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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2. 노산성의 여러 현안문제 (평창 역사의 바른 정립에 관한 회고)

2. 노산성의 여러 현안문제 (평창 역사의 바른 정립에 관한 회고 )

후세백작 2020.01.06 07:32     


  제 1장의  평창역사 정립에 관한 회고의 의의와 개괄적인 이야기에 이어서 제 2장 이하 3장등 계속하여 이미 발표한 평창역사의 새롭게 정립하는 각 개뱔 역사의 게시글들의 이래에 관한 보층 설명을 합니다. 이러한 보충 설명은 역사적 사료가 아니기에 각 개별 역사글에서 누락된바 그 이해를 위한 설명이므로  역사 전반의 개괄적 요소는 생략하기에 각 개별 역사글을 참조하시고 개별 역사 글에 이어서 주관적인 해석의 의미로 연장하기에 이 점을 양지 하시고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본인의 평창 역사글은 기존의 일반적 역사글과는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간의 평창의 역사가 오류적으로 서술되엇으며 또한 불확실한 모습의 역사나 관심 밖이던 역사의 새로운 고찰로 조명 하기에 그 순서나 범위는 임의적 구분으로 열거함을 공지 합니다.



1) 평창 일번지 노산성의 국행 성황사의 제 문제


  노산은 평창의 태기산에서 발원하여 회룡고조형으로 과립과 박환의 힘찬 용솟음을 분출하며 달려와 관자놀이 격의 시루목을 건너서 그 정기를 멈춘곳이 노산으로 평창의 진산이다. 이 노산을 둘러가며 물이 수태극으로 감아돌며 만든 땅은 노산의 정기를 받은 평창으로 노산은 평창인들의 언제나 숭상하는 고향인것이다.


 이러한 노산의 제 1봉은 중리 산 1번지로 약 500여m의 노산성을 축조하고 예전에는 성곽안에 여러 건축물들이 있었기에 기와장등이 부스러져 있으며 평창의 기상을 말하는 국사(국행) 성황사가 있었다.


  이 평창의 국행 성황사는 고려말 이후 이조시대에 전국의 군, 현에 두었던 성황사의 하나로 성황사란 지방 수장인 군수(정4품)이나 현감(정 5품)이나 이를 대신하는 제사장이 정초에 기일을 잡아  임금을 대신하여 이곳에 나아가 국가의 태평과 국민의 평온의 국태민안의 제를 지내던 곳이다.


  평창의 노산 성황사는 1872년의 오면지도에도 노산의 위에 그림으로 명확히 표시되어 郡의 중요 행사처임을 나타내고 있는바 현재 사람들은 성황단이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오류이다. 사당의 당집이 있으면 司자가 붙으며 제단만 있슬경우는 성황단의 檀자를 붙이는 것이다.  물론 군사성황사도 여타 부락의 성황사(서낭단)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祭를 지냄에는 격식상에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또한 참고로 이야기하면 일반적인 상식이 결여로 성항단(서낭단) 옆의 당집을 성황사(서낭단)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 모르는 무지이며, 성황단은 돌 누적단이거나 아니면 각종 나무를 대상체로 신령시 하는 것이며 당집은 성황신의 대상이 아니란 점이다.


  60년대 말까지 노산 성황사의 둔전을 받아 농사를 지어 제수용품을 마련하여 정초에 이곳에 올라 제를 지내던 제사장 고, 김학수 옹의 子 택용씨의 증언으로 미루어보면 그는 초교시절에 부친을 따라 노산 성황사에 올라 제를 지냈다 한다.

 당시 술과 떡등 제물을 장만하여 저녁에 동네청년들이 등에 지고 여러사람이 성황사에 올라 추운 밤에 군불도 쬐가며 깊은 밤 자시를 기다렸다가 제를 지낸다 한다. 이때 매년 같이 다니시는 분은 필자의 옆집의 황완택 옹(농업)이 부친이 한학을 하신 유림이시기에 매년 성황제에 참여한듯 합니다.


