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통수(于筒水)는 한강의 발원지임에 변함이 없다.
후세백작
오대산 상원사에서 중대 사자암으로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자그마한 길이 하나있다. 이 길을 따라 40여분쯤 올라가면 해발 1,200m 지점에 조그마한 우물이 있는데 이것이 한강의 발원지인 우통수(于筒水)이다(평창 우통수, 강원도 기념물 제88호) 우통수는 한중수(漢中水) 또는 강심수(江心水)라 불리기도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우동수(于洞水)가 지금의 우통수로 변화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우통수는 현재까지도 우물은 마르지 않고 있다. 속리산 삼파수, 충주 달천과 함께 조선의 3대 명수로 전해진다. 땅 속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의 형태가 아니라 암석에 생긴 절리를 따라 주변 바위에서 흐르는 물이 고이게 되면서 우물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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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아래 태백시의 가뭄들의 뉴스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다>
태백시등 강원 산간지역의 극심한 가뭄은 1985년 기상 관측이래 처음이다.
이번 가뭄의 피해는 생활용수를 책임지고 있는 광동댐의 저수량 부족에서 시작됐다.
광동댐은 총저수용량 800만t으로 태백·정선·삼척·영월 지역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1984년 지어졌다.
우리나라는 4~9월에 내린 빗물로 나머지 6개월을 살아간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형상 가파른 지형이기 때문에 비가 와도 금방 흘러내려가 버린다. 때문에 제대로 물을 잡아두지 않으면 갈수기에 심각한 가뭄을 겪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 기상청은 8~9월에 280㎜가 내릴 것으로 예측했다. 수공은 광동댐 수위조절을 위해 물을 일단 방류했다. 이 댐은 원래 수문이 없는 물넘이댐이었다. 물이 차면 자연히 넘쳐 흐르도록 설계된 것이다. 그러나 2002년, 2003년 태풍 매미, 루사 등 대형태풍을 겪으면서 홍수방어능력을 갖춘 댐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4개 수문을 설치했다. 광동댐이 8~9월 사이 476만t을 방류한 이유다.
그러나 예보는 빗나가 예상보다 훨씬 적은 138㎜밖에 내리지 않았다. 광동댐 수위가 낮아져 충분한 물을 공급하지 못한 것이 가뭄 피해를 키우는 하나의 원인이 된 것이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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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가뭄 피해 광동댐 의존율 높은 탓
우리나라의 연평균 강수량은 1245㎜로 세계 평균 880㎜의 1.4배지만 인구밀도가 높아 1인당 연강수량은 세계 평균의 8분의1에 불과하다. 또 계절별 편차가 심해 연강수량의 3분의2가 홍수기인 6~9월 사이에 집중된다. 그나마 산악지형 이라 금방 흘러가 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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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통수(于筒水)는 한강의 발원지임에 변함이 없다
위 뉴스에서처럼 황지의 2009년 가뭄은 수문이 없던 광동댐에서 매미, 루사같은 태풍을 대비하여 홍수방어를 위해 댐의 물을 빼 버린후 가뭄이 들어 그렇다고 이를 인재라고 주장해야 옳은 것일 듯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인제 뒤엔 더 큰 문제를 앉고 있는 것입니다.
구름이 대관령을 넘기에는 위로 상승해야 하지만 너무 무거운 탓에 산무우에 걸쳐저 영서지방의 산간에 비를 뿌리고 만다. 이로서 태백산맥 영서 산간지방은 집중호우도 발생하지만 산마루 넘는 태백지방은 위 그래프에서 보듯 우리나라 전체 평균 강수량의 절반인 연 500mm의 수량을 기록하며 2007년에 한강의 발원지를 검용소로 변경하였는데 때마침 하늘은 이를 반응이라도 하듯 2009년에는 150mm정도 내리며 극심한 가뭄을 기록하였다.
이로서 위 기사에서 보듯 황지지역은 개천바닥엔 물이없어 개구리가 모여서 전부 숨을 못쉬어 폐사하고 도룡용은 말라죽고 사람들은 목욕을 하는게 사치같다는 뉴스에 변비도 걸리는등 가뭄속에 화장실 물이 없어 아마 냄새가 시가 전역에 진동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구름이 태백산맥 넘는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강수량이 원래 적은 지역이란 점에서 이 지역의 생활용수를 위해 1984년에 광동댐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광동댐을 건설하기 이전에 검용소 아래의 골지천은 가뭄이 없었었다면 무엇이 인재고 광동댐은 뭐하러 만들었겠는가??
