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석정의 역사사료의 고찰에 의한 제 연구
<팔석정 답사기/정원대>
2019.08.17. 23:17
봉서 선생은 물의 가운데 신선들이 사는 땅에 취해
봉래蓬萊 영주瀛洲 방장方丈 이름을 붙였다 기록한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여덞개 바위에
석안石鞍 석귀石龜 석옹石瓮 석평 石枰 석두石竇 이름을
새겨 놓았으니
전해 오기를 율곡 이이 맏伯형 죽곡竹谷 선생이 노닐던 곳으로
물의 동쪽에 정자를 세웠는데 팔석정八石亭이라고 하였다
그후에 후손 이아산李牙山이 살다가 정자를 중수 하였는데
정자는 없고 글씨만 남았다고 ...
죽곡竹谷 새긴 것인가
아산牙山이 새긴 것인가
알 수 없다 하였다
출처 : 병인년(1866년)고종3년 봄春 봉서 선생 八石亭 記(봉서유고)
위 시에 팔석정에 대한 본인의 이해를 설명해 드립니다.
우리는 지금으로서는 八石亭을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 석대투간(石臺投竿). 석지청련(石池靑蓮). 석평위기(石坪圍棋), 석실한수(石室閑睡), 석요도약(石搖跳躍)이라하며, 팔석정은 봉래 양사언이 강릉부사 부임시 3일간 또는, 8일간에 이곳 경치를 즐기고 가며 바위에 刻字의 글씨를 새겼다 한다.
하지만 지금의 이러한 이야기의 역사적 사료는 제시되지 않아 이것이 바른지 와전되었는 소명하기 힘들다. 그러기에 이 장에서는 양사의 팔석정이란 개념은 내려놓고 역사적 문헌에 기록된 팔석정의 이야기를 펼쳐 가겠습니다. (팔석정 2부에서는 양사언과 그의 서체의 각자들에의한 팔석정과의 연관은 무엇일까 논고하겠습니다)
그러면 팔석정에 대해 한줄기 역사적 사료에 의한 소명이란 이에 대하여 우선 봉서선생은 누구이며, 그가 이야기하는 죽곡은 누구인가부터 밝혀 드립니다.
* 봉서유고(蓬書遺稿)
조선후기부터 개항기까지 생존한 학자 "신범"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03년에 간행한 시문집으로 신범선생의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중연(中淵), 호는 봉서(蓬西)이며,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서응순(徐應淳) 등과 교유하였다. 현재도 봉평에는 신범 선생의 후손분들이 살고 있으며 봉평의 봉산서재에 율곡 이이와 함께 이항로 선생을 모신 사당엔 신범선생이 이항로의 화서학파에서부터 연유를 가진다.
최익현(崔益鉉)의 발문에 의하면, 저자의 문장은 과장이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에 빠지지 않고 인의(仁義)·충신·인륜의 정상(正常)의 이치에서 나왔으며, 그 학문은 『소학』을 근본으로 하고 『주역』에 조예가 깊어서 기수(氣數)·하락(河洛)에 독창적인 글을 남겼다고 한다.
봉서유고는 1903년에 신범의 손자 신상묵(辛象默)과 사위 이석범(李錫範)이 편집·간행하였으며 7권 3책. 목활자본으로 규장각 도서와 장서각 도서 등에 있다. 권두에 이용직(李容稙)·윤헌(尹瀗)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최익현과 후손 신승우(辛承禹)·신규집(辛奎集)의 발문이 있으며 이 책은 19세기 유학자의 사상 경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참고 자료이다.
출처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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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곡(竹谷) 이선(李璿)
죽곡(竹谷) 이선(李璿)은 쉽게 이야기하여 율곡 이이선생의 백형으로 부친은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 공이며, 조부는 이천, 증조부는 판관을 지낸 이의석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신사임당으로 사임당은 평산 신씨로 진사 신명화공의 따섯 딸 중 둘째 딸 입니다. 죽곡 이선은 이원수 공과 사임당 신씨의 4남3녀중 맏아들로 아래로는 아래로는 맏딸 매창(梅窓), 둘째 아들 번, 둘째 딸, 셋째 아들 이이(李珥), 셋째딸, 넷째 아들 우(瑀)가 있습니다.
