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리사지를 찾아서
지난 겨울에 정원대님과 동행하여 대상리사지 탑을 찾아갔다. 일명 안정말사지라는 대상리사지는 폐사지로서 지금 매매라고 붙여놓은 개인 주택이 사찰이었는지 알 수도 없었으며 다만 저 멀리 산자락에 방치된 탑재들만이 사찰이 있었슴을 알려준다. 그러기에 사찰이 어디에 위치했었는지 가람배치의 형태도 예측할 수 없었으며, 탑은 왜 산 자락 위에 쌓아두었는지 영문도 모른채 다만 탑재들 하나하나 사진을 찍고 우물터등을 둘러보고 나오며 전 이장님을 찾아가 조금이나마 대상리 사지에 대해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증언에는 우물이 있어서 우물 井자를 써서 안정마을이라 한다하며, 위의 골짜기에 장마때 산사태가 나서 탑을 쓸고 내려갔으며 뱃터의 강 바닥에도 탑 잔재가 있다 하였다. 또한 어릴때 약 6~70여년전 조그만 석조불상을 아마 여자인듯한 세명의 스님이 배로 싣고나와 버스에(당시로선 주천경유 제천행 버스) 싣고 갔다 한다.
증언도 이것만이고 더 이상 알 수있는 것은 없었다.
석탑의 재재를 쌓아둔 위치는 평창군 평창읍 대상리 168-4번지로서 사원지는 222번지로 추정하며, 대상리 사지란 현재의 이곳 지명인 대상리를 딴 지명이며 1967년 발간된 「한국지명총람 2」나 1987년의 「平昌郡 歷史의 遺跡』이란 책에서 이곳 지명을 안정말 마을에서 유래하여 安亭寺로 생각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의 출처는 아래와 같습니다.
* 「한국지명총람 2」 한글학회 1967년
* 「平昌郡 歷史의 遺跡』 강원대학교 박물관 1987년
* 평창 대상리사지; 주택신축부지내 유적 발굴조사 보고서
저자 평창군 강원문화재연구소 출판사; 고려출판사 출판년도 2006 년
* 국립문화재 연구소 「전국문화유적 총람」에서 "안장말사지"라 기록하고 있다.
* 평창군 발행 「평창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1999
「전국문화유적총람」에서는 평창 대상리사지 석탑부재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이 절터는 대상리에서 평창강을 건너 맞은편에 있는 안정말 부락 일대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 지명이 안정사라는 절에서 유래 하였다는 점으로 보아 절의 이름이 안정사라고 생각된다. 현재 절터에는 무너진 탑재와 기와조각이 널려있다. 탑재가 여러곳에 흩어져 있어 원래의 형태는 알 수 없다.
하대중석으로 생각되는 일부 석재가 우물가에 있고, 상대 중석 2매는 밭의 둑방에 옮겨져 있으며, 하대갑석,상대갑석, 1층 옥신석등의 담장에, 옥개석 2개는 물속에 들어가 있다.
상대갑석과 하대갑석은 각 2매씩 석재를 조립하여 만들었으며 상대중석은 4매의 판석을 이용하였는데 양 우주가 각출되어 있고 1층 옥신은 1석으로 이루어졌는데양 우주가 정연하게 이루어져 있으며 윗면에는 22cm×22cm의 방형 사리공이 있다.
옥개석의 형태는 추녀밑이 직선이고 층급 받침수는 4개이다.각 석재의 크기는 상대중석이 높이 78cm, 너비 74cm, 상대 갑석의 넓이 82cm, 두께 20cm, 1층 옥신 71cm×66,5cm, 1층 옥신의 넓이는 104cm이다. 이곳에서 수습한 기와는 평행선 무늬가 4종류, 문살무늬가 1종류, 기하학적 무늬가 2종류로 주로 암기와 조각이다
<안정사의 어원의 의미>
증언엔 안정마을이란 지명은 이곳에 샘이 있어 우물 井자를 쓴다고 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편안할 安자를 연상하여 安井寺로 표기할 수 있겠지만, 그럼 여기서 왜 퍈안하다는 뜻이 샘이니 이 지역과 어떤 연관의 연결고리를 가지길래 편안한 安자를 쓸까하는 의혹이 생긴다.
