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백작 보낸날짜 : 20.11.16 08:00
(가칭 장평리 탑)
위 사진의 탑은 지금현재 알려지지 않은 탑으로 이 탑을 소개합니다. 동탑은 아직 학계와 문화재청에도 보고되지 않은 탑이기에 이에 상세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탑의 현 소재지는 평창군 용평면 금송1길 27 (지번; 용평면 장평리 355-1번지)내 정원에 위치합니다(G.P.S상으로도 확인이 용이함)
동 탑은(이하 가칭, 장평리 탑으로 칭한다) 사각칠층석탑으로 상륜부는 유실되었으며 5층 탑신석만 새로 정비한 흔적이 보이는 바, 상륜부를 제외한 탑신부에서 기단부의 지대석 상층부까지 높이가 4,2m이며 탑의 폭이 가장 큰 부분으로 하대갑석의 가로 폭은 1,2m이다. 탑은 마치 맑고 깨끗하게 보여 그 자태가 단아하다. 그러기에 근자에 조성된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탑을 자세히 관찰하면 동력의 그라인더나 에어툴을 사용한 점은 없이 정으로 쪼아 만든 것을 관찰할 수가 있다.
동 탑은 현재 개인 소유이며, 동 탑의 원래의 사원지나 출처등의 증언은 아직 정확성을 띄고 있지는 못하다.
처음에 전해 듣기로는, 진부 어느 밭을 포크레인 작업시 매몰되어 있는 탑을 옮겨왔다고 전해 들었으나, 이곳을 답사하기 전에는 도사리 운운하다가 답사시에는 주인이 전라도에서 20여년전에 사왔다고 하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바 20년전이면 2,000년대에 동탑이 골동품으로 전라도에서 매각되었다는 이야기에는 필자의 이해로서는 신빙성을 갖지 못한다.
물론 주인에게 직접 듣지를 않은 상태로 이 3가지중 유력한 장소로 추론하는 곳은 큰도사리 골이다. G.P.S로 볼때 큰 도사리골의 어느 부근이 폐사지의 유력한 것으로 추론되며, 도사리 장평리에서 멀지 않은 현 영동고속도로 건너편으로 오대산의 폐사지에 3층 탑이 있는 탑상골 산마루를 넘는 곳으로 “큰 도사리”에도 사원지는 있었을 가능성을 추론합니다.
동 탑의 미관적 느낌에는 현대적 감각의 모던스러움을 자아내는 탑으로 탑파의 석질은 산화철분이 녹아 내리지 않은 점으로 보아 빛깔좋은 양질의 대보화강암으로 치석되었으며, 탑의 안정적 느낌의 배경으로는 동탑의 옥개석 7층의 앙각이 필자가 주창하는 탑의 조형론(* 주 1)에서 옥개석 전각이 일반적 다층탑에 대한 필자의 조사자료 의하면 앙각 79º~83º 이내인 81º로서 경사값이 안정적 느낌을 가지며, 또한 각 층의 전각이 임의의 앙각 81º의 경사각의 직선상에 좌표하기에 탑이 가장 이상적 비례의 균형을 가진다. 따라서 필자는 이 임의의 사선을 탑의 생명선이라 하였다.
탑신석은 각형 1단의 바침이 조출되었으며, 옥개석 하면에 낙수홈은 없다.
또한, 하층 기단에는 양 우주와 하나의 탱주가 모각되어 있으며, 동 탑의 특징은 2중 떡잎의 연화좌의 독특성을 보이는 바, 하층 기단 명석의 안상. 상층 기단 갑석에 조식된 연화문의 복련좌 (覆蓮座)에는, 이중 연화좌의 앙복련 (仰覆蓮)으로 조식하였다. 상대갑석에는 한면에 각 3구씩의 안상이 모각되어 있으며, 안상은 내부에 삼산형 화문이 조식된 양식으로 4면에 합이 12좌와 코너 4개 부분으로 총 16개의 연화좌가 조식되었으며 하대갑석에는 각면에 4개로 4면합이 16좌와 코너에 연화좌 4개로 총 20개의 연화좌를 조식하고 있다.
연화문이 조식된 초층 탑신의 받침은 관촉사 삼층 석탑의 경우는 건립연대가 1006이고, 개심사지 오층 석탑은 1010년이다. 하지만 쾌석리 사자 삼층 섭탑이나 탑동리 삼층 석탑은 그 건립연대가 고려 중기로 나타나는바 동 탑은 상하, 2기의 연화문이 조식된바 고려 중기시대가 아닌가 사료됩니다.
