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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판관대 세미나를 환영합니다


판관대 세미나를 환영합니다                 


후세백작 2019.11.03 22:19


오는 11월 22일 평창에서는 판관대의 문화콘텐츠 계발을 위한 심포지엄을 개최한다고 한다.

우리 역사와 문화에 심사임당과 율곡에 관하여 평창으로 이 문화 콘텐츠를 계발함은 고무적인 일로 환영합니다.


우션 죄송합니다만 "문화 콘텐츠 발굴"이 아닌 "문화 콘텐츠 계발"이란 용어를 사용함에 아래에서 본인의 견지를 피력합니다. 


본 심포지엄에서 주제어에서 "문 콘텐츠 발굴"이란 단어를 사용하며, 이창식 교수의  세미나 주제의 제목으로 "문화콘텐츠 발굴과 확산"이라 하면서 발굴이란 용어를 사용하지만 문화 콘텐츠는 역사의 사실의 발굴이 아닌 역사적 사실을 이용하여 응용하는 문화를 개발하고 발전시켜 나가자는 심포지엄이기에 문화 콘텐츠이기에 본인으로서는 부득이 문화콘탠츠 발굴이란 용어가  아닌 문화 콘텐츠 계발(啓發)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이 글을 논고합니다.



   <우선 위 판관대 표지판의 감상 소견부터 피력합니다>


왼편 사진속의 판관대 비석의 감상적 소견부터 표하면 메인부의 몸체의 연판은 위에서는 무언가 내려 눌린듯한 인상에 그 이유는 몸체는 작고 기단은 비율적으로도 넙적하고 큰 2층이 몸신의 1/2를 차지하기때문에 몸체는 눌린듯한 인상이다. 물론 이 비석은 석조물의 탑은 아니지만 옛 선인들의 탑 조성의 비례균형엔 이런 무리함은 없었다.


 아마도 이러한 기단은 일본 교토의 청수사 3층 석탑에 두 기 있는데, 그것엔 무리함은 없고 강건한 인상을 자아낸다. 일본은 화산의 나라라 석재 산업이 발달치 못하고 화산재의 토양분과 태풍의 강수량에 의해 나무가 잘 자라고 목재가 많아 목재의 문화이다. 그렇다고 목재문화의 양식면에서 우리나라 법당은 섬세하고 아름답지만 일본은 무사의 문화라 민흘림이나 배흘림등의 엔타시스도 없으며 그저 기둥의 목재의 굵기가 압도할 뿐이지 다포형식에 도리를 이용하여 층 수를 높이는 듯하다.


오사카 성의 벽체엔 4~5m의 화강암을 평면으로 다듬애 벽면을 장식하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예술적인 가공은 하질 못하는 문화가 없는 것에 비해서 우리는 화강암의 조각 기술, 그 중에 시각적 미의 도안을 제일 중시하였는데 위 비석은 그러하질 못하고 조각자 자신의 편리만 따른듯 하다.


이러한 구체적인 설명의 이유는 판관대에 문화 콘텐츠에서도 독자들은 판관대 비석의 모양을 재일 먼저 접할 수 있는데 이때 판관대에 대한 인상에서 독자들의 마음을 제일 먼저 사로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비석의 명문은 일전 게시글에서 다룬 바처럼 극히 주관적인 풍수 글을 쓰고서 또한 잉태지라는 것에 맞추어 율곡의 12월 말에 출생하였기에 음 2월에 이원수 공은 별미를 얻어서 휴가차 내려올때 사임당 신씨는 강릉 와가에서 이곳에 당도하여 율곡을 잉테하였다 한다.


러한 시간 맞춤은 역사가 아니라 짜깁기의 글이다.

 막말로 잉태지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지난 글에서 이야기 했듯이  성경에서 성모 마리아는 수태고지 우물가에서 임신을 했다는 이야기를 이야기 했다는 것을 기념하는 가브리엘 교회는 종교적 이야기이지만 역사에서 잉태를 무엇으로 증명한단 말인가. 그러면 이 공이 집(판관대)애 당도하기 전에 대화 주막에서의 이야기는 왜 역사가 아니고 설화이며 판관대가 잉태지라 함은 역사로 간주되어 있는가??


 여기서 대화 주막의 이야기는 아마도 일제 이후 신작로가 생기고 장평으로 해서 봉평으로 당도하였다고 이야기를 구성하지만.,.

