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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미탄 "육백마지기" 어원의 재고찰

<요약>

육백마지기는 본인 이외에 모든 사람들은 볍씨 육백말을 뿌릴 공간이라 한다. 육백마지기에 어원은“육백 +마지기”의 합성어로 육백은 제자백가 시대에 풍수가의 음양오행설의 이론에 따라서 아홉별 중에 여섯째를 육백이라하며 금성을 말함이다. 육백마지기를 어느 농부가 산 넓의 공간을 볍씨 육백말을 뿌릴만한 공간이라 말할 수 있는가??  이제는 내 말을 믿든 않믿든 맘대로 무식하게들 하시고..인터넷에서 백과사전 한번 찾아보시면..

<인터넷 사전 검색>

◆  육백(六白)  - 음양설에서 아홉 별의 하나인 금성을 이르는 말

◆   음양설 (陰陽說) - 음과 양의 이, 기를 우주 만물의 생장 변화의 근본 원리로 하는 설

◆  구성(九星)  -  一白은 음양가에서 수성을 일컷는 말, 二惑은 토성, 三碧은 목성, 四綠 삼벽과 함께 목성을 일컷는 말. 五黃은 토성, 六白은 금성, 七赤은 육백과 함께 금성을 일컷는 말. 八白은 토성. 紫白은 화성을 말한다. 이것이 음양수로 말하는 아홉별이다.

이렇케 일반 사전까지 들춰주는데 나에게 자꾸 딴 말들 할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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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세백작 2022.10.09 23:35

금성이 초저녁 별로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는데 금성은 초저녁엔 서쪽하늘 지는 태양 옆에서 보게 됩니다.
밤에 동남쪽하늘에 달 옆에 동쪽에서 밝게 빛나는 별은 목성과 토성입니다

그리고 지구가 자전하여 다음날 새벽 해뜨기 전에는 금성이 동쪽하늘 달 아래로 떠 오릅니다.
이때의 금성은 밤하늘에 제일 밝은 별이기에 금성이 올라오는 대(마루) 같다는 표현으로 "육백(금성) 맞이하기"의 발음이  두 음절로 분절되기에 보다 쉬운 하나의 음절로 음운 현상을 가지며 " 육백(금성) 마지기"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곳 평창군 미탄면의 성마령과 육백마지기는 별의 지명으로는 전국에 유일한 곳입니다.  미탄의 옛 선인들이 별을 노래하는 감성과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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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 남부의 지붕인 미탄 청옥산의 육백마지기는 일반적으로 밭의 넓이를 이야기한다고 이해하지만 본인은 이전글에서 六白은 음양오행설에 의해 금성(샛별)을 가르키는 말이고 마지기는 논, 밭의 경작단위라기 보다는 "맞이하다"가 구개음화 현상으로 마지하다로 변화여 명사형으로 마지기로 준말로 금성마루를 뜻하며 이로서 星摩嶺(별星, 닦을 磨)의 의미와 상충함을 볼 수 있다고 피력하였습니다.

 일전 본인의 "청옥산 육백마지기 어원의 고찰"이란 글에서 미탄 분이 과거 우리가 육백마지기에 올라 화전농사를 하기전엔 그런 명칭이 없었다고 하는 문의에 다시 분석적으로 답을 드립니다.

육백마지기에는 약 40여년전 화전민들이 정착한 바 그 이전에는 육백마지기란 단어를 듣지 못하였다 하는데, 그러면 우선 육백마지기란 단어는 6~70년대에 만들어진 단어인가 고찰해 봅니다.

정부는 임산 자원을 보전하는 한편 화전민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시책으로 1968년 '화전정리법' 공포 후 화전민을 다른 지방에 정착시키기 시작하여 1976년에 화전정리가 종결되었으며, 화전정리법 대상은 산림경사도 20도를 기준으로 ‘산림으로 복구’할 화전과 ‘농경지화’할 화전으로 구분하였습니다.

