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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평창에 남겨진 역사과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창의 역사방관 고발

 

 (평창에 남겨진 역사과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 가리왕산 碑

 

가리왕산은 발왕산에서 발원하여 차령산맥으로 이루는 해발 1560m로 백두대간의 지붕으로 평창군과 정선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옛날 맥국(貊國)의 가리왕(加里王)이 이곳에 피난하여 성을 쌓고 머물렀으므로 갈왕산(葛王山)이라 부른다고 하며, 북쪽 골짜기에 그 대궐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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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간행된 <조선환여승람>에는 ‘갈왕산’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일제를 거치면서 받침 발음이 어려운 일본인들에 의해 ‘가리왕산’으로 바뀌었고,  ‘王’자가 다시 ‘旺 ’자로 바뀌었다는 것.1961년 건설교통부가 최초 고시한 산 이름 중가운데에 ‘旺’자가 들어간 산은 평창 가리왕산(1561m), 양평 금왕산(488m), 영동 대왕산(304m), 평창 발왕산(1458m), 화순 선왕산(414m), 밀양 열왕산(663m), 서울 인왕산(338m), 괴산 주왕산(408m), 평창 중왕산(1377m), 창녕 화왕산(757m) 등 모두 8곳이다.


이중 1995년 이후 ‘王’자로 변경 고시된 산은 가리왕산, 발왕산, 인왕산, 중왕산(주왕산) 등이다.
1978년 발간된 <정선군지>에 의하면, 고대 부족국가였던 맥(貊)의 갈왕(葛王)이 예(濊)의 침입을 피해 이 산으로 피신했다고 하여 갈왕산이라 불렸으며, 평창군 진부면 장전리 장전계곡에 남아있는 대궐터라는 지명이 바로 갈왕의 궁궐터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가리산(加里山)’이란 이름도 발견된다.
대동여지도 등 19세기 경 발간된 고지도에는 ‘가리산’이라 표기되어 있다.곡식이나 땔감 등을 쌓아둔 더미를 말하는 이 ‘가리’는 이 산의 형태가 낟가리를 닮았다는데서 연유한다. 가리산이란 이름은 이곳 말고도 포천 가리산(774m), 홍천 가리산(1051m)과 설악산 가리봉(1519m) 등이 있다.


한편, 정선문화원 배기선(71세) 원장은 이런 설들은 모두 누군가 지어낸 얘기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이 산의 이름은 원래 ‘말갈산’으로 불렸는데 이는 거란의 지배를 받던 말갈족들의 침입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 한다. 고려 때 거란족들이 쳐들어와 대궐터라 부르는 곳에 주둔해 있었고, 이들이 끌고 온 말들이 1만 마리가 넘었다고 한다. 이때 말들이 하도 많아서 ‘말갈산’이라 불렸고, 세월이 흐르면서 가리산 등으로 불리다가 가리왕산이라는 이름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런 얘기들은 배 원장이 어린 시절 마을 어른들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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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여러 이야기중에서 본인의 이해로서는 맥국의 갈왕이 살았다는 기록이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옛날 고조선은 예국, 맥국, 삼한의 한(韓)족이 서로 충돌시 제정일치사회응 만든 나라였다.

예와 맥족은 북방민족으로 대관령을 두고 강원도의 중원의 맥족과 영동지방의 예국으로 분포되고 있으며 춘천에 가면 맥이란 단어와 강릉은 예란 단어를 많이 쓰고있다.

 

우리민족은 남방문화가 아닌 예, 맥족에 기인한 스키타이 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과거 옥저의 동예가 번성하여 태백산맥의 嶺을 넘어 강원중부권으로 유입된 듯, 맥족의 부족국가들은 태기산으로 피하여 태기왕, 또한 갈왕산에 갈왕을 나타내는듯 하다.

그리고 말갈족은 수, 당시절의 북방민족으로 국가도 아닌 다수의 부족사회로 이루에는 여진족으로  우리민족에게 끌리어 다니고 또한 우리에게 융화된 부족국가로 여진족은 거란의 지배하에도 있었지만 거란의 지배하에 말 1만마리는 좀 이해되지 않는다. 고려시대에는 강동6주에서 거란의 지배하의 여진족을 방어하였다.

 

하여간 1995년 건설교통부는 旺자를 王으로 바꾸어 변경고시하였는데, 이 비는 그 이후에 세운듯 하고 누가 세웠던간에 평창과 정선의 행정은 이를 수정치 못한것은 직무유기란 점이다. 아니면 일본놈 아들이든가...