 기실 이원수공은 한양에서 근무한게 아니고 조창의 흥원창(원주)에서 근무하였슬 가능성의 높은데 그러면 원주 부론, 문막에서 문재, 전재를 넘에 방림 대화를 경유화여 봉평 집으로 간것은 아닐 것이다.


 잉태지 이야기는 하나의 설화이지 역사는 아니다.

그러면 판관대의 역사는 무엇일까에 답으로 지난 글에서 이곳 백옥포리 판관대는 신 사임당이 부친 신명화 공의 2년상 (만 2년)을 신 공의 집인 서울에서 치르고 (이 3년상도 오죽헌에 치렀다 하는 것은 오류임을 지난 글에서 지적함) 이곳 백옥포리로 내려와 신혼 산림을 하였다.


 이곳 판관대의 백옥포리는 신 사임당의 신혼 집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18년 생활 후 서울로 이사를 가게된다. 여기에 서울도 강릉도 아닌 첩첩산중속 어중간한 곳인 백옥포리에  신혼집을 장만하였슬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든다. 이 이야기는 이원수공에게 장인어른인 신공은 이미 사위의 한직이란 직업 형태를 알아차린듯 기지가 밝고 총명한 신 사임당을 앞으로 가르칠 것도 많고 하니 멀리까지는 시집을 못 보낸다 하였기에 백옥포리는 강릉땅으로 한양이 가까운 지점인데 신 공은 지금도 떵떵거리는 강릉 최씨의 문중땅을 빌어 집을 지어 주었던 것이다.


  신사임당은 이곳 백옥포리에서 18년 생활후 서울로 이사하게 되는데 다섯째인 결혼 12년차에 출산하였기에 율곡은 여섯살때 까지 이곳 백옥포리는 고향인 것이다. 하지만 영조때 사패지를 내려주는 판관대라는 잉태지에 의해 율곡의 고향은 잊혀지고 지금 사람들은 율곡하면 오죽헌이나 파주라는등 율곡의 고향은 상실되었습니다.


  오죽헌의 신사임당의 모친 용인 이씨의 외가로 최응헌이 오죽헌을 짓고 살았으며 무남 독녀에 외손봉사로 사위 이사온에서도 무남독녀로 용인이씨는 신명화공에게 시집을 가고 신명화공은 나이 마흔에 진사에 합격하여 양반을 득하지만 곧이어 사회가 뻗치며 그는 처가 서울생활을 접고 멀리 처가인 강릉의 오죽헌으로 낙향하여 오죽헌은 2대의 외손봉사를 거치게 됩니다.


  신공과 용인 이씨 사이엔 다섯 딸을 낳았으며 두번째가 신 사임당 입니다. 그런데 신 사임당은 홀 어머니를 간병하느라 오죽헌에서 생활하였다면 그에게는 일곱자매와 부군 이원수공도 오죽헌에서 생활하였다는 것으로 자연스레 부합되는 이야기는 아닐듯 하다.


  당시에도 요즘처럼 주민증이 있었다면 율곡의 주민등록지는 오죽헌이었슬까요?? 그의 주민등록지의 고향은 잉태지로 소문난 백옥포리의 판관대란 점입니다. 이러한 점은 율곡학회의 신사임당 연표와 율곡의 연표를 해석하면 신 사임당은 결혼후 백옥포리에 18년 정착하였으며 율곡은 사임당이 결혼 12년차에 출생하였기에 이곳 판관대는 율곡의 여섯살까지의 고향이었으며 이후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서울의 집은 오죽헌의 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씨가 오죽헌은 넷째 딸의 아들 권화에게 선산의 묘 벌초를 부탁하며 오죽헌을 주었으며 서울에 집 한채 있는 것은 둘째 딸 인선(신 사임당)의 아들인 율곡에게 제사를 부탁하며 서울집을 남겼기에 서울 생활 시대로 접어든다.


  율곡은 어린시절 우계 성혼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모님이 편찬으셔도 약을 마련하지 못하는데 신분상 노동일도 않되고 막상 돈 벌 수도 없으니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는 길밖에 없다고 하였다. 과거 시험은 여러 유형이지만 결과로 보면 그는 9선 장원급제하였으며 그의 이러한 명성은 전국 방방곡곡에 회자되었다. 이러한 부분의 일화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유용한 문화 아이콘으로 켑쳐되었으면 좋을 이야기이다.