경사도 20도 이상의 화전은 ‘화전지’라 하여 이러한 곳은 산림으로의 원상복구를 원칙으로 하였고, 경사도 20도 미만인 화전은 ‘농경지화’하여 이를 전답으로 인정하고 필요한 절차에 따라 지목을 변경하였다. 그러기에 육백마지기는 경사도 20이내의 화전지로 개간되었으며 40여년전인 1970년대 무렵엔 약 50여호의 화전민이 이곳에 올라 처음으로 경지를 작업하여 개간하여 배추나 중갈무등을 심었다 한다. 그러나 본인의 이해로는 이때 개간된 화전지에서 육백마지가란 어원이 발생되었다고 보기에는 좀 어려운 시각입니다.

 우선 육백마지기란 단어는 농토를 지명하는 단어인가 하는 의문부터 시작해 봅니다.

마지기란 경작지 단위로서 여러 설명이 있는데 하루살이나 반나절 갈이등의 단위에서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단위로 한문으로는 이두음처럼 음을 빌려 두락(斗落) 이라 합니다. 즉 마지기란  한 말의 씨앗을 뿌릴 만한 넓이를 말하며, 대개 논은 120평, 호남지방에서는 200평을 한 마지기라 합니다. 그리고 밭은 100평 정도또는 300평의 설도 주창되며, 밭은 강원도와 충청도에서는 일반적으로 斗落으로 불리어 지지만 이곳 평창일대와 영서에서는 두락보다 마지기란 용어를 더 일반적으로 사용하며 또한 한마지기도 보편적으로 300평을 기준하고 있다. 그러기에 육백마지기가 경작지 단위라면 청옥산 산마루 정상의 해발 1,000~1,200m의 밭은 180,000坪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단위는 세종때의 기준이 임진왜란 이후 다시 변하여 인조 12년(1634)부터 1등전 1결의 넓이는 10,809㎡가 되었다가 대한제국 광무 6년(1902)부터는 1만㎡인 1㏊를 1결로 제정하였다. 1등에서 6등으로 갈수록 1결의 면적은 일정한 비율로 넓어진다.「신라(新羅) 및 고려(高麗)의 양전법(量田法)에 관(關)하여」(박흥수,『도량형과 국악논총』,박흥수박사화갑기념논문집간행회,1980)

 조선때에 화전민에게도 세금을 걷기위해 법령을 재 정비한점을 볼 수 있는데 아래의 해동지도 평창군 편을 인용해 봅니다.

 위 해동지도에 우측 상단에는 평창은 1685戶로  전은 185結 51卜9束, 답은 1結78卜 3束 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총 생산량은 米는 955錫, 豆太(콩, 팥)는  1,180석13두. 피잡곡은 1798석  6두를 나타내고 있다.(답의 1결의 수치는 오류인듯 ) 세금을 계산하기 위하여 사용한 농토의 넓이단위 마지기(斗落)이 아니라 結,卜,束의 단위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세종 26년(1444)부터는 6등급으로 나누게 되었는데 인조 12년(1634)부터 1등전 1결의 넓이는 10,809㎡가 되었다가 대한제국 광무 6년(1902)부터는 1만㎡인 1㏊를 1결로 제정하였다. 1등에서 6등으로 갈수록 1결의 면적은 일정한 비율로 넓어진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시인 1910년부터 약 10여년간 우리나라 전 국토를 측량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지번의 이름이 그때부터 처음 매겨지는 것으로 단위의 넓이는 현대의 평, 정보(ha)등으로 매겨집니다. 그러기에  경작지 이조때 세금을 거두기 위한 단위인 결(結)은 사라지고 일제시대에는 삼각 캠퍼스에 의한 정확한 도형량의 평(坪)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 지금도 평상적으로 통용이 되는 마지기(斗落)이란 단위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근거를 제시할 수 있슬까요??  마지기란 볍씨를 한 말 뿌릴 수 있는 넓이 기준이라면 이는 삼각 캠퍼스에 의한 측지의 평(坪)의 단위보다는 비 과학적이기에 마지기란 용어는 최소한 삼각 측지법에 의한 측량 이전에 사용한 용어임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농지의 단위를 결(結)로 나타냈지만 마지기란 단위의 최초 상한대는 알 수 없지만 일제강점의 1910년 이전에 사용하였슴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해 볼때 청옥산의 육백마지기는 조선시대에도 불리웠는지 아니면 1960년대 이후에 조성된 단아인지는 알 수 앖다. 그리고 과거의 고 지도에는 그렇게 자세하지는 않지만 위 해동지도나 1872년 제작된 평창군 오면(5面) 지도에서는 청옥산도 두만산(斗滿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1861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 목간본  十二 - 08  하단부

