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평창 최초의 사진들
후세백작
「조선고적도보」 15권은 일본서 출간된 책으로 일본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1912년 대동강의 낙랑유적 발굴현장 사진 촬영을 시작으로 매년 조선에 찾아와 2~3개월씩 전국문화유적, 유물 6,333장의 사진을 기록하다.
이중 아래의 월정서와 평창면 동북오중석탑, 하남오중석탑의 사진은 실린 평창 최초의 사진들은 정확한 기록은 안나오지만 1912년 금강산과 오대산과 경주 답사시 찍은 것으로 인근의 사진으로는 영월의 탑 한 점과 제천에 한 점 사진이 있는점으로 미루어 금강산과 경주 사이를 가는 길에 평창을 들린듯 하다. 그리고 보통 답사 3년후에 매년 한권씩 책을 출간했기에 1915년 출간된 3집에 수록되어 있다. 당시로서는 신작로도 없는 길에 사진사를 대동하고 유리건판 사진기로 촬영하였다.
6,25때 월정사는 당우 21채가 전소후 60년대에이르러 중창시 탄허스님은 본전을 대적광전으로 명명하엿지만 조선시대에는 칠불보전 (七佛寶殿) 이었다
또한 오대산 사고는 선조가 사명당에게 명하여 사명당이 2년간 건축한것인데 6,25때 전국 사찰 소각령에 전소되엇다. 아래의 두 탑은 당시 평창면 소재의 서남오중석탑(유동리 5층석탑)과 동북오중석탑(소재미상)의 두 점의 사진이 고적도보에 수록되어 있으며 필자는 3~4년전 수항리사지 유실된 석불 3구의 사진이 있는가 하는 의문으로 6천매 사진 일일히 점검해본 결과로 동 책에서 평창 문화유물에 더 이상의 자료는 없다.
오대산 월정사 칠불보전 (五臺山 月精寺 七佛寶殿) (세키노 다다시 작. 유리건판 사진, 1915경 촬영.)
조선시대에 월정사 법당은 위 사진의 칠불보전 입니다. 칠불보전은 6,25때 중공군이 개입하고 아군이 후퇴하게되자 '50년 12월 말에 유엔군 사령관 워커장군의 전국 산속의 사찰 소각령이 내려지고 또한 1군단장 김백일 장군도 같은 명령을 내립니다.
전쟁에 이러한 명령은 청야전법도 아닌데 필자의 이해로는 독, 소 전쟁때 독일군이 소련에 쳐들어오자 스탈린은 독일군 반경 60km내의 모든 민가는 불태우라는 명령에 집을 잃은 수만은 민간인들은 그 추운날에 동사도 당하는,, 그래도 전쟁의 승리를 위한 군인의 청야라는 작전전술이란 점이다.
인천상륙작전에 미군이 인천진격시 인천시내 한 복판에 해광사란 절이 북한국의 아지트가 된 것을 보고 사찰 소각령을 내린듯 합니다. "49년에 빨치산인 북한 이호재의 강동정치학원의 제 1병단이 오대산에 남파되고 10여회에 걸쳐 오대산루트로 하여 지리산으로 남파되었다.
오대산을 국유화하고 목재를 생산하였고 이효석의 진부배경의 소설 " 개살구"에 배경이 되는 오대산은 그간 못쓰고 버려야 하는 박달나무가 철도레일 침목으로 사용되어 웃찾바리에 싣고 대관령을 넘어 주문진항에 가면 돈이 되고 목기가공 기계들의 수입에 박달나무는 안동에 목기가공 공장까지 생겨나는데 1933년 발췌돈 진부 아리랑 사설 한토막에 왕자 축자(허가품의 세금을 지불하는 관인도장)로 다 나아간다든지 또는 박달남금은 기차타도 안동현에 간다.
당시 이 지역 민초들은 기차 궤경도 못했는데)이렇게 경기가 좋아 현 국랍공원 매표소 아래앤 당시 산판과 목재 운송에 종사하는 인부가 260나 되었는데 무장공비의 약탈과 부역, 만행에 목숨이 위태로웟는데 당시 유엔군 사령관 워커중장과 김백일 군단장은 전국 사찰을 모두 소각하라는 명영이 내렸다.
여기에 필자의 소견으로는 워커 장군은 2차세계대전당시 연합군의 그 유명한 패튼대전차군단의 적장자 1번주자로 활양하였기에 독일군이 소련 침공시 스탈린은 독일군 반경 60km 이내의 모든 주택을 전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물론 소련인들은 집을 잃고 추위에 동사당하는등 그 고생은 말도 아니겠지만 전쟁의 승리를 위한 목적이 결부되었던 것을 워커 장군은 똑똑히 보았슬 것이다.