이러한 이유로 본인은 언덕 岸자를 써야 한다고 밝힙니다. 그 이유로는 언덕 岸자는 묏山변에 厂(기슭 엄)자 안에 사이 干자를 쓰것으로 이 干자는 朱沙干으로 쓸때는 안字로 발음한다. 이러한 의미의 朱沙干(주사안)을 쓰는 것은 여기서는 합당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지만 기슭 엄자(厂)는 산 기슭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바 그러한 에로 접안(接岸), 동해안, 해안선등 모두 언덕 岸자를 쓰는데, 그 이유는 물과 땅이 맞닿는 곳에 언덕 岸자를 쓰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지점을 땅을 물에 언덕이라 표현하며 또한 이 샘은 3m어래 내려져 있기에 이 샘으로 내려가서 보면 산 기슭이란 분위기도 이해가 빠를듯 하다.
그러기에 평창의 안정사는 우물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면 岸井寺라고 표기하여야 옳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이곳엔 우물이 있기에 안정마을이란 기록은 없으며 안정말 마을이라 함에 지번도에도 안정말이란 지명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데체 안정밀이란 무슨 뜻일까?? 안정말마을에 말자는 어디서 영향을 받은 단어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안정마으은 산으로 막힌 마지막 마을이라고 안정말이라 했슬까?? 아마도 조선시대 이후 조계종 주천 법흥사의 말사였는지는 모르겠으나 흔히들 작은 절을 말사라 지칭하는 것에서 안정말사지로 부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안정말이란 부락명이 지어진것은 아닐까 추론도 해 봅니다.
하지만, 이 곳의 근처의 주택 건축시 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기와 와편, 토기 조각등이 출토되며 아마도 이 사찰도 신라시대에서 시작하였으며, 석탑재의 옥개석의 층급이 4층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에도 사찰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짐작하지만 그 본래의 사찰이름은 기록이 전하지 않기에 후대인들이 안정사라 함은 참고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항이지 본연의 사찰이름으로 맞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기에 이 글에서는 현 지명을 따라서 "대상리 사지"로 기명합니다.
위 기록중에 安亭寺라 쓰고 있다.
참으로 딱한게 일반적으로 安靜寺라하면 모를까? 安亭寺라면 스님들이 일상에서 좌선을 하지 亭子에 앉아서 유유낙낙 합니까?? 또는 사찰에 亭자를 쓴곳을 보았습니까?? 이는 어찌보면 한문실력이 모자라서 스님들을 조롱하는듯한 기분이다.
평창군의 "지명지" 감수자는 지명지에 지명의 한문이 틀립니다 하는 발언에 답으로 나는 한문으로 않쓰고 한글로 썼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하였다고 평창에 가면 웃음을 자아내는 코믹한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현존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지명은 한문에 의존했기에 한문 풀이로 그 사상적 배경까지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지명에 우선 순위는 풍수사상적, 음양오행과 비보의 성격을 띤 한문지명이 가장 많은데 평창엔 이 개념의 지명은 두드러지게 만치는 않으며, 지형적 특이성, 형태적 묘사등의 지명들이 가장 많습니다.
지명은 그 지역 얼굴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처음 만날때 얼굴인상의 이미지가 그 사람의 스타일을 읽는 가장 비중이 큰 것이듯 지명은 그 지역을 나타내는 얼굴이기에 이를 한문으로 이해하고 보다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듯 진정 그 동리를 파악하는 작용을 하듯 지명은 그 자체에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입니다.