동 탑의 각 부분 단위별로 통석으로 조성하였는데, 단 기단석은 4매의 면석으로 구성하였으며 기단석에는 팔부중상을 조식하였다. 기단부 면석에는 양쪽에 볼륨감있는 우주를 새기고 사방불의 팔부중상을 4면에 릴리프(부조)의 방법으로 조식한 바 사릉장 [四稜杖 사릉형으로 치석했으며, 동방 지국천(持國天), 서방 광목천(廣目天), 남방 증장천(增長天), 북방 다문천(多聞天) 등 사방의 천왕을 사천왕이라 하는데 이를 도상화한 것이다.
우리나라 사천왕상은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의 의미가 좀더 확대되어 부처나 불사리(佛舍利)·불국토(佛國土)나 국가를 악으로부터 지켜 주는 신장상(神將像)으로 신앙되어 계속 조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과 동 탑의 정교하고 반듯한 조각기법의 우수성과 사방불을 조식한 바 내부에 감실은 있어야 한다는 보편적 탑의 논리로 볼때 동 탑의 내부엔 감실이 있어야 할 듯 합니다.
동 탑은 고려 칠층석탑으로 양식적인면으로 수려한 점을 보이고 있으나 이러한 민족유산임에도 문화재로 인가 되기엔 윙 논고한 탑의 출처, 즉 폐사지의 위치 확인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울러 동탑, 장평리 탑은 고려 중기 이후의 탑으로 보이나 본 탑의 시대적․ 지역적 분포에 의한 탑의 조성양식 비교나, 그리고 樣式的 특성의 연구가 요구되는 바이다.
동 탑이 현재 사유재산으로, 양식을 자진 사람들이 볼때는 동탑을 아름다움으로 바라보기 이전에 개인의 욕심이란 점으로 치부해 버릴 것이다.
동 탑은 어쨌든 민족 문화유산의 한 점이지만 이 점을 밝히지 않는다면 밝히지 못하는 문제와는 다른 것으로 동 문화재는 이러한 출처 문제에 인위적으로 가려져 역사에서 사장된디면, 이에 대히여 사람들의 인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위적 훼손자는 역사 자체에 오명스럽게 영원히 그 이름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 주 1>
우리나라국보 405개째로 증가일로에 있지만 이 중 단일종목으로 가장 많은 부분은 33개의 석탑입니다. 그러나 석탑의 제 문제를 조금 어필한다면 만약 한 평짜리 집을 지어도 설계도면으로 구청에 허가를 득해야 하는데 탑은 국보이지만 그러한 엄밀한 도면이고 무엇이고 하나도 없는 구구주먹식이다.
이 야야기는 역으로 가령 하나의 탑이 완전 없어졌다고 가정하면 똑같은 모형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답을 구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탑은 역학자들의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양식의 차이나 안상이 몇 개, 연화좌이고 우주고 하는 일반적인 범위에에서 논고가 되고 통계로 인해서 탑의 건립시기 추정뿐이지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였기에 탑의 인식의 문제에 해석에 봉착되는 점을 가지고 있다.
이에 이해를 위한 예를 한점 들면은,,,
진부면 수항골에 수항리사지(수다사지)에 현재도 2층 옥개석만 가지는 탑이 하나 있는데, 이 탑이 원래 몇 층탑인가 하는 등 여러가지 의문에 어느 고고원이 평창에서 세미나를 한 수다사지 자료집을 찾아 보았다. 약 7~8년전 열한명이상의 학자가 평창예총에 모여 다섯개 파트로 나누어 세미나를 한 기록의 리포트였다.
이 세미나는 현재의 수항리사지가 삼국유사 자장정율조편에 기록된 강릉의 수다사였다는 점을 연구하는 세미나로 이 세미나의 한 파트로 수다사지 3층 섭탑에 관하여 단국대 박경식 교수의 리포트가 있었다. 박경식 박사는 '70년 울정사 팔각구층석탑을 해체 복원한 고, 정영호 박사의 제자이다. 물론 필자의 블로그 글에 의하면 정영호 박사는 팔각구층석탑의 공사 리포트에 논고가 있는데 이 논고는 큰 주류의 논고에서 분명 오류로 점철되었기에 동 탑은 아직 큰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박경식의 리포트 제목엔 수다사지 3층 석탑이라고 쓰고 있는데 현 2층탑에 대하여 3층석탑이란 언급의 설명은 한줄도 없다. 그냥 3층석탑이라고 쓰는 것은 무리한 수로서 평창군지에도 이처럼 3층 석탑이라 지칭하고 있다.
