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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평창 지명변천의 이해

평창 지명변천의 이해

후세백작

<입탄의 지명에대한 분석적 고찰>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지명의 연원과 그 바른 이해를 위해서 하나의 과제로 평창읍 소재의 입탄리에 대한 고지명의 변천을 분석함으로서 고지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져 합니다.

 

지명이란 바로 땅의 이름이지만 이 이름값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설정되어 인간의 의지작용에 의해 명명하고 불리어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지명은 그 지역에 형태적 형상이나 인위적 사건등에 의해 이름값이 확정되지만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풍수사상에 입각하여 풍수적 형태에 의한 용어를 사용하거나 또한 모든 이름값에 저변에는 이러한 풍수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슴이 드러난다.

 

우리는 풍수란 금시발복의 명당론을 생각하지만 풍수란 인간이 땅을 사용하기에 합리적 선택의 사고방식을 취하는 사상으로 조선시대는 잡과에 관리도 선출하는바 조선사회는 각 마을 동제와는 다른 개념의 국사성황제와 또 하나는 풍수사상이 사회 전반의 기조를 이루었다.

 

국가가 주관하는 국사성황사는 요즘에서보면 미신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조선사회는 물론 인류 역사에 가장 난제는 전염병이엇다. 이러한 전염병에 조선사회도 그 대응이 불가항력이라 각 군현에 국사성황사에서는 제사장이아 고을 태수가 君(임금)을 대신하여 국태민안의 국가 기원제를 드리는바 이러한 민속신앙이 사회전반에 내포되고(이 점은 다음편으로 평창의 노산성과 국사 성황사 편에서 다루겠습니다) 또 하나의 조선의 사회사상에 그 저변에는 풍수설이 배경으로 확산되는 점입니다.

 

조선 지리지에 각 고을에 역사의 시작의 건치연혁에서 처음으로 진산이 나옵니다. 평창의 진산은 세종지리지에는 수정산이었고 150여년 후에 신중동국여지승람 지리지 평창편에서 평창의 진산은 노산이라 기제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 부분의 이해도 다음으로 게제 합니다)

 

각 고을에 건치연혁의 첫줄에 진산이 먼저 기제되는데 이러한 진산이란 풍수적 용어 입니다. 즉, 풍수란 위에 언급한바 보통 음지의 명당론, 즉 연화부수형이니 금구몰니라는등의 음택의 명당론만 생각할 수 있으나 조선시대의 풍수론은 음양의 사상으로 음택이 있기에 또한 양택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음양의 풍수사상에 저변에 우리나라는 산지 습곡의 지형으로 (고) 양주동박사는 단군은 檀자에서 보듯이산 위에 살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 조상은 산과 산 사이에 개활지에 모여 살았기에 자연 산을 받들고 모든 기원제에 앞서서 산에 고하는 산신제를 먼저 지냈고 산을 숭상하며 살았습니다.

 

<고지명의 일반적 이해>

지명고찰의 하나의 예시인 입탄의 고 지명을 이해하기에 앞서 고지명에 대한 이해의 서술을 먼저 합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전에는 신라시대에는 한문의 음을 빌려쓰는 이두의 문자를 사용하였으나 이후 시대에는 이두음의 사용에 한계성을 알고 우리말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정확성을 살리기 위해 한자의 뜻을 차용하여 우리말을 표시하였습니다. 우리의 고유언어는 하늘 天에서 하늘은 우리의 고유 말입니다.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에는 말을 기록하기위해 우리 말 하늘과 같은 뜻의 한문으로 天자를 차용한 것입니다.

 

이렇듯 길 道자에서 길이 순수 우리 언어란 점입니다. 여기에 형용사 큰 大자를 붙이면 大道라고도 말하며 동시에 순수 우리말로는 큰 길이라고도 사용하며 大海, 大道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큰바다, 큰 길이라고도 말합니다. 두가지 모두 사용함에는 어떤 규정도 없이 편의상 아무것이나 택일하여 혼용해 중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우리 언어의 특징입니다.