  우계 성혼은 파주 출신으로 율곡이 친하게 된 점은 율곡이 쓴 신 사임당 행장기록에서 율곡의 맏형 "선"이 성혼과 친하였으며 아로서 양 집안은 친분을 가지게 되었다고 밝히는데 아마도 맏형 이선은 어린시절 파주의 할아버지 집에서 자란듯하며 율곡은  16세에 어머니 사임당 신씨가 타계하자 파주 선영에서 만 2년간 시묘살이를 하였기에 우계와 친분을 나눈듯 하다.


18세가지 시묘살이가 율곡의 파주 생활이었다면 이후 금강산에 2년간 들어가게 된다. 스님들은 매냥 없는 무자만 찾는다고 비아냥 거리는 율곡은 불 신자도 아닌데 금강산으로 들어간 것은 아마도 그의 게모 권씨의 악랄함때문이었다고들 지적하는데  사임당 신씨는 생전에 부군 이공에게 내가 죽으면 재혼을 하지말고 아이들을 돌보라고 당부도 하였건만 이공은 잉태지의 판관대라는 이야기에 앞서 휴가를 얻어 백옥포리 집으로 당도하기에 해는 떨어지고 대화의 어느 주막에서 기생과의 이야기 설화는 아마도 그의 품성을 잘 아는 사람들이 지어냉 이야기인듯 싶고 신 사임당 사후 곧바로 그는 권율장군 집안의 여자를 재처로 맞아들인다.


  대화 주마의; 이야기에서도 이원수 공이 한양에서 별미를 얻어 백옥포리 집으로 당도하는듯한 인상으로 당시의 관동대로의 대화가 등장하지만 본인의 이해로는 이 이야기는 알맞는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일전 수운 판운 이원수 공의 게시글에서 수운판관은 종 5품직으로 수운은 오직 한강 수계에만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5대 조창이 있었는데 강원도 조세창고인 원주의 흥원창과 충청권 조세창고의 충주 목나루의 가홍창 북한강으로는 소양강창과 황해도 예성강에 두 곳이다.


 여기에 이원수공은 나이 50에 수운의 판관 자리에 임명되는데 어느지역의 수운판관이었느냐고 따져보면 그는 원주 흥원창의 수운판관이었다. 율곡의 신 사임당 행장기에는 율곡은 맏형 선과 함께 아버지 일을 도우러 배에 승선하여( 당시는 수운 판관이 되기 전) 관서지방에 출장중에 서강에서 하루는 아버지의 가방속에 유기그릇이 붉게 물들자 배에 모든 사람들이 보며 이상한 일이라 여겼는데 이후 곧바로 어머니 사임당 신씨의 부음을 전해 들었다 한다,


  이 부분에 오죽헌 박물관장을 역임한 어느 박사는 일반인이 이야기와 동일하게 평안도 출장이라 한다. 물론 관서는 대동강 지역으로 평안도 지방이지만 그곳에는 수운창이 없고 아홉개의 해운창에도 해당되지 않는 지역이다. 몇일전 나주 영산강 바닥에서 건져올린 배의 뒷머리 부속품으로 비추어 46m의 목선이고 그 건조방식은 고려 초의 방식으로 그럼 과연 이 큰 배애 고려 왕건 탈 수 있다는 의혹이 부풀어 올랐다.

멀리 삼천포는 시가지의 회전 로터리를 잘못 나가면 정 반대방향이라 삼천포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삼천포의 해산물은 고려 임금에게 멀리 개경까지 수라상에 진상하였는데 이 거리가 먼 삼천리에 잇는 浦포라 하여 삼천포라 불리웠듯이 고려는 송나라와 같은 시기에 출현하여 송나라 무역에 버금가는 해상 판도를 취한 나라였다.