 

부족국가의 임금이 거처했다는 기록에서 연유하여 葛王山이라 하였다면 일본 쪽아리들이 갈자가 혓바닥이 안돌아 가리라 했고 왕(王)자는 개명하며 旺(성할 뢍)자로 변경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놈 혓바닥 못굴려  "가리"라고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일본 조선사 편수회 아래의 쪽바리넘들에 의해 旺자로 바뀐것은 한문의 뜻보다는 旺=日+王 즉 일본놈 왕이라고 뒤바꾼 것이다.


 자는 그대로 놓고보면 日자 王자 즉 일왕이 된다..

즉 갈왕은 일본왕이란 뚯이다..아주 간악한 쪽바리덜,..가장 흉칙한 단어로 만들고 있다. 민족의 영산에 일본놈 왕이라니.. 직무유기 하지말고 얼렁 바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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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벽파령 碑

 

- 해발 980m -


 

  갈왕산 안미골에서 정선을 넘는 해발 900여m의 백파령이 있다. 그곳에 20017년 정선이 성마령 시비를 세웠다. 벡파령 정수리에다가 왜 정선문화원이 설치고 장난질 하는가...이러한 비는 한켠에 보기좋케 마련해야 할듯하고 비석 모양새도 꼭 정선안들 닮은듯,, 샤프하던가 자연스럽지도 못하고, 돌을 가지고 나무막대 받친듯한 모양새를 만든는게 더욱 꼬질하다.

 

  탑에서 처음에는  목탑이 수명이 짧아지자 정림사지 탑에서 석탐이 목조 가구수법을 나타내 보였는데, 그러한 이미지 추구도 아니고,, 자연스럽다는 감른 인공으로 만들어서 그 재질의 성질을 이용하면서 가장 인위적인 티를 나타내지 않았슬때 자연스러운 것이지 여기 돌이 무거워 땅이 꺼질것이나 각목같은 석재를 받쳤다고 한다면 좀 더 어자러운듯,,,

 

  시비 앞면에는  간단한 백파령의 주제어나 쓸일이지 주렁주렁 자기네 사설을,,더욱 우스운것은 뒷면의 원천석 詩이다.

원천석은 원주 원씨의 중시조로 방원의 스승으로 방원이 왕이되자 왕사로 모실뜻에 원천석은 치악산으로 들어가 칩거한다. 할 수 없이 태종은 치악산 둘레는 세금을 반만 장수토록하여 치악산으로 만은 사람들이 이사를 했다 한다,

또한 원천석은 문인으로 고려말 충절지사들이 찾아오는등 그의 명성은 높았지만 위 시지는 백파령에 올라라고 되어 있지만 그 서정성 내용이 벽파령과 갈왕산의 자연을 담은 내용은 아닌듯 하다.

 

  이 詩에서 벼랑밑 바위로 기어서라든가 호수는 어디를 지징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기에 만약 원천석이 어느 한 부분을 다녀가면서 시를 읊었다 하더라도 이 시는 가리왕산을 지칭하기엔 그 묘사의 서정성이 비약적인 것도 아니란 점이다.벽파령의 碧(푸를 벽) 자에 받침이 石자가 들어가 있어 막연히 보기엔 기암의 산으로 여길 수 있으나 가리왕산, 청옥산 모두 토산土山)이다.

 

  본인의 이해로는 원천석은 이곳을 다녀가며 삶에서 느낀 감정을 시로 읊조린 것이 아니라 벽파령이라 하면 마치 가암괴석의 바위의 석산으로 이해했던 것은 아닌가 의문한다. 원천석이 백파령을 다녀갔던가 이색이 정선을 다녀갔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그러기에 의문은 의문으로 끝난다손 치더라도 이 시는 벽파령의 산세를 묘사한 시로는 부적격이기에 원천석의 명성이야 어쩧든간에 본인으로서는 이 시는 벽파령에 내걸만한 시가 아니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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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창읍 천동리에 (가칭) 김삿갓의 묘도 방치할 것인가?

 

 

  평창읍 천동리 하 도마치에 두기의 묘, 김병연(일명 김삿갓)과 그의 아들 익균의 묘로 의심되는 위,아래의 두기의 묘는 흐르는 세월과는 아무 상관없이 시대를 초월한듯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없이 조용히 누워 있다.

 

  영월에서 김삿갓에 대하여 영월 백일장의 장원시에서,,우선 당시 영월은 백일장이 열릴만한 인구가 되었슬까 하는역사적 의심에 또한 김병연은 홍경래난때 조부의 반역죄로 폐족이되어 당시의 신분표시에 백일장의 향시의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 또한 향시제목에 조부인 김익순을 탄하는 주제에,, 장동(안동)김씨이고 학렬은 순자돌림인 김익순을 탓하며 우리가 보는 김삿갓의 영리함에 모순되게 김삿갓 스스로의 족보는 모른다는 어패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김삿갓은 영월 깊은 산속에 숨어살았다. 숨어산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고 당 시대상에 도덕적 규범은 무너지고  양반들의 횡포에 안동김씨로서, 폐족이기에 양반들의 린치가 무서워 숨어살은 것이다.