<여기에 박경식 교수의 리포트에는 또 다른 문제점>
◆ 동탑의 아래 바닥에 별도로 있는 한개의 옥개석을 주워 3층에 올리면 된다고 한다. 그런데 현 2층의 옥개석과 바닥의 옥개석에는 바닥의 옥개석이 폭이 작아 3층용이 될 수도 있지만 두께가 더 두꺼워서 2층용이 되어야 한다, 그럴때는 2층옥개석이 쑥 들어간 현상으로 이 옥개석은 다른탑의 부재임을 알 수있다. 또한 바닥제의 옥개석엔 찰주구멍이 나 있는데 동 리포트에서는 10*10*20cm으로 맞창이 나고도 넘는 사이즈이다.
◆ 그런데 이런것 따지기 이전에 육안으로 구분은 동탑 2번째 옥개석 위에는 복발과 노반을 합한듯 이중구조의 돌이 올려져 있다. 그리고 윗면은 대각선으로 골을 지게 엠보싱되어 있어 상륜부를 약식 연화봉우리를 올려서 밀리지 않게 하는 작용을 하고 있는데. 아래 바닥의 옥개석을 현 2층 위에 복발이 있는데 그 위에 올리라 한다면 소경이라야 그런 말이 가능하다.
◆ 탑신석 사이에 상대갑석과 하대 받침석의 두장이 끼워져 있어야 하는데 수항리사지의 탑에는 세장이 크기순으로 끼워져 있다. 탑에 이러한 걍우의 형식은 어뵤다 이를 지난 논문에서 지적한 강원대 박물관이나 박경식 교수의 리포트나 이상 3개 논문에서 이상하다고만 했지 무엇인지도 영문도 모른다.
그것은 왜냐하면 지금까지 사학자들이 사학적 연대 순으로만 서술하였지 조형론은 분야조차도 없었다. 즉 국보라는 위상속엔 어떠한 도형적인 정연한 논리도 없다. (이 부분은 필자의 글 월정사탑을 검색하면 열편이상의 글이 있습니다)
박사라면은 한눈에 이 3매의 사이돌을 바르게 규정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3매는 갑석등 고유의 명칭은 있으나 필자는 이 3매가 동시에 조식된ㄴ 점에서 각 영역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사잇돌이라 하였건만 지금도 인터넷엔 어느 공사장 반장을 한다는 사람이 이에 반기를 들고 협박식으로 웃지못할 일까지도....그 친구 지금까지 탑에 단골메뉴만 알았지 탑의 경사도인 앙각이 뭔지도 모르면서 궁상맞은 넘들이지,,,
즉 이 말은 탑에 조그만 역사적 명칭으로만 되풀이 되고 본인이 주창하는 새로운 조형론에 탑의 경사각도인 앙각을 위시해 여러부분은 무지라는 점에 탑의 발전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형론에서 학자들은 2중 기단석에 위 , 아래에 상대갑석과 하대 받침석( 여기서 부연은 기단석에 통석으로 붙어서 제외한다)이 두겹씩 끼워져야 하는 기초적 상식도 모르고 있는듯 하다, 그러면 가장 큰 사잇돌은 갑석일까 받침석일까?? 2중 가단석에서 현 3매의 사잇돌 중 가장 큰 부재는 상대 갑석으로 역순으로 크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조형론을 모르고서는 지금현재 수항리사지 탑의 조식이 오류인데 이를 해결할 수 없다.(현 수항리사지탑은 6,25때 파손되어 남은 부재만 남아있는 부재만 쌓아 올렸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니고 '70년에 어느 사람이 100만원에 팔아서 밀반출되다가 동네 주민에게 적발되어 갔다 놓은 부재들은 동네 주민에 의해 쌓아 올려졌는데 이때 탑의 양식을 못맞추어 지금까지 잘못되어 있고 학술지 3곳에서 이상하고 어렵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 학계의 현 주소이다.
또한 수항리사지에는 당간지주가 있다고 전해지며 위 논문에서는 현 수항초교 담장 아래에 있는 석물을 보고 안상이 잇어 이는 당간지주 난간석이라 한다. 이 이야기느 신종원 교수가 먼저 한듯 하다.
이 이야기에 당간지주는 당간을 세우기 위한 부속체이기에 당간에 난간석이라 하여야 옳은 것이지만 전국 약 50여개의 당간 지주가 남아잇는데 그 터들에는 한곳도 당간의 난간석이란 석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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