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항리사지 탑 논문의 수상에 대한 항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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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제33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수상자 발표 ( 2018-11-09 )
대상(국무총리상) | 차문성 | 일제강점기 교하노씨 묘역의 이장과정과 제(諸)석물의 문화적 가치에 관한 고찰 | |
최우수상(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 정의연 | 남해 화방사중매구패」雜色에 關한 硏究 | |
특별상(국사편찬위원장상) | 고주호 | 수항리 사지 탑의 원형을 찾아서 | |
특별상(국립민속박물관장상) | 정헌성 | 탄현 지역 양요당팔경에 대한 고찰 | |
우수상(한국문화원연합회장상) | 이경식 | 평창군 국구사우 터 탐색과 복원의 당위성 |
<출처 ; 인터넷 "잔국문화원 연합회" 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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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抗辯>
본인의 논문 "수항리 사지 탑의 원형을 찾아서"라는 논문이 "전국 문화원 연합회"의 공모전에서 아마 3등정도인 역사편찬위원장 상을 수상하게 된다 한다. 하지만 본인의 입맛은 그리 달콤하지만은 않다,
왜냐면, 공모전의 취지는 체계적인 향토문화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함이라 하는데, 국무총리상의 1등상 "파주 교하 노씨의 일제때 이장에 의한 석물연구"인가 하는 논문인데 석물은 비석 하나의 갓머리 부분에 제 아무리 논고해봐야 그리 큰 생산적 요소가 있슬까 하는 의문과 난간석이 비지정문화재에서 지정 문화재로 되길 바란다는 논문이다.
본인의 "수항리 사지 석탑의 원형을 찾아서" 의 내용을 비교해 본다면 본인은 우리나라 국보 403개중 석탑이 28개로 가장 비중이 많은데, 석탑에 관한 학문은 역사가들의 역사적 사료에만 의한 것이 전부이고 조형적 양식의 이해는 없기 때문이 현재 석탑의 이해에 문제가 잇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석탑의 조형론의 학설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통하여 수항리 사지 탑의 모든 문제를 해결을 하고있다. 과연 어느쪽이 향토문화 발전에 이바지하는 바가 큰가 하는 점이다.
본인은 이러한 조형적 양식의 분야의 학설을 주창하는바 아마 심사위원 1차 3명과 2차 심의의 5명 모두 역사 박사님들이지만 본인의 이러한 새로운 학설의 도입에는 동의하지 못하는 듯한 모양세는 아닌가 추정한다. 그렇다면 본인의 조형적 논리의 학설에 생소한 심사위원들이 나에게 상을 준다고 내가 받아야 하는가?? 아마도 한문 몇자 적고 풀이하여야 구태의 기호에 맞는 것인가?? 참으로 우서울 일이로다.
본인은 수다사지 논문이 20페이지 한정분에 걸려 가장 중요한 몇 층탑인가를 그래픽을 통한 해석부터 하여야 하나 이를 증명하기엔 7~8 페이지가 소요되기에 이는 빼어 버린 것이 아쉽고 그러기에 본인의 논문은 아래의 설명들을 모두 포함시키자면 약 7~80페지를 가져야 한다.( 페이지당 천자 기준으로 본다면 그래봐야 5만자 정도일뿐,,,) 하지만 1, 2등상의 논문을 그리 길게 쓸수있는 부피는 있슬까?? 이것이 본인 논문의 차별성이다.
앞으로 전국문화원 논문공모나 여타 공모는 아류로 생각하기에 관심없다. 정녕 역사의 사실만을 추구할 뿐이다.
그래서 본인은 이번 공모전에 본인의 논문에 대한 <나의 항변>을 쓰고 이후에는 이 논문을 쓰게 된 배경에는 지난 "13년 평창군과 월정사는 공동 주관으로 평창에서 "수다사지 활용방안"의 세미나를 개최하여 다섯 파트 부분의 연구보고와 그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로서 대담자 까지 포함하여 약 11명의 학자들이 세미나를 개최하였건만 활용반안에 대한 효력은 없으며 또한 동 리포트중 단국대 박경식 박사의 "평창 수다사지 삼층석탑과 석조유물"편에서는 여러 오류가 심해 이 부분을 전격해부하여 그를 비방한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그런 오류부분은 활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단속적 의미의 글을 게시할 것이다.
위 사진은 수항리사지(법정명) 탑의 전경사진이다.