 

이 두가지 즉 한문으로 또는 순 우리말의 단어가 줄곧 같이 사용하면서 오히려 한문으로 발음할때 그 뜻이 어려워 우리말의 뜻으로 한문풀이하는 주,객이 전도된 현상을 가지고 한문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예로 4자성어로 이해한다면 佳人薄命이라하면 가인은 뭐고 박명은 무엇인지 낱말사전을 찾아서 순 우리말로 이해해야 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한문이 어려워 만 백성이 사용하자고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셨는데 글이란 언어를 법칙에 의한 틀의 구조내 표시기호로 나타냄을 말합니다.

 

그런데 모든 언어나 문자는 인류의 발달사와 함께 발전해 나가지만 한글의 이러한 전통의 관습을 넘어서 합리화 문자 틀을 만들은 바 한글이 익히기 쉬워 백성들에게도 널리 퍼지는 보편화의 확장성에 기인하여 뜻을 빌어쓰던 한문은 이제 음의 한문으로 사용하는 또 다시 이두음화 음의 한문으로 대치하는 차용현상을 가집니다.

 

여기에 평창의 지명을 예로 합니다

평창읍 마지리는 말이 연못에 빠져 죽어서 馬池라 하는 설화적 내용을지닌 지명입니다. 이뜻은 언제라도 한문의 뜻이 바뀌는 한문은 사용해서는 않됩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이 시기 즉, 한글이 보급되어 서민들도 쉽게 사용하는 한글 확장성사회에서는 이미 마지란 지명이 한문없이도 말로도 여러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상태라 뜻이 아니란 음으로 馬之라 쓰여져도 알아 들을 수 있기에 쉬운 한문을 사용하여 글의 사용에 저변층이 확대해나간 것이다.

여기에 주의점은 마지를 한글로 않쓴 점은 당시에 한글의 토씨의 조사적으로많이 쓰이고 명사등은 한문을 사용하였기에 이때 한문의 뜻보다는 음의 차용에서는 같은 음의 한문에서 좀더 쉬운 한문으로 대체된 것이다.

 

<구한말 새로운 새로은 사조에 한문 뜻의 신조어로 개명>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오래가지 못하고 17~8세기에는 청나라로부터 유럽등 세계 문물이 수입되며 문동량이 많아지고 교역이 늘어나고, 문화의 폭이 다양해자 지금까지 없었던 단어들이 새로 만들어지며 즉, 자동차, 기차,안경등의 여러가지 신 문물에 새로운 단어가 생겨야하고 또한 우리ㄴ단어나 중국 한문에는없던, 정치라는 단어등 여러 일본어도 차입되어 사용하는등 단어가만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계문명이 수입되는 신 문명시대에는 자연 신사조 경향이 동반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구한말에는 지명의 대부분이 새로운 해석하에 신조어로 개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 경향성이란 문예에서 가령 낭만주의 자연주의라 하는 사조이라고도 이는 지금까지에 내제한 인식률의 사유적 사고의 변환으로 사회행동 양식이 전환되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이 구한말에는 새로운 세계로의 확장에 수반되어 우리 일상에서도 새로은 의미의 영역을 가지는 관점에서 한문의 뜻이 탈바꿈하며 단어에 한문적 의미가 달라지게 됩니다.이때 신라, 고려를 돌아 천년을 넘게 사용되던 지명으 단어도 새로운 단어로 변경되는바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조선시대의 풍수사상에 기인한 생활상의 당어로 변환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평창지명의 예시를 언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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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

.1, 하리 시루목 고개는 구한말에 증황(시루 甑, 관자놀이 목項)입니다(* 시루목이 甑項峴으로 기록된 문헌을 이번 평창군민신문이 발굴하여 인터넷판 평창군민신문에 게제 하였습니다)

2, 현 진부면 水項里는 고지도에서는 水多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水多라는 지명은 삼국유사 자장정율조편에 자장율사는 말년에 수다사에 거처하였다고 기록한바 천년을 넘게 사용되던 지명이 1970년대의 고 지도 4개에서도 水多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이후 水項里로 개명되었다이러한 지명의 한자 뜻의 변경을 그저 일제의 조선사관의 탄압이라 한다면 그것은 실수로 분명한 것은 이러한 개명은 조선말 시대부터 이루어짐을 여러 단어들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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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구한말 이러한 개명은 조선의 풍수사상에 기인한 시각의 사유적 시각이 반영되는 단어들로 위 에시 1)에서 甑項峴에서 項자가 없이 甑峴으로도 그 뜻이 일맥사옹하고 고유말로도 시루목 고개에 項자가 필요치 않는데도 項자를 넣은것은 項자가 관자놀이란 풍수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필자의 예전에 쓴 평창예찬이란 글에서 노산성의 풍수적 견지를 인용합니다.