 하지만 본인의 이해로는 고려 조 왕건은 해상 무역을 기반으로 왕조가 탄생되지만 왕건이 영산강을 오르는 배에는 타지 않았슬 것이다. 명장 왕건이 배에서 양쪽의 육지에서의 공격을 받을 그러한 행동은 하지 않았슬 것이다. 왕건의 훈요십조 8항에는 차현이남 즉 공주강 바깥은 형세가 반대로 되어 반란이 심하니 왕족의 혼인은 물론 양반이라도 관리로 등용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하며 후백제의 반란등을 증거로 삼았는데 왕건이 전라도에서 소홀한 행동은 하지 않았슬 것이다. 그러면 영산강바닥에 덮혀져 있던 배는 평저선으로 조세미를 싣던 배일 가능성이 있는데 이후 조선시대에도 바다에는 9개의 해양청엔 이러한 큰 배들로 조세미를 한양의 경창(용산)으로 날랐는데 아는 평택, 논산, 나주,등지의 곡창자대등에 해양창이 있지만 평안도와 함경도는 조세미 대신 현찰로 징수하였다.


 그러면 오죽헌 박물관장을 역임한 어는 박사왈 이원수공과 아들 선과 이는 아버지 일을 도와 배로 출장중 관서지방에서 부음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는 것을 평안도라 설명하는것은 오죽헌은 율곡과 신 사임당의 박물관으로 이 박물관장의 이러한 오류적 생각은 마치 학문의 가면인듯 역사를 왜곡하고 저해하는듯 하다.


  이원수 공이 수운 판관 전해의 일로 율곡은 관서지방 서강에서 부음 소식을 할때 관서라 함은 조세의 수운은 한강 수계인 점으로 관서는 평안도가 아닌 현 영서를 관서라 하였다는 것으로 지금도 영동은 관동이라 많이 쓰는데 아마도 당시엔 영동, 영서라 지칭하지 않고 관동과 이에 비유하여 영서지방을 관서라 지칭한것이다. 여기서 서강이라함은 동강과 상의되는 용어로 평창에서 주천을 거처 영월의 동강과 합수되는 지점까지를 서강이라 하며 이 서강에 있었기에 충주의 충청조세의 가홍창에 근무한 것이 아니라 강원도의 조세를 담당하던 흥원창에 소속된 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때  판관대(후일 영조가 사패지를 하사하며 내린 이름이다)애서 율곡을 잉태하는날 대화 주막에서 주모의 요청을 거부하고 3~4십리 집에 당도하였다는 설화는 아마도 후일 일제때 신작로가 생기며 생겨난 설화인듯 하다. 왜냐면 당시 안흥-문재-전재- 방림 -대화 -모릿재- 청심대- 진부로 들어가 강을으로 가는 관동대로에 현 장평을 경유 봉평으로 가는 길은 큰 도로가 아닐듯 하기 때문이다. 원주 흥원창에서 봉평으로 가기엔 1930년대 이효석의 소설 산협에서 봉평의 공제도는 문막에 소금받이를 떠날때 문재, 전재를 넘기보다는 횡성의 우천, 둔내를 지나 봉평 입새의 무이를 거쳐 백옥포리로 가는 길이 지금도 빠를듯 하기 때문에 대화주막의 설화는 마치 이공이 근무지가 거명되지는 않지만 무언중에 수운판관은 서울 거주의 관룔로 잘못 오인된듯 하다.


  이제 잉태지의 역사는 그것이 어떻게 역사가 되는지. 잉태란 점을 神이 아니면 어떻게 증명하겠다 말인가, 요즘 유행인 검사들이 진상 조사를 한다면 잉태를 인간이 알 수 있다는 검사는 한 명도 없슬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잉태지는 역사적 사실로 모각되어서는 아니되며 이는 오직 설화적 이야기의 재미를 더할 따름이다.


  그러면 판관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무엇일까??

 이것이 율곡학회의 신사임당 연표와 율곡의 연표를 비교하여 보면 백옥포리는 신사임당의 신혼초 살림집이엇으며 결혼 12년차에 율곡을 낳아 18년차에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기에 이곳 판관대의 백옥포리는 율곡의 여섯살가지의 고향이며 지금처럼 호적이 있다면 이곳이 율곡의 출생지로 기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요즘 산모들은 대부분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출산하지만 과거엔 때로는 친정에서 출산하는 경우가 부지기 수 였으며 신 사임당도 홀 어머니의 간병과 또한 여러 동생들의 손을 빌릴 수 있는 잇점에 오죽헌에서 출생한듯 하다면 오죽헌은 강릉이고 또한 당시에 봉평의 백옥포리도 강릉부 땅이었다. 그래서 오죽헌쪽 사람들이 오죽헌이 율곡의 탄생지라고 하니 백옥포리 사람들은 그럼 백옥포리는 잉태지라는 단어로 응수한 듯한 모양새이다. 이 당시는 양자 모두가 강릉땅이니 지역적 시비는 일지 않았으나 1906년 행정 개편으로 이곳 백옥포리의 봉평면, 진부면등은 평창군으로 이첩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일제 식민지로 들어갔으나 평창인들은 율곡이 오죽헌에서 탄생화였다고 율곡의 주민등록지를 오죽헌으로 할 수 있습니까?? 율곡의 고향 판관대로 등록해야 할 것이기에 율곡의 고향은 평창입니다라고 주창해야 올바른 문화를 가꿀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올바른 문화란 무엇인가하면 지금 현재 율곡의 고향이란 점을 감추고 잉태지라고 선전하기에 율곡의 고향은 상실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잉태지 이야기는 설화적 요소를 가지는 설화는 되지만 그것이 역사는 아니란 점 입니다. 이러한 잉태지 이야기에 율곡의 고향을 상실케 하였습니다.



