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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평창구석기) 기화리 쌍굴 유적

(평창구석기) 기화리 쌍굴 유적 

◆ 평창시공) 평창의 하늘은 열리고,,,

(1) 기화리 쌍굴 연혁

1. 기화리 쌍굴유적의 조사 연구

동굴운 선사인류의 중요한 생활공간의 하나였고, 지금은 선사문화를 연구하는 다양한 자료를 제공해주는 중요한 문화유적이다. 특히 석회암 동굴은 동굴안 쌓임층이 알칼리성을 띠고 있어서 뼈 유물을 화석화하고 오랫동안 보존하는데 적합한 환경을 띠고 있다. 따라서 동굴유적에는 많은 뼈와 유물이 출토되며 이를 통하여 과거의 기후와 동물상과 인류의 기원과 이동과정 그리고 문화행위를 살필 수 있다.

연세대 박물관은 이러한 동굴유적 조사로 1973년부터 1980년까지 7차에 걸쳐 제천 점말동굴에서 남한에서 최초로 구석기 동굴 유적을 발굴 조사하였으며 청원 두루봉동굴, 단양 상시바위그늘, 단양 금굴, 연당 피난동굴에 이어  2007~8년 기화리 쌍굴 조사를 통하여 신셍대 4기 갱신세 동물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고 동굴유적의 체계를 마련하여 구석기 문화와 자연환경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2. 기화리 쌍굴 위치

기화리 쌍굴에는 구석기 말기의 선사 유적이 존재한다.

기화리 쌍굴은 평창군 미탄면 기화리 산1번지 남쪽사면 바위 절벽위에 위치하며, 동굴의 해발 높이는 300m로 현재 하천에서 50m 위에 위치한다. 하늘굴 입구는 너비 7m, 높이 5m의 무지개형 입구로 길이는 70m이며 완만한 10도의 경사를 가지며, 땅굴은  입구 크기가 너비 16m, 높이5m이고 바닥 기울기가 35도이며, 두 굴은 하늘굴 15m지점에서 이어진다. 쌍굴의 입구는 두개로 남서방향의 하늘굴과 남쪽방향의 이랫쪽 땅굴로 나누어지며, 동굴 아래엔 카르스트 지형으로 용천수가 솟아 창리천으로 흐르는데 추운 겨울에도 얼지않아 선사인들에겐 유용한 식수로도 사용되었슬 것이다.

3.기화리 쌍굴의 지질구조와 자연환경

이곳일대의 지질구조는 대부분 고생대 퇴적암류인 조선누군층과 평안누군층의 암석으로 유적 주변에는 조선누군층에 속하는 영월층군의 영흥층이 넓게 퍼져 있으며 이를 부정합으로 덮고있는 평안누군층이 분포하고 있다. 쌍굴은 영흥층 석회암지대에 형성된 동굴이며, 하천지대의 낮은 층은 신생대 4기의 퇴적층이 기반암을 부정합으로 덮고 있으며, 유적의 북서쪽 평창읍 일대는 선 캠브리아기 화강 편마암층과 정선군층의 정선층이 분포해 있다(한국동굴 연구소 2005))  

 기후로는 높은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 남한강 상유의 내륙산간의 지형적 특징으로 계절에 따라 온도차이가 크고 겨울에는 혹한과 많은 강설량을 나타내며 여름은 짧다. 연 평균 기온은 10,8℃, 연중 최고기온은 37,2℃, 최저기온은 -23,5℃이고 강수량은 1,244mm이고 이중 여름에 집중해 내린다. 눈은 평균 11월 하순부터 이듬해 3월 하순까지 관측되며 20cm이상 폭설이 내리기도 한다. 서리는 10월 초순부터 이듬해 4월 중순까지 내린다(영월기상청 인터넷 자료. 2014)

4. 주변지역의 선사유적

기화리 쌍굴 유적과 가까운 남한강 수계에 위치한 영월군에서는 후탄리 퇴적층에서 찍게, 몸돌, 격지등ㅇ 발굴되었고 남면 북쌍리문개실과 남애, 삼옥리, 덕포리, 연하리, 영흥리에서 갱신세 토양의 발견과 뗀석기가 찾아졌고 방절리납골유적, 연당 피난동굴, 특히 삼옥리 유적은 동강 하안에 위치하며 기화리 쌍굴로 부터 직선거리 10,5km 떨러져 있고 석회암 암반사이 돌리네 지형에서 245점의 석기가 발굴되었다.