 

(인용)

임금님의 어전의 병풍의 일월 오악에서 오악중 삼각산을 주산으로 잡듯이 평창은 조산인 수정산에서 회룡하는 용이 서산을 타고 방칫골을 넘어 방송국 중계소 부근에선 용오름치는 힘찬 과협의 박환을 거치며 시루목을 넘어 노산에 정기를 내려놓은 형국이다. 평창의 진산인 노산은 주먹을 뿔끈 쥐듯이 산의 중앙부는 곰의 배꼽처럼 내려앉아 포효하기전의 힘을 주는듯한 형상의 대명당이라. 이곳이 평창의 기상을 말하여 주고있다.

위 인용에서 과립과 박환은 풍수용어로서 민자로 곱게떨어지관 산은 죽은 死血이며 힘차게 비틀과 울룩불룩한 뜻으로 관자놀리 시루목을 넘어서 노산의 풍수적 견해를 제시한 글로 보아도 이러한 관자놀이 항(項)이 구한말 시대 사상에 중요한 의미를 갖기에 甑項峴(시루목고개)에 項자를 삽입한 것입니다.

 

2)번의 예문에 천년이 넘게 水多라고 사용되던 지명이 구한말에 水項里로 개명된 점에서 項 자는 물이 굽어도는 관자놀이 격에 의미로 사용되어 水多라는 물이 많은 지역, 바꿔 말하면 상습 폭우지역이란 의미입니다(* 일전 수항리사지가 수다사지란 연구를 하기 위해 평창에 10명의 학자가 모여 세미나를 하였던바 수항리사지가 수다사란 의미를 확실히 부여하지 못하였기에 필자는 고지도에서 수항리가 에전에 수다란 지명이었슴을 밝히고 水多라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 게시글에서 보면 나전에서 오대산 비로봉까지 올라가는 골짜기에 양족으로 가리왕산, 잠두산, 백석산, 백적산, 두타산, 적성산등 해발 1,000m 넘는 고봉들,,, 협곡을 이루는데 수항리에서는 백적산과 두타산이 서로 마주보는 간격이 1km가 안되기에 태백산맥을 넘어가던 구름이 양 산에 걸려서 비를 뿌리는 상습 폭우지역으로 천년전에도 이 수항리를 水多라고 이름붙였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이러한 의미의 수다가 구한말에는 수항리라고 풍수적 사상이 기인하는 지명으로 바뀐 것입니다. 여기서고 수항리를 물항재라고 시적 언어로도 변경하지만 항자는 지역에 연관이 없는 풍수용어 입니다

 

<평창의 고지명을 예시로 한 지명이해>

이러한 역동성의 태동기에 바빠지는 세상속에 우리의 단어는 그 원뜻의 맞는 한문으로 다시 환원해 갑니다.

이러한 단어 개명에서는 당시 시대적 관념인 풍수적 사고관념이 구한말 시대에 일상과 문화에 전반적인 사상을 기조하는 것이 풍수의 용어입니다.

이러한 신조어의 경향성은 일상의 단어나 문화적인 단어에까지 파급됨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일상의 생활이나 문화적 풍토에서도 새로운 경향성의 풍조가 나타나는데 그 한 예로서 봉평면 팔석정의 팔각에서도 그러한 영향으로 팔석의 명칭이 개명됩니다.

