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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1872년 지방지도, 평창군 오면지도]

[1872년 지방지도, 평창군 오면지도]

1. 1872 지방도 平昌郡五面地圖

* 평창군은 지금의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미탄면 일대에 해당하는 비교적 작은 고을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면적이 작지만 縣이 아닌 郡으로 된 것은 穆祖 孝妃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 읍치는 평창읍 중리, 하리 일원에 있었다. 고을은 높은 산지에 위치하고 있고 평창강이 내부를 곡류한다.
* 지도는 회화적 기법을 가미하여 고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산에는 수목까지도 그려 넣었고 주변의 각 마을에는 황색의 초가집을 그려 표현하였다.
* 고을의 진산은 魯山인데 산의 정상에는 城隍祠가 자리잡고 있다. 읍치에 있는 國舅祠宇는 穆祖의 妃 孝恭王后의 부친인 千牛衛長史 李肅과 모친인 突山郡夫人 鄭氏를 제사지내던 사당이다. 읍치 동북쪽에 있는 斗滿山은 黃腸封山으로 지도상에도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읍치 앞과 후평리 강변에는 송림이 잘 가꾸어져 있는데 홍수해를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 지도의 하단 여백에는 馬池津에 있는 동굴에 대한 설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 동굴은 현재 응암굴로 불리는데 상굴과 하굴로 이루어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군수 權斗文이 이 동굴로 피난하였는데, 끝내 탄로나 잡혀가게 되자 그의 妾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자결했고 參奉 智士涵과 出身 禹應民 등은 왜적과 싸우다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2. 1872 지방도 제작경위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등 서양열강과 전투에서 이긴 대원군은 국방강화에 필요성을 인식하고 양이침범 비전측화 주화매국(서양 오랑케가 침범하는데 전쟁을 하지않고 화친을 주장하는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글을 새겨넣은 척화비를 세우면서 항전을 결의하고 서양의 침범에 적극적인 자세로 대응책을 마련하였다.

관제와 군제의 개편, 군사시설의 확충과 함께 전국의 군사시설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1871년 각 지방에 읍지 편찬을 명하고 1872년 3월에 전국 각 지방의 지도를 그려 올리게 하여 지도 제작을 지시하였다.

1872년 495장의 지방지도에는 전국 각 군, 현지방의 특징적 정보가 잘 담겨있다.

 

3.현재의 위치와 범위읍치

* 위치(衙):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중리
?郡內面(군내면):평창군 평창읍 고길리・노론리・상리・이곡리・조동리・종부리・중리・지동리・하리
?南面(남면):평창군 평창읍 대상리・대하리・도돈리・마지리・약수리・유동리・응암리・입탄리・조둔리・종부리・천동리
?東面(동면):영월군 상동읍 석항리, 정선군 신동읍 가사리・고성리・덕천리・방제리・예미리・운치리・조동리・천포리
?北面(북면):평창군 평창읍 계장리・뇌운리・다수리・여만리・용항리・원당리・임하리・주진리・하일리・향동리・후평리
?味呑面(미탄면・멧뚠면):평창군 미탄면 기화리・마하리・백운리・수청리・율치리・창리・평안리・한탄리・회동

 

4, 지도의 지명 찾아보기

(한자, 한자소리, 고을 범위(우리말이름), 현재위치)

 

◆ 郡內面(군내면)

* 衙[東軒] 아[동헌] (평)중리

* 客舍,객사 (평창읍)중리

* 南大川 남대천 (평)평창강

* 鄕校 향교 (평)하리

* 鎭山진산

* 倉[司倉] 창[사창] (평)중리

* 校洞里 교동리 향교말 (평)하리

* 邑上里읍상리

* 鍾阜里 종부리 (평)종부리

* 池洞里 지동리 못골 (평)지동리

* 鳥洞里 조동리 새골 (신)조동리

 

南面(남면)

* 藥水驛 약수역 (평)약수리

* 琚瑟押山 거슬압산 (평)대하리

* 摩池津 마지진 마지나루 (평)마지리

* 三方山 삼방산 (평)노론리

*大也川里 대야천리 대얏골・댓골 (평)대상리・대하리

*道敦里 도돈리 도루니 (평)도돈리

*麻池里 마지리 마지나루 (평)마지리

*藥水里 약수리 (평)약수리

*入呑里 입탄리 들뚜니 (평)입탄리

*泉洞里 천동리 샘골 (평)천동리

 

東面(동면)

* 東倉 동창 (신동읍)고성리

* 佳士里 가사리 (신)가사리

* 石頃里 석항리 (상)석항리

* 所洞里소동리

* 倉洞里 창동리 (신)고성리

 