  김택용씨의 증언중에는 어느 해에는 우리의 기제사처럼 지방을 써 붙이고 군수이하 여러사람의 촌지를 사르고 제를 지내고 있는데 캄캄한 밤이지만 제단 뒤편으로 호랑이가 다녀간 것을 느끼고 이는 부정이 탈 수 있기에 다음에 날을 잡고 올라서 다시 제를 지냈다 합니다. 우리민족은 호랑이는 영물로 여기며 아마도 제사시 조용히 이곳을 다녀갔다면 이는 길조라 여길 수 있으나  이 성황제에서는 호랑이도 부정의 소지로 용납이 안되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군민의 평안을 기원하는 염원이 담긴 제이기에 신성하게 지내야 하는 점으로 여겼으며 부정적 요소는 군만에게 해가 돌아가는 화근적 요소가 돌까 염려하였던 점을 볼 수 있는 좋은 증언 자료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왜래학자가 들어와 국구사우의 세미나를 하면서 중리의 정월 대보름제때에 중리 농악대는 노산에 올라 국행 성황사 앞에서 한마당 농악풀이를 중리 서낭당의 암신과 노산 성황사의 신(남신)이 접신과정이라 한다.

현장적 파악에 부족함이 있다., 위의 증언에서 군민의 안녕에 부정이 탈까봐 신성하게 제를 지냈는데 중리 서낭제와 접신과정이라면 국사 성황단은 좀 혼돈스러운듯 하며 군 전체에서 일개 부락만 접신을 한다면 이는 만 백성을 위함에 위배되는 것으로 이것은 접신이 아니라 중리 농악대가 생기고 정월 대 보름때에 노산에 올라 인사차 농악풀이 한마다을 한것쯤으로 해석해 보아야 좋을듯한 생각이란 점입니다.


  그리고 근자에 향토사학자도 아닌,,, (향토사학자란 범위는 없지만,,) 평창 역사에 얼마나 노력한 흔적은 털끝만치도 없는 사람들이 시중의 일반 역사책을 대비하여 그 이해에 의해 주관적 생각으로 노산 성황단이 뭐 어떻다고 마음대로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왜곡이기에 이러한 글들은 이름 석자 생색내기 바쁜 옳치 않은 역사논리란 점을 알립니다.


  그래서 마음대로의 엿가락 역사를 창출하는 현재에 비 향토사가들의 이 국사 성황단을 평창읍 "노산 임진노성전적비 충의제당"이라고 부른다. 참으로 염청난 문화 장난속에 역사는 왜곡되고 말은 것이다.

국사 성황단에 제는 멈추었다고 그 당집이 충의 제당이라 용도변경 되었다면 이것은 엄청난 역사. 문화훼손이란 점이다

참으로 웃지못할 일이 자행되고 있다



2) 노산 임진 전적비란??


  노산성에서 임진란때 전투를 했다고 하며 이곳에 임란 노산 전적비를 세워 놓았는데.. 430여년전 임진왜란때 노산성에서 전투를 한 기록이 있습니까?? 그런 역사적 증거의 기록이나 사료는 단 한 점도 없는데 무엇으로 노산성에서 전투를 했다고 이야기 하는지 알 수 없읍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노산에 임란 전적비가 세워지고 노산성에서 전투를 하였다는 기록도 보게 되었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전하여 쉬 찾아 볼 수있는 내용으로 당시 강원 논문 공모전에서 평창의 노산성에서의 임진란 전투의 논문이 금상을 수상하였는데(논문의 작가는 비공개 하겠습니다) 내용엔 평창의 군, 민이 합세하여 왜구 100여명을 사살하며 승리를 하였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본인으로는 강원도 대상의 논문을 모함하려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논문은 당시로서는 평창에서 임란전사를 알 수 없었던 때라 가상의 픽션으로 쓴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노산성에서 그럴듯한 전투를 연상하며 노산성에 제법 큰 임진란의 전적비를 세워 놓았는데 하지만 이러한 논문에서 노산성에서 왜구와 전투를 한 역사적 사료는 전혀 발굴된 것이 없다.


   그러기에 이러한 논문은 무엇을 근거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출처의 역사 기록이나 증가의 사료도 없기에 역사의 이야기 논고가 아니라 명백한 허위의 이야기로 당 논문이 노산성의 임란 전적비의 논리적 받침으로 작용되기에 숨김없이 논고해야 되는 부분이다. 이 논문에 강원도 문화원 연합회에서 심사위원들은 대상 결정시 그 논문의 인용출처나 고증의 검사도 미약하게 심사한것으로 이러한 역사의 사실이 아닌 허구의 픽션물로 평창 노산성의 임란사가 대상을 받았다. 그것은 아마도 강원 문화원 재단은 역사논문이 아니라 소설의 작가를 생산하였다고 비난받아야 마땅할 듯 하다.