< 사찰터와 탑의 위치추정>
탑 부재의 위치는 아래에 168-4번지에 있으며 168번지 일대가 사찰이 있었는가란 문제에 답으로는 이곳은 아래 길보다 좀 높은 산의 끝자락 경사지로 폭은 10여m가 안된다. 그래서 우물아래까지 가람배치 형태를 재 보았지만 위의 경사지와 아래의 평탄지와는 이중 구조의 지면일것으로 그러기에 여기에 건물이 있었다고는 볼 수 없으며 절의 가람배치 형태는 좀 넓은 땅인 222번지 현재의 고 건물이 사찰의 법당터이며 그 앞에 탑이 위치했어야 할 것인데 탑의 지대석은 아직도 원위치에 박혀 있다면, 이를 찾는다면 본 사찰의 가람배치를 그나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현재로서는 탑의 부재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약 80여m의 산자락 위에 잇어 이 밭터가 탑의 자리 아니엇던가 의혹스럽다. 그럼 이 점에 아래의 사진 3매를 보면서 추정적 이해를 해 봅니다.
최초의 기록인 인용글에서 보면 탑의 추정위치에서 탑제가 유실되어 약 8~90m떨어진 우물가까지 갔다는 점이다. 이렇게 멀리까지 갈사태였다면 제자리엔 하나도 남지 않았어야 할텐데,,이게 가능한가 하는 생각에 위 인용글을 자세히보면 물가에. 또한 위로 도로를 지나 밭가에. 또한 우물가에로 넓은 범위로 확산되었다는 것은 인위적 작용이란 점이다.
가령 부서진 탑재의 잔재가 남아 마당이 보기 싫게되자 산위로 걷어 치웠고 또한 수항리사지 예에서 보듯 잔재더미는 귀신나온다는 예처럼 주택신축시나 이전에 택지 조성시 이런 잔재는 귀신묻는다는 사고방식으로 (현재가 아닌 예전의 우리의 사고방식은 충분히 그랬었다) 밭 가장자리 또는 펜션이 아닌 공터의 우물가. 또한 물에 반 빠진 옥개석 이 3점은 집터 바로 옆으로 밀린 지점의 공통점으로 보아 원래의 위치가 아니란 점입니다.
또한 밭을 개간시 장비등으로 저쪽 끝쪽의 윗쪽 산 자락으로 치운것이라보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탑재의 위치는 현 고 건축물 앞이었으며 고 건축물도 당시 사태에 함께 침수되고 파손되어 재 복구한 점을 여실히 볼 수 있다.
(아래의 사진 3매는 1999년 평창군이 발간한 「평창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으로 본 책의 재 스캔으로 올리는 것입니다)
위, 아래 사진은 아마도 주택등지에 널려있던 탑 부재들을 산자락에 산자락으로 옮겼고
다시 밭을 개간하기 위해 포크레인등으로 밭 가장자리 윗편으로 옮긴것으로 판단함.
이 부재가 위 인용부에 1층 옥신석(탑신석)으로 사리공이 22cm 이라 함에
따라서 탑재의 전체 폭은 약 70cm정도가 될 것이다.
물가에 떨어진 옥개석 1매로 2층 옥개석으로 추정함며 아래 탑재 사진에 있는듯 합니다
<현장답사>
윗 레포트의 기록에서 2, 3층 옥개석은 물 속에 있다 하였으며 증언자 이장님도 예전에 골짜기 안쪽에서 산사태가 나서 탑이 붕괴되어 배터거리 깊은 물 속에도 탑 부재가 있다고 하였기에 지난주 2차 답사로 강에 두어시간 잠수를 하여 강 바닥을 샅샅히 뒤진바 올해는 아직 장마가 강물을 휩쓸고가지 않아서 물속 시계는 1m가 미쳐 안되기에 바닥 돌들을 하나하나 밟아보고 손으로 만져가며 확인해 보았으나 한 점도 찾지를 못했다.
