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창경찰서 5층석탑의 글에서 아래 사진에 대한 답>
아래 사진속 인물은 故, 김종환 氏의 중학교 시절의 사진입니다. 그러면 ‘69~’70년 사진으로 당시로서는 파출소는 시장쪽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고, 또한 경찰서(구 일신중학 자리)가 옆의 2층의 신 사옥으로 이전되며 그 자리는 야학이 들어서게 되었고 후일 일신중학이 개교하게 되었다. 2층 경찰서 준공 시기는 대략 ‘64~5년도 쯤으로 ‘65년 국군장병 파월 이전쯤으로 보입니다. 당시 라듸오엔 연일 파월 군가가 나오던 시절을 회상하시면 그 이전에 2층 경찰서가 있었다고 얼른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일신 중학 개교는 아마도‘68~9년도 쯤으로 당시 경무대는 경찰서 자리는 다년간 비어 있어서 그 앞의 운동장과 같이 동네 놀이터가 된 적이 있으며 일신중학 학생 구성은 그간 중학을 가지않은 청소년들의 구제대상으로 동급생중에 무려 8세나 나이가 나이 편차를 가지고 있다한다.

위 사진에 의해서 (구) 파출소엔 망루가 없다하는 증언과 망루가 있었다 하는 증언, 또한 위 사진의 소장자도 망루가 옆에 있어 (구) 파출소에서 찍은 사진이라 하는데 대한 분석적 고찰을 합니다.
어느 분의 증언 채집에 박*도씨가 이곳에서 사진속의 망루를 본 적이 없다는 증언은 필자가 잘못된 증언이라 하였지만, 기실 바른 이야기 입니다. 즉, 일신학교 개원에 앞서 경찰서도 이사가고 파출소도 이사가고서 구 파출소 자리는 개인 건물이 들어서며 동시에 망루는 철거되었던듯 하며 이후에 일신학교는 개교하여 일신학교 학생들은 등교길에 그곳이 정문 입구이었으나 당연히 망루를 보지못한 것이 정상이란 점이다.
하지만 위 사진을 현 경찰서 5층석탑과 대조시 사진속의 4층탑은 현 평창경찰서의 5층탑의 4개층 부재와는 모양새가 동일한 같은 부재라는 점을 알 수 있다사진속의 탑과 경찰서 탑의 분석의 고찰에서 본 사진은 경찰서 탑과 모양새가 같은 탑으로 탑재에서는 1층 옥개석, 2, 3층 옥개석, 4층 옥개석이 형태가 틀린 다른 3개 사찰의 탑을 모아서 조합한 탑재들로 구성된 짬봉의 똥탑임을 볼 수 있다.
이 사진의 파악에 우선 이야기로는 평창에는 망루가 두 개 있었다. 이런정도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로 증언정도는 필요없슬듯 한 것으로 본인의 기억에 의존하여 이를 서술합니다.
(구)파출소라 함은 50년 전쯤 지금의 하리 파출소 전신으로 농협지부 건너편의 코너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앞은 경무대의 경찰서로 들어가는 입구였으며 망루가 있었다. 이 망루는 위 사진속의 망루의 모양새가 아니라 폭이 좀 넓고 높이는 1층 반정도로 망루 상단에는 방송용 앰프의 나팔이 설치되어 정오, 통금, 밤 11; 30분에 통금 예비 사이렌을 울리고 때로는 주민 정보용 알림의 방송을 하였다.
또 하나의 망루는 소방관제용 망루로서 소방소 건너편 당시 연초조합내에 도로쪽 편에 있었으며 관측용이기에 높이는 좀 높은 모양새의 2층 반 정도로 높게 되어있었으며 사람이 올라가 관측한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는 연초조합창고 정도의 작은 사옥 한 채가 있었으며 심*환씨가 살았었다. 이 사택이 위 사진속 망루 뒤에 보인다.
그러기에 위 사진은 평창경찰서 보안과 앞 화단에 옮겨진 탑을 정문쪽에서 찍은 것으로 노산의 중턱 오르는 곳에는 많은 건물이 있지만 그것은 시루목쪽에 있었기에 시내쪽 방향에서는 산으로만 찍힌 것이다,
그러기에 본 탑은 구 파출소 옆 이후 노인회관 앞에 화단에 있었으나 이후에는 2층 경찰서 담장의 뜨락 화단인 보안과 앞쪽에 이전되었다. 이때 찍은 사진이다. 그래서 본 사진이 69년대쯤으로 추정하기에 시간대도 맞는 것이다.