탑에 전문가들인 박사님들은 이 탑을 보며 바로 동 탑은 조형양식에 위배된다고 것을 직감하여야 좋을 듯하다. 하지만 그런 학자들은 한 명도 없었고 리포트 기록에 박경식 교수나 강원대. 강원대 박물관에서도 사잇돌 3매의 부분에 의혹적인 지적만 있었슬 뿐 정확한 해석을 하지도 못하며, 여러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점이 무엇인가 따져본다면 본인의 논문에서 지적했듯이 동 탑에 기단석의 2층 갑석과 초층 탑신부에 사잇돌이 크기순으로 3매 들어가 있는데 이는 탑의 조형양식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기단석은 통석으로도 가능하나 몇 개의 면석으로 이어질 경우 그 아래는 평탄한 받침석을 깔아야 하고 위에서는 여러 매의 기단석을 내려 눌러 면석을 서로 결속시키는 갑석이 필요하다. 여기서 갑석도 크기에 따라 여러 장이라면 면석과 엇질러 깔고있다. 그러기에 받침석이나 갑석은 그 기능적으로 두 겹일 필요가 없으며 역학적 힘이 모자란다면 갑석, 면석을 두껍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모든 탑에서 보면 조각적 수법으로 보이지 않는 룰에 의해 받침석이 기단석보다 크게 됨을 알 수 있다.그러기에 2중 기단석의 탑일 경우에는 아래 하층의 기단석에 받침석과 갑석이 올려지고 하층 갑석위에 상층 받침석과 기단석 갑석이 올려지게 조성하는 것이 탑의 조형양식이다.
여기서 가장 큰 부재는 하층 감석이고 다음이 하층 면석이며 바로 위의 2층 갑석이 세번째 크기 순이며 다음 크기가 2층 받침석이라야 한다. 그러기에 위 사진의 전경모습의 수항리 사지(법정명) 탑의 조형양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잇돌 크기 순으로 3매를 한 부분에 잘못 쌓아진 것이다. 위 두학자들은 두번씩들 답사하였다고들 한다, 학계의 어느 학자가 이런 사잇돌 3매의 오류라도 지적할 수있었는가? 그리고 이 탑의 서두에서 과연 동 탑은 몇층탑인가 부터 규정을 해야한다.
우리가 알기에 수다사지 탑은 3층 석탑이라 한다. 박경식 박사의 리포트에서도 1943년 총독부 발행의 "조선 보물고적조사자료" 책 555페이지를 인용하였으며 "수다사지 3층 석탑"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수항리사지 탑이 3층탑이라는 기록은 1943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고적도보 조사자료"란 책 P555에 수다사지는 3층 석탑이고, 또한 3존불의 크기 사이즈까지와 당간지주가 있다고 인용하고 있는데 본인은 바로 그 책을 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책의 원저인 세케노 다다시가 1915년 평창읍과 월정사의 유리건판 사진기록을 담은 1918년 고적도보등 전 15권의 책 모두에 6천여점의 사진을 모두 검색해 보아도 당시의 수다사지는 수항리 사지나 혹은 일명사지로 나올텐데 이곳의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그러기에 1942년의 책이 더욱 궁금하여졌으며 또한 그 책엔 3존불의 크기까지 알려지게 되었으나 3존불은 석불 3점으로 표기하는게 더욱 정확하며 불상인가 보살상인가 의문에 답사를 다시 하였지만 실패를 했으며 그것이 시대적 차이로 석수 스님들의 차이를 보이는 석불로 가정하여볼 때 논산 개타사지에 유리한 3점의 석불과 비슷한 모양새는 아닐까 의문한다.
또한, 이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당간지주는 그 위치가 현 탑과 그 뒤의 법당, 옆의 요사체를 중심으로 돌아굽은 수항천을 넘어 멀리 나가지 못할 것이라 추정한다면 사지로 지정된 현 경작지 1만여 평속에 어디엔가 있슬 듯하지만 석물도,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기에 본인은 결코 수다사지에는 당간지주가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본다.
현재 당간지주이라는등 또한 당간지주 난간석이라고 지칭하는 수항초교로 옮겨진 장대석은 안상의 조각이 가로로 연 이어 잇기에 당간지주는 아니다. 그에 앞서 당간지주라 보기에도 30*30은 가늘기에 당간지주 용이 아니다. 아마 봉선사 앞의 당간지주는 높이가 1m도 안되는 가장 작은 당간지주일 수도 있으나 석자재 두께는 5~60 cm이 넘는다.