아래에 게시하는 본인의 1차 답사시 사진에 아마도 두개의 옥개석 부재가 있는듯 하며, 선행 답사자들의 글에 부서진 옥개석 기록을 보면 탑의 큰 부재들은 지금 무져놓은 탑 부재들속에 있는지 다시 확인해 보아야 한다. 여름이라 숲이 우거진 관계로 재 답사는 가을 이후로 미루며 현존 확인되는 옥개석 1점과 또 한 점만이라도 더 확인된다면 예전 본인의 "수항리 사지 탑의 원형을 찾아서"라는 논문에서 발표한 새로운 이론인 탑의 기울기값 (앙각)의 함수관계의 역 대입 치수로 우선 본 탑의 원형을 그래픽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다음으로 미루며 또한 이곳에 산재해있는 민속자료 한점과 현재 개인소유의 건축물에 대한 이해를 피력합니다.
안정마을이란 지명의 유래를 지니는 우물로 여기서 우물 井자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기록인「전국문화유적총람」에서는 안정사란 절이 있었서 안정말 마을이란 이름이
유래했다는데, 이 점에 대해서 본인으로서는 이해가 불가하다.
밭의 폭은 10여m로 사진 왼쪽 중앙부에 탑신재가 쌓여있다.
위 사진에 정방형 석재는 1층 탑신석으로 무게는 약 800kg정도일텐데 밭보다 조금 높은 산자락으로
옮겨놓고, 그 위에는 탑신재가 아닌 타 부재의 돌을 올려 놓은 것으로 보아 전문가가 아닌 일반 주민들이
언젠가는 다시 찾아볼 사람을 위해 성의있게 가지런히 쌓아올려 탑의 재건을 기다리고 준비한듯 합니다.
< 건축물의 이해>
위 건축물이 전신 법당으로 텁의 위지는 사진 한 복판으로 추정하며 지대석은 파 뭍혔는지 의문입니다.
위 건물은 대상리 222번지로 과거 불전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지금은 개인의 집으로 매매합니다란 플랭카드가 걸려있다.
성보문화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예전부터 개인의 사찰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현 건축물은 원래의 목재를 재 사용해서 다시 축조한 것이다.
그러면, 원래의 건축물은 그 대목들을 살펴보면 낡아서 리모델링한 것은아닌 느낌으로 아마도 예전 어느해인가 수해당시 위 골짜기안에 산사태로 범람하는 흙탕물에 탑과 같이 붕괴, 파손되어 다시 재 건축한듯한 느낌이다.
본 건물의 특징은 못을 사용치 않았으며 수명이 얼마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도 각 부재의 목재의 뒤틀림이 없이 잘 건조된, 성의있게 지었던 건물이다.
대상리 사지 터의 현재의 건축물은 과거에 법당으로 지는 건물로 실내에는 불상을 올리는 단상이 아니라 어포지티브의 제단이 건물에 붙박이로 되어 있고 건물의 기둥의 쐐기 홈은 창방, 중, 하방을 끼우게 되어 있으며 아래로 떨어지는 머름이 좀 크게 되어 있슴이 특징이다. 그것은 하방이 높음으로 이는 실내에서도 온돌이 아닌 아래 하방도리를 받치고 하늘마루를 깔았슴을 보이는 것이다.
또한 천정부에는 중도리를 받쳐 기둥 안쪽의 고줏대를 설치하였으며 우리나라 양식에서 외부 기둥은 엔타시스의 배흘림, 아래 폭이 넓은 민흘림, 위 아래 폭이 일정한 원주기둥을 사용하였는데 이 건물은 사각기둥으로 후일 재 축조시가 아니라 원래 사각기둥을 사용하였다. 뒷면 (북쪽)의 서까래를 보면 서까래를 올리는 부연의 도리는 연속적으로 사각 홈으로 파여진 것을 볼 수 있으며 현재의 서까래는 원형을 다시 올렸기 때문이다.