 

구한말 화서학파 유학자인 봉평의 신범선생은 평창인으로서는 단 한권으 책이 규장각에 바치되어 있는데 동책 「봉서유고」의 팔석정편에서 1,850년대에 팔석정을 다녀가면서 바위에 세겨진 팔석의 석각이 봉래(蓬萊), 영주(瀛洲), 방장(方丈), 석안(石鞍), 석귀(石龜), 석옹(石瓮), 석평(石枰), 석두(石竇)라는 명문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봉서유고 221쪽)

 

그런데 근자에 팔석으로는 우리의 신앙의 주체인 삼신산인 봉래, 영주, 방장(백두, 한라, 지리)산은 그대로이지만 다른 지명으로 석안(말의 안장처럼 앉기 좋은)등의 5개 석각이 2음의 모두 4음의 석지청련, 석실한수, 석평위기, 석대투간등으로 바뀌어지고 제각각의 에술성이 결여된 서체로 석각되어 있는바 이 체가 양사언의 체도 아니고 또한 양사언은 신범선생보다 300년 먼저의 사람인데 구한말에 양사언이 4자 성어를 썼다면 이치에도 맞지 않기에 이러한 개명은 분명 구한말 신사상의 관념의 영향을 받은 산물이란 점입니다. 이렇게 구한말 시기를 분석해볼때 당시 음양의 동양적 사상속에 한 축의 기조를 이룬것이 풍수사상이기에 고지명을 해석함에 풍수론적 입장을 배제해서는 않되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입탄의 여러 고지명에 대한 분석적 이해>

입탄에 현재 사용되는 이름은 入彈 또는 들둔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에 입탄의 한문명에 彈자는 사전적 의미로는 “탄환” 또는 “튀기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점은 아래에서 다시 분석하며 우선은 입탄의 고지명을 분석 이해 합니다. 고지명으로는 入呑 또는 들둔(들뚜니)라 하며 이곳에는 沙峴과 沙五叱이란 지명도 가지고 있어 지명연구에 대단히 흥미로운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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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탄의 변천지명>

* 순조때까지는 入呑을 사용하였다.

* 구한말때부터 일제시대와 현재까지 入彈을 사용하고 있다.

* 우리말로는 들둔(들뚜니)라고 현재도 사용하고 있다.

* 입탄에는 沙峴과 沙五叱이란 두 곳의 지명을 가지고 있다.

* 모래재와 또는 노리재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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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탄의 지리적 환경>

입탄은 지리적으로 태백산백의 중앙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태기산의 준령들이 차령산맥을 이어가며 서쪽으로 내려 뻗으며 수정산을 지나 백덕산으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하며, 입탄의 앞으로는 서산(하평 산으로 조선기록에 서산이라 두번 명기됨)을 넘으면 평창읍내이고 뒤로는 큰 봉의 백덕산이 주천 사자산으로 이어지는 산새 사이에 폭이 좁은 골을 이루며 실개천(灘)이 흐르는 곳을 따라 한줄로 늘어선 작은 촌락이다.

 

이러한 깊은 산속의 작은 마을이지만 조선시대에 입탄은 평창군 남면 입탄리로 1822년 평창군에서 입탄리 이국신에게 발급해준 준호구 기록이 현재 무릉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듯이 조선시대에 입탄리는 평창군 관할 소속의 행정적 기능을 갖추고 있는 점도 이국신의 입탄리 거주 준호구를 통해서입니다. 호구단자에 대한 평창군의 기록으로는 유일한 듯 합니다.

이렇게 입탄은 깊은 산속의 작은 마을이지만 이곳에서도 과거로부터 사람이 살아왔기에 현재까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입탄의 지명도 여러갈래로 불리어 왔슴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여러지명으로 혼용되 불리는 변천과정을 분석적 고찰을 통하여 이해하고져 하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이해한다면 평창읍 마지리는 말이 연못에 빠져 죽었다고 하여 馬池리라 합니다. 언제라도 이 설화의 내용은 변할 수 없기에 그 뜻은 馬池입니다. 하지만 위 설명처럼 17~8세기 조선의 근대문명 태동기에는 어려운 한문이 배제되고 쉬운 한문의 음을 따서 馬之里 ,또 麻池里라고 사용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용에 갈 之자는 조사로서 지명에 사용하기엔 좀 문제가 있슬 것이나 이 시기에는 그런 의미는 배제되고 어려운 한문의 뜻이 아닌 쉬운 음으로만 표기하게 된 것입니다.

같은 예로 미탄명의 두만산을 비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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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산의 변천지명>

*해동지도에서는 頭萬山 (세종때)

*이후 대동여지도, 청구도. 일제때에는 斗滿山으로 표기.