''동여''에 수록된 지명은 ''대동여지도''와 비슷한 1859년에서 1865년 사이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1872년 지방지도 _ 평창군 오면지도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지리지

읍치 동북쪽 斗滿山은  黃腸封山으로 지도상에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읍치 앞과 후평리 강변에는 송림으로 잘 가꾸어져 있는데 홍수해를 막아주는 역할을 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 해동지도나 오면지도에서 청옥산은 아직 두만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청옥산에 특이점은 송림 숲을 그리고 그림 여건상 극락암은 위에 표기하였다. 후평과 평창읍 남산 아래의 강변을 따라 송림이 표기되어 있는데 두만산은 황장봉산으로  아누구도 입산을 금지하는 封山東界(봉산동계) 비석이 황정산에 세워져 있다. 당시에 두만산은 화전의 농사를 짖지않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두만산이라 지칭한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서, 대략 1900년대 이전에는 두만산으로 기록한바 두만산이라 불리게되는 이유는 미탄의 어느 지명 유래및 역사 글에서는 斗滿이라는 뜻은 두류가 많이 생산된다고 부른 이름이라 서술했지만 이는 청옥산이라 불리기 전에 두만산이라 불리던 시절에 두류(아마도 콩, 팥, 서리태 콩등,,) 이 재배되었을까 하는것은 의문이라기 보다 오류이고 斗滿이란 의미는 斗落(볍씨를 떨구는= 뿌리는 파종을 의미함)에서 斗滿山 정상의 고원부는 넓기에 씨앗이 샐 수없슬만큼 많이 필요하다는 느낌의 넓이를 강조하는 것으로 당시에는 화전의 밭도 아닌바 斗滿이란 넓이가 넓다는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두만산이 청옥산으로 변하고 육백마지기라는 이름의 기록은 하루아침에  변경된 것이 아니라 구전으로 불리어지며 유지되어 왔기에 행정적인 역사서들에 미처 기록되지 않은 듯 찾아보기 힘들며 그간 구전되어오던 미탄아라리에서 육백마지기란 단어를 역사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과거 미탄의 역사에서 육백마지기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나 구전으로 전하는 미탄 아라리의 기록을 인용합니다.

 * 두만이 둥둥재 새조밭 파기 싫거든

        미창(미탄) 담배수랍에(수매) 들병장사 갑시다.

* 한치 뒷산에 두치곤드레 임의(나지미/ 일어임) 맘만 같아도

         고것만은 뜯어를 먹어도 봄살은 된다

  이 두 사설의 가사에 보면 미창, 수랍, 나지미란 단어는 그 시대성을 반영하는 단어입니다.

 "미창"이란 미탄의 조선시대의 옛 지명이며 "수랍"이란 아마도 "수매"란 신 용어 이전의 구어의 표현인듯 하며 "나지미"란 "님에"라는 뜻의 일본어입니다. 물론 이러한 지명때문에 이 가사의 발생시기는 일제강점 이란 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마치 정선아라리처럼 정선 아라리 향수자들의 도그마(독단적 견해)의 논지처럼 꼭 그 시대의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정선아라리를 이해해 봅니다.

평창아라리는 1930년대에 김소운에 의해 진부에서 다섯곡이 채집되었습니다. 그러지만 정선 아리랑의 최초의 기록은 1985년에 일입니다. 정선아리랑이 다시 부활되며 기록한 것이지 이전엔 아무 기록도 갖지 못하고 다만 구전으로만 전해 내려온것입니다. 여기에 그들의 이론에 "도그마"란 표현을 붙이는 것은 그들은 정선 아라리 시원을 "눈이 올라나 비기 올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라는 사설속에 개성의 만수산이란 단어가 인용되었기 때문에 고려말 충신들이 임금을 사모하는 노래라고 단언하지만, 그것은 인증이 안되고, 필자의 지난 의문의 글을 충족시키지 못하기에 하나의 주장일뿐이다.