경작지내에는 조그만 장대석 자재들도 있는데 무게가 무거워 운반도 용이치 못할 당간지주는 없기때문에 동 책의 서술 기록은 의심이 가는 것이고 그러기에 당간지주의 존재여부는 미지수이란 생각이다. 그렇다면 1942년의 고적도보의 책을 믿을 수 있슬까?? 그러기에 무엇에 근거하여 이 탑재를 3층석탑이라 할 수 있는것인가??
여기에 본인은 아래의 그래픽에서 보듯 가상의 3층탑과 5층탑을 그래픽화 하여 이를 통하여 탑의 조형적 기능을 살펴봄으로서 3층탑임을 알 수 있다.
아래의 그래픽을 보며 3층과 5층의 어느쪽이 수다사지의 탑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슬까?? 여기에 두개를 비교하여 설명할 수 있는 전문학자님들은 계십니까??
이 두탑을 비교할때 우선 두 탑은 본인의 탑의 조형적 이론 주장의 하나인 삼층탑은 전각의 기울기 각도가 13~15도, 오층석탑의 경우 7~8도의 경사도를 유지하여 그래픽한 도형으로 탑신부와 상륜부사이가 잘 들어맞지 않는듯 보이지만 오층석탑은 옥계석의 기울기 경사도가 연장되어 복발도 하나의 느낌처럼 유연하게 보이지만 기실 오층탑이 아니라 정답은 삼층탑이다. 그러기에 수항리사지 탑은 3층이 되는 것이다.
정밀하게 이야기하면 5층탑의 그래픽에서는 옥개석 기울기의 임의의 사선상에 복발이 머물지만 이것은 오답이다. 3층탑의 그래픽에선 옥개석의 기울기 사선보다 복발은 안쪽에 머물고 있다. 이렇게 사선이 2중으로 되어있어야 조형적 균형에 정답이란 이야기로 현재 모든 탑은 이런 모양새를 취하기에 복발과 맞닿는 상층의 옥개석은 그 아래 옥개석보다도 사선이 연장되어 안쪽으로 좀 길게 연장되어 복발점까지 간는 옥개석면이 좀더 긴점을 모든 탑에서 볼 수있기에 수항리 탑은 삼층탑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본인은 논문의 제목에서 3층이란 타이틀이 없는 것이다.
논문에서는 가장 먼저 해야할 3층탑의 규정 설정을 주장해야 하는 이론이지만 이를 생략시킨 이유는 이를 정확히 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탑을 비교하여 실측의 비례에 의해 보편적 기실 모든 탑에서 탑신부와 상륜부 사이의 복발은 가로의 크기가 작은 것이다. 이를 통계로 증명해야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기에 이를 증명하기까지엔 몇 장의 원고분량이 늘어 이번 공모전의 20페이지 기준을 넘어서기 빼문이다.
또한 모든 탑의 대부분의 복발은 2단 사각형의 형태로 조성되어 있으며 높이도 조금 높은듯하게 육중한 모습을 가지나 본 탑에서는 단축적인 편법으로 플렛flat하게되어 모서리의 엣지를 죽여 라운드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그 위에 올리는 영화등의 상륜부가 많이 단축된다는 의미를 내포하며 이로서 본 논문에서 지적한 아래의 갑석과 갑석부연등 가로 4선의 그림자를 보일 지점에 그 하나를 안으로 들어가는 라운드 곡선으로 변형시킨범등 본 탑의 전체적인 구도속에 조형미를 중히 여긴 흔적을 볼 수 있다.
이로서 당시 타 탑처럼 탑의 전통질서라는 의미를 연장하지만 본 탑은 석수스님의 미학적 계산 속에 일부 양식적 구현을 벗어나는 어찌보면 서양미술사의 사조(ism)처럼 현실의 인식을 넘어서는 조각적 수법을 보이고 있다.