사진에서 원경의 피사체 노산성의 각도로 볼때 앵글의 촛점은 즉 사진사의 위치는 경찰서 정문쪽이며 본 탑과 망루까지 거리는 7~80m정도 이내이다.
본 사진은 지난해 어느 분이 필자에게 평창 경찰서 탑이 원래는 4층 탑이었다고 보내주셨을 때 경창서 탑은 원래 작은 삼층석탑 3가지가 잔재물이 합해져 5층으로 만들었기에 가늘게 왜소한 느낌을 가진다고 설면하였었다.
삼층석탑의 규모는 일반적으로 높이가 15m 에 이르는 탑도 있습니다.
도도하고 강직한 맛의 감은사지 쌍탑과 비레와 균형으 표본적인 아카데미즘의 고선사지 탑은 통일신라 양식으로 "정형탑'이란 유형의 기준 모델등의 탑입니다.
보통의 삼층 석탑은 대략 3,6m 정도 입니다, 강릉 구정의 신복사지탑이나 한송사지 삼층석탑등은 대체로 이러한 크기 입니다. 그러나 현 평창경찰서의 5층탑의 3개탑 부재는 모두 2,5m이내의 탑으로 구겅되었던 탑이기에 이를 5층으로 위작하다보니 모양새가 가늘고 왜소한 형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아래 기단석은 구 파출소 자리로 이전시 무거워 운반이 안되자 그 자리에 묻고 건물을 세웠다고 건축주이자 당시 이를 옮긴 김**옹의 증언이 있으며 대신 모조 지반석을 만들었는데 지반석과 갑석이 붙은 형태로 연화대좌를 만든 모양도 우스운 짝퉁이란 점입니다.
https://blog.daum.net/kkks1/1805
평창경찰서 탑의 분석과 그 이해
평창경찰서 탑의 분석과 그 이해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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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필자는 두 살때 파출소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 본 망루가 초교시절이전에 철거되었다 하여도 이에 대한 기억은 필자가 5살 전후하여 부친께서 일일파출소장을 역임할 때 파출소에서 놀며 망루를 본 기억의 회상입니다.
두 살때의 기억이라하면 거짓말로 보일테지만 정확한 날짜 를 산출할 수 있는 기록으로 필자의 조부님 대상날자와 필자의 생일날을 환산하면 생후 18개월때 필자는 하리 파출소에서의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필자의 기억 여섯편의 자막을 정확히 그려낼 수 있는데 정말 생후 18개월때를 기억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재미로 서술하겠습니다. 물론 때로는 이러한 기억력으로 역사를 고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필자의 생후 18개월의 기억>
필자의 머리 속에는 항상 이해할 수 없는 기억의 자막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50대 후반의 어느날 집안 모임에서 잠시 옛날 조부님 대상때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필자를 집에서 잃어 버리고 한참 찾다가 파출소 방송에 집을 잃은 아이를 보호중이니 찾아 가라는 방송을 듣고 얼른찾아 왔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큰 소리의 탄성을 질렀다. 그간 머리속에 맴돌던 알수없는 기억들에 대해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필자의 생일과 조부님 기일은 4개월 차이이기 때문에 조부님 대상날이면 필자는 생후 18개월째인 아이였는데 그날 어머니에게 산소에 먼저 간다고 집을 나갔다니 이게 될말입니까 하고 의아스럽지만 말이 되었기에 문제였습니다.
(생후 18개월때의 스케치)
생후 18개월떄 어느 봄날 조부님 대상날이였다.