  왜구들과 노산성 북쪽에서 전투에서 아군의 장수들이 왜구를 백 명이나 죽였다 하는데 시루목 여울의 여만리 강가에 2기의 돌 누적단은 툭하면 평창의 사가들에 의해 전투시 이용된 엄폐물로 이담이니 뙤담이라 하지만 한림대 연구서적에서는 고구려초기의 적석총이라 한다. 하지만 본인은 이 돌누적단은 국내에서 가장큰 돌 누적단 서낭당이라고 밝혔으며 후일 두 가지 사안으로 증명되었다 (해당 게시글 참조)


  또한 왜구는 대굴령을 넘어 평창을 쳐 들어오는데에 노산성 북쪽을 공격하였다고 막연하게 가상해 볼 수도 있지만, 본인이 밝혀놓은 평창의 임진왜란전사에 보면 왜구  4번대는 모리 요시나리 장수 휘하 일만 사천명이 원춘도의 감영인 원주를 쳐들어가기 위해 강원도 주변을 대회전하며 제압하는 전법으로 백봉령을 넘어 정선에서 원주 가는 길로 평창을 지나게 된 것이다.

(해당 게시글 참조)

 

 본인은 이러한 이야기로 당사자를 반감하자는 취지가 아니라 지금 노산성의 임란 전투비가 아마도 그 논문이 출현시 세워졌고 이때 이후에 임란당시 권두문 군수의 직계 13세손 권태하님이 제 1회 평창 노산 문화제를 다녀가며 이에 고무되어 집안에 있던 호구록을 번역하시었기에 호구록에 의해 430년전 임진란 당시 평창의 응암굴 전투가 소상히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기에 본인의 이러한 기록성을 보면서 현재의 노산전적비가 역사에도 없는 허상이란 점과 후일 노산성에 잔적비의 논란이 다시 붉어져 임진란 당시 왜구를 100명이나 사살한 역사기록 운운한다면 반드시 본인의 이 글이 필요할 것이다. 지난 역사를 잘 알수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없었다는 허위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면 그럼 알 수 없는데 어떻게 100명을 죽인 역사는 어디에 기록이 있었던가 하는 문제에 역사는 없다고 단정하는것이 문제가 아니라 있었다고 한다면 그 출처의 정확성으로 증명해야 함이 꼭 필요한 일이기에 단연 노산 전적비는 증명할 수없는 이야기로 역사적 사실이 아니기어 허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허상이라는 논증에 더욱 중요한 역사적 사실로 입증한다면 임진란 당시 권두문 평창군수는 평창전사의 일부분을 일기체 형식의 "호구일록"으로 남겼다. 여기에 호구란 호랑이 굴에서 즉, 포로가 되어 잡혀가다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탈출해 왔다는 의미를 제목으로 붙였다.


 "호구일록"의 시작은 왜구가 평창으로 진입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조파(朝坡,고개 파.동쪽의 고개를 뜻하며 현 멧둔제쯤)"에서 사신의 연락으로는 왜구가 지금 조파를 넘고 있다고 하자 권 군수 이하 모든 장수들과 군민 모두가 응암굴로 피신하였다. 다음날 응암굴 전투에서 평창으로선 무관 지사함등 여러명의 군졸이 응암전투에서 사망한 기록을 볼 수 있다. 평창의 장수들은 모두 응암암굴로 피신하였는데 백여 명을 죽였다는 논문에서 100여 명을 죽인 전투는 평창의 장수들이 할 시간이 없었음이 분명히 나타나며 또한 평창의 장수들은 모두 응암굴로 피난가는데 어느 장수들이 싸워 100여명을 죽였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백여명을 죽인 전투를 하였는데 왜 동굴로 피난갔는가 하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 그러기에 그 논문의 위증이 성립되는 것이다.


  임진란 이후에 1872년 숙종때 해동지도 평창군 상단에 기록된바 평창의 군사는 34명이라한다.