그러기에 그곳에 이번 가뭄에 말라 비틀어진 천변 13km 이상의 천이 비가 올때만 강물이 흐르던 건천수였을 것이란 점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고 골지천 13km가 2009년 태벡의 극심한 다뭄에 도룡용이 말라 죽고 개구리떼가 숨을 못 쉬어 죽었지만 광동댐 건설 이전에는 평시에는 물도 없는 마른 천이기 때문에 광동댐 이전 이조 역사까지에서도 도룡용이 말라 죽었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과거의 검용소는 하천도 없었고 검용소란 자체의 이름도 근자에 이를 발견한 문화원장이 지은 것이다. 그러기에 우통수는 한강의 발원지임이 틀림없는 것이며 삼척부사 허민수(허목 선생)도 이러한 바를 모르고 우통수 예찬의 기록을 남겼던 것은 아닐 것이란 점이다.
아래의 (2009년 황지의 가뭄에 대한 뉴스들)들을 보면은..
이 뉴스들을 보면 경동댐의 하천은 경동댐 만든 다음부터 물의 채널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수로란 점이다
따라서 만약, 이제 우통수 아래에 인위적으로 실오라기 같은 물 수로의 채널을 100km 만들고 우통수의 물을 이곳으로 통과하여 한강으로 흘러 보낸다면 이는 현재의 검용소의 거리보다는 약 60km 더 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황지의 경동댐 수로는 필요에 의해 만들었지만 본인이 만들겠다는 우통수의 수로 채널은 장난이라고 비난한들 두개다 모두 인위적이 되는 것이다.
필요던 필요악이든 목적이 아니라 방법론적의 문제에서 인위적 행위란 점이 똑같다.
그러기에 인위적 수로가 아닌 원래의 길이로는 우통수가 더 길다 하겠다
국가기록원은 어디에 기준을 두는가? 쯪
그러기에, 국가 기록원이 어쩠던간에 우통수(于筒水)는 한강의 발원지임에 변함이 없다.
우통수(于筒水)에 대한 문헌 기록들
◈오대천 우통수, 금강연 시편
남한강의 시원지는 오대산 오대천 위쪽의 우통수라고 알려져 왔는데, 국립지리원이 1987년에 실측 조사한 결과 삼척시 금대봉의 검룡소가 최장 발원지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하지만 이미 신라 시대부터 신비의 샘물인 우통수를 한강의 근원지로 삼았다.
◈“대산(臺山) 오만진신(五萬眞身)” - 삼국유사 3권 (발췌)
삼국유사’에 따르면 우통수 곁에는 이미 수정암(현재의 서대 염불암(念佛庵)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신문왕의 두 태자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이 오대산 속에 이르자 푸른 연꽃이 갑자기 땅 위에 피므로 형인 보천이 여기에 암자를 짓고 머물러 살았으니 이곳을 보천암(寶川庵)이라 했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600여 보(步)를 가니 북쪽 대(臺)의 남쪽 기슭에 역시 푸른 연꽃이 핀 곳이 있으므로 아우인 효명이 또 암자를 짓고 살면서 각각 부지런히 업(業)을 닦았다...두 태자는 항상 골짜기 속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부면지(1993)에는 우통수의 3가지 특징을 기록하였는데 첫 번째로 순수한 맛이 으뜸이어서 이물로 차를 다리면 茶味가 독특하고, 두 번째는 차기가 얼음보다 강하여 얼지 않고, 세 번째로 물빛이 푸른 듯 희지 않고 신비하다고 하였다.
우통수(于筒水)는 부 서쪽 1백 50리에 있다. 오대산 서대(西臺) 밑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는데, 곧 한수(漢水 한강)의 근원이다.
◈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대산 우통수가 한강의 발원샘이며, 금강연이 발원지이고 봄.가을에는 지방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대목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강원도 강릉대호부 편에 “ 봉우리 다섯 개가 고리처럼 벌려 섰는데, 크기와 작기가 고른 까닭에 오대산이라 한다. 서대 아래 수정암 옆에서 우리샘(檻泉함천)이 솟아나는데 빛과 맛이 여느 물과 다르며, 그 무게 또한 그러하므로 우통수라고 하며, 곧 금강연은 한강물의 근원이 된다. 봄 가을에 그 고을 관리로 하여금 제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한강물이 비록 여러 곳의 물을 받아 흐르나 우통수가 중심이 되어 빛과 맛이 변하지 않으니 마치 중국의 양자강과 같다. 한강의 한(漢)이란 이름이 이로 인하여 되었다.”로 기록이 되어 있다.