 평창군에서 조사된 구석기 유적은 평창읍 도돈리 평창강 북쪽 구릉에서 뗀석기가 발견되었다(1990) 신석기 시대 유적은 주진강 유역에서 채집을 시작으로 후평리 빗살무늬 토기 채집등 많은 발굴과 특히 2010년대 이후에는 방림~ 영월 국도공사 현장에 시굴조사를 통하여 후평리, 주진리, 방림리, 도돈리. 천동리, 종부리 유적을 발굴하였다.

(※ 편집자 주- 이번 평창학 연구소의 평창학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여러 고고문화원에서 방림- 영월간 국도 공사 현장에 시굴한 각 고고문화원의 보고 조사서를 토대로 앞으로 여러 항목으로 평창의 신석기, 청동기 발굴조사서를 토대로 평창역사를 서술해 나가겠습니다)  

(2) 기화리 쌍굴유적 조사

1. 조사개요

◆ 2007년 연세대박물관 팀은 한국동물학 연구소의 자료(2005년)를 바탕으로 2007년 4~6월에 평창군, 영월군 일대에 있는 여러 동굴을 답사하고 유적동굴의 가능성이 높은 기화리 쌍굴을 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2007년 8월 평창군으로부터 토지사용에 협조를 얻고 9월에 문화재청에서 발굴허가(허가번호 2007-642)

11월 10일부터 발굴을 시작하여 이듬해1월 혹한기에 조사를 중지하고 2월 중순에 조사를 재 착수하여 3월14일까지 80일간 조사를 하였으며 조사면적은 36㎡를 조사하였으며 조사 마무리는 5월 중순까지 하였다.

조사단 구성

단      장  박영철 (연세대학교 박물관장) 지도위원  이융조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최복규 (강원대학교 사학과 교수)박희연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한창균 (한남대학교 역사교육학과 교수) 배기동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조 사 원  최미노, 윤현진, 김현진, 정승은

※ 평창군 협조 

평창군 문화관광과 과장 신종해, 학예사  박광식, 기화리 이장 김준하외  모든 마을주민들이 숙소에서부터 본 조사를 원할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조하였다.

(* 필자 주 : 평창군은 토지사용 허가시 조건사항으로 평창에 박물관건립시나 이에 준하는 조건이 조성시  유물반환의 이면서식은 있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2, 조사내용

1) 석기및 굴 바깥돌

* 석기종류- 안팍날 짝개, 여러면석기. 긁개, 밀개, 몸돌, 격지

* 석질은 규암, 규질 편마암, 안산암질 응회암등

* 크기; 대부분 50~50에서 100mm정도임.

( 밖에서 들어온 자갈은 총 39점이며 온전한 자갈 5점, 깨진 자갈이 33점이다)

(긁 개)

2) 동물뼈 유물

 * 불에 탄 뼈, 자른자국을 지닌 뼈, 깨진뼈

 

  < 동물뼈 화석>

*Ⅳ지층 출토 동물 뼈 화석 ( 나머지 지층은 이하 생략)

원숭이( 앞니, 발가락뼈 둘째마디. 최소마리수 1마리), 꽃사슴(아래앞니, 발목뼈, 송곳니 합 14점. 최소 마리수 3마리), 사슴(왼쪽 아랫 송곳니 2점최소 마리수 2마리), 노루(인쪽 둘째 앞니 2점), 고라니. 사향노루, 산양, ( 앞니 1점 , 옆니2점, 어금니 3점, 손등뼈 . 최소 마리수 1마리) 코뿔이( 위 셋째 어금니 조각 1점, 윗 어금니 볼쪽 조각3점), 호랑이( 앞니1, 왼쪽 네째 어금니2, 발가락뼈 1점, 최소마리수 1마리) , 곰(손목 마름모뼈 1점), 산달( 아래 첫째 어금니) , 오소리, 토끼, 새, 두더쥐(위 팔뼈 좌우, 각 1점), 갈박쥐(어금니뼈 1점), 토끼털관 코박쥐, 표범 , 어류

(* 각 뼈화석의 크기는 300~50mm이내임 )

* 4개층 모두 출토 뼈의 합계는 298점이고 마리수는 72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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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층위 (퇴적두께 합은 150cm)

Ⅰ지층- 석회마루층

지층 - 명적색 토양층(5YR4/6)

Ⅲ지층 - 황적색토양포함 낙반석층

Ⅳ지층 - 적반색포함 낙반석층

 

4) 절대연대

절대연대측정으로 OSL연대측정(토양사료)와 방사선 연대측정AMS(뼈 유물, 숯사료, 토양사료)를 실시하였다.