그리고 본인은 그 논리는 정선 아리랑 향수자들의 편집광적인 도그마의 주장이라 규정하며, 본인은 이 사설을 육백마지기에 올라 나물뜯을때의 아라리라고 주창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본인은 미탄아라리에 미창, 수랍, 나지미란 단어의 사설 가락을 역사적 시간을 밝히는 단어 하나로 이조시대나 아니면 일제시대에 발생된 아라리라고 주창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이후에도 언제라도 지어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에선 또 다른 미탄의 평창아라리를 인용해 봅니다.

 청옥산이야 노름노름해 꾀꼬리단풍이 들거든   

                           뒷집에 총각 낭군아 동박 따러 가세.

육백마지기 도느네 실안갠 눈비나 주려고 도련만

                       소녀 눈전에 도느네 청년이 누구를 바래 돌겠나

육백마지기 돼지마 감자를 첫찜 드려놓고  

                     곤드레 쌈에 된장을 발라서 많이 드시고 가세요.

육백마지기 퍽퍽 무너져 육지가 평지가 되더래도

                 당신하고 나하고 마음 변치 맙시다

재작년 봄철이 또다시 돌아 왔는지-

                        한치 뒷산에 곤드레 딱주기가 또 올라오네!

한치 뒷산에 곤드레 딱죽이 임의 맛만 같다면

                    올 같은 흉년에도  봄살아 나겠지.

 한치 뒷산에 곤드레 딱주기 세지를 말어라

                          나물 뜯으러 가는 핑계로 님상봉 가자.

한치뒷산에 떡갈잎이야 나날이 퍼드러 지는데

                            우리집의 부모님은 나날이 늙어 가시네

 한치 뒷산에 떡갈잎이야 옥양목 광목만 같다면

                               조선 천지에 우리 백성이 맘 놓고 살지

 

황정(장)산 중허리 굵으나 굵은 소나무

                         경복궁 대들보로 다팔려 나간다

황정산(황장산) 저 꾀꼬리는 음성도 좋다

                    우리 님의 음성과 비슷도 하다

 

서발장대가 돌돌굴어도 거침이없는 신작로

                                총각낭군이 가자고  할적에 왜못따라 갔나

반달같은 우리오빠는 대동아 전쟁 갔는데

                           샛별 같은 우리올개(올캐)는 독신 생활한다

소나무 쓸만한 거는 전붓대로 나가고

                         논밭에 쓸만한 거는 신작로로 나간다

미탄땅이 살기좋대서 내가 살러왔더니
                           돈 그립고 님 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

참나무 모시대를 내가뜯어 줄거니

                   한치뒷산 한(산)중허리로 날따러 오게

청옥산 말랑에 노루 사슴이 놀구요 
                        우리집 울안에는 임자 당신이 노네요

청옥산 멀구야 다래는 얼크러 설크러 지는데-

                            나는 언제나 임을 만나서 얼크러 설크러 질거나

청옥산 떡갈잎은 나날이 퍼드러지는데      

                        우리 집에 부모님은야 나날이 늙어 가시네.

 한질 담 너머 두질 담 너머 꼴 비는 저 총각

                                잔솔밭(청옥산) 산중 허리로 날만 따라 오게.

평창같이 살기 좋은데 살려만 오세요
                        그물같은 물밑에도 해당화가 핀대요

나물도 뜯고 임도보고 겸사 왔는데

                          나물도 못뜯고 임도 못보고  낭패가 났네

극락암 뒷절에 도는 안개는 눈비나 줄려고 돌지만 

                    소녀집 문전에 도는 청년은 누구를 바라고 도느냐

                       (* 극락암은 청옥산의 암자이다)

청옥산 줄기가 무너져서 육지 평지되어도

                             임자하고 나하고 맘 변치 않는다

비행기재 말랑이 자물쇠형국인지

                         한번만 넘어 오시면 넘어갈 줄 몰라요.

