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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 이효석

이효석의 진부시대(3부) <영서 3부작에서 평창의 이야기들,,,>

이효석의 진부시대(3부)

<영서 3부작에서 평창의 이야기들,,,>

 

후세백작 2019.09.04 04:13

 

진부시대 3부에서는 이효석의 영서 3부작중 봉평을 배경으로하는 「산협」속에 평창의 역사를 비춰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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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협」

  이효석의 단편 「산협」은 봉평을 무대로 남안동 산골 정경과 생활상이 그려지고 있다. 짜임새 있는 구성에 의해 이야기는 재미를 더해 가는데, 이 장에서는 「산협」의 문학적 이해는 미루고, 1930년대의 영서지방의 생활상을 통해보는 마치 주변에서 일어나는듯한 이야기들과 그 속에서 당 시대의 평창의 역사적 사실들을 유추해 봅니다

  소설에서는 봉평 남안동의 농부 공제도는 봄이면 각 마을에서 그러하듯 황소 두 마리에 콩 넉섬을 싣고 무이리를 지나 둔내와 횡성 우천을 지나 원주 문막나루(흥원창)로 소금받이를 간다. 소 두마리의 등허리에 산더미같은 소금 바리를 싣고 오면 한 일년은 실컷 먹는다. 그런데, 열흘 후 에 돌아오는데 대체 한 필의 말은 어디가고 한 마리의 소 잔등에 소금섬 대신에 금항아리도 아닌 단장한 여인을 태우고 제도는 산길위로 표연히 나타난다.

  사십 중년에 아들이 없다 보니 두번째 장가라..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되는 산협은 무언가 여인네들의 악다귀같은 恨이 풀어지는 잔치는 아닌가 마음 설레며 읽어야 한다. 「산협」이나 개살구」에서는 공통적으로 아직 외래 문화가 들어오지 않던 외진 시골 마을에 도시의 미모의 여인네가 소실부인으로 등장하면서 밀가루 대신 비누로 얼굴을 씻고 봉초가 아닌 궐연의 담배 등을 선뵈는등 남안동 골은 개화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후실인 원주댁은 아이를 갖어 배가 불러오자 이를 보고 참다못한 본 부인 송씨는 잔 꾀를 내어 헛구역질을 하기에 재도는 창말에서 용한 점장이 판수를 불러다 확인한 결과 아이를 갖었다 하기에 누이의 아들인 조카 중근이가 붙여서 오대산 절에 백일불공을 떠난다. 원주 댁은 딸을 낳았는데 원주댁을 황소 한 마리와 맞바꾼 대장장이가 찾아온다. 또한 백일불공을 마친 송씨는 만삭의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 자결을 시도한다. 이때쯤 엔 눈치 빠른 독자들은 공재도, 네가 씨가 없는 고자야 하고 말을 건네고 싶어 진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미 공재도는 송씨 부인의 뱃속아기는 중근이 아기일 것이란 점도 알고 있었다.

 