과연 현 우리나라 탑에 역사가들이 본인의 이러한 그래픽화로 보는 탑의 구조론이나 미학적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반문해보면 우리나라 탑의 학문에 본인이 주창하는 탑의 조형론속의 구조론등의 학설은 도입되어야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제 조형론을 떠나 과연 자장율사는 왜 수항리에 정착하였슬까 하는 사색을 잠시하여 본다,
37대 선덕여왕부터는 신라 하대라 한다. 선덕여왕때부터 본격적 왕위 쟁탈전이 시작되고 선덕여왕은 6년간 재위에 김경신이 김주원을 제거하고 원성왕이 되었다.이때부터 하대 155년간 원성왕계가 명주군왕 김주원계를 누르며 약 20여명의 왕이 이어지며 재임기간은 6~7년정도로서 왕권 보장이 힘든 시기로 진골의 권력싸움에 그 재정적 감당의 진골계 노비들은 재정적 담당이 늘어나가되는 부담속에 고통이 가중되어 가고 이로서 진골계는 쇠잔해지고 지방 호족의 출현등은 바다로의 힘의 이동현상등을 나타내는 시기였다.
당시 자장율사도 선덕왕때는 호국통으로 일반적으로 아파트 15층 정도의 높이의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축하며 신라 세력의 결집을 나타내지만 이후 정치적 암투에 종교적으로도 진골들의 자리가 불안해지자 선종들을 추방시키는 것으로 자장은 화엄종을 모르는 바도 아니지만 그는 하루라도 계를 지키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계율종으로 평민사상의 선종을 대두시키자 진골, 양반들은 입지적 조건이 좁아지자게 되니 선종을 이단으로 취급하여 압력을 가하자 그들은 변방으로 물러나게 되는데 그 속에서 자장은 왜 하필이면 평창으로 들어와 암자 생활을 하였슬까??
여기에 본인의 추정으로 진부의 수항리는 당시로서는 명주 땅이고 성골의 명주군왕 김주원의 지배세력이 미치는 이곳이 자장에게도 안전하고 의미상통하는 지점은 아니었슬까??
그리고 세미나 리트트 말미에서 승가대의 최태선 교수의 수다사지 정비및 활용방안에서 수다사지가 원래의 위치인가 의아하단 모습에 본인은 강가의 현 위치가 처음 암자로부터 출발하는 위치였슬것이란 생각으로 수다사는 법전에서 앞을 보면 가로막는 안산이 가장 극대효과를 나타내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물이 돌아굽는 반대편의 위치에 혹 수해가 진다해도 물줄기의 안쪽편이라 수압의 작용이 없는 지점이기에 물과 고대 생활의 불가분의 관계에 이런 위치는 절로서는 평창읍 중리의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노암사魯岩寺나 김천의 강가의 폐사지 하나도 이러한 동일한 지역으로 원래 신라의 경주에서 절은 시내의 평지에 존재하였지만 외압에 선종은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길목에 몇 십년간은 이런 물가에 자리하게 되고 이 시기에 다수의 절들은 보령의 성주사자등처럼 개활지의 범람원에 자리잡는 예를 다분히 볼 수 있다.
이런 본인의 독출한 개념의 생각을 진착시키는 논문이라야 좋았슬듯 하지만 그러기에 논문은 6~70 페이지 분량이 필요하다. 아마 이번 수상의 타 논문들은 그 주제들에 의해 이정도 분량을 논할 수 있슬까??
본인의 논문이 미약하게 보이는 것중의 하나는 안상은 띠장으로 공간의 분활로 공간구성의 짜임새를 가지는 조형적 요소이지 불교적으로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서술함에 심사위원 박사들은 무식타고 바라보앗슬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본인이 장엄(壯嚴)석탑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석탑의 기단과 탑신 표면의 장식 조각을 壯嚴 (梵語로 Vyoha)이라 한다. 이러한 장엄은 탑에 봉안돤 사리의 수호나 공양의 관점에서 팔부신중상등의 壯嚴 彫飾은 사천왕상에서부터 안상까지 10개의 종류로 나누어지며 외양을 장식하는것 뿐만 아니라 호법신 護法神의 특별한 기능이 있다 한다. 하지만 안상이 무엇을 보호하는가??