세종실록에는 '오대산 수정암 옆에 물이 솟아나오는 샘이 있는데 색과 맛이 보통과 다르고 그 무게 또한 그러하여 우통수라 한다. 우통수는 금강연이 되고 한수의 근원이 된다'라고 기록돼 있다
가로, 세로 각 1.5m 규모의 샘물인 우통수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시대 신문왕의 태자 2명이 머물며 부처님께 차를 공양했다는 신령스런 물로 기록돼 있다
조선시대 지리서인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택리지' 등에서 한강의 근원으로 꼽은 `우통수'에 조선후기까지 많은 지리지에서는 우통수와 금강연을 한강의 시원지로 기록되어 있다.
◈ 1929년에 발행한 "조선환여승람(朝鮮환與勝覽)"의 강원도지리총설 산악편에 “오대산은 일명 청량(淸凉)이며 만월(滿月), 기린(麒麟), 장령(長嶺), 상왕(象王), 지로(智爐)등 오대(五臺)가 산 위로 나열하였으니 높고, 크고, 깊어서 인적이 드물다. 서대(西臺) 아래에서 우통샘이 용출해서 산곡수와 더불어 합류하여 기린동구릉(麒麟洞丘陵)에 이르러 반야연(般若淵)이 되었고, 동대(東臺) 아래에 금강연(金剛淵)이 있으니 4면에 반석 폭포가 날아 내리니 즉 한강의 근원이다.”
◈ 고산자 김정호가 순조 34년(1834)에 제작한 ‘청구도’에는 오대산이 한수지원(韓水之源)이라고 적혀 있다.
또 조선시대 지도에서도 금강연과 우통수 표기를 찾을 수 있는데, 금강연이 표기된 지도는 11종, 우통수가 표기된 것은 5종, 우통수와 금강연이 동시에 표기된 지도는 5종이며, 이 가운데 고산자 김정호가 순조 34년(1834)에 제작한 ‘청구도’에는 한수지원(韓水之源)이라고 표기돼 있다
(사진제공=월정사성보박물관)
이처럼 우통수와 금강연이 한강의 발원지로 규정되고 난 후 매월당 김시습을 비롯해 이이, 허목, 김창흡 등 유자(儒者)자들이 오대산을 찾았다. 오대산을 유람하는 이들은 반드시 우통수와 금강연에 대한 시나 기문을 남겼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려말 선초 선비인 양촌 권근(1352~1409)이 오대산 서대 수정암 중창기( 五臺山西臺重創記)에 쓰기를 "---서대 밑에서 샘이 솟아나서, 빛깔과 맛이 보통 우물보다 났고 물의 무게 또한 무거운데 우통수(于筒水)라 한다,
서쪽으로 수백리 흘러가다 한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가는데, 한강이 비록 여러군데서 흐르는 물을 받아서 모은 것이지만 우통수가 중령이 되어 빛깔과 맛이 변하지 아니하여 마치 중국의 양자강과 같으므로 한강이라 이름짓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마치 중국의 양자강의 경우와 같이 물이 무겁고 단단하다는 뜻에서 중냉(中冷)이라 부른다
중냉이란 중국 강소성 서북쪽의 양자강 샘을 말하는 것인데 그 샘물 맛은 차기로 소문이 났는데 황토가 넘쳐나도 양자강 강바닥을 흐르며 다른 물과 섞이지 않았다 한다. 우통수의 물도 그와같이 긴 여정을 따라 한강에 다다를 때까지도 그 맛과 기운을 잃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대의 밑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으니, 물 빛깔과 맛이 딴 물보다 훌륭하고 물을 삼감도 또한 그러하니 우통수라 한다. 서쪽으로 수백 리를 흘러 한강이 되어 바다에 들어간다. 한강은 비록 여러 곳에서 흐르는 물이 모인 것이나, 우통 물이 복판 줄기가 되어 빛깔과 맛이 변하지 않는다.” 하였다.