위의 평창아라리 사설은 "평창아라리 가사집" (2005,1,25 평창군청 문화관광과 발행 )본중 일부 발췌로

평창아라리는 이 지역의 향토적 생활공간이 잘 표출되어 있다. 

  미탄 고유의 지명이 들어간 미탄 아리랑으로 일반적으로 이곳을 무대로 노래하는 한치 뒷산의 아리랑의 사설은 더 많은 것으로 사료되며, 여기서 청옥산이나 육백마지기란 지명은 불리어지나 두만산이란 가사는 없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영서의 아리랑의 시작은 1870년 이후로 고종과 민비의 아리랑 보급에 장려로 궁중에서 매일 밤 전문 예인집단의 경연대회를 개최한바 이에 고무되어 전국적으로 아리랑 붐이 일어난 시시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헐버트의 기록에서 그는 한국에 도착하는 날부터 천 여일이 넘도록 궁중에서 하루도 인빠지고 아리랑을 들었다고 기록하고도 있습니다.

  이 시기에 정선 아리랑은 뗏목 아리랑등이 만들어지며 영서 산간지방에도 아리랑이 확산되어 영서 아리랑 사설은 구한말 이후 일제 강점시를 지나 5~60년대까지 새롭게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60년대 이후의 시간대에는 산업의 발전에 기인하여 매스 미디어의 발달에 전국이 동시시대로 가며 아리랑등의 민요는 쇠퇴하기에 이릅니다.

여기에 미탄지역에서도 막다른 오지중 한 곳인 두만이 마을은 '70년대까지 밥만 먹으면 아리랑을 불렀다고 합니다.

( 이러한 미탄 아라리와 정선 아라리의의 제 이론의 작퉁에 대해서는 일전부터 수십편 게시하고 있습니다.또 하나 현 유네스코에 등재된 미탄의 평창아라리 보존회의 아라리와 위 설명의 옛 미탄지역의 평창아라리는 창법스타일이나 인토우네이션(억양)등에 차이가 있으며 이는 전선분이 미탄으로 시집와서 정선 스타일이 묻어난 것이기 때문이라 하며 평창시장에 그분의 자제분도 똑같은 창법스타일의 가창력을 지니고 이다 한다

 영서 아리랑의 활성화 시기는 이렇게 구한말에서 현 매스 미디어의 오락이 전달되기 전의 '60년대 말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육백마지기에 올라 개간한 화전민은 위에 언급한 바에 1968년 화전정리법 이후에도 개간지가 경사도 20도 이내이기에 경작지로 개간되었으며 임도등의 교통적인 발달도 가져와 대략 75년도까지 성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러면 이러한 경지개간에 의해서 육백마지기라는 명칭이 생성되었다면 여기에는 두가지 언밸런스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위에 아리랑 논고에서 그 시기를 밝힌바 정선쪽의 아리랑에서도 한치뒷산의 아라리 사설이 성행되었다면 이는 70년대 이후에 정선으로 전래된것으로 보기에는 그 논리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선에서는 한치를 정선 남면의 한치라고 하고 있습니다만 남면 한치는 일제강점시 금광의 광산이 있었다하며 나물 한 포기 나지 않는 곳으로 한문으로고 땀한자의 汗峙이며 청옥산 아래 한치동의 한치는 겨울에 내린 눈이 봄에도 녹지않아 찰한자의 寒峙란 지명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정선 아라랑 연구자들은 짝퉁의 모습이 너무 심하지요. 기왕 한마디 더 한다면 평택생으로 정선에 찾아들어온 자칭 아리랑 박사라 하는 김연갑은 정선은 아리랑이라 불렀고 평창은 어르랑이라 불렀다 합니다, 하지만 그 출처도 없는 이야기에 엣날에는 정선과 평창의 지리적 단절의 금을 긋고 아리랑이 다르게 표출돠는것이 아니라 영서 산간 아라리로 정선 아라리도 평창아라리처럼 후렴이 없었습니다. 이 부분도 김연갑의 정선 아리랑이란 책에 연규한씨의 말이 잘 인용되어 있으며 또한 동 책에서 만수산 사설의 가사에 연규한 씨가 연대적인 물음에 답을 못하자 그럼 이 사설이 600년전이군요 하고 기준을 내리고 이로서 정설화로 둔갑한 면에 그로서 역사 규정은 어패이고 실제 역사의 자료가 있어야 할 것이다. 