北面(북면)

* 白德山 백덕산 (평)원당리

* 梨峴 이현 뱃재 (평)주진리

* 注津橋 주진교 주진다리 (평)주진리

* 餘萬里 여만리 여마니 (평)여만리

* 元堂里 원당리 (평)원당리

* 林下里 임하리 (평)임하리

* 注津里 주진리 두나루・주나루(평)주진리

* 後坪里 후평리 뒷들 (평)후평리

 

味呑面(미탄면・멧뚠면)

* 味呑峙 미탄치 멧뚠재 (미)창리

* 頭萬山 두만산 (미탄면)회동리

* 黃腸山 황장산

* 平安驛 평안역 (미)평안리

* 星摩嶺 성마령 (미)평안리

* 白雲里 백운리 (미)백운리

* 平安里 평안리 평안・역말 (미)평안리

* 會洞里 회동리 횟골 (미)회동

 

5.지도의 이해

지도는 여지도가 처음으로 나오며 기준으로 지방지도, 해동지도, 대동여지도등이 4가지 유형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는바 평창학 자료총서. 고지도편에서는 기준이되는 고지도 4점에 관해 이상과 같은 논고를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선 평창학 자료총서란 무엇인가 설명부터 드립니다.

이제, 이제 지방화시대 30년을 경과하면서, 정보화 시대로 접어들며 인터넷 문명에 힘입어 역사자료들은 방대해지며, 세분화되어 검색하고 찾아보기가 복잡해져 찾아보기가 힘든 지경에 이르렸습니다. 이제 수많은 정보들이 각 공공 역사 단체들에 의해 규명되고 있는바 이러한 평창역사들을 한 눈에 보고 이해가 쉽게 하며 또한 평창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평창 역사 전반의 문헌을 제공하는 취지로 이제 정보화시대에는 역사도 상품으로서 서비스를 제공하나는 취지이다. 평창정보화시대에 편승하여 평창의 모든 역사자료는 그 주인인 평창 스스로가 보관하고 관장해야 당연한 귀착이라 생각합니다.

 

그간 평창연구의 세미나 자료나 평창군지의 기록을 보면 많은 연구의 성과도 가지고 있으나 매년 출간되는 책에서도 오류가 증폭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하나의 역사 사실을 고증 주장함에 여타 특수적인 평창지리나 환경들의 제반 여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찰하지 못햇기 때문이다,

때문에 평창학의 문헌 자료들로서 어떠한 하나의 연구에 전체의 평창균형적이고 통섭적인 역사 고찰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뜻의 이해의 몇 가지 예를 단면적으로 든다면.

문제의 하나는 평창군은 조선시대에 5개면이었으며, 1906년에 강릉부로부터 방림, 대화, 진부. 1930년에 정선으로부터 횡계면을 이관받아 7개면으로 구성됩니다. 그러기에 이제 평창은 조선시대이전으로는 강릉부 역사에서 방림, 대화등의 역사를 유출하여 관장해야 되는 것입니다.

방림, 대화의 역사는 과거 강릉역사를 가지고 뭐 그리해야 되는냐하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이곳의 역사는 조선시대에는 강릉관아에 속했었지만 현재는 평창으로 평창의 역사로 취급됩니다.

 

지난해 출간된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책에서는 방림역을 기존의 추정위치에서 정정하여 방림삼거리라고 주장한바 방림주민들은 동 책의 발간처인 평창문화원에 찾아 이것이 오류라고 지적하였지만 딱히 딱히 방림역 위치에 대한 고증을 못하였다는 이야기에 필자는 여러 선비들이 기록한 여러 유산기에서 방림역을 유출하여 고증하였다.

또한 평창역사단체가 진부역을 고증하러 청심대가는 버스에 올랐다는 메서지에 왜 진부역을 고찰하러 청심대에 갈까 의아해서 곧바로 진부역을 고찰하여 게시하고 청심대에 내리면 읽어보시라 하였다. 이렇게 이미 인문지리 책의 오류도 진부 파악하고 있었으며 진부역 고찰을 한 시간만에 논고하였다.

 

이러한 점에 역사를 알고도 밝히지 않았던 것은 평창악 데이터 베이스를 마련하고 위의 오면지도의 예시처럼 평창고지도. 즉 평창오면과 강릉에서 이관된 방림, 대화, 진부등의 고지도가 하나로 묶여지고 잉 따르는 모든 이야기들의 제반사항을 열거하는 책, 위의 오면지도를 대원군이 국방강화를 위해 제작하라고 하는 이야기나, 우리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라고 하면 잘 알고 있지만 기실, 그 지도는 너무나 단순하다. 이 지도는 이에 따르는 해설의 지리서를 보며 지도를 보아야 하는 점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적을듯 하다. 이러한 모든 평창지리지의 인식과연구에 도움이 되는 책을 마련하고져 하는 책으로 여기에 실록 지리지의 첨부나 그 해설등으로 꾸미는 책이 한권으로 동 책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자료를 체크한다.