  그럼 이제 이야기의 재미를 더하기 위한 설화적 잉태지 문화론을 넘어서 율곡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무엇일까 논고합니다.


 율곡 이이 선생의 성리학이란 당나라 말, 손나라를 거치며 역사 전면에 등장하는 사대부들의 주자학 사상이 주류를 이루며 송나라시대 부터 새로운 사상체계를 이룩하며 성리학으로 발전 하였다. 성리학은 론, 존재론, 인성론등의 치밀한 철학적 기초를마련하여 유학을 재해석한바 그의 결정체로 이황의 형이하학적 주리론과 함께 율곡 이이선생은 형이상학적 주기론의 이통기국설과 기발이승론을  주창하며 천년 흐름의 주자학의 체계를 완성하고 집대성한 학문으로 우리나라 철학사상의 큰 기조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율곡의 학문적 위상에 너무나 소홀했다. 이순신은 아산 현충사가 있다. 이황은 도산서원이 잇으며 남산에 큰 전신상의 기념비가 있으며 하물며 각 지방 문화에 사당, 현충시설들이 즐비하지만 율곡 이이는 어쩐 일인지 외가의 오죽헌에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소금강에 책상바위 이야기뿐이며 파주에 자운서원이 있슬 뿐이다.. 그나마 율곡의 고향(봉평 판관대)의 후대인들이 율곡과 이항로 선생을 모시는 운치있는 위치에 조그마한 사당을 건립하여 위패를 모시는 봉산서재를 마련한 것은 디행이지만 이것도 영조가 율곡의 잉태지를 찬양하기에 사패지를 내려주는 등에  기인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나라 철학 사상의 큰 획을 이루는 주자학의 결집된 완성을 이루는 이이 선생의 문화는 너무나 빈약하다. 흔히들 역사를 들추며 조상의 얼을 기리고, 또한 이로서 교육의 지표로 삼아 자라나는 세대에 큰 공감을 형성하는 문화를 이루어야 함에 율곡 이이 선생에 대해서 일반인들은 그 내용을 일 수가 없는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율곡 이이 선생은 민족의 대학자임에 틀림이 없건만 그를 숭상하는 문화는 하나도 없다. 심지어 판관대가 잉태지 문화라는 궤변같은 이야기를 역사라고 등장시키며 율곡의 고향까지도 상실 시켰다. 이제 이러한 관점에서 학계는 역사를 바로 세우고 그 역사를 통하는 문화 아이콘을 계발(啓發)하여 문화를 더욱 가꾸어야 하는 것이다.


  E.H 카는 역사는 과거와 오늘의 대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과거의 비뚤어진 역사를 바로 정립하여 세우고 그 속에서 문화란 발굴이 아니라 역사를 통하여 훌륭한 교훈을 오늘에 살리에 더욱 풍요로운 지점으로 향하기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판관대는 율곡이 어린시절 뛰놀던 고향이기에 그의 정서가 묻어나는 곳으로 사람들은 이러한 환경적 요소가 어린시절의 정서에서 호연(浩然)의 넓은 기질을 함양한다고들 하기에 율곡 이이 선생의 높은 학문의 바탕에는 이러한 환경적 자연의 요소도 가미되었으리라. 그러기에 이곳 판관대는 자라나는 세대에 아이들에게 학습의 장으로 희망의 등불으로 높은 정표를 세워야 한다.