 평창아라리는 학자들의 연구의 세미나 한번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선은 많은 학자들의 연구와 세미나를 통해서 이러한 논지를 굳히고 있는데 충주 아리랑을 논고하던 이창석 교수는 정선 축협 3층에 올라 정선 아리랑의 세미나를 하였고 알랜 로맥스의 민요의 제기능 이론도 있는데 강등학은 민요의 기능성을 일반적 견지에서 밝히다가 정선에서 세미나를 하였고 전산재의 현장성이란 이론도,,,

또한 정선 아라리의 찬미자인 고숙경이나 우리나라 민요등의 가락을 모든 가락을 채집하신 이보형 이 모든 학자분들이나 정선 아라리 향수자 모든 분들이 정선 아라리만 추구하다보니 아리랑의 본질이 망각된다는 본인의 생각에 그럼 평창아라리는 왜 후렴이 없는가 이는 옛 강원도 아리랑의 고형으로 정선 아리랑의 원조도 평창아라리와 동일시 후렴이 없었는데 왜 없는 것일까 하는 점은 아직 누구도 흔들어 연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아라리의 본질이 가락입니까 가사 입니까에서라는 명제로 후렴이 퇴락되어 잘리어 나갔는가 아니면 원래부터 없었는가에 대한 연구도 없이 아리랑을 완벽히 소화하지 못한 현재 모든 아리랑의 이해는 각자들의 도그마에 의한 해석에 치우치지 못한다는 점이며 이 한계를 넘어서야 아리랑의 본질적인 이해가 가능하는 생각입니다. 본인은 앞으로 이 글들을 제시 할 것입니다. 본인의 논지가 잘못이라면 언제든지 논쟁으로 답을 드리겠습니다.

좀 다른 부분의 이야기였습니다만 이 모두 미탄 아리랑의 제 논지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네 삶의 정한속에 한치 뒷산의 아라리의  본연의 이해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장황한 이야기에 좀 지루해지지만 두가지의 이야기로 다음에 다시 구분하여 서술할 것이며 본제로 돌아와서 평창에서 최초의 아리랑 기록은 진부면지에 의하면 1933년 김소운에 의해 다섯 사설의 가락이 채집되었습니다.

오대산 박달나무는 왕자 축자로 기차타고 안동현에 다 나간다라는 사설을 지금은 이해를 못하여 정선쪽에서는 해학편에 기재하지만 이에 해석도 이미 게시하였으며 이러한 당시 시대상은 평창의 작가 이효석의 "산협" "개살구"" 영서의 일기"에서 당시 오대산 박달나무에 대한 시대적 산물의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선에서 아리랑의 문헌적 기록은 근자에 아리랑이 복고된 1985년 기록이 최초의 기록입니다만 위에 예시한 청옥산 아라리의 사설들은 정선 아라리의 다른 사설들과 연관해 보면, 예를 들어 뱃사공 지장구등에서 보듯 최소한 해방이후의 가사이지 근, 현대의 가사는 없다고 판단되기에 육백마지기에 화전민이 오르기전에 이미 육백마지기란 이름이 불리어지지는 않았슬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 육백마지기가 화전민들이 만든 단어라는 것에 또 하나의 의문점

  6~70년대에 화전민들이 육백마지기를 개간하였다면 당시의 기계화나 축력에 의하기 보다는 인력에 의한 경지정리작업시 아마도 그 전성기 마지막 지점인 1975년정도에서 기준으로 육백마지기라면 모르겠지만 정착초기엔 육백마지기라고 하면 이해력이 떨어진다.