죽곡 이선은 40의 나이에(1564년) 사시미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며 1570년 남부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그해 4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선은 어려서 학문에 집중하였으나 과거와는 인연이 닿지 않아 입신양명의 길을 걷지는 못햇으나 인근의 학자로 우계 성혼의 부친이기도 한 청송 성수침과 각별한 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여 그로인해 두 집안이 가까워짐에 역활을 하였다 한다. 묘소는 파주 동문리 율곡의 가족의 묘가 선영의 자운서원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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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석정은 죽곡이 팔석정을 짓고 살았으며, 이후 이아산이 팔석정을 고치고 살았다 한다. 죽곡은 1524년 생이고, 위 인용부에 봉서선생의 기록에 의하면 물의 가운데 신선들이 사는 땅에 취해 봉래(蓬萊), 영주(瀛洲), 방장(方丈)이란 이름을 붙였다 기록한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여덞개 바위에 석안(石鞍), 석귀(石龜), 석옹(石瓮), 석평 (石枰), 석두(石竇)의 이름을 새겨 놓았으니 전해 오기를 율곡 이이 맏(伯)형 죽곡(竹谷) 선생이 노닐던 곳으로 물의 동쪽에 정자를 세웠는데 팔석정(八石亭)이라고 하였다.
여기엔 우리가 팔석정의 지명을 양사언이 지었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로 봉서선생의 기록에는 양사언은 언급이 없다.
물론 양사언이 이곳을 다녀갔다는 기록은 한점도 없다. 그리고 팔석에 4자성어는 구한말 이후 근자에 붙여진 이름인듯 하다. 그 한 예로 팔석중 석요도약(石搖跳躍)에 跳躍이란 한자한자는 한문의 글자이지만 跳躍이란 단어는 일본에서 만든 단어인듯 하다.쉽게 이해하자면 정치, 경제, 사회들의 단어는 중국에서 만든 단어가 아니라 일본이 만든 단어이듯 우리 단어구성에 일부분은 일본식 단어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바 일어로는 跳躍(ちょうやく)이며, 중국어는 1. 跳跃 2. 弹跳 3. 起跳이라고 검색되는바 이러한 연구고증도 있었으면 합니다.
(팔석정에 양사언의 이야기에 대한 본인의 이해를 통해보는 서술은 2부에서 충분하게 피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죽곡 이선은 1524년 생이며, 봉래(蓬萊) 양사언은 1517~1584으로 죽곡과 양사언은 명종시대의 동시대인으로 양사언이 7살 위란 점을 볼 수 있는데 봉서선생의 기록에는 양사언이 아닌 죽곡이 이곳에 팔석정의 정자까지도 짓고 살았다 한다.
이 점이 봉서유고집에 기록된 팔석정의 현재까지의 단 한점의 역사서술로 중요한 사료인 것이다.
그러면 죽곡 이선은 선친의 고향땅 파주가 아닌 봉평의 팔석정에 살았슬까 하는 점의 서술을 합니다. 이 부분에서 오죽헌과 이율곡의 이야기를 개괄적으로 잠시 언급합니다.
오죽헌은 최응헌이 살던 곳으로 2대에 걸처 "외손봉사"로 이어지며 사위 신명화 공은 서울 태생으로 나이 마흔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어 양반자격을 얻지만 곧 당파싸움의 사화에 연계되자 관직을 벗고 멀리 강릉 처가로 이사를 하여 낙향하여 목숨을 부지하게 됩니다.
신명화 공은 다섯 딸을 두었는데 그중 둘째딸 신 사임당을 아들받이로 생각하며 사위 이원수 공에게 사임당에게는 더욱 가르칠것도 많고하여 멀리 못 보내겠다고 하였던바 아마도 이원수 공이 판운수운의 조세직에 종사하는 한가한 외직이란점도 간파한듯한 이야기이며, 서울이 가까운 강릉땅의 끝자락 봉평의 백옥포리(1906년 강릉부에서 평창군으로 이첩됨)에 집을 장만하여 주었으며 이후 신명화 공은 서울로 올라가 6개월만에 사망하게 되자 신 사임당은 서울서 (일반적으로는 강릉이라고들 하는데 이는 오류임)3년상을 치르고 만 2년후 시어머니를 모시고 혼례를 치르고 백옥포리로 돌아 옵니다.
이원수(1501~1561)공과 신사임당(1504~1551)은 참봉을 지낸 첫아들 이선(죽곡), 차남 이번, 삼남은 우찬성을 지낸 문선공 이이, 막내는 군자감 정을 지낸 이우를 두었습니다. 당 시대의 사회상에서는 임진왜란때 원주시장 김제갑 옹은 영원산성(치악산0에서 그의 아들과 함께 전사합니다. 이보다 더 빠른 이해로는 당시 남천 권두문 평창군수는 응암굴에서 그의 아들 주와함께 포로가 되어 원주 감원감영에서 주의 노력으로 비오는 새벽에 벽을 헐고 고씨동굴의 고종원 두 형제와 넷이 탈출합니다.
