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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아리랑

다시 서술하는 미탄 "육백마지기" 어원의 재고찰

미탄 "육백마지기" 어원의 재고찰  http://blog.daum.net/kkks1/1681

 

후세백작

 

세금을 계산하기 위하여 사용한 농토의 넓이단위 마지기(斗落)이 아니라 結,卜,束의 단위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세종 26년(1444)부터는 6등급으로 나누게 되었는데 인조 12년(1634)부터 1등전 1결의 넓이는 10,809㎡가 되었다가 대한제국 광무 6년(1902)부터는 1만㎡인 1㏊를 1결로 제정하였다. 1등에서 6등으로 갈수록 1결의 면적은 일정한 비율로 넓어진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시인 1910년부터 약 10여년간 우리나라 전 국토를 측량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지번의 이름이 그때부터 처음 매겨지는 것으로 단위의 넓이는 현대의 평, 정보(ha)등으로 매겨집니다. 그러기에  경작지 이조때 세금을 거두기 위한 단위인 결(結)은 사라지고 일제시대에는 삼각 캠퍼스에 의한 정확한 도형량의 평(坪)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 지금도 평상적으로 통용이 되는 마지기(斗落)이란 단위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근거를 제시할 수 있슬까요??  마지기란 볍씨를 한 말 뿌릴 수 있는 넓이 기준이라면 이는 삼각 캠퍼스에 의한 측지의 평(坪)의 단위보다는 비 과학적이기에 마지기란 용어는 최소한 삼각 측지법에 의한 측량 이전에 사용한 용어임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농지의 단위를 결(結)로 나타냈지만 마지기란 단위의 최초 상한대는 알 수 없지만 일제강점의 1910년 이전에 사용하였슴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해 볼때 청옥산의 육백마지기는 조선시대에도 불리웠는지 아니면 1960년대 이후에 조성된 단아인지는 알 수 앖다. 그리고 과거의 고 지도에는 그렇게 자세하지는 않지만 위 해동지도나 1872년 제작된 평창군 오면(5面) 지도에서는 청옥산도 두만산(斗滿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위 해동지도나 오면지도에서 청옥산은 아직 두만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청옥산에 특이점은 송림 숲을 그리고 그림 여건상 극락암은 위에 표기하였다. 후평과 평창읍 남산 아래의 강변을 따라 송림이 표기되어 있는데 두만산은 황장봉산으로  아누구도 입산을 금지하는 封山東界(봉산동계) 비석이 황정산에 세워져 있다. 당시에 두만산은 화전의 농사를 짖지않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두만산이라 지칭한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서, 대략 1900년대 이전에는 두만산으로 기록한바 두만산이라 불리게되는 이유는 미탄의 어느 지명 유래및 역사 글에서는 斗滿이라는 뜻은 두류가 많이 생산된다고 부른 이름이라 서술했지만 이는 청옥산이라 불리기 전에 두만산이라 불리던 시절에 두류( 아마도 콩, 팥, 서리태 콩등,,) 이 재배되었을까 하는것은 의문이라기 보다 오류이고 斗滿이란 의미는 斗落( 볍씨를 떨구는= 뿌리는 파종을 의미함)에서 斗滿山 정상의 고원부는 넓기에 씨앗이 샐 수없슬만큼 많이 필요하다는 느낌의 넓이를 강조하는 것으로 당시에는 화전의 밭도 아닌바 斗滿이란 넓이가 넓다는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두만산이 청옥산으로 변하고 육백마지기라는 이름의 기록은 하루아침에  변경된 것이 아니라 구전으로 불리어지며 유지되어 왔기에 행정적인 역사서들에 미처 기록되지 않은 듯 찾아보기 힘들며 그간 구전되어오던 미탄 아라리에서 육백마지기란 단어를 역사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과거 미탄의 역사에서 육백마지기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나 구전으로 전하는 미탄 아라리의 기록을 인용합니다.

 

*둥둥재 새조밭 파기 싫거든

         미창(미탄) 담배수랍에(수매) 들병장사 갑시다.

* 한치 뒷산에 두치곤드레 나지미 맘만 같아도

         고것만은 뜯어를 먹어도 봄살은 된다

 

◆ 육백마지기가 화전민들이 만든 단어라는 것에 또 하나의 의문점

6~70년대에 화전민들이 육백마지기를 개간하였다면 당시의 기계화나 축력에 의하기 보다는 인력에 의한 경지정리작업시 아마도 그 전성기 마지막 지점인 1975년정도에서 기준으로 육백마지기라면 모르겠지만 정착초기엔 육백마지기라고 하면 이해력이 떨어진다.

 

 또한 위에서 논한 경작자 논리적인 단위보다는 강원도 일대에서는 논은 마지기를 단위로 하며 밭은 마지기보다는 평이라한다. 즉 이렇게 얘기한다 가령 "논 닷마지기와 밭은 300평 있소"라고 말을 하지 논 닷마지기와 밭 한마지기 있소라고는 하지 않는다. 가끔은 밭 한 두락 있소 하는 표현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밭보다 큰 임야나 산의 단위는 정보(ha와 동일시. 3,000평 기준)으로 임야 6정보라면 600두락의 180,000평이다.