또한 호구록에 의하면 왜구가 맷둔제를  넘어 쳐들어 온다는 보고에 군수이하 군 관만 모두가 응암굴로 피신하였다고 당시 군수의 임란일기에 명백히 서술 되어 있으며 이로 보아서도 노산성에서 100여명을 죽일 전투의 시간적 영유가 없었고 평창의 모든 무관들은 응암전투에서 단 한 명의 왜구도 죽이지 못하고 모두 사살되었다고 호구록엔 응암전투를 소상히 밝힌바 임란당시 노산성에서 100여명의 왜구를 사살하였다는 것은 역사논문이 아니라 소설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러기에 노산 임란 전투비는 허상의 거짓이며 여기에서 매년 평창군수이하 군민들은 엉터리의 허상의 노산전투에 작헌을 하고 참배하는 우스꽝 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역사가 밝혀지기 전에는 어쩔 수 없는 형편으로 그 예를 다함이라 할 수 있지만 그날의 역사가 밝혀지고 알았다면 역사는 바르게 수정되어야 함에 수십년 방치되고 있으며 노산제의 그것이 마치 평창의 제 1의 기상인양 제를 드리는 것은 평창문화원 설립 목적에 첫번째 항에 지방 향토사 발굴과 정체성 운운하고 정부로 부터 예산도 타는데또한 문화원엔향토사 향토사 전문위원이 10명정도 있는데 이 전문위원들이 이러한 역사를 소명해야 하이 당연하리란 생각에 아직도 바르게 정립하지 못하고 방치하고 있는것은 역사에 배임이라 지적한다.


  지금 평창이 노산에 올라 노산전투에 대한 충혼의 재를 드리는것은 이러한 에에서 처럼 허위이기에 평창군수 이하 평창인들은 허공에 제를 드리기에 향토사가들은 이를 정립하여 다시 수정하여야 한다고 역설한 바도 있는데 아마 본인의 글의 인지도가 낮아서 읽지도 않아서인지 지금껏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럼 전적비의 큰 비석을 응암리로 옮겨야만 하는 것입니까?? 아마도 이런 움직임이 쉽지않아 묵묵부답일까?? 그러면 이제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하는 해답까지 제시합니다.

평창 시내의 노산은 평창의 진산으로 과거 평창을 처음 측량시 노산의 제일 높은곳을 중리 산 1번지로 기록한 바 있듯이 과거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평창군민의 평온과 무사를 기원하여 임금을 대신하여 평창군수가 나아가 또는 제사장이 국사 성황사에서 국태민안을 위한 제를 드리던 곳으로 이곳은 평창의 일번지입니다.


  평창의 응암리 전투는 임란시 강원도에서는 유일하게 항전을 한 郡으로서 그 기상을 높이 기리기 위해서 응암리에 비석을 세워야 마땅하나 노산성은 평창의 일번지로서 현재 노산성에 건립한 비석을 그 자리에 둘 경우에는 노산성 전투의 전적비란 오류의 기록은 응암리 전투 전투로 고쳐써야 하고, 강원도에서 유일하게 군, 관민 모두가 항전을 고장으로서의 위상도 그려야 한다.

이로서 응암리 전투를 평창 제일의 기상으로 기려야 하는 것이다.


 여만리 강변의 두기의 돌 누적단은 평창에서는 이담, 뙤담(오랑캐)이라 하며 한림대 연구서에서는 고구려 초의 적석총이라 하지만 본인은 이것이 돌 누적단으로는 전국에서 제일 큰 서낭단이라고 밝혀 놓았다. 그런데 '80년대 이곳에 여만리 제방을 축조하면서 사진의 기록 한 장없이 제방공사시 뭍혀 버렸다.


* <연구과제 1>

당시에 기록은 현재에 쓰여져서 강원도라 지명 하지만 당시로서는 원춘도라 하였으며 지금의 평창이란 지명도 당시에는 창평현이라 사용하였다. 이에 조선시대 평창이란 단어 사용은 근자의 것이고 조선 초기에는 강원도가 아닌 원춘도이고 창평이란 단어를 사용하다 중기 이후나 조선 말에 행정제의 개편의 정비가 있슬때 수정된 듯한 가설이 성립되기에 이에 연구도 잇어야 한다. 예를 들어 국구사우에 정비에서 정조는 강원도가 아닌 원춘도 관찰사 에게 명을 내리고 하는 문장이나 창평이라는 단어도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 <연구과제 2>

 호구록에서 왜구가 미탄에서 평창으로 넘어올때 왜장의 서신을 들고 온 자를 조파(朝波)에서 이때에 조파는 어디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이 평창의 동쪽방향이기에 아침 朝자에 坡

자는 지역명을 나타내는듯 한데 坡(고개 파) 나 派(물 갈래파)는 지역명에 좀 더 확실히 다가가지만 波(물결 파)는 의미 전달에 오류로 쓴듯 하다.