*일제때 餘蔭山(당시 한글로는 여름산이라고 표기. 두만산은 해발 1,254m로 시원해서 여름산이란 수식을 한 듯 합니다)

*현재는 靑玉山(청옥이 생산되었으며 玉은 귀족들도 사용하지만 원래 왕의 전유물이기에 귀한 물건이 출토되어 청옥산이란 지명이 붙였슬 것으로 추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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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인용예의 입탄명의 변천에서나 두만산의 변천에서 원래 지명으로는 입탄이라 할때 入灘이라고 여울 탄자를 사용하며 呑자로 바뀌었슬듯 하고 두만산도 그 뜻이 頭滿山이 원래 어원으로 이것이 斗萬山으로 바꿔야 하나 원래 사용했던 한문은 찾을 수 없다.

이점에 이해가 어려우면 쉬운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입탄을 가는 길에 하나는 대상리에서 강을 건너면 고개가 없는 골짜기로 들어가는데 바로 강을 건너 아래쪽에 막힌 골짜기는 안정마을 입니다. 필자는 일전 安井寺의 석탑을 보기위해 찾았는데 위냥이라하는 샘물에 표지판에 안정마을 유래는 바로 이 우물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이 우물의 특징은 땅 지하4m 아래서 샘이 나오고 샘물이 강으로 흐르기에 골을 파서 둑을 만들었다.

이것이 편안할 안자의 安井샘이 아니라 언덕 아래로 흐르는 岸井샘이라고 편안할 安자를 쓰는 것이 아니라 언덕 岸자를 썼어야 맞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원래는 岸井에서 安井으로 변했는데 원래의 岸井이란 기록은 문헌상에 찾아볼수 없듯이 頭萬山이나 직역으로 머리가 만개이고 斗滿山은 콩이 차다라는 풀이는 뭔가 제 이름값이 아니기에 찾드레 한문이 바뀌에 頭萬山이나 頭滿山이라고 했으면 머리가 가득 차자, 또는 콩이 만개라는등으로 또 다른 해석을 가할수도 있지만 頭萬山이나 斗滿山은 옳은 이름값의 지명은 아닐것이라 추정하는 바 이러한 콩斗자나 마지의 馬池, 麻池는 이두음의 훈이 아니라 음을 단 단어를 사용한  시기에 기록된 지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치의 예로 평창지명에 많은 예를 들 수 있으나 여기서는 入呑의 예를 味呑과 같이 비교 분석하여 이해 하겠습니다.위의 지형적 고찰에서 입탄의 지형은 조금 언급했듯이 입탄은 수정산, 백덕산, 사자산으로 이어지는 높은 고봉들이 사이에 실개천이 흐르는 작은 둔치에 마을로 삼킬 呑자를 써야할 형태나 형상은 없어 보인다.

 

또한 味呑의 지형도 발왕산에서 발원하여 가리왕산, 청옥산으로 이어지는 고봉들 사이에 입탄과 실개천이 흐르는 유사한 지형에 味呑이란 지명에 呑자의 의미를 붙일 곳이 없다. 그러기에 입탄이나 미탄의 경우에 삼킬 呑자는

원래의 지명에 뜻이 아니라 한자의 뜻이 음으로 사용되는 시기에 기록된 지명으로 呑자는 고어입니다.

그리고  여울 탄 (灘)자를 쓰는 것은 고지도엔 안나오는 시기에 사용되었으며 이시기는  위에서 언급한 수항리, 증항등 풍수용어가 사용될 시기로 구분지어 집니다

 