◈ “오대산 기(記)” - 허목(발췌)
오대산 서대에서 신정(神井)을 길으니 우통수라 부른다. 산 속의 여러 물이 만나 흘러서 큰 시내를 이루는데, 남대의 동쪽 골짝에 반야연이 되고, 월정 아래에 이르서 금강연이 된다.
◈ “오대산 유람기” - 김창흡(발췌)
오대산의 샘물은 각기 이름이 있다. 중대는 옥계수(玉溪水)라고 하며 서쪽은 우통수, 동쪽은 청계수(靑溪水), 북쪽은 감로수(甘露水)이며 남쪽은 총명수(聰明水)라 한다.
김창흡은 그의 오대산 유람기 마지막 대목에서 이 산의 네 가지 아름다움을 찬미했는다.
1. 이 산은 그릇으로 비유하자면 대단히 덕이 높은 군자와도 같아서 조금도 가볍거나 거친 태(態)가 없다.
2. 깊숙한 숲속의 커다란 나무는 크기가 몇 아름씩이나 되어 구름에 닿고 해를 가릴 정도에 이른다. 청한자(淸寒子) 김시습은 <초목이 우거져 속인이 드물게 찾는 곳으로는 오대산이 유심하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다.
3. 암자가 숲 깊숙하게 자리했으니 어디에 있든지 결하(結夏; 하안거)할만 하다. 이것이 또한오대산의 뛰어남을 이룬다.
4. 샘물의 맛이 특출하게 좋은데 이런 물맛을 맛 보기는 다른 산에서는 드문 일이니 이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뛰어남이다.
◈ 허균은 "우통은 오대산 상원사 곁에 있는데 한강의 상류에 있으며 나라안에 으뜸가는 샘이다(于筒在五臺山山院寺側是漢江上流爲東國第一泉)이라는 말하였다.
호를 惺所라고 스스로 영리할 성자를 쓰던 허균은 (1569~1618)이 남긴 화사명시(和思暝詩)중 "소회"를 쓰면서 소자정에 답한 운을 쓰다(書惺用答邵資政韻)끝 부분에 어느 봄날이 끝날 무렵 차를 끓여 갈증을 달래고 싶지만 어찌하면 우통수의 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 매월당 김시습은 서대(西臺)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드넓은 부처 말씀이 본이요 겉모습 아니고
금빛여래는 헛것인 듯 참이니
산빛을 보고 소선은 일찍이 게송을 남기고
솔가지 그린 위언은 이미 신묘함을 전했네.
우통의 맑은 물은 깨끗함이 옥과 같고
상서로운 향화 부처님 말씀처럼 큼이라
어슷비슷 여러 봉우리 구름 속에 보이니
천녀가 옷깃 여미고 새벽 공양 올리네
◈ 홍만종이 지은 <소화시평>에는 오대산이 한강의 발원지임을 암시하는 시를 찾을 수 있다. .
평창군은 이를 통해 우통수에 대한 역사 및 문화적인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고 스토리텔링을 가미해 체험관광 명소로 조성할 방침이다. 가로, 세로 각 1.5m 규모의 샘물인 우통수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시대 신문왕의 태자 2명이 머물며 부처님께 차를 공양했다는 신령스런 물로 기록돼 있다.
세종실록에는 '오대산 수정암 옆에 물이 솟아나오는 샘이 있는데 색과 맛이 보통과 다르고 그 무게 또한 그러하여 우통수라 한다. 우통수는 금강연이 되고 한수의 근원이 된다'라고 기록돼 있다.
특히 우통수는 삼국유사는 물론 조선조 세종실록과 연려실기술 등 무려 20여개의 문헌에 기록될 정도로 국내 샘물 중 가장 오래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으나 제대로 보전되지 않아 역사적 가치를 잃고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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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은 우통수와 검룡소가 정선 북평면 나전리 (가운데 점)에서 만나는 구글 지도이다.
직선 거리로 보면 검룡소에서 나전까지보다 우통수에서의 거리가 더 멀다. 그러기에 검룡소에서 정선땅을 돌아 나전까지 가기엔 뱀 열마리가 구불 거리는 사행천의 구절양장 지형이라하여도 우통수에서 보다 40여 km가 길다하는 국가 기록원의 말은 요즘 구글의 지도로 다시 재 보아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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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황지의 가뭄에 대한 뉴스들)
◈ 강원 남부 가뭄..생태계 재앙 확산
입력 2009.03.04. 16:19 수정 2009.03.04.