지층의 OSL값은 B.P.45,000±5,000(250~125㎛)이고 AMS 연대값은 B.P.15,820±290, B.P 20,500±300이다.

Ⅳ-1지층  OSL값은 B.P.49,000±2,000(250~125㎛)이다.

지층에서 OSL값은 B.P.58,000±3,000(250~125㎛)이고 AMS 연대값은 B.P.29,700±400, B.P 34,990±410이다.

(* 편집자 주 - 토양의 측정값은 45,000년 전에서 58,000년 전까지 나타내며 유물의 방사선 측정 연대는 15,000년전부터 45,000년전의 측정값을 가진다)

 (3) 맺음말

평창 기화리 쌍굴유적에서는 총 8개층이 확인되었으며 그중 4개 지층에서 동물뼈가 수습되었고 3개 지층에서 석기와 굴 밖에서 들여온 돌이 출토되었다.

 석기와 굴 밖깥돌, 불탄 뼈와 자른자국을 지닌 뼈의 확인과 뼈의 타격과 잔손질도 확인함으로써  인류가 기화리 쌍굴을 생활공간으로 이용하였슴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B8칸 주변에서는 불먹은 깨진 자갈과 숯이 확인됨으로서 오랜기간동안 여러차례 인류가 이 동굴을 거쳐갔슴을 알 수 있다.

 기화리 쌍굴유적은 동굴 뼈 화석과 구석기의 뗀석기가 같이 확인되는 중요한 유적이다. 향후 지속적인 조사와 체게적인 연구가 이어지면 구석기 시대의 자연환경 복원과 함깨 석기문화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줄 것을 기대한다.

이상--

平昌學總覽 硏究總書 資料集

(자료출처)

평창 기화리 쌍굴유적
2014
연세대학교 박물관
GIHWARI TWO CAVE SITE, PYEONGCHANG

(편집작성자 ; 平昌歷史硏究者 高 柱 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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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歷史의 理解 2> 미탄면 (1)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 유적의 이해

후세백작

◆ 평창역사의 시원은 미탄면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 유적 입니다.

 본 유적은 연세대 박물관의 동굴유적 조사로 청원 두루봉동굴, 단양 상시바위그늘, 단양 금굴, 연당 피난동굴에 이어  2007~8년 기화리 쌍굴 조사를 통하여 신생대 4기 갱신세 동물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고 동굴유적의 체계를 마련하여 구석기 문화와 자연환경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인용합니다.

 기화리 구석기유적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인류의 기원부터 조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인류의 기원은 전기구석기 시대로 아프리카에서 발견한 300~350만년전 오스트랄 피테쿠스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 여름에는 아프리카 동굴에서 185만년된 인간화석을 발견했습니다( 탄소연대 측정으로는 범위를 넘어서는 연대이기에 옛날에는 지국 남, 북극의 N,S가 어느 시점에서 바뀐 시간대는 인간이 알고 있기에  동굴의 돌멩이들을 표본으로 극성파악을 하여 연대추정 했다 합니다)

이후 50만년전 북경원인, 자바원인. 하이델베르그인은 호모 에릭투스(직립원인/ 선사람)이 나타나고, 20만년전에는 네안데르탈인과 우리나라 역포(평양시)사람, 덕천(평남 덕천 승리산인)사람과 호모 사피엔스(슬기슭 사람)가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검은모루 동굴의 화석은 대략 70만년으로 파악되며, 단양의 금굴 화석은 30만년정도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구석기 시대 후기인 4만년전부터는 크료마뇽인과 이에 속하는 흥수아이. 승리산인 등의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합니다.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과 제천 점말동굴 유적등이다. 이들은 현생인류에 속하는 여러인종의 직계조상으로 추장합니다.