즉, 한글이 창제되고 글자의 확산에 한문 뜻의 사용에서 음의 사용의 변경은 어려운 획에 한자보다 쉬운 획으로 바뀐 음만을 빌려 쓴 용례입니다. 이때 우리 언문의 특성은 한글은 토씨의 조사들로 수식어였으며 한문은 명사등의 체언으로 사용해 병행했기에 한글이 수식의 받침을 해 주기에 원 뜻의 한문의 의미는 퇴색되고 음으로 변용하여 사용한 시기이다. 조선의 중, 후기에 이 시기를 지나며 구한말 외래 문명의 수입에 신조어가 만들어지며 또한 이 시기에 기존의 단어도 당시의 사관에 입각한 새로운 단어로 개명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味呑은 음역에서 다시 신조어로 바뀔때 美灘으로 바뀐바 이것은 미탄이란 지명에 가장 적확한 단어인듯 합니다. 즉  詩語같이 실개천, 또는 이른아침에 안개낀 개여울의 여울 灘자의 사용으로 현재 사용하는 美灘이란 뜻의 의미는 가장 아름다움을 잘 나타낸 표현이다. 하지만 入呑은 入灘으로 변경되지 아니하고 入彈이라고 쓰이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에 그러할까?? 이것이 입탄과 미탄의 경우의 지역적 편차라 하기엔 비논리적인듯 彈자는 사전적 의미로는 총알 탄, 또는 튀다라는 뜻을 가진다.또한 입탄의 入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도 연구과제이다.

 

( 시골의 지명이 어려운 한문으로 된 점에 누가 이렇게 쓴것일까에 문제는 평창만 하더라도 고려가 망하자 이색이 오대산에 칩거하였고 조광조도 율곡 이이, 허민수(허목)도 평창을 다녀갔듯이 임지에 오른 군수등이 한문으로 지명을 썼으리란 점이다. 당시에 대과과거시험은 초시에 합격자들이 3년에 복시에 삼십명정도 오르면 일년에 열명정도로 요즘 판사시험 수백명 합격은 비교가 안되는 천재들이다)

 

입탄의 또다른 지명으로 현재도 사용하는 들둔, 조선시대에는 들둔(들뚜니)라고도 명기되어있다.

이를 일반적으로 해석하기엔 들野자와 언덕 屯자로도 보인다. 입탄의 산 앞쪽 마을은 鳥屯이다. 鳥屯이란 지명을 이해하기 위해선 현 조둔 이장님댁 앞에서 보면 조둔의 새귀앙지산의 중심으로 세귀앙지산은 능선의 4개로 새의 날개. 목의 형으로 곱게 떨어진 산으로 鳥屯은 풍수적 형상의 용어로서 이곳에서 일반인도 동 산을 바라보면 다른 산들과는 틀린 높고 단촐함을 볼 수 있는 산이다.

이러한 조둔이란 지명이 생길대 들둔의 지명도 생긴것은 아닐까? 물론 여지도서에는 야둔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의문을 하나 제기한다면 들뚜니의 기본형은 들뜨다. 들뜨다는 윗쪽 방향이란 점도 암묵적으로 제시한다. 여기에 입탄의 入자도 서다라는 형태를 가진다. 혹시 이 두 글자가 하나의 연결고리를 가진다고 볼 수는 없슬까?? 그래서 현재사용하는 入彈의 彈자는 위에 제시한 단어풀이에서 총알, 또는 튀다라 했는데 입탄은 “들뜨다”와 설“入”자와 튀다라는 의미의 “彈“자의 상호 상관성을 가질까? 만약 이러한 상관성마져도 없다면 음의 한문의 뜻의 한문으로 돌아갈때 입탄은 엉뚱하게 총알彈자로 돌아갔슬까??

 

바로 이러한 지점에 입탄의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는 일반적인 추정으로는어려움이 있기에 이를 답사하고 탐구하는 향토사학이 필요한 것이다. 입탄의 지명에 대한 또 하나의 문제는 들든이라 하며 유동에서 넘는 고개를 들둔고개라 한다. 이를 과거에는 沙峴이라고도 기명하였다.

 

필자는 오래전인 초교시절 이 고개를 넘어 입탄에 간적이 있는데 지금도 기억엔 고개가 모래언덕이 아니고 전형적인 산길에 입탄은 여울이 흘러가며 둔치에 집 한채씩 띄엄띄엄 있는 모습에 별다른 특징이 없는 산촌마을로 기억한다. 입탄에 특색이라고는 뇌운리와 입탄리는 청석이 나는 수석의 산지로 그 외에 별 다른 특징이 없는데 이 고개를 왜 沙峴이라 했슬까?? 또한 여울이 빠져 나가는 입탄의 꼬리에는 沙五叱이란 원 지명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임진왜란때 권두문 평창군수는 포로로 잡혀서 원주 감영을 탈출하며 평창으로 오는 첩경에 산길에서 입탄을 들어오며 이곳에 沙五叱이란 지명을 남긴다.