이렇게 "주"도 관직의 아버지 일을 도우며 아버지에게 공부를 배우기 위해 임지까지 따라나서듯이 율곡의 4형제도 아버지가 수운의 조세직이기에 조세를 운반하는 일을 도왔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육로보다는 수로에 의한 운반으로 이포나루나 각 나루에는 관의 큰 배들이 1~20척 운영되는 수운의 시대였던 것입니다.(이원수공은 나이 50에 종 5품의 판운수운직에 오르며 60에 사헌부의 감찰직에서 주변의 부당한점을 보며 사표를 스고 관직을 벗어서 후일 탐관오리의 누명에서는 제외됩니다)
본인의 예전 글 " 율곡의 고향은 평창입니다"에서는 율곡학회의 율곡과 신사임당의 연표에 의한 이해를 게시하였던 바 신 사임당은 결혼 12년차에 다섯째인 율곡을 낳으며 18년차에 정든 고향집을 떠나 서울로 이사하게 됩니다. 이를 보면 죽곡 이선이나 율곡의 고향은 현 봉평 백옥포리라는 것입니다. 요즘도 외가에서 출산하듯이 율곡은 외가인 오죽헌에서 출생하지만 그의 호패의 고향기록이 있다면 그의 고향은 현 평창이고 봉평백옥포리란 번지수가 기재될 것이다.
율곡은 여섯살때이며 맞이 이선은 18세때 정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하는데, 여기서 이선은 이때 결혼을 하였는지 기록은 없으나 그는 이후에도 고향집 판관대에서 오리(2Km) 위에 산수가 빼어난 곳에 팔석정의 정자도 짓고 살았다 하는 기록의 역사 재 발굴에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아래의 인용글에 율곡학회의 연표에 의한 판관대가 율곡의 고향이란 게시글을 첨부합니다.
平昌歷史의 史觀 定立에 서서(탈고)http://blog.daum.net/kkks1/1219
<봉산서재와 판관대로 보는 율곡의 고향은??>
몇 일전쯤 어느 댓글에 판관대가 잉태지라는 이야기는 정사로 취급될 수 없기에 이에 다시 논고를 하겠다 하였던바 바로 여기서 이 논지를 서술 합니다. 판관대가 율곡의 잉태지라는 점에서 1660년 현종은 봉평에 서재를 건설하고 춘, 추 존향을 하게끔 사방 오리에 사패지를 하사 하였다 한다. 이러한 연유로 말미암아 잉태지가 부각되었기에 율곡의 고향은 상실된 듯 합니다.
서양에서도 잉태지의 문화는 있습니다만, 크리스천인들은 잘 아실 예루살렘의 수태고지의 가브리엘 교회는 동정녀 마리아가 우물가에서 잉태 6개월이란 소식을 접한 기념을 하기위해 세운 교회랍니다. 하지만 이는 종교적인 특정이야기이고 판관대가 잉태지라하는 것은 출산을 꺼꾸로 재어보고 추정하는 말이지 확실한지는 미지수의 이야기로 이는 재미있는 야사로는 통할수 있으나 정사는 아니란 점입니다.
또한 판관대의 비문에는 이곳의 산세는 명당이란 미사어구에 풍수는 극히 주관적인 관념이지만 보편적인 이야기로 설명하는 이곳의 산세의 풍수적 명당론은 양택이 아닌 음택성이란 점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원수 공이 말미를 얻어 휴가차 판관대에 당도하고 사임당은 강릉 오죽헌의 언니네 집에서 용꿈을 꾸고 음 2월에 그 추운날씨에도 바로 선자령을 넘어 160여리의 봉평 집에 당도하였다는 이야기는 윗 글에서 보면 율곡의 맏형은 율곡과는 열 두살 차이로 위로 네명의 아들중에 몇 명 데리고 선자령을 넘을 수 있었슬까?? 또한 오죽헌은 언니네 집도 아닌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가 살았으며 후일 오죽헌은 네째딸의 권화의 아들에게 벌초를 하여줄 것을 당부하며 떼어주고 서울의 집한채는 여섯살이지만 똑똑한 율곡에세 제사를 부탁하며 건네주어 백옥포리의 고향집 판관 생활을 마감하고 서울 수송동으로 올라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불확실한 점은 야사와 야담으로 미루고 이제는 율곡의 맞형 이선이 팔석정의 정자를 짓고 살았다는 팔석정의 정확한 역사 기록에 힘입어 팔석정 자리엔 다시 봉평의 산하에 걸맞는 팔석정으로(이왕이면 지붕도 팔각, 따라서 기둥도 여덟개. 기둥도 팔각의 이중 다포형식의) 고즈넉스러운 정자를 복원하여야 좋을듯 합니다.