그 예로는 수항리 사지가 삼국유사 자장 정률조에 기록된 수다사지란 점이다. 청심대아래에 水多洞(수다골)이란 지명이 나오는 실록의 문헌등을 편저하며. 아래에 이런 역사기록을 체크하는 책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월정사를 비롯한 오대산 불교권은 자장율사의 문수보살 성지로 잘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문수보살에 대한 기록이나 자장율사의 기록등은 하나도 없다. 단 자장율사는 수다사에 거쳐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하는 수다사가 수항리 사지란 점을 확인키 위해 열 명이상의학자가 평창문화원에서 세미나를 했지만. 본인의 고지도나 고 실록 지리지에서 정확한 문헌상의 기록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발췌의 평창고 지리지와 고지도편의 책을 평창학 총람의 연구서의 하나로 하고 두번째로는 이번 조선 선비들의 금강산 유산록속에 평창기록의 발췌분이다. 이러한 문헌속에 평창은 이미 여러 건 발표한바 여기서 방림역과 진부역, 횡계역들의 고증이 가능하고, 또한 이미 짧게 기록된 우통수에 대한 14명 선비들으 기록의 전후 이야기들까지 발췌 기록과 선비들의 기록속에 환취루 시에서 인용되는 시보다 "환취루에서 김성경에게 시를 쓰다"라는 율곡 이이선생의 시가 더 비중있기에 이러한 詩의 해석까지 (환취루는 평창의 객사앞에 있는 누정) 이 해석은 지난 판관대에서 세미나 기록을 책으로 출판중인데 여기에 본인의 세미나 리포트도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선비들의 기록에 의한 평창역사 사료의 발췌책을 만든다.

 

세번째로는 아마도 평창의 시원문제를 다루는 평창고대사이다.

평창에는 구걱기 유적, 신석기 창동기 초기철기등 모든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것은 3~4만년전에 미탄면 기화리 쌍굴에 인류가 거주했다는 기록으로 이는 10여년전 연대박물관팀이 몇개울 시굴조사하고 연대 측정값까지 정확한 자료 값을 가지는 구석기 유적입니다.

그러나 이 역사는 사장되었고 필자는 연대 박물관 서고에서 이 기록문을 찾아와 일부를 게시하여서 이제 이번 읍면사에 겨우 이 기록이 오르는듯 합니다.

 

한심스러운것은 이러한 구석기 유적임에도 평창에서는 아직 표지판 하나 없다는 점이다. 일전 미탄면에서 자체적으로 관광 안내도를 그렸는데 그곳에 기화리 쌍굴 구석기 유적은 표시되엇습니까??

따라서 평창에서는 아무도 모르고 사장된 역사인바 그 중 하나의 예로 매년 통계연보는 무슨 기록만 하고 있습니까??

평창읍에서는 하리 고조선 동검과 최고(最古)의 인골에 대한 기록도 동일한 예로 필자의 게시물에만 의존 알려져 왔는데 이번 읍지에 기록되는데 대모용을 보니 완벽하진 못하였다.

그리고 신석기나 초기 철기의 후평리 역사들은 아직 사장되어 있있다.이는 이번 방림 영월 국도 공사기 많은 시굴조사를 단행한바 각 고고단체나 국도 관리청의 문서함에 있는바 찾아보기도 힘들지만 필자는 이러한 평창의 시굴 기록문 전체를 다 찾아 보관하고 있다.

 

이 점에 평창에서 세미나를 개최한 기록서까지 모두 발췌한 책으로 평창의 진정한 역사책인 것이다. 이러한 책을 편저방식으로 발간할 계획이었고 여기에 실록편은 '88년도 책으로 문화원에서 실록 발췌 책을 발간한바 실록, 일성록, 훙제전서등은 취급하지 않습니다.

 

다음 책으로는 그간 평창에 역사서들의 오류를 밝혀 사관적 견지에서 바른 정립을 하는 역사서 책을 계획합니다. 모든 역사서들이 평창군지에 수록되는바 결국 평창군지는 역사서이자 무수한 오류로 인해 만화책이 되어버린 실정입니다.