자세하게 논고한다면 결국 본인은 안상은 서양에서도 동양에서도 모두 공간의 보조적인 장식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이 안상이 꼭 필요한 것은 신라의 곡옥의 모양이 잇다 이 곡옥은 인간이 만든 가장 자연스러운 도형이지만 우리는 보자기등에서 이 곡옥의 모양새를 흔히 볼 수있는데 그 옆에는 잎사귀의 장식들로 메우고 잇다 만약 여기서 잎사기를 뺀 곡옥만의 그림은 어떻게 보일까?? 그것은 단촐하고 밋밋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기에 안상이 빠진 장식은 안상이 있는 것괴는 다른 허전한 분위기란 점이지 이것이 불상 조식기법에 속하지만 사천왕상의 팔부신 중상등처럼 불탑을 보호하거나 경외하자는 취지에 이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뭐 이런 글들 주워 인용하며 한문이나 좀 쓰고, 논문이랍시고 남의 글을 짜깁기하여 인용부서를 찍고, 참고 문헌이랍시고 약 30개 책을 출판사까지 책장수처럼 써 놓는 형식을 갖추면 그것이 노틀 맨의 심사위원들의 취향이라 점수가 더욱 높을 일은 아닐지 모르지만 본인은 그런것 쓰기보다 본인의 창의적 요소를 필하기에도 바쁘다.
본인도 그런것 모르는 바는 아니다. 본인은 책을 다 보면 관심없는 책들은 바로 버린다. 현재 책장에 남아있는 책엔 한국불교인물 사상사(민족사) 에서 범일국사론, 한국철학(예문서원)에서 불교 문화의 시기, 사상적 토대나. 불교미술, 명찰순례(최완수 편) , 비교 종교론. 종교심리학. 불상, 석탑, 부도, 석등등 버릴 수 없는 책도 20여권 논문하단에 책장수처럼 베껴 놓아야 잘 썼다고 하는 것일까??
디지탈 시대에 컴퓨터 하나먼 가지면 책 수 만권보다 이런것 모두 능가하는 정보시대에 PC라인 상에서 무슨 인용부 점찍고 할 필요가 있는가?? 논문의 형식에서도 구 시대의 프레임을 벗어나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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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수상자중 이경식 선배는 지난해에도 이런 내용의 글을 출품하여 낙선된 점이 있었다. 그때 선배는 지난해 논문에 본인의 주장하는 위치의 글을 읽었지만 블로그의 닉네임 후세백작이란 닉을 논문에 인용부로 찍기는 좀 머했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 그러면 원리적으로 인터넷도 지적 소유권의 대상체이기에 닉의 아이디를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용이란 점이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일반적인 점잖은 생각일 것이다. 가득이나 학문의 중요성을 다루는 논문에서 인용부에 컴의 닉네임을 쓰기란 참으로 우섭지만 컴은 수 만권짜리 책이란 사실이다. 이것이 시대의 아이러니랄까 인식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낳고있다.
이런 문제에서 보면 컴은 이 시대의 일상인데 올해에 "국구사우 터 복원의 당위성" 논문이 새롭게 수정되어 다시 출품되었는데 이 논문에선 고주호의 블로그 글에서 주장하는 위치 터에 대한 내용과 장정룡, 박도식 교수의 글에 인용부가 찍혔는데 1차심사때 문화원 연합회 사무국에서 본인에게 귀하의 논문의 내용과 비슷한 글이 인터넷에 떠 다니는데 이점에 대해서 아시는데로 답변을 부탁드립니다란 내용의 메세지가 날라왔다.
본인은 내 생각을 20페이지에 담기도 부족하여 그런 일이 없거니와 나의 글은 비 인기 글이라 타인이 스크랩할 일도 없으니 뭔가 이상합니다라고 답변을 했더니 다음날 고주호외 이경식을 혼돈하여 잘못 보낸 메서지라 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인터넷에 글이란 국구사우는 평창에만 존재하기에 아마도 본인의 다수의 글이 지장일거란 생각에 바로 본인의 이 부분 글들을 잠시 비 공개 처리 하였었다. 그리고 2차 심의위원들이 위 세사람의 인용글 내용을 확인하고자 한다기에 본인의 글을 보내 달라는 통화에 본인의 글이 논문에 괜한 영향을 끼칠까 몇 일후에 1/3을 삭제하여 멜을 보냈으나 시간이 경과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도 읽지 않음으로 뜨고 있다. 인용했는데 무슨 큰 문제있슬까만은 또한 본인이 제출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현직에서 물러난 노틀맨 박사님들이 심사위원이라 위의 증거로 볼때 컴맹은 아릴테지만 인터넷의 습관화엔 좀 익숙치 않은듯 하여 본인의 논문의 이해에도 마이너스란 작용은 아닐까 추정한다.. 하지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시대는 더욱 다변화하는 디지탈 시대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이제 한 권의 책자보다 무수한 정보를 담고있는 인터넷이 논문에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질것으로 학문도 이제 모든 것을 수용하는 길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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