나아가 어릴적 율곡의 형제가 뛰놀던 판관대의 고향집까지 연개하여 맑은 물이 굽어도는 백옥포리의 자연을 명당보다 더한 이땅에 성현이 태어난 상서로운 땅으로 율곡의 고향이란 점을 기려야 좋을 듯 합니다.
율곡 이이는 문성공이란 시호를 받습니다. 문성공이란 시호는 성리학의 시조 안향이 문성이었스며 한 고조 유방의 책사 장량의 시호가 문성공이으며 조선에서는 정인지와 세조의 사돈으로 뛰어난 학자인 학역재의 시호가 문성이며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는 시호로 문성(文成)이란 단어는 고귀한 시호임에서도 율곡 이이 선생의 역량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천의 요선정은 그 아름다움의 자태는 수마의 물이 깍아만든 여성스러움이 있다면 이곳 팔석정은 하늘과 땅과 빚어낸 자태에의해 물이 솟구치고 휘 돌아감는 남성의 미를 과시하는듯한 아름다음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그러길래 죽곡 이선은 고향땅의 아름다움에 이곳에 팔석정이라는 정자까지 짓고 선비의 마음으로 살았다는 역사는 이 경치의 찬미는 물론이거니와 그간 판관대는 율곡의 잉태지라고 아리송한 역사에 새로운 역사적 의미를 확인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http://blog.daum.net/kkks1/1276 판관대 비석의 명문을 읽으며,,<울곡의 고향은 어디인가??>
또한 평창의 4대 성씨의 하나인 추씨는 봉평에 많이 사는듯 합니다만 추성구 선생을 비롯하여 옛 봉평인들의 노력으로 건립된 봉산서재. 이제는 죽곡선생의 기록에 힘입어 봉산서재와 판관대, 팔석정을 하나의 문화로 연개하여 봉산서재는 현재의 비 지정 문화제에서 지정 문화제로 인가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예전 게시글에서처럼,, 백옥포리 청소년 수련원을 건축당시 문화과의 3석인 친구왈 이름을 무얼로 지었으면 좋을까 하길래 바로 "율곡 수련원"이라 했듯이 이러한 율곡 대 성현의 고향마을이라는 문화권에 힘입어 청소년 수련원을 율곡 수련원이라 개명하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일전 가산 이효석의 유해가 돌아온다는 뉴스를 보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은 문제에 동양 문화권에서는 죽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회귀성을 가지지만 서양문화에서는 그가 이룩환 문화지에 영원히 살아 숨쉬기를 고대한다는 비유속에 개화기의 선교사 헐버트는 민비 시해이후에 고종 암살 루머에 고종의 방에 불침번을 자체하였으며, 헤이그 밀사때에도 우리는 이준열사 이위종 이상설만 알고 있지만 헐버트도 파리까지 동참하였던바 고종 강제 퇴위시에 헐버트는 일제에 의해 추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조선이 해방되자 헐버트는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 묻히기 보다는 그가 노력헸던 한국땅에 묻히길 원해서 한국으로 귀환하여 일주일후 서거하였으며 지금은 절두산 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봉평은 메밀꽃 필 무렵의 가산 이효석의 소설을 테마로 전국에 가장 잘 알려진 전원문학지로 랜드마크를 찍었습니다.
보잘것 없이 허드러지게 피던 메밀꽃을 순백의 아름다움으로 가꾸어 전 국민의 가슴속에 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기에 일전 이효석 선양회와 재단과의 마찰 속에서도 이효석의 유해는 고향을 등지고 먼 벌판에 홀로히 외롭게 계시는것보다는 독자들이 사랑하는 메밀꽃의 향이 짙푸르게 피어오르는 봉평땅으로 돌아옴도 괜찬치 않으련가 하는 글을 쓰고서도 혹 유족분들의 입장은 어떨까 고려해서 게시하지는 못하였지만, 이제 봉평은 이보더 더 넓은 세계로 웅비할 소재를 계발 하여야 좋치 않겠습니까??
봉평인들은 그간 메밀꽃 문화를 이룩하였듯이 힘과 아이템의 축적을 하였기에 봉평인들은 새 문화 창조의 저력을 다시한번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율곡의 고향마을로서의 문화론의 이 글을 씁니다.
그리고, 2부에서는 양사언과 팔석정론에서 역사적 소명을 하지 못하는 문화이야기란 점에서 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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