미닫이 창호 문이 6짝과 벽으로 된 약 8m가 넘는 넒은 안방 아랫목에서 부친은 양반다리로 혼자 앉아서 신문을 보고 계셨던 모습을 필자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때 저는 다가가 부친께 빨리 가자고 졸랐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희미한 기억이 나는 삽화로 어디를 가자고 한 것은 말을 잘 못했슬 18개월 아이가 아마 전날 야외에서 뛰놀떤 때 부친께서는 내일 다시오자 하며집으로 돌아가자 재미있던 양외 뜀박질이( 묘 잔뒤우에 웃으며 뛰던 모습의 희미한 기억이) 이는 아마도 부친께서는 다음날 대상제사를 위해 이곳 산소를 다녀가며 깨끗하게 청소하신 듯 하다. 당시 방축골 조부님 산소 잔듸밭에 뛰돌던 것으로 추정하며 돌아오는 길에 자전거 앞 안장에에 바람을 맞으며 기분좋아 콧노래를 부르던 기억을 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상을 물리고 아랫목에서 신문을 보고 계시는 부친께 어저께 그곳에 간다고 하였으니 빨리 가자고 졸랐던 것입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부억에서 어머니가 할아버지 음식을 장만하니 좀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럼 언제 가냐고 어머니께 물어 보겠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물론 생후 18개월짜리인 필자가 말을 잘 하였는지 아니면 본인의 이름도 알고 있었는지 이러한 사실은 모릅니다만 어머니에게 가서 물어보겠다는 뜻의 의지를 이야기한 점은 분명 기억합니다. 이렇듯 만은 부분에서 말하는 것은 그 단어는 아닐지 몰라도 본인의 생각이 그러함은 60여년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레서 안방에서 맨 아래 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목욕탕 방이라하는 작은방에서 부엌으로 연결된 작은 문을 밀어열고 어머니께 빨리 가자고 하였더니 음식을 마련중이니 끝나는데로 가겠다고 하였다. 그래도 저는 막무가내로 졸랐더니 야단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어릴적에 아마도 필자는 고집불통인듯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조르는데 부엌에서 두서개단 올라가서 수도가 있는 밖으로 나가셨다. 당시 분위기로는 음식 냄새가 진동하는데 밖에서 몇 사람이 전을 붙이고 있는듯 추정합니다. 어머니가 다시 부엌으로 들어왔슬때 저는 그럼 나 먼저 가겠다고 억지를 부리며 말했더니 될말이 아닌듯 어이없다는 식의 역청 반으로 그럼 너 먼저 가라고 하셨다.
나는 돌아서서 방을 뛰쳐나와 나 혼자 가겠다고 생각하면서 긴 쪽마루복도를 나와서, 이때 복도에서 안방 문을 열고 아버지에게 먼저간다고 이야기하여야 정상일 테지만 본인은 빨리 가겠단 의도로 막 뛰었던 기억과 마루 아래에 시멘트 바닥에 내려와서 신발을 돌려신고 신작로를 나가서 골목쪽으로 돌때도 도랑위 화강암 돌다리를 조심히 건너던 기억과 목욕탕 방에는 가마솥보다도 더 큰 둥그렇고 높이는 1m도 넘는 큰 무쇠 욕탕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이 방에서는 이 무소 탕을 본 기억은 없다. 후일 4~6세때 무쇠 탕의 기억은 가지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어린 나이에 목적하는 것만 눈에 보이고 기억하는것 아닌가 합니다.
골목길에 들어선 다음 장면으로는 아마 시루목 고개 초입으로 느껴지는데 양 대문이 있는 문에 오른쪽 문을 붙잡고서서 앞에 도끼질을 하는 사람을 보고 울고 있었다. 앞 마당에서는 젊은 청년이 소나무 푸른 솔가질ㄹ 도끼로 자르고 있었는데 마당엔 한지게의 솔과 그 앞에는 툇마루에 앉아있던 여자가 나와서 나를 앉고 다시 마루로 간다, 도끼질하던 청년도 나와 같은 방향이엇고 여자는 마루 왼편에 앉았는데 나를 마루에 앉히고 무어라 이야길 하고 나는 울기만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리고 다음 자막으로는 울고잇던 울음이 뚝 끄치는 생각이다. 무언가 낯설기도 하겠지만 이상한 기분에 멍멍하여 울음을 그쳤는데 아마 그곳이 하리 파출소가 아닌가 추정하며 그 여자는 나를 그곳으로 데리고가서 신고하고 가출 아이 찾아가란 방송이 나왔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 다섯장면은 약간씩 전후하여 생생하게 기억하는바 집안에서는 너는 방축골이 아니라 향동으로 갔다며 그 청년분은 누구라고 하던데 한 번 찾아보고 그 아주머니는 나에게 무어라 했는지, 또한 필자는 본인의 이름을 말 하던지하는 점을 살펴봐야겠다.
누가 보아도 참으로 거짓말 같은 기억의 한 토막이었습니다.
여기서 당시 이 집은 일제때 세무서인지 기관과 관사가 함께한 건물로서 목욕탕도 그들이 만든듯 하는데 이 집을 지을 당시는 일제때 평창에 목수일을 하신 오** 목수와 최** 분이 공사일을 하셨다 합니다. 그리고 오목수 분은 남산에 송학정 정자를 지었다 하는데 그러면 송학정 지은 연대는 추정해볼 수 있지 않은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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