그러기에 조파란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동리쯤으로 보인다면,,

과거에 정선에서 미탄을 넘어 평창으로 오는 길의 코스는  성마령을 넘어서 미탄을 거처 멧둔제를 넘어 오는것으로만 생각할 수 있으나 기실 성마령을 넘어 청옥산 육백마지기를 지나 조동으로 내려와 평창으로 진입하는 길은 다시금 멧둔제를 넘는 어려운 코스보다 더 근거리 육백마지기를 내려오면 고길리에서부터 골짜기의 평지로 평창까지 갈 수 있기에 가마나 차량이 아닌 시절에 도보이동은 청옥산에서 지동, 조동리로 내려와 평창으로 진입하는것이 어쩌면 더 용이한 코스란 점입니다.



3) 하리 옹달샘은 왜 마르는가??


노산성에 노산 성황사등 몇편의 개시글 중에서 노산성의 지형과 지질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하였는데 그 글중에 하리 옹달샘은 왜 마르는가??  예전엔 많은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던 옹달샘이 거의 말라 버렸는데 혹시나 사람들은 천년 운도가 다하여 말랐다고 자연의 야속함을 탓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아니다. 천재의 변화가 아니라 인재의 화(禍)를 자초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름아니라 노산은 석회암 지대로 미탄에서 조동, 상리로 이어져 중리와 노산도 안미까지 극한 카르스트 지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카르스트 지형은 돌리네에 의해 석회암에 빗물이 들어가 화학적 작용에 의해 용식 침식되는 작용으로 노산성 정상의 중앙부는 대략 30m쯤 침식되어 붉은색 진흙의 테라로사 지형을 이루고 있다.


  미탄의 고마루엔  약 100여개의 돌리네나 폴리네가 형성되어 있으며 돌리네의 대표적 마을인 돈너미 마을을 지나며 보면 코끼리 바위에 들어간 부위의 돌리레도 볼 수 있으며 기화리 쌍굴 아래엔 지하로 스며든 용수가 다시 분출되는 용천수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조동리의 못골은 청옥산 뒷면과 남병산의 뒷면의 사이에 깊은 골에 고길천은 내려흐르다 노산리 이후 웃상리에서는 강물의 자취가 없어지고 마른 장강만 보인다. 지류천은 지하로 스며들어서 송어장의 샘물을 만드는데 송어장 초기에는 초당 일곱초롱의 용수가 분출되었다 한다.


  이러한 카르스트 지형은 중리의 노산에도 이어져 산 중앙부가 녹아 함몰되었으며 하리의 옹달샘과 중학교 위에 샘을 만들며 여러 샘을 볼 수 있으며 노산의 뒷편 평창강 바닥에서도 샘물이 분출되어 물속깊은곳 수중 5m 아래의 강바닥에서는 물 속의 밀도 차이를 볼 수 있으며 샘물이 올라오는 방울도 볼 수 있다.


  노산은 중앙부가 함몰되며 30m정도 깊이의 호수를 만들 지형이나 산을 흘러내리는 지류의 소하천도 없이 여러 개의 샘을 만들고 있는데 중앙부 함몰 부위는 흙으로 메워 다져서 활공장을 만들은 바 이것이 돌리네 흡지 구멍을 메워서 스며드는 물이 없어서 옹달샘은 용출이 되지 않는것이다, 자연에 이러한 인위적 도전은 괜찮을까??


  우리는 동물, 식물 군락이 침입에 즉 외국산의 침투에 생태계의 교란이나 파괴등을 흔히 보아 잘 알지만 지리, 지형의 변화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물리량의 변형의 파장은 언제나 이루어지는 정확하기에 노산의 돌리네를 막아서 옹달샘이 흐르지 않는 것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변화는 일어날 것이다.  그러한 변화의 충격은 폐해를 가져오는 것이기에 특이한 자연의 법칙은 인위적으로 거스르지 않는게 좋다면 지금이라도 활터의 과녁을 접고 돌리네가 숨쉬게  복원하여 그에 맞는 개발을 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도 중요한 교훈의 하나는 지리적 자연적 륵이점에 맞는 아이콘 계발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란 점으로 이를 거스르고 전혀 다른 문화를 접목한다면 그 충격은 피해로 돌아오는 것이기 정체성을 찾아 그에 맞는 발전을 강구함이 옳은 방법으로 그것이 역사에 대한 오늘의 대처방법이기에 다시금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3부 안내>

 3부에서는 평창의 바위공원과 백일홍 축제를 돌아보며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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