 

사오질이 판운으로 가는 고갯길이라 하는것은 잘못이며 우리가 판운이라 하면 주천가는 강변마을로 알고 있지만 기실 판운리는 무릉도원면의 산속의 광할한 면적을 가지는 법정 리로서 권 군수가 평창으로 넘는 첩경에 인적이 없을듯하여 사오질은 峴이라고는 할 수 없지면 호구록에서는 입탄 끝 부분의 어느 특정 지역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沙峴또 沙五叱은 음만 따서 쓴 한문으로 보기는 어려울듯 하고, 그럼 동의의 어원을 가지는 뜻이 있슬까??

이 점에 또한 아직 답은 내리지 못한다. 하지만 沙峴을 모래재라고도 한다.

그런데 근자에 노래재라는 큰 비석이 세워지고 권두문 군수가 포로에서 탈출하여 이 재를 넘으며 노래를 불렀다 하여 노래재라 한다. 그러나, 사현의 모래재가 노래재로 변함에 “ㅁ“ 이 “ㄴ“으로 변하는 음운현상은 없다. 모래가 노래로 변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노래재고 한다면 그것은 설화적 내용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후 일제 강점시에 지명은 주로 일왕의 왕자가 변으로 앞에 붙은 지명으로 바뀝니다.

 그 예로 동계올림픽으로 잘 알려진 중봉의 가리왕산은 加里旺山, 發旺山, 博芝山(두타산)에서 보면---

 

* 加里旺山은 원래 가리산이었으며 가리왕산(加里王山)으로 변하였는데 일제는 큰산은 일왕의 뜻으로 加里旺山으로 바꾸었으며. 이의 일왕자 사용문제에 대해서  평창의 향토사학자 엄기종 향토사학자는 산림청에 오류에 대한 이해의 글로 진정하여 산림청에 오류에 대해선 加里王山으로 수정되었다.(전국의 산의 행정면은  산림청에서 관장하고 있습니다)

 

博芝山은 원래 두타산이었으나 일본놈들은 이를 일장기로 교모하게 바꾸었다. 博자는 넓을 박자이고, 芝

자는 지초(芝草)라는 뜻이고 일산(日傘=양산), 즉 둥그런 양산을 뜻한다. 이러한 양산은 또한 욱일기라는 일장기의 둥근 모양을 형상하기에  이 두 글자를 합성하면 사각 박스안에 둥그런 그림과 살을 가진 양산이라면 이는 일장기를 뜻한다고 엄기종님은 이렇게 해석하시고 산림청에 정정 민원을 제출하여 현재로서는 두타산으로 환원되었다.

 

  * 發旺山은 대관령 스키장이 설치된 산으로 고지도엔 팔왕이란 설은 없으며 이는 근대에 붙인 이름값으로 조선시대 고지도앤 鉢囊山(鉢- 스님의 바리때 발, 囊- 주머니 낭. 배낭의 뜻)으로 되어 있다.( 이 점은 필자가 처음으로 문제제기 합니다)

여기서 천황산은 일본의 작태이고 천왕산이라 할때 王자는 우리 산들에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주로 1,000m급 이하의 산에 나타나며 그 위 단계의 높은 산에는 비로(첫째)봉, 아미산(중국의 불교 4대 성지산), 두타산( 불교적 이미지 용어)로 왕자보다 그 위의 산들은 불교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 용평스키장의 발왕산은 해발 1,500m 로서 팔왕지지의 해석이 아닌 왕부다 더 높은 불교용어를 사용한 발낭산(스님의 바리가사인듯)이었습니다.

 

 일제때에는 식민사관으로 加里王山에서 큰 산은 일왕의 것이라고 일왕을 뜻하여(旺) 임금왕앞에 일(日)자를 붙여  加里旺山는등 1925년 사이토 총독이후에는 민족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식민사관적 견지로 조선의 고지명을 개조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또 하나는 수항리의 두타산이 일제때 박지산으로 바꿨습니다.

