면 이해해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에 하나의 예를 들면 여만리 강변 여울옆에 지금은 제방으로 수몰된 두기의 돌 누적단을 인터넷이나 평창분들은 이담이니 되담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조선시대엔 기록이 없으니 멀리 고려시대 몽고난 정도에 적군이 노산성을 향한 공격용 城으로 이야기 합니다만, 한림대의 사진도판 책에선 이를 고구려 초의 무덤양식인 적석총이라 합니다. 마치 당시의 평창사람들은 장마가 지면 수몰지역인 이곳에 무덤을 쓴 청개구리같은 심보라는 말처럼,,,학자들은 말도 안되고 상식이하의 썰을 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본인은 여만리 서낭단은 쌍기의 돌 누적단으로 아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돌 누적단이라고 주창하였습니다.
이 돌누적단의 크기 사이즈를 옛날에 실측하신 분의 증언에서 서낭단이란 저의 주창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요즘 평창군지 기록채집에서 본인이 이를 기록한다면 당연히 이담이나 되담이 아닌 새로운 서낭단이란 주장할 것입니다. 아마도 평창 역시에서 10개 이상을 본은은 새로운 이해로 기록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한 생소한 이야기에 이해보다는 반감이 더 작용될 듯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하나의 가상으로 어느 마을에서 새로운 이냐기가 나오면 곧바로 수록할 것입니다. 그럼 이 두가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군지 발간이 30년 넘어서 그간 다 틀리기에 새로히 작업한다는 그 효과는 무엇인가?? 역사는 언제나 새로운 기록이 발굴되고 다시 수정되어야하는 불가피성을 가지는데 평창은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새로운 역사의 입증입니다. 이를 어떠한 방식으로 누가 입증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아마도 현재로선 평창의 특수성, 현장성의 정체성을 잘 모르는 감수자의 주관적 견해가 섞이는 판단이란 점입니다. 이 점의 글이 문제가 된다면 그 실증의 예를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아에 지금 간단히 멘트하면 이에 감수자 장정룡교수는 국구사우 세미나 기록에서 보면 중리 농악대는 노산성에 올라 장군당에서 농악을 한다는 이만년씨의 증언을 이를 장군단(위에 서술하는 국행성황사)에서 접신 과정이라 표현합니다.
역사의 이해는 각기 다른 견해를 표출하지만 본인으로서는 국행성황사가 부정을 방지하고자 호랑이도 부정으로 보는데 왜 중리 서낭제의 신에게만 감응하는가 하는 문제는 주관적인 견해란 생각입니다.
그러기에 감수자 이전에 소 위원회라도 구성하여 여러 의론을 수렴하여 보다 더 객관화 시키는 작업이 곁들어져야 더 좋을 것이란 견해입니다.
물론 장정룡교수가 감수한 평창아리랑 책은 저로서는 수백번 뒤진 책으로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어 지금도 감사히 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아쉬움은 평창아리랑의 제 이론과 성격의 규정의 논고가 없고 산의 메아리란 한 단어만 서술한 점입니다.
바로 이전글에서 "한국 구비문학 대계 평창군 편"의 소감문에서 이 책은 6~700여 페이지 분량으로 박사란 사람들 네명에 의해 평창의 구전으로 전해지는 구비문학을 채집하여 국가 기록원에 보존한다고 한다. 하지만 박사들 이러한 평창의 구비 전승 이야깃 거리들을 채집하기 전에 평창에 관한 특수성과 보편성의 정체성을 좀 준비해 보고 이 임무에 임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다만 각 읍면 마을회관등지를 돌아다니며 촌노들이 무조건 얘기하는 그대로 발췌하여 기록한 것이기에 이러한 수고는 비용높은 박사들이 할 필요없이 알바들이 해도 충분한 짓거리이다. 그것은 왜냐면 어떤 것이 정말 구전된 평창의 정체성을 가진 구비문학인지 아니면 요즘 매스 미디아의 전파에 의해 유행으로 번진 평창의 것이 아닌 일반적 유희조의 이야기인지 최소한 이런 구분은 하여서 발췌기록하였어야 한다.
평창아리랑의 고형은 후렴이 없다, 한데 후렴이 있는 아라리를 부르는것을 채집하였다면 그 가락은 평창아라리가 아닌 정선 아라리임에 분명하다. 최소한 이러한 기초적인 평창의 정체성을 상식으로나마 숙지하고 기록하였다면 정선 아라리가 전파를 타고 촌노들의 심심풀이로 올겨진 가락의 가사들이 (정선 아라리와 평창 아라리는 거의 대다수의 사설이 동일하지만 그 차이는 가락의 음율이고 또한 후렴의 있고 없고의 차이로 나타난다) 그러기에 후렴이 있는 아리랑을 채집하여 기록하면서 이를 동일한 평창아라리라고 취급하면 잘못의 오류인 것이다.