  우리 주변에 늘상 일어나는 일인듯 십지만 이 소설의 짜임새는 읽으면서는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이지만 뒤에서 돌아보면 이야기의 구상이 더욱 재미스럽다. 그리고, 이 소설의 배경엔 평창의 역사성도 잘 드리우고 있는데, 공제도의 성씨 공문일가의 계도는 멀리 중국 창평땅에 두고 만고의 성인(공자)을 그 선조로 받들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의 후손이라는 바람에 마을사람들의 공경과 우대를 받는다고 그려져 있는데, 예전에 평창향토사가님 한 분은 평창의 기원은 공자가 살았다는 창평에 기인하며, 성현이 살던 곳 창평이라고 평창에서 창평이라고 그대로 쓰기에는 너무나 경솔할 것 같아서 창평을 바꾸어 평창이라고 쓴 것이라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소금받이를 떠나는 이 소설의 배경적 요소에서 부과적으로 평창의 중요한 역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문막나루는 흥원진으로 조선시대에 한강 수계의 3대 조창(조세창고)가 있던 소양창, 원주의 흥원창, 목계의 가흥창(충주)중의 하나로 흥원창에는 2백석을 싣을 수 있는 평저선이 20척 있던 곳으로 가을철 강원도 일대의 조세미를 육운 또는 작은 배등의 수운으로 이곳으로 날라 흥원창(원주 부론 소재) 조세창고에 보관하였다가  다음해 2~5월 사이에 바람이 잦은 날에 용산창(마포나루)로 운반하는 것으로 각 수운창의 관리는 수운판관(종 5품직)이 하였기에 율곡의 부친 이원수 공도 나이 50에 수운판관이 되어 이러한 조창 관리자가 된다. 이원수 공은 두 아글 선과 이를 데리고 율곡의 신사임당 행장에서는 관서지방(평안도)의 서강에서 사임당의 부음을 받았다 하는데 이원수공은 해운판관이 아닌 수운판관이었는데...

* 봉평에는 판관대가 있으며 이곳이 율곡의 6살까지의 고향집이다. 그러기에 이 부분, 봉평의 판관대라는 역사에 판관대란 부친이 이원수 공이 수운판관을 했기에 따온 이름이다, 여기서 수운판관이란 당시 우리나라 교통은 육운이 아닌 수운의 국가로 전국은 9개 해운창과 5개 수운창이 있었으며, 이는 원주의 흥원창, 충주의 가흥창, 소양창, 예성강에 두 개의 조창이 있다. 그리고 전라도, 경상도는 해운창 담당이다. 이들은 구한말 기차가 들어오며 각 창들의 쇠락해 갔다.

* 흥원창은 남한강과 태기산에서 발원해 문막을 당도하여 흐르는 섬강이 합수되는 부론면 흥호리가 흥원진 나루이며, 소설에서 문막나루라 함에 흥원진의 조창에서 원주, 횡성, 평창의 내륙지역으로 가기엔 섬강을 하나 더 건너야 하기에 섬강으로 약 10km위에 올라가 문막의 배나루에서 내륙으로 간 듯하다,

 

* 소설에 소금받이 떠나는 때는 봄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것은 흥원창에서 2~4월에 세곡을 실어 나르기에 이때 평저선이 소금을 싣고 올라오는 것이다. 영동고속도로상 남한강 다리에서 보면 강이 직선으로 급류로 내리 흐르는데 이곳엔 배 한 척이 못 올라 오기에 여러척이 함께 밀고 당겨 올라와야 되는 힘든 곳도 있다.

이렇게 옛 역사에 소금의 전국 배급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평창은 선질꾼들이 임계, 도전을 지나 백봉령을 넘어 소금을 날라왔다는 역사도 가지고 있다.

「산협」에서 그 시대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소금은 옛날엔는 물물교환의 대상이나 녹으로도 받는 필수 생활품이기도 하다. 봄철 한강을 오르는 국가의 배인 평저선엔 소금과 젓갈을 실어 오르기에 각 동리에서는 저마나 나와 물물교환해가는 점을 였볼 수 있기에 당시 육로가 없던 시절 흥원진의 문막나루(원 지명은 배나루)는 원춘도의 기능상 주 요점 도시로서의 기능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소설은 시대상황으로 1920~30년대를 잘 그리고 있는 바, 오대산 불공속에 봉평을 벋어나 진부를 가면 긴 신작로를 볼서 있으며 재미있는 표현은 우찻바리들이 다니며 하루 두어 번 돼지보다 새커먼 차들이 돼지보다 더 큰 굉음을 울리며 빠르게 달린다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 지형에 바다에서 수평선의 일직선을 볼 수 있지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은 없다, 그래서 가장 길게 똑바른 도로는 아마도 고위도~중위도 평탄면을 가지는 상진부에서 유천사이의 도로는 1Km이상의 직선도로이기에 당시에선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큰 직선 이었으리라.