이상 입탄의 고지명으로본 평창 지명 변이의 연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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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에 발간된 지명지에 논란에 관여할 것은 아니지만 지명지를 한문이 아닌 한글로 썼다고 하는 말이 전하는바 이 점에 동의할 수 없는 사항만 간략히 합니다.

가령 진부면에는 九石里가 있습니다. 지명지에서는 어떻게 해석했는지 필자는 알 수 없지만 九石이란 단어 뜻 그대로 아홉개 돌이 난다는 말로 이는 지질학적으로 습곡산지나 융기등에 중심이 아닌 변방의 모서리에 해당하고 또 다른쪽에서도 변방에 해당하여 여러 광물들이 나올 수 있는 특수지형인듯 합니다. 그런데 한글로는 구석이라하면 귀퉁이 짜투리같은 느낌으로 여기에 접미사 뙈기를 붙이면 구석뙈기라고 어김없이 한글이 되지만 한문의 九石이나 r은 한글의 구석은 말로는 구분이 않되고 전, 후의 문장에 치중해야 되는 동음이의어 입니다 이러한 혼돈에 지명은 한문으로 사용해야 됩니다.

 

또 하나의 예로는 방림의 僧頭峰을 순 한글로 표기한다면 스님 삭발 머리본 이라고 할 수 있으나 좀 어줍잔은 말 같기도 하고 아마도 우리말로 명확한 단어는 중 대가리봉 이라하면 얼른 알아들을 수 있지만 이 단어는 좀 당사자인 스님들에게 폄하적의 느낌을 단어로 이해된다.

또 하나 재미있는 지명은 진부면 하진부 2리에 "소도둑넘 마을"이 있다. 옛날 산적들이 내려와 소를 훔쳐 잡아먹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오히려 산적들은 주민을 위해주는 의리를 가진 의적이라고 주민들은 친근했다고 한다.

그러기에 지명에서 한문을 한글로 쓰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으며 더 중요한것은 고지명에 대하여 과거 그 시대의 분위기를 고찰하여 당 시대인들의 사상적 사조, 경향성을 잘 이해하고 지금씨데의 언어로 표현해야지 고 지명을 지금의 분위기에서 파악하여 기술한다면 그것은 오류가 된다

 

또 하나 재미있는 지명은 진부면 하진부 2리에 "소도둑넘 마을"이 있다. 옛날 산적들이 내려와 소를 훔쳐 잡아먹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오히려 산적들은 주민을 위해주는 의리를 가진 의적이라고 주민들은 친근했다고 한다.

 

또한 동 시대라고 완벽한 시대는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경향성에 조선시대는 음양오행사상에 풍수론까지도 당 시대의 사상에 지배적 영향을 가졌지만 이제 우리세대를 마지막으로 유교주의는 퇴조되며 720만의 베이비 세대도 어느덧 중장년에 속하며 20,30의 세계화 세대가 도래됩니다. 과연 우리 세대의 관점이 미래의 세대에도 똑같지 않기에 시대 사조의 경향성에 따라 이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기에 과거 역사는 있는 그대로 표시하고 해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쉬운 예로 위에서 예문으로 언급했듯이 馬池里를 麻之里로 표기한것은 오기가 아닐 것으로 이는 한 시대에 사용한 기록입니다. 그 시대의 사조와 사관의 배경의 고찰을하여 본 결과 麻之里라고 쓴 점은 그 시대의 필연성을 가졌으나 이를 오류로 썻다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과거의 한 시대를 삭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역사는 그 시대 시대의 시대사 반영이며 고 지명 또한 같은 맥락의 시대사 반영인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사고로 평창에서 어떤 한자는 오기니 오류니 잘못썼다고 하는 판정은 멈춰야 할 것이고 앞으로 기록에서는 위 입탄리. 미탄명 지명의 변천에서 보는바와 같이 모든 지명의 쓰인 연대도 함께 표기해 시대적 반영까지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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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에는 인용부나 참고 관련서적은 없습니다. 오직 필자의 주관적 견해로 시대구분등을 반영하였기에 이 점에 오류가 있다면 양해를 바랍니다.그리고 출처의 인용으로는 세종지리지, 신중동국여지승람의 평창군편, 여서 지리지등 각종 평창의 지명에 관한 고 서적을 인용합니다.

平昌歷史硏究者 高 柱 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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