* 사람 혹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인류로서 사피엔스란 뜻은 지혜롭고 지혜로운 사람이란 뜻으로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를 순수 우리말로 '슬기 슬기사람"이라 바꾸어 부르기도 한다.
* 검은모루동굴- 평양시 상원군 소재 동굴로 70만년전의 살았던 원인(原人)
* 단양의 금굴- 30만년전 남,녀 화석이 발견되었으나 일제때 일인들에 의해 없어졌다. 일제는 내선일체 사상에 조선의 뿌리인 구석기 유물도 파괴한 것으로 사료됨(필자 주)
* 흥수아이- 충북 청원군 두루봉동굴에서 5세정도의 어린이 유골 발견. 발견자 김흥수씨의 이름을 따 흥수아이로 불린다. 여기서부터 현재의 크로마뇽인 입니다.
* 승리산인- 평안남도 덕천군 승리산 동굴의  인골 화석이름.

 

◆ 기화리 쌍굴유적의 이해

필자는 지난 몇 년전 연대 박물관 기록서를 검색하다 우연히 이를 발견하고 다운받아 250페이지 중 시사성 있는 기록만 발췌, 게시하였다. 

기화리 쌍굴 구석기 유적은 구석기 절대연대측정으로 OSL연대측정(토양사료)와 방사선 연대측정AMS(뼈 유물, 숯사료, 토양사료)를 실시하였다. 토양의 측정값은 45,000년 전에서 58,000년 전까지 나타내며 유물의 방사선 측정 연대는 15,000년전부터 45,000년전의 측정값을 가진다(500년 이하나 5만년 이상의 유물은 탄소14가 너무 많거나 적어서 오차가 커지기에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 유적은 3~4만년전의 유적으로 2007~~8년에 연대박물관팀이 시굴 조사하여 위의 연대측정및 과학적 입증으로 1만5천년~4만5천 년전의 후기 구석기 유적입니다. 이로써 평창에 알려지게 되고 이번 읍면지 편찬에도 미탄면지에 어느정도인지 수록되어 출간 예정인듯 하다. 하지만 아직 평창에서는 그 기록도 없었으며 표지판 하나도 없었다. 아울러 일반적인 학술기록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따라서, 현제 인터넷 다음 백과사전에서 평창군을 검색하면 역사단원에서 외람된 글이 나타나고 있다.

(평창에서는) 구석기시대 및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이 발견된 적은 없으나 인접한 횡성과 홍천지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서도 오래 전부터 인류가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여기서 쌍굴의 구석기 유적에 대하여 문제는 위에서 4만년전의 공주 석장리나 제천의 점말동굴 구석기는 모든 문헌상에 구석기 유적으로 출간되지만 기화리 쌍굴 유적도 4만년전의 동시대의 구석기 유적이면서 연구논문등에서 조차 기록이 누락되고 있다.

석회암 동굴에 뼈는 알칼리성을 띄기에 오래 보존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어서 연대박물관이 기화리 쌍굴과 같은 방식의 프로젝트로 점말동굴도 조사를 한것인데, 점말동굴의 특이점은 당시 제천시가 6차 조사작업을 진행한바 기화리 쌍굴유적과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내용이지만 국내 구석기유적으로는 잘 알려졌지만, 기화리 쌍굴 구석기 유적은 상대적이라기 보다 젼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점의 차이는 제천시주도로 6차 조사를 했다는 점과 평창은 파 묻어 버렸다는 확증적 차이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기화리 쌍굴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하늘굴은 깊이가 70m이고 경사도는 10º라 한다. 여기에 연대 박물관 팀의 시굴작업은 자연광이 들어오는 30m지점까지만 지하 1,5m의 바닥까지 시굴조사하였다 한다. 이 문제에서 빛이 들어오지 않는 나머지 부분 40m의 시굴 조사작업도 필요하다.

공주 석장리 구석기에서 손보기 교수는 주거용 공간도 파악하였다 하듯이. 기화리 쌍굴도 석기인들이 동굴 입구에서만 생활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동굴 동물도 있고, 추위와 맹수들을 피하는 문제에서 나머지 40m에 조사가 어쩌면 더 많은 유물을 발굴하고 이로서 구석기인을 더욱 이해할 수 있는 계기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곡리 구석기는 보웬상병이 강변에서 데이트도중 집어들은 돌이 이상해 본국으로 갈때 싸가지고 가서 세계적 권위의 교수에게 제출하였고, 이것은 구석기 중기시대의 애술리안 돌도끼이니 서울대로 전문을 보내 현장 확인을 해달라고 하였던 바 고, 김원룡박사는 전곡리로 달려가게 된다.