그러나 네명의 박사들은 자기네 주관이나 기본적 전승 구비개념도 망각한체 촌노들의 발음 그대로만 채집하고 기록하였는데 그것의 일부 구전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요즘 매스컴 영향이 더 많은듯 하다.
아마도 박사님들이 평창에 오셔서 세미나를 하거나 이야기를 한다면 이 모두 후세백작의 담을 넘기는 쉽지 않다는 점을 아셔야 할 듯합니다. 과거 국구사우 세미나, 수항리 사지 세미나등에 박사들이 논지가 오류임 몇가지 사실은 본인은 분명히 밝히고 잇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구비문학 대계의 평창편 책도 진정 평창의 전통성과 구원되어오는 구비문학의 채집이 아니기에 분명 평창의 향토성을 흐리게 하는 요인을 가지고 있다고 본인은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글의 종미에서 위 신문기사의 노산성의 성황단에서는 매해 노산제의 충의제를 개최한 것으로 알고있다. 이것은 큰 불찰이며 과연 이러한 문제들의 시작과 끝은 어디일까?? 그것은 평창엔 향토사 단체도 있는듯 하지만 유명 부실한지는 모르겠으나 이를 공동의 의견을 교환하는 세미나 형식이나 포럼, 아니 그보다는 월례회를 통한 역사 정립의 연구회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번 군지 발간에 본인이 주창하는 평창역사의 새로운 장들을 악 열개 삽입하면 당장 혼돈이 옴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어드 동네에서 새로운 역사라고 들고 나오면 그대로 반영될 것이다. 이 두가지의 이야기는 동일한 결론으로 처리되어야 하는데 상반되는 차이점은 무멋일까. 그것은 역사 인식의 문제에서 객관화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정립의 역사를 누가 인정하고 알아볼 수 있슬까?? 이러한 문제에 평창 역사는 더욱 혼돈스러워질 것이다.
역사는 과거와 오늘의 만남이란 하는데 이는 오늘 시점에서 필요하기에 역사는 존재하는 것이고 오늘의 시점이 과거의 싯점에서는 변하였기여 역사인식도 변모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이번 군지 채집작업에서도 위의 구비문학의 전철을 밟지 마시고 더욱 중요한 것은 모든 발췌안이 평창의 전통성과 구원성의 정체성이 여부부터 따져봐야 하는데 이러한 연구 시스템이 부족한듯 합니다. 그것은 감수자 주관의 판단으로는 만좃스러운 결과를 도출하기 어렵기때문입니다. 이점이 무엇인가를 밝히고져 한다면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만,,, 역사는 서로 보는 견해에 따라 주관적인 차이의 객관성을 가지기에 일인의 편저의 감수는 극히 위험하다는 생각이란 점입니다. 아뭏튼 좋은 군지 발간을 기대합니다.
이상과 같이 볼때 평창엔 역사 시스템이 원활치 못하기에 이를 새로히 창출하든 보완을 하든 새로운 면모를 갖춰야 할듯하며 또한 역사는 제 마음대로의 고무줄 늘구는듯 관점도 없아 아무렇게나 서술하는것이 아니란 점으로 앞으로는 평창역사에 대해서 동일성의 부여와 이를 동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연수 프로그램의 커리큘럼의 코스도 필요한 것이란 점을 이야기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그리고 또한 본 글과 본인의 여러 글들에 반하는 관점의 사안이 있으면 언제든지 멘트를 기다립니다.
평창역사를 위한 논쟁이라면 항상 기꺼히 본인의 역사관에 의한 관점을 논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019, All Rights Reserved.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平昌歷史 史觀定立'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팔석정의 역사사료의 고찰에 의한 제 연구 (0) | 2019.08.18 |
---|---|
미탄 "육백마지기" 어원의 재고찰 (0) | 2019.08.03 |
대상리 사지(岸井寺址)를 찾아서 (0) | 2019.07.09 |
육백마지기 어원에 대한 문의에 답을 드립니다. (0) | 2019.05.18 |
우통수(于筒水)는 한강의 발원지임에 변함이 없다. (1) | 2018.10.19 |
평창에 남겨진 역사과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0) | 2018.07.30 |
평창경찰서 오층석탑의 설명 (0) | 2018.07.13 |
『조선고적도보』로 보는 평창읍 유동리 5층 석탑과 동북 5층 석탑 (0) | 2018.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