 또한 우리나라엔 성웅 이순신 장군의 성역화등 구국의 길에 나라를 지킨 무인들은 사당이나 많은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학문의 중요함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이나 율곡 이이 선생의 문화는 빈약하다 그러기에 이곳 판관대는 민족 문화에 있어서 문치를 숭상하는 학문의 요람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이다.

 

  여기서 점시 인용글 한 점을 살펴 봅니다

너브산장  19.11.14. 15:06

판관대 역사는 팔석정 팔일경 죽곡 이산(이율곡의 큰형) 과 후손 이아산의 역사를 재조명하여야 합니다 . 잉태지 위치는 백옥포3리 박종하 집 옆입니다.문제는 양사언의 집과 우물은 잘못 기록된 역사이므로 바로잡아야합니다.후세 선생님 고맙습니다

 위 인용의 댓글은 본문의 문장과 의미가 다른듯 하지만 기실 판관대는 율곡의 맏형 이선과 그의 형제들의 고향이며, 이선은 18세때 집안은 서울로 이사를 갔으나 언젠지부터 이산은 고향땅에 살았으며 그는 팔석정을 짓고 팔석을 세겼다고 "봉서 유고"에서 전한다 


  현재의 팔석정의 팔석의 단어는 일제시기에 조합된 단어이지 조선시대에는 없었던 단어로 추정되며 팔석정과 양사언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팔석정이 이선의 아마도 아버지 위원수공의 급료 녕 쌀 20석과 그외 둔전을 받아 농사를 짓고 살았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그러기에 팔석정에서 판관대, 평창국립수련원은 율곡 수련원으로 개명하여 이곳 일때를 율곡 학문의 산실로 벨트타운을 조성하여 그의 학문의 업적을 기리며 현 봉산서재도 좀 더 확장하여 위패를 모시고 율곡 기념관과 율곡 학회까지 이곳으로 이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 율곡은 외가나 조부의 선대와 자운서원의 가족 묘가 있는 파주가 그 모체가 되어야 하는 가하는 점도 가히 이상하며 더욱 이상한 점은 율곡은 외가 오죽헌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하는데 그런 기록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려러니하는 주관적 추정하는 글로 역사를 서술하면 바르지 않기에 언젠가는 상당한 충격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 예로 봉평의 메밀꽃 문화에 이효석의 생가가 남안동이고 하였지만 이젠 이효석 재단법인은 진부에서,, 그리고 올해 신인작가상 시상식은 진부에서 개최하였다. 이효석의 子 우현 선생님은 현 제단법인은 지금은 멀리 파주로 이장되어 있는 효석의 합장 묘를 진부로 이전 계획도..


  그 뿐만 아니라 김삿갓의 묘는 평창읍 천동리 하 도마치 산속에 찾는이는 없어도 그의 아들 익균과 단 둘이 오늘도 인생무상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러기에 역사는 어디까지나 바른 이해와 바른 서술로 이어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 이번 판관대 세미나에서 국어과 교수들도 좋치만 역사 학자의 역사적 사실 규명이란 점이 아쉽긴 하지만 아마도 이러한 필자의 생각이 잘못일수도 잇겠지만 현 역사학자들중에 본인의 생각과 같은 이해를 할 수도 있지만 이를 주장화는 학자는 없는듯 하다.


  이 나라에 성웅 이순신의 생가에는 현충사라는 문화유적을 가꾸지만 율곡은 생가가 어디인지도 모른다면 이는 우리시대의 오점이라 하겠다. 일본의 에도막부의 훈돗시만 찬 벌거숭이 에도막부는 역사에 무엇을 남겼는가??

하지만 우린 학문과 예(禮)를 중시하던 나라에 대 학자의 위상에 버금가는 문화유적이 불충분하다. 그러기에 이곳 판관대는 역사의 바른 정립아래 대학자를 존중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유적을 다시금 만들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모든 이야기는 이미 본인의 게시글에 부분적으로 논고한바 율곡학회의 신사임당괴 율곡의 연표 비교로 보는 율곡의 고향이나 판관대 비석의 명문은 역사가 아니라 소설이란 이야기 또한 팔석정은 양사언이 아닌 율곡의 맏형 이선이 지은 것으로 율곡의 형제 모두의 고향은 백옥포리 판관대이며 이선은 임종시가지 고향에 팔석정에서 살았다는 기록의 글들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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