 또한 위에서 논한 경작자 논리적인 단위보다는 강원도 일대에서는 논은 마지기를 단위로 하며 밭은 마지기보다는 평이라한다. 즉 이렇게 얘기한다 가령 "논 닷마지기와 밭은 300평 있소"라고 말을 하지 논 닷마지기와 밭 한마지기 있소라고는 하지 않는다. 가끔은 밭 한 두락 있소 하는 표현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밭보다 큰 임야나 산의 단위는 정보(ha와 동일시. 3,000평 기준)으로 임야 6정보라면 600두락의 180,000평이다.

 그러기에 근대화 이후에는 어렴풋한 마지기의 단위보다는 측량의  지번도에 나타나는 정확한 용어인 평이란 단위로 말하고 있기에 육백 마지기나 육백 두락이란 표현은 6~70년대에 이곳에 화전민이 경작하기 이전 시간대에 사용한 용어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측량된 측지도를 펼쳐서 재어보면 과연 육백마지기의 180,000평인가 알 수도 있슬 테지만 이를 몇평이요 한게 아니라 600백 마지기란 용어를 사용한것은 측량이전의 눈어림 값으로 봐야 할 것이다.

  눈어림 값이란 일반적으로 어림잡아서 5나 10의 단위로 미루어 대강 말하지 (오백 마지기나 천 마지기) 6이나 4등으로 육백이나 사백 마지기등으로는 말하지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육백마지기란 정확한 상태를 이야기 한다면 이는 계획성이 없는 자연의 상태에서 개간이 다 된 시간대에서 나타나야 하기에 시간적으로 모순이 걸리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정확한 역사적 사료가 발굴되지도 못하였기에 화전민들이 경작하며 밭의 단위로 육백마지기란 단어가 새로히 생성되었다고 보기에는 본인으로서는 그 이해력이 떨어집니다.

그러기에 육백마지기란 일전 본인의 주창한 바 육백은 음양의 옛 고어로 금성(샛별)을 의미하며 마지기는 맞이하다라는 표현의 구개음화 현상의 마지하다로 변하며 이를 명사형 준말로 마지기로 복합적 변형이란 점으로 청옥산 마루 정상은 넓은 고원의 지붕으로 이곳에서 금성을 맞이하든 아니면 산 아래 미탄 읍내에서 보면 그 경사값때문에 새벽의 샛별은 조금 높이 떠오르는게 아니라 이곳 육백마루에 걸터 앉는 모습으로 이를 보며 샛별이 내려앉는 마루란 뜻이든 육백마지기의 육백이란 금성을 지칭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나 역사적 정확한 고증의 자료가 없기에 이를 단정하는게 아니라 주창하는 것입니다.

물론 화전민들이 오르기전엔 육백마지기란 이름이 없다가 화전민이 오르면서 육백마지기란 단어가 생긴 점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전적으로 수긍합니다만, 위에 장황한 논고에서 화전민들은 무슨 근거로 육백이라 어림합니까?? 또한 그 이전시대 즉 조선시대이후 금성을 육백이라 불렀으며 청옥산 정상은 고원 마루로 그 위로 떠오른 육백(六白 금성) 즉 청옥산 정상은 육백마루, 육백을 맞이하는 등의 뜻이었던 바, 화전민들은 이러한 육백마루를 육백마지기의 밭의 개념의 단어로 전용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이때 육백은 밭의 단어에 근거할 수없기에 별의 단어 육백을 차용했다면 이것은 의미상으로 오용하게 되는 점이다. 

 이어서 육백마지기의 원인으로 해석이 불가하다.

   이러한 논지는 오백마지기라면 타당성이 결여되지만 육백마지기이기 때문이 그 단어의 뜻과 의미를 내포할 수 있는 범위를 가지기 때문에 아주 그르다고 말 할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마도 정선 사람들이나 영월 사람들은 이것이다라고 우겨댈 것입니다. 그네들은 정선 아라리가 600년전 전오륜 패거리들이 만든 것이란 역사적 사료나 물증도 없이 김연갑이 연규한씨에게 이보다 더 상한의 가사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슬때 답이없자 그럼 이게 가장 오래된 사설이겠습니다. 마치 요즘 시각으로 이야기하면 한국은 6,25 동란에 빠져 있는데 1952년 일본은 미국과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대마도와 오끼나와를 일본땅이라고 조인 한 것입니다. 이러한 분쟁은 당사국과 인접국이 따져야 하는 점입니다.