그러기에 똑 바른 도로는 끝이 없다는 표현에서 작가 효석은 진부의 유천의 수 km가 일직선의 도로도 보았던 듯 싶으며, 개살구에서는 오대산의 기억을 소설에 대입하는 바 오대산에 아름드리 박달나무 등 이러한 삽화들 속에서도  평창의 역사는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다음편 「개살구」에서  다시 논 하겠습니다.

「개살구」

「개살구」는 이효석의 단편으로 영서의 3부작중그의 고향 진부의  1930년대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로서, 그의 아버지가 면장을 역임하며 그는 이곳 진부에서 출생하였다.  그러기에 이 소설은 고향인 진부의 풍속상과 그곳에 살고 있는 농촌사람들의 순박한 모습의 자전적 요소를 가지는 소설로  문학적 측면을 넘어서 평창의 역사성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맥락을 차지하고 있다.

 이 소설의 한 대목을 인용해보면, 

살구나무 아래 보일 듯 말 듯한 운든스러운 함석집의 이야 기로부터 시작된다. 서울집을 향용 살구나뭇 집이라 하는 것은 집 뒤에 아름드리 살구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집안 오대조 대대로 내려온 무준한 살구나무는 도리어 그 아래 함석집을 막아주는 셈이 되었다. 살구나무 꽃이 한창 필 적이면 무르녹는 꽃 향기는 온통 집안으로 피어 오르며 한층 더 집안을 감싸주는 형세가 되었다.

살구나뭇집도 결국은 하늘아래 같은 집이니 있슬 것은 다 같은 이치이나 그 집은 그 살림살이가 어떠한 것이며 그 속에 허구한날 무엇이 일어나는지 외따로이 떨어진 호젓한 나무아래 그 집안의 속 사정을 동리사람들은 엿볼 수가 없었다. 푸른 열매 익어 갈때 개살구는 어금니에 군물이 돌듯이 집안의 살림살이도 군물이 도는 개살구의 맛일지는 모르나,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살구를 훔치려 집 뒤를 기우적 거리기 일쑤였다.

 마치, 영화가 시작되는 삽화처럼 운둔스런 함석집의 전경이 작가 효석의 유연한 필력에 의해 시작되는 개살구는 개화기의 1920~30년대 진부를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필자는 작가 효석의 평창초교 49년 후배로서 어릴 적에는 평창 읍내에서도 좀 큰듯한 일제때의 기와집에 살았지만 어느 골목길  옆집이 정말 「개살구」의 삽화처럼 오동나무로 가려져 속살이 언듯 언듯 비춰지는 함석지붕의 집이 본인으로서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60년대의 본인도 그러한 마음 한구석이 있었는데, '30년대에 함석지붕의 집은 아마도 이곳 진부 시골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체였슬듯 하다.

이러한 고급풍으로 운든스럽기까지한 함석지붕이 조명되며 시작되는 단편 개살구는 오대산에 자생하는 박달나무가 쓸모없는 나무라 버려야 될 줄 알았는데 산업의 현장에 각광받는 목재가 되어 소나무보다 더 비싼 고급목으로 취급받아 박달나무로 돈을 벌고, 역시 신흥부자의 부의 상징으로 이 시골에 파장을 몰고오는 서울댁, 「산협」에서는 원주댁이라는 도시여성에 대한 이국적 동경이나 신 문화에 대한 이야기들은 마치, 나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듯한 이야기로 재미를 더해가는 소설이다.