외부에는 굽도리 아래 삐도리도 받혀 삐져나오게 만드는 목조건축물의 정형을 본땄으며 사각의 귀가 딱 맞게 떨어지는 건축양식과 기계적으로 켠 목재는 일본에서는 흔히 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강점시대의 산물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이곳의 주택건축시 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17c) 의 와편및 가야 토기의 잔재가 출토되었기에 본 건축물의 대목들의 처음사용 연대는 정확히 밝히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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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리 사지에 산재해 있는 2기의 연자방아에 대하여>
대상리 222번지의 대상리 사지의 앞 마당에 1점과 서쪽 축대에 세워진 1점 합 2점의 지름 1m내외의 숫 연자가 이곳에 있다.
정교하지는 못하지만 왜 두기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가상 추정치로는 바닥에 있는 숫 연자는 사용을 하지않아 연마가 되지않은 상태로 이는 아마도 사가의 고줏대 홈을 팔때 경도가 낮아 부스러짐에 다시금 널은 돌을 구하여 숫 연자를 만들었으며 이도 많이 연마됨점은 보이지 않지만 사용을 하려고 기단을 만들고 위에 올려져 있었기에 마당 정리시 이는 축대로 옮겨진듯 하다. 이 연자는 이 사지의 입구를 들어서며 빗면으로 보이는 축대에 세워놓은 숫 연자는 미학적으로 운치를 더해준다.
연자방아는 말이나 소등의 축력을 이용하기에 사람의 힘으로 하는 디딤방아나 절구보다는 편리하지만 소를 몰고 곡식을 방아찧는 최소한 2인이 함께 하여야 하는 것으로 연자방아는 개개인의 도구가 아닌 동네에 공동으로 사용하며 소를 몰고와 방아찔때 여러집이 함께 찧는 마을 공동소유의 방아라 할 수있다. 그러기에 대상리의 평창강을 건너기 힘든 장마철등에 이곳의 연자방아는 안정마을 골 안의 가구들과 강을따라 내려가는 가구들 약 1~20여호에게 가장 중요한 생활도구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연자방아는 민속자료로서 박물관에 보관하는것보다 현장에 있어서 이곳의 동네 마을의 구성요소들을 였볼때 더 정감이 있는 것이다.
아래의 연자방아 그림에서 더 정확히 하자면 고줏대가 숫 연자에는 4각으로 끼워지지만 암 연자방아는 회전하기에 원형으로 깍여있으며 방틀의 후리채를 소의 고삐에 묵어 돌리는 방아입니다.
위 대상리 사지의 답사를 마치며 앞으로 재 답사시 탑의 부재의 정확한 치수를 다시 재에 탑의 원형을 그래픽화 할 것입니다.
또한 이곳의 주택이 시굴조사를 한 것을 보면 사지터의 문화재 보존지역임에는 틀림없으나 탑은 문화재 등급에는 속하지 못하는 비 문화재인듯 합니다.
만약 그래픽작업을 통하여 탑의 재 축조가 가능하다면 문화재라면 문화재청의 심의를 거쳐 2급 문화재 건축기사이상의 건설사가 정비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마치 평창경찰서의 짬봉 5층 석탑( 원 부재들은 5층탑이 아닙니다) 처럼 개인이 당국의 허가를 얻어 재축조의 정비를 하였으면 합니다.
이땅에.. 평창에 천년넘은 보물중의 하나로 평창강을 따라 아련하게 들리는듯한 천년전의 목탁소리가 정겹게 다가갈 수 있도록 대상리 사지에 하나 남은 탑 부재의 새로운 탄생을 기대하면서 이 글을 마칩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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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위 연자방아나 개인 건축이지만 100여년 넘은 시대의 목조건축물은 지방 문화재로 인가하여 보존함도 있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배로 건너야 하는 어려움이었지만 이젠 다리도 잇고 마치 수항리사지 인근의; 열명이 올라 앉아 점심을 먹엇다는 지름 약 3m 이상의 고인돌도 근자에 도난당하였듯, 이젠 3점, 탑 부재나 숫 연자방아 2점 목조건축물의 3점의 보존 관리도 필요한 싯점이라 생각합니다.
연자방아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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