 미국은 일본에게 6,25에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내가 두 섬나라를 인정해줄테니 좀 싸게 만들어라는 이런 억지빈정도 감수해야 하듯이  김연갑은 무슨 권한으로 역사를 마음대로 주물렀는가,,,(어찌 만수산 사설은 전오륜 패거리가 불렀다고 단정하는가... 본인은 이 사설도 구한말 청옥산에 올라 나물뜯을때의 노래라고 주창한 점도 있다)

 어디 정선뿐입니까?? 영월은 한 수 더 떠서 "82년도 당시 영월문화원장 고 박영국옹은  무연고 묘를 김삿갓 묘라고 학게에 질의하여 다수결로 인정 받은 것이다('82년도 강원일보 기사 참조) 그런데 원래 김삿갓묘였다면 다행일 수 있었으나 이 역사는 그렇지 못하고 김삿갓 묘는 아들 익균과 함께 평창읍 천동리 하도마치라는 삼방산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당시 본인의 글에서 박영국옹이 역사학자 출신이었다면 학계에 이런 문의조차 할 필요도 없었슬텐데.. 역사가 출신이 아니엇기에 문의가 가능했던 점으로 현 문화원장임은 한 평생 역사교사로서 정통 역사가 출신으로 그의 인삿말씀 같은 글에서 영월의 손톱한 역사도 모두 망라하여 새로운 역사관을 창출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속에 김삿갓 문화론은 한 단어도 없기에 고의적으로 누락시킨 점이다, 이는 올바르지 못한 역사창출이라고 본인은 해석합니다. 이러한 입장인데 이때 평창은 뭐 합니까...노 마크 찬스애도 숫을 못 날리는 축구선수는 선수가 못된다는 점으로 평창의 사가들은 모두 죽어 있다고 표현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정선과 영월의 역사에 대한 본인의 여러 글에 대한 명확한 사료나 증명이 없다면 그들의 역사는 그 자체가 오만과 편견의 역사란 점으로 최소한 본인으로서는 매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본인은 육백마지기 어원에 대하여 그 사료나 검증이 되지 않는한 하나의 이론적 설로 제시할뿐이지 그것이 역사라고는 주창하지는 않습니다.

 아상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음의 미탄을은 육백마지기 정수리에 내리 꽂은 풍력발전기는 친 환경의 애코란 단어를 구사하지만 일전 본인의 글에서는 그 소리가 호이겐스 현상으로 밤이면 크게 들리기에 귀신소리처럼 들릴 것이라고 조금만 멘트하였지만 이번 여람 두어번 답사시에 들은 이야기들,,, 과연 육백마지기엔 호랑나비가 날아들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이것이 정말일까, 그럼 혹 육백마지기는 인간이 고사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에 앞으로 관찰을 해 보아야 한다는 글을 써서 제시할 것입니다.

 * 호이겐스 현상이란,,,

우리 속담에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호이겐스 현상이란 낮에는 대류가 상승하기에 소리도 하늘로 올라가 새가 듣게 됩니다. 그리고 밤이면 대류는 지면으로 가라 앉기에 소리도 동반되어 가라앉아 쥐 구멍속으로도 파고 들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가르는 풍력발전기의 풴 소리는 바람이 불면 불 수록 더 세게 돌며 더 크게 들릴 따름입니다. 밤으로 이 소리는 산을 타고 내려와 평안리, 한치를 넘어 들릴 것이며 또한 퓐 돌개의 뒤편인 지동리에서도 들립니다.

 스스로 별천지라 부르며 아름답게 살고있는 27여 가구의 지동리...

자주 가문다는 소리가 그치지 않고, 또 어떤 분들은 지동리는 비가 오지 않는다 합니다.

 이것이 혹 풍력발전기의 피해는 아닐까요 하는 점의 이야기를 써서 제시하겠습니다.

  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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