 

그러기에 근대화 이후에는 어렴풋한 마지기의 단위보다는 측량의  지번도에 나타나는 정확한 용어인 평이란 단위로 말하고 있기에 육백 마지기나 육백 두락이란 표현은 6~70년대에 이곳에 화전민이 경작하기 이전 시간대에 사용한 용어로 볼 수 있다.물론 지금으로서는 측량된 측지도를 펼쳐서 재어보면 과연 육백마지기의 180,000평인가 알 수도 있슬 테지만 이를 몇평이요 한게 아니라 600백 마지기란 용어를 사용한것은 측량이전의 눈어림 값으로 봐야 할 것이다.

눈어림 값이란 일반적으로 어림잡아서 5나 10의 단위로 미루어 대강 말하지 (오백 마지기나 천 마지기) 6이나 4등으로 육백이나 사백 마지기등으로는 말하지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육백마지기란 정확한 상태를 이야기 한다면 이는 계획성이 없는 자연의 상태에서 개간이 다 된 시간대에서 나타나야 하기에 시간적으로 모순이 걸리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정확한 역사적 사료가 발굴되지도 못하였기에 화전민들이 경작하며 밭의 단위로 육백마지기란 단어가 새로히 생성되었다고 보기에는 본인으로서는 그 이해력이 떨어집니다.

그러기에 육백마지기란 일전 본인의 주창한 바 육백은 음양의 옛 고어로 금성(샛별)을 의미하며 마지기는 맞이하다라는 표현의 구개음화 현상의 마지하다로 변하며 이를 명사형 준말로 마지기로 복합적 변형이란 점으로 청옥산 마루 정상은 넓은 고원의 지붕으로 이곳에서 금성을 맞이하든 아니면 산 아래 미탄 읍내에서 보면 그 경사값때문에 새벽의 샛별은 조금 높이 떠오르는게 아니라 이곳 육백마루에 걸터 앉는 모습으로 이를 보며 샛별이 내려앉는 마루란 뜻이든 육백마지기의 육백이란 금성을 지칭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나 역사적 정확한 고증의 자료가 없기에 이를 단정하는게 아니라 주창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지는 오백마지기라면 타당성이 결여되지만 육백마지기이기 때문이 그 단어의 뜻과 의미를 내포할 수 있는 범위를 가지기 때문에 아주 그르다고 말 핳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마도 정선 사람들이나 영월 사람들은 이것이다라고 우겨댈 것입니다. 그네들은 정선 아라리가 600년전 전오륜 패거리들이 만든 것이란 역사적 사료나 물증도 없이 김연갑이 연규한씨에게 이보다 더 상한의 가사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슬때 답이없자 그럼 이게 가장 오래된 사설이겠습니다. 마치 요즘 시각으로 이야기하면 한국은 6,25 동란에 빠져 있는데 1952년 일본은 미국과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대마도와 오끼나와를 일본땅이라고 조인 한 것입니다. 이러한 분쟁은 당사국과 인접국이 따져야 하는 점입니다.

 

미국은 일본에게 6,25에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내가 두 섬나라를 인정해줄테니 좀 싸게 만들어라는 이런 억지빈정도 감수해야 하듯이  김연갑은 무슨 권한으로 역사를 마음대로 주물렀는가,,,(어찌 만수산 사설은 전오륜 패거리가 불렀다고 단정하는가...그것은 역사에 증명사료도 없는 하나의 주장일분이다. 본인은 주장은 이 사설도 구한말 청옥산에 올라 나물뜯을때의 노래라고 주창한 점도 있다)

 

 어디 정선뿐입니까?? 영월은 한 수 더 떠서 "82년도 당시 영월문화원장 고 박영국옹은  무연고 묘를 김삿갓 묘라고 학게에 질의하여 다수결로 인정 받은 것이다('82년도 강원일보 기사 참조) 그런데 원래 김삿갓묘였다면 다행일 수 있었으나 이 역사는 그렇지 못하고 김삿갓 묘는 아들 익균과 함께 평창읍 천동리 하도마치라는 삼방산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당시 본인의 글에서 박영국옹이 역사학자 출신이었다면 학계에 이런 문의조차 할 필요도 없었슬텐데.. 역사가 출신이 아니엇기에 문의가 가능했던 점으로 현 문화원장임은 한 평생 역사교사로서 정통 역사가 출신으로 그의 인삿말씀 같은 글에서 영월의 손톱한 역사도 모두 망라하여 새로운 역사관을 창출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속에 김삿갓 문화론은 한 단어도 없기에 고의적으로 누락시킨 점이다, 이는 올바르지 못한 역사창출이라고 본인은 해석합니다. 이러한 입장인데 이때 평창은 뭐 합니까...노 마크 찬스애도 숫을 못 날리는 축구선수는 선수가 못된다는 점으로 평창의 사가들은 모두 죽어 있다고 표현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정선과 영월의 역사에 대한 본인의 여러 글에 대한 명확한 사료나 증명이 없다면 그들의 역사는 그 자체가 오만과 편견의 역사란 점으로 최소한 본인으로서는 매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본인은 육백마지기 어원에 대하여 그 사료나 검증이 되지 않는한 하나의 이론적 설로 제시할뿐이지 그것이 역사라고는 주창하지는 않습니다.

 아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