또한 인천상륙작전후 인천시내에 들어와 보니 시내 복판에 해광사란 절이 인민군 아지트가 되어 있는 점도 보고 전국 사찰 소각령을 내린듯 하다. 공산당이 내려오면 살기 위해 공산당에 부역해야 되고 이후에는 부역자로 처단받아야 되는 상황에 공산당의 거쳐가 될까바 군이닝 아니라 민간인 4명이 월정사를 소각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오대산 사고는 불타 없어지고 상원사는 한암 스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군인들에게 나도 사찰의 일부이니 불을 태워라고 명하나 군인들은 , 선우휘 중대장은 법당의 문짝을 뜯어 마당에 놓고 불태우고 보고하였다 합니다.
이러한 기지아래 상원사는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선우휘는 6,25에 정훈장교로 입대하였으며 후일 조선일보 논설고문 역임. 5공시절 어느 세미나에서 그가 한말,, 조선일보 말단기자였는데 데스크 마감인 5시까지 정인숙 사진을 가져와란 명령에,,,원효로 2가 그의 집을 찾았는데 이미 모처에 의해 자료들은 다 치워지고,,그래서 나오면서 문패를 보고 동사무소가서 정인숙 주민번호를 열람하는데 그냥 뜯어들고 조선일보까지 뛰어 들어 왔답니다. 그때 생각엔 난 이제 다른 신문에서는 없는 미모의 여인에 사진을 싣게되니 특종이야, 이게 출세길이라 며기며 마라톤 코스를 들뜬 기분으로 한 걸음에 달음박질해 사진을 제출하엿는데 왠걸,,, 보도 정지라 한다.. 아뿔사 인생은 노력만도 아닌 참 함난하단걸 느꼈다 합디다. 죠크였습니다)
월정사는 이러한 수난을 겪어 6,25때 전소됩니다. 전소 이전의 칠불보전 사진은 아마 유일할듯 하며 아래의 오대산사고는 사명당이 지은 것이나 이도 6,25때 모두 전소됩니다.이상한 점은 사고의 실록과 아래 사진들의 왕실 의궤등은 1912년 읿본으로 약탈해갔다고 하지만 다다시는 분명 1915년에 이를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아마 사진속들의 의궤도 일본서 지진에 불타고 없어졌다면 유일한 사진인듯 합니다
6,25전의 칠불보전이 있는 월정사 전경사진
월정사 8극9층 석탑(국보 48-1호)
(다다시의 사진엔 대부분 사람을 대입시켜 유적의 크기를 알 수 있게 하였다)
오대산 월정사 팔각구층 석탑 전경
五臺山 月精寺 七佛寶殿 외부 공포(栱包) 및 처마(軒)
팔각구층석탑 석조보살상(국보 48-2호)
, <五臺山 史庫 전경> 세키노 다다시 작. 유리간판사진, 1915년경
평창 오대산 사고 (平昌 五臺山史庫) 선원각 전면
평창 오대산 사고 (平昌 五臺山史庫) 史閣전면
(평창 오대산 사고 (平昌 五臺山史庫) 사각 초층 내
평창 오대산 사고 (平昌 五臺山史庫) 선원각 선원계보기략
오대산사고 선원각 왕자 인성 군행
오대산사고 선원각 임자식년 선원
평창 오대산 사고 (平昌 五臺山史庫) 선원각 왕자 인성군행록
제목 (平昌面 西南五重 石塔) 현, 유동리 5층석탑
제목 (平昌面 東北五重 石塔). 소실로 인해 위치 추적 불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朝鮮王朝實錄 五臺山史庫本)
국보 제151-3호(1973년 12월 31일 지정) ; 75책(27책:1973년 지정, 47책:2007년 지정, 1책:2019년 지정
오대산사고본실록 27책이 1973년 국보로 지정된 후 일본에 남아있던 오대산사고본실록 47책(2007. 2. 26. 국보 추가지정)이 2006년에 환수되었고, 1책(2019. 6. 26. 국보 추가지정)이 2018년 환수되어 총 75책이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당시 실록을 재간행할 때 4부 중 3부는 정본(正本)으로 인쇄했지만, 전란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나머지 1부는 정본 인쇄를 하지 못했다. 이에 조선정부는 최종 교정쇄본을 장정(裝幀)하여 정본을 대신하도록 했는데, 이 교정쇄본이 오대산사고에 보관되었다. 따라서 오대산사고본 실록 중 태조~명종실록은 교정쇄본이고 이후에 소장된 선조~철종실록은 정본이다.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경에 일제에 의해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에 기증하는 방식으로 반출되었고,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화재로 인해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화를 면한 오대산사고본 실록 중 27책이 1932년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 이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어졌다. 오대산사고본실록 27책은 1973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이후 일본에 남아있던 오대산본 실록 47책이 2006년에 환수(2007. 2. 26 국보 추가지정), 환수문화재 추가 지정 1책(2019. 6. 26 국보 추가지정)되어 현재 75책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평창 오대산에는 2년전 오대산사고 박물관이 7~80억 국가예산으로 건립되었으나 오대산 사고본은 제 위치로 돌아오지 못하고 영인번만 비치되어 있다. 영인본이란 사진카피의 만화딱지본으로 이를 소장이란 단어보다는 비치하고자 박물관을 짓다니... 그것은 평창인들의 낮잠론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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