 

  이러면서 김삿갓의 아들 익균은 전라도 화순에서 객사한 아버님을 모시고와서 와석리 생가로 가는 길목 노루목 삼거리에 김삿갓 여기있소 하고 묘를 썼슬것인가?? 그러면 숨어살 의미도 없다.

또한, 김삿갓의 트레이드 마크인 삿갓은 당시에 모자로 많은 사람들이 쓰고다닌 만들기 쉬운 보편적 모자이다.우리는 그를 너무나 의식하고 그러기에 무척이나 잘못 판단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또한 80년대에 정대구의 박사논문에 와석리 생가가 밝혀지자 당시 영월문화원장 박영국옹(당 72세)는 길도없는 와석리 골짜기를 수없이 탐문하며 봉화로 넘는 노루목 삼거리의 무연고 묘를 학계에 이곳이 김삿갓 모라고 건의하여 당시 학계는 어느 학계인지는 모르지만 반대의 의견도 있었지만 그곳이 김삿갓 묘가 맞다고 인정해 준 것이다.

 

  누구나 이를 알면 의심이 가긴 마찬가지 이겠지만 본인은 이러한 문제에 도저히 이해가 되지않아 일전 "김삿갓은 죽어서 천동리를 다녀간듯''이라는 글을 게제하였었다.

이후 평창의 두분의 향토사학자님이 천동리를 다녀가면서 현지 선배님들에게 증언을 듣고 하 도마치 산속에 방치된 두 기의 묘가 김삿갓과 아들 익균의 묘라는 (가칭) 증언을 들었다 한다.

 

  여기에 향토사학자님들은 아직 인정되지 않았기에 가칭이란 꼬리를 달았지만 그 증언에서는 3년전 종손분들이 이곳을 찾아와 제를 지내고 도미하였다 한다.

 그리고 안동 김씨 문중에서도 이미 이곳을 다녀갔으며 인터넷상에 글 하나에서는 종손분들은 이제 영월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한다(그 이유의 하나는 알지만서도 게시하기는 힘든 이유이다) 그리고 방계 종친회장님들만 영월에 참석하였다 한다.(월보 김관동님의 게시글이 있으며 본인의 의사를 묻지 않았기에 스크랩은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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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0 19회 난고문화 축제사진첨부 월보(김관동30/10) 16.10.02


  그러면 이제 평창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영국에 바이런은 어쩌고 하며 이태백이니 두보니 하면서 우리의 시성, 그것도 민중의 저항정신이 깃든. 꼭 민중적이라기보다는 풍퓨와 해학에 고종황제도 즐겨들었다는 그의 시상들,,

이제 그 시인의 과제가 우리앞에 던져진 것을 알았다면 이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갖춘 정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항간에선 이 묘의 사실 입증에 D.N.A 검사가 확실하다고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영월의 김삿갓묘는 무엇으로 옳다고 이야기 할 수 잇는가??  이제 평창의 조직체는 종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하나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평창의 요구사항은 친자확인의 절차에 의한 유족분들의 DNA 사료검사를 준비해야할 문제까지 갈 수 있고 또한

천동리 묘 두기는 무연고 공시 후에 친자확인 소를 통하여야 할듯한 법적 절차를 준비해야함도 결코 가상만은 아닌 점일

것이다.

 

  일전 평창의 향토사학자 한분은 후배시인으로서 이 묘를 벌초하였는데 150여년되어 사그라진 조그만 봉분에 인고의 세월을 비웃기라도 한듯 비스듬히 누워 자란 소나무 뿌리는 돌멩이만 닿아도 두개로 갈라지기에 그대로 놔 두기로 이야기 하였다.

아직도 김삿갓은 세월을 탓하는 것을 알기라도 한듯 봉분에 피어오른 소나무 한 그루도 비스듬히 빗겨기며 혼자서가장 무덥다는 오늘 지금 이시간에도 김삿갓에게 조그만 그늘 한 점을 선사하고 있슬 것이다.

 

  이제 평창은 이러한 사실속에 평창에 남겨진 하나의 과제이다.

죽어서도 150여년 아직도 숨어다니는 방랑시인 김삿갓의 긴 방랑응 알았다면, 우리는 이제 천동리에서 그의 방랑의 마침표를 찍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시민들 곁으로 다가와야 할 것이다.

 

--------------------------------------------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