송세혁 기자가 취재했습니다.[리포트]
20여 종의 양서·파충류가 서식하는 한강 발원지 태백 검룡소 일대 계곡.계속된 가뭄으로 계곡물이 바짝 말라 곳곳이 자갈밭으로 변했습니다.그나마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에는 꼬리치레도롱뇽과 개구리 30여 마리가 떼죽음을 당했습니다..<중략>
[인터뷰:홍진표, 태백생명의숲 사무국장]
"가뭄을 통해서 물줄기가 끊겨지면서 좁은 공간에 여러 아주 많은 개체들이 몰리면서 용존 산소량이라든지 먹이의 문제라든 지 이런게 문제가 생기고..."
하천 물이 말라붙어 바닥을 드러낸 골지천 13km구간도 수생동물의 무덤이 됐습니다.바위틈에도, 얼음 밑에도 죽은 민물고기와 다슬기가 널브러져 있습니다.이제 막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들도 집단 폐사했습니다.웅덩이를 가득 메운 물고기 떼는 물길이 끊겨 꼼짝없이 갇혀 버렸습니다.물이 거의 바닥난 웅덩이에선 물고기들이 고통스러운 듯 애처롭게 파닥입니다. 물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에는 물고기와 개구리가 떼를 지어 모여 있습니다.
더욱이 이번 가뭄은 5월까지 지속될 것으로 예상돼 번식기를 맞은 수생동물에게는 치명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인터뷰:박대식, 강원대 과학교육학부 교수]
"번식지가 줄어들게 되니까 결국에는 제한된 공간 내에 많은 개체가 번식하게 되니까 종들 사이에 경쟁이 심화되고요. 경쟁이 심화되면 많은 개체들이 죽어서 없어진다는 거죠."
최악의 가뭄이 이제는 생태계까지 파괴하는 재앙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 한기총,생수 25t 전달.. "가뭄 해갈 될 때까지 기도"
입력 2009.03.06. 19:02 수정 2009.03.06. 19:0
마르지 않는 '사랑' 태백 적신다
'사랑의 생수'가 목마른 강원도 태백을 촉촉이 적시고 있다. 5일 오후부터 전국에 비가 내렸지만 태백지역에는 슬쩍 흩뿌리고 말았다. 먼지를 가라앉힐 정도다.
한국기독교봉사단(단장 조현삼 목사)이 20t을 싣고 와 태백시 기독교연합회에 전달하고, 앞서 5일에는 성결대(정상운 총장)가 강원지역 7개 고등학교와 주민들에게 10t의 생수를 돌렸다. 태백시는 전국에서 들어오는 생수를 모조리 나눠주지 않고 비축하고 있다. 5월까지 비가 충분히 오지 않을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1가구당 2ℓ짜리 생수 6통을 배분하고 있다. 전정호목사는 "40년 만에 이렇게 비가 오지 않은 것은 처음"이라면서 "요즘 태백 사람들에게는 마실 물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제일 고마운 사람"이라고 말했다.<중략>
지하수를 퍼 올려 영업을 하는 목욕탕은 근근이 문을 열거나 아예 휴업에 들어갔다. 태백역 등 공공기관의 수세식 화장실은 못쓰게 된 지 오래다. "집 가까이에 물탱크가 달린 공공화장실이 없는 많은 성도들이 변비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태백=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한강>
입력 2015.11.11. 10:01댓글 0개 서울=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kjhpress@yna.co.kr
▲ 수도공급이 완전히 끊긴 강원도 태백시 철암동의 한 주민이 수자원공사가 나눠준 병물을 받고 기뻐하고 있다.
태백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김 할머니는 얼마 전 동사무소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마당에 있는 우물을 다시 뚫었다. 40년 만이다. “수도도 없던 시절에 동네 사람들이랑 쓰던 우물인데, 이걸 다시 쓰게될 줄 알았겠나. 다행히 우물은 마르지 않았다.”며 힘겹게 두레박질을 했다. 이웃인 김영자(59)씨에게 목욕은 사치다. . 물이 없으니 가장 불편한 것은 화장실 문제다. 집 뒤 야산에 재래식 화장실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뭄으로 일상 생활이 40~50년 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태백·정선등 4곳 용수, 광동댐만 의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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