오대산에 채벌장이들이 들어서면서 박달나무의 시세가 한창 좋을 때에는 산에 베은 나무를 실은 우찻바리(우리는 예전에 4바리. 6바리란 표현처럼 우마차를 바퀴기준으로,,)가 뒤를 이어 대관령을 넘었다. 또한 박달나무로 논 섣 마지기가 더 늘어나게 되었고, 또한 학교에는 돈 백 기부하여 학무위원의 타이틀도 가졌고, 조합의 신용을 얻어 아들을 조합의 서기로 취직시키며...아마 그 시절에도 금수저의 빽 작용이 요즘 유행말로 출발선이 다른 듯 합니다만,,  

이 소설에서는 오대산에서 내려오는 박달나무의 목기류 행상과 새댁들의 머루와 다래, 동백채집 , 꿀뜨기등 가을의 시골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바, 오대산의 박달나무는 「산협」과 자전적 글인 「영서의 기억」에서도 이야기 되고 있다. 이렇게 당시 오대산의 박달나무는 산주는 물론이거니와 채벌공, 목기 가공등의 산업화 과정속에 시골마을 진부의 번영을 나타내고 있는 바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 1933년에 진부에서 채집된 아리랑에 해석의 반증을 나타내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아리랑 기록에 정선은 1960년대 이후이고 채미헌이라는 두문동의 날조 기록은 1985년에 기록이지만 진부에서는 1933년에  다섯편의 아리랑이 채집된 중요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33년도에 김소운의<조선구전 민요집,제일서방>에 가장먼저 수록되어 있다. <조선구전민요집>에 수록된 이후, 1960년 영창서관에서 재 발행되었

-----< 평창아라리중 1933년 김소운에 의해 가장 먼저 채록된 가사 >-------------- 月精五臺山 박달낭근 축자왕자로 다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 아리랑 고개서 노다 가세 축자왕자는 팔자도 좋아 긔차에다 몸을 실고 안동현 구경 아리랑 시리랑 아라리야 시리랑 고개로 너머 가네
http://blog.daum.net/kkks1/1313  평창아리랑(아라리)의 시발점에서..


  1933년 김소운은 전국에 아리랑 가사를 채집헤 주면 사례금을 준다고 신문에다 공고를 하여 진부에서는 다섯곡의 사설이 채집 되었는바 정선 아리랑은 자기네 아리랑이라고 하며 이 아리랑의 사설속에 왕자축자로 다 나간다. 안동현 구경이라는 문맥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해학편으로 분류하였다.

  이를 필자는 일제 강점시 오대산 관대거리에 계림이란 목재회사와 오대천이 내려오며 천 m의 고봉이 다섯개라 아우라지보다 더 많은 목재를 산간의 보메기를 하여 등걸목으로 날라 일정구간인 나전쯤에서 뗏목으로 엮어 나갔다고 게시하며 왕자 축자로 다 나간다는 뜻은 각 나무마다 도살장에서 부위별 통고기에 검인도장의 王, 丑 를 찍어 도벌목이 아니라 허가를 낸 정품의 목재라는 표듯 비싼 박달나무의 검인 도장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개살구에서는 박달나무가 웃차바리에 실려 주문진항에 나가서 배에 실려 기차선로의 침목으로 나갔다는 삽화 설명이지만  신작로로 제천으로 실려가 기차로 안동에 보내진다는 것으로 안동엔 박달나무의 목기 가공공장이 있었던 듯 하다고 당시 산업의 발달에 의해 목기 가공공장들이 생겨서 오대산 박달나무의 가공에 대한 이야기들을 「개살구」, 「산협」 「영서의 기억」에서 인용하고 있는 바  이를 진부서 채집된 아리랑 사설을 이해하는 입증적 시대적 상황과 사료로서도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 주문진 항은 강릉 아래의 안인항이라야 역사적으로 맞는 듯 합니다)


이효석의 진부시대 (4)에서는 자전적 글 「영서의 기억」속 고향의 향수 등 이제 정말 그의 문학은 고향 진부로 돌아와 어제는 제 20회 이효석 문학상 수상을 진부문화원에서 시상한 바 그간 먼 여정속에서 이제는 정말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에 진부시대를 이야기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