노산성에서 이만때 전투를 해서 전적비를 세운다나 봉산서재 현판에는 신사임당은 이곳 판관대에 4년 살았다 하는등 지난해에도 평창의 인문지리란 책은 필자의 점검으로는 2/3이상이 잘못된 책입니다. 문화원에서 는 군청 예산으로 정원대 세번째 책의 출간을 거부해서 예총에서 발간하는데, 무슨 넘의 한문선생이 역사책의 감수자라니.. 물론 동 책의 저자에게는 개인적으로는 고마움을 느끼고 아무런 감정은 없습니다만 동 책의 오류는 평창역사를 저해하는 수준으로 오류등이 있기에 언제라도 폐간되어야 하는 책입니다. 동 책은 각 역사들의 조명에 걸림돌이 되는 바 해당 글 논고시마다 동 책이 오류라는 점을 정확한 입증으로 하겠습니다. 지난번 방림역, 진부역 위치가 오류인점을 바르게 고증하여 보정처럼 각 단위별로 정확한 논고를 하며 오류를 바로 잡을 것입니다.

 

평창의 진산 노산의 문제에 국가성황사(국행성황사)의 문제. 여기에 대한 기록들의 오류들, 정원대의인문지리 초판본에서는 본인의 글에서 성황제때 ( 대보름 이전에 시간은 지시에 행합니다) 호랑이가 다녀간듯 하여 부정이 탓을까봐 다음에 다시 제를 지냈다는 당시의 제사장의 子 김택용씨가 막역한 친우로서 증언을 게시한 바 이를 인용하여 호랑이 론을 쓰더니 증보판에서는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주술을 쓰고 있습니다.

나의 글을 셉쳐가서 이렇게 오류질을 하는것이동 책에 여러개 있습니다. 동 책에서는 길위에 역사책만 상전으로모시는데 실상 필자의 글을 꽤나 인용하였다. 그것은 괜찬치만 바르게 논고를 하지 못하였기에 문제삼는다.

우리는 신성한 호랑이로 알지만 이도 부정이 탔다고 다시 제를 지내는데 이와는 반대인 비니이다라고 서술하는 바 이는 오류라는 이론적 이해의 글등,,

하다못해 국구사의 세미나에서 평창관아는 중학교까지로 의외로 컸다하는 엉터리론의 문제는 이경식의 국구사우 논문에서 기인하는 점으로 당 논문은 이미 상 받기 이전에 필자는 논문을 대하였고 당시 당 논문은 무엇이 문제인가 여러 문제로 인하여 논문 구성의 조건이 빗나갔으며 논문의 전개과정의 상식이 아닌 비상식으로 점철되어 이러한 관아가 컸다 하는바 평창은 일제때 중리에서 하평까지의 제방 수리공사 이전에는 아마도 현재의 땅의 반도 안되었는데 그럼 관아는 더더욱 컸다고 하여야 할 것의 잘못된 문제.. 그래도 당 논문이 평창에 득이될까하여 관여는 안했는데 이제는 관아가 컸다하는것, 또한 지난해에 장정룡의 평창임란사에서 강소사를 애첩이라 지칭하여 앞으로는 애첩이라 유행될 수도,,

이러한 여러 문제들에 사관적 바른 견지의 책을한, 두권 만들 계획으로 지난번 필자는 두번째로 평창문화원을 찾아가 평창기록을 공저로 하는 위의 세권정도의 책은 문화원쪽에서 만들어 주시길 부탁하였고 사관적 견지 정립의의 역사책은 애매하다면 자비라도 만들겠다고 하였던 바 긍정적인 답을 얻었지만 후일 예산문제로 지연되어 무산되었다.

평창인들의 의지 이전에 평창군은 평창의 역사의 기상을 나타내는 이러한 책 한권 만들 예산이 없다 하는데

기약은 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두고온 고향에대한 그간 쓰던 역사정립을 봉사정신에 기인하여 이제라도 밝아져서 아름다운 고장이 되길 기대하는 마음에서 앞으로도 늘상 같은 자세로 많은 역사를 정립할 것입니다.

 

당장 오대산사고 실록과 의궤 환수위원회가 늦게나마 발족됨을 환영합니다.

이 점에 환수위원장으로부터 환수 취지문도 받아 보았습니다. 잘 요약되어 있는데 환수는 평창인의 노력 여하에 달린 것입니다

필자는 이 점의 글을 몇년전부터 쓸까 하였는데 누가 읽고 환수운동이 벌어질까 하였는데 이제 환수운동이 조직화되어 고무적입니다.

이제 평창인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환수가 될 수 있는 이해의 글을 쓰겠습니다.

그리고, 봉평제엔이란 글에서이 이야기했듯이 이 겨울 평창의병을 약 150페이지 분량으로 요약하여 역사정립을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