당시로서는 동양에는 애술리안 도끼(돌도끼)가 없다하며 즉, 세계적으로는 동양에 구석기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힘든 상황에 미국으로부터 인정해주니 ,,,김원룡박사는 전곡리에서 돌아오는 차속에서 두 시간동안의  기분은 인생중 최고였다 한다. 이후 제자 배기동 한대교수( 동 기화리 쌍굴 발굴단 고문)는 전곡리 유적 발굴 사업을 이어받아 계속 이 지역 을 답사하고 땅도 파보고 세계적 학술회의도 계최하여 애술리안 돌도끼의 권위자까지 초청 감식한 결과 처음엔 3~4만년전 유적지로 알려졌지만 애술리안 돌도끼는 27만년전의 중구 때의 것이 맞다고 판명하여 동 유적은 27만년전까지 올라가게 된다.

기화리 쌍굴에 유물중에 뗀석기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뗀 석기류보다는 칼지지 못하고 중기 구석기시대 뗀석기같은 모습이다. 물론 당시에 연당 피난동굴, 제천의 점말동굴등도 비슷한 문화궈느 같은 연대등의 상황일 것이기에 석기에 대한 의심은 좀 줄어들지만 기화리 쌍굴에서 출토된 뗀 석기들은 후기구석기 이전쯤으로 보일 수 있는 문제 아닌가 추정합니다.

 물론 당시에 기후는 오늘날과는 좀 달랐던듯 하지만 기화리 쌍굴 아래는 50m만 내려오면 석회암지대의 용출수가 있어 겨울철에도 얼지 않기에 식수가 용이한 지점일듯 하며, 평창읍 도돈리의 구석기 유물이나 열울에 유물들은 간헐적으로 뗀석기만 파악되지만, 동굴 유적이 더욱 중요한 의미는 뗀석기와 바깥돌 유입상황, 그리고 석기인들이 먹었던 동물의 뼈, 불뗀 흔적등이 있기에 석기인과 상대적으로 그 먹이가 동시에 보여서 석기인들의 상황을 좀 더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서도 이해가 좀 의심스러운 점은 청원 두루봉엔 꼬뿔이(꼬불이는 소과 동물이 아니라서 꼬뿔소가 아님) 3점의 화석이 발견되고, 후기 구석기인들은 집단으로 사냥했다 하는데,, 19종의 동물 뼈는 모두들 부서져 5mm 이상 물에서 채로 건져서 확인한 뼈들이지만 여기에는 어떠한 동물이든 척추나 갈비뼈등은 없고 손가락 마디 뼈, 턱뼈, 이빨등의 뼈만 있기에, 또한 호랑이등 맹수들도 있는 바 아마도 사냥보다는 맹수들이 잡아먹고 남은 부스러기들이나 사체의 잔해들을 주워먹었던 점이 더욱 강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당시 석기인들이 힘든 생활상황을 엿볼수 있다. 

그러면, 위에서 언급한 역사가 기록이 되어 있고, 없는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를 이해해 본다면...

위 백과사전 인용에 반대적으로 평창은 구석기 신석기등 오랜 역사가 있었다고 알려졌다면, 옛부터 인류가 살았던바 이곳은 인간이 쾌적하게 살 수 있는 환경과 자연을 지닌 지역이라다는 느낌으로 평창은 기후, 자연환경등이 좋아서 대단히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졌을 것이고, "오래 전부터 인류가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서술될 것이다.

옛부터 살기 좋은 땅이란 곳과 아무도 살지 않았다는 점으 차이를 쉽게 이해하자면, 부동산 광고는 어느쪽을 더 선택할까요?? 여기서. 평창에 역사가 없었다는 점보다 있었슬때가 보다 좋은 분위기가 될 것이다.

나의 주변에서는 역사라는게 돈이되냐 뭐냐고 투덜거리는 친구들이 많치만,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역사인식은 분명 경제적인 지수를 창출하고 향상되는 것입니다.

역사는 과거의 일이지만 오늘 역사를 들춘다면 그것은 오늘의 역사를 위함입니다. 즉 과거사를 보며 이 지역에 역사의 특이한 정체성들을 가려가며 역사의 스토리텔링화 하여 오늘의 역사를 바르게 더 의미있게 선점적 미래지향을 위한 지식도입인 것이다.

그러면, 다음장에서 청옥산과 육백마지기등에 관한 시대적 이해와 나아가서 미탄면 전체 역사문화인 성마령, 육백마지기의 미탄 아리랑, 기화리 쌍굴 구석기 유적, 얼음치 박물관, 백룡동굴등 미탄 역사문화의 유기체적 활용반안에 대하여 모색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