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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 귀환운동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 귀환운동

 

후세백작 

 

오대산 사고(五臺山 史庫, 사적 제37호)의 오대산 사고본의  ‘조선왕조실록’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경에 일제에 의해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에 기증하는 방식으로 반출되었고,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화재로 인해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화를 면한 실록 중 27책이 1932년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 이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어졌다. 오대산사고본실록 27책은 1973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이후 일본에 남아있던 오대산본 실록 47책이 2006년에 환수(2007. 2. 26 국보 추가지정), 2011년에는 의궤도 환수되었다. 배현진 교수는 1책이 남아있는 점을 알고 다시 반환받아 환수문화재 추가 지정 1책(2019. 6. 26 국보 추가지정)되어 현재 75책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이번 환수위가 결성되고 총 74책 환수한다는 점은 오류이고 75책이다.

 

이로서 오대산사고본은 2006년 환수운동당시 원래의 제 집인 오대산사고로 귀환하지 못하였기에  아직까지도 오대산사고본은 정확한 환수가 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로 말미암아 이번에 원 소장처인 오대산으로  귀환하자는 본격적인 환수운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오대산 사고본의 실록이란??>

조선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는 경복궁내의 춘추관, 경상도 성주, 전주, 충주의 4대 사고본이 있었으나 이 모든곳은 외딴 곳이 아니라 임진왜란당시 진격로에 있었기에  전주사고본 외에는 모두 불타 없어지게 되자,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국록을 지키고자 선조는 5개 사고지를 만들었다.

 

선조실록 권 199에 의하면 각처의 사고에 실록을 분장할 것은 논의하여 남아있는 구본인 전주사고본은 강화도 마니산에, 신본 3권은 춘추관, 태백산(봉화군 춘양면)과 묘향산에 부장하고 초본(교정쇄본)은 오대산에 봉안하여 5대사고분을 확립하였으나 춘추관 실록은 이괄의 난때 불타고, 묘향산 사고본은 인조 22년(1633년) 전북 무주군 적상산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오대산사고, 태백산 사고, 적성산 사고, 정족산 사고(마니산본이 이전)의  4대 사고본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의 침략에서 조선과 일본이 하나의 나라라는 내선일체사상(內; 일본, 鮮;조선)을 심기위한 연구를 위해 조선의 역사와 기본적인 사료(의궤)등이 필요하였슬 것이란 점에서 실록이 아주 중요한 대상이 되었슬 것이다. 이러한 배경속에 당시 일제의 궁내부주사 무라우에의 건의에 의해서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사고본은 구왕궁 장서각에 옮겨져 조선총독부가 접수했다. 오대산사고본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1909년에 조사된 기록에 의하면 당시 오대산 사고에는 철종시까지의 실록 761책(권). 의궤 380책. 기타서적 2,469책 등 합 3,160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1913년 일본 학습원 대학의 만주사 전공인 사라토리 구라기치 교수는 이왕직에 조선왕조조실록을 연구자료로 요청했다(李王職이란, 1910년 망국과 함께 대한제국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됨에 따라 기존의 황실업무를 담당하던 궁내부(宮內府)를 계승하여 설치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아닌 일본의 궁내성(宮內省)에 소속된 기구였다)

"오대산 사적" 기록에 따르면, 총독부 관원및 평창군 서무주임 오께구찌와 고용원인 진부면의 조병선이 이듬해 (19114년 3월)에 월정사에 머무르며 사고와 선원보각에 있던 사적 150짐을 간평리의 다섯 동민을 동원하여 3일에 시작하여 11일까지 모두 주문진항으로 옮겨서 일본 도쿄대학으로 가져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대산 사고 실록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도쿄대에 보관중이던 실록 788책은 1923년 관동대진진에 모두다 전소되며 학자들이 빌려간 75책중 그로부터 9년후인 1932년에 27책이 경성제국대학으로 돌아왔다.이후 봉선사를 중심으로 배교수는 남아있는책 46권 환수운동을 벌여 2006년 도쿄대가 조선왕조실록 47권을 서울대에 기증 형식으로 반환하였다. 그리고 누락되었던 실록 한권을 2018년에 추가 환수받아 현 75책이 고궁박물관에 소장이 아니라 수장(收藏거둘수. 감출장)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중종, 성종, 선조, 효종연간의 실록이다.

 

 2006년 환수운동이 벌어졌슬때 서율대는 보관에 어려움이 있고 연구 목적상 오대산으로 이전이 불가 하다 하였다, 여기서 당시에도 월정사는 성보박물관에 우선 보관하며, 차후 대책을 논의할 수 있었으며 또한 연구 목적이라는데, 어는 넘이 국보를 들고를 빌려서 들고 가는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을 영인본으로 양장하여 일반에 배포하고 있다. 다만 오대산본은 교정본으로 교정기록의 연구는 있지만, 학자들의 연구는 영인본을 만들어 해야 되는 것으로 서울대의 반환불허 이유는 핑게였슬 뿐이다.

 이후 오대산본 75책은 왕실의 기록이란 점으로 고궁박물관으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오대산사고 박물관은 문화재청의 같은 박물관이 아니기에 돌려줄 수 없다 한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가 곤혹스러운 점은 그 예시를 하나 들면 60년대에 원주 단구동엔 철불 좌상이 공터에 딩굴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그것을 가져가면 신흥 크리스쳔등의 향향으로 부정탄다고 하여 고물장수도 들고가지 않았는데 춘천박물관이 수거하여 현재 춘천박물관 2층에 상설전시되는데 모든게 눈높이에 있어야 하는데 (모든 조각상의 포인트는 눈 높이를 기준으로 조각되기 때문이 그 높이에서 보아야 가장 이상적이다) 바닥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눈아래에서 보이는 푸대접을 받고있다.

이후 원주 박물관이 신설되고, 그중 한 점이라도 돌아 오지 못하고 현 원주박물관 입구에는 이미테이션(모조품)이 전시되고 있다.

 

그러면 5년전쯤 평창읍 하리에서 출토된 평양식 고조선 청동검은 당시에 춘천박물간으로 간다고 하였으며 평창에 박물관이 신설되면 같은 문화재청 국립 박물관으로 돌려줄 수 있다 하였지만 필자로서는 위의 원주 철불의 예를 볼때 이말은 이해 불가이다.

그러기에 오대산 사고본 실록을 돌려받는것은 원 소장처의 내것이라도 주장하여 돌려 받아야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시를 들면 신사에 있던 북관대첩비는 역사학자가 알고 있었으며 다시가서  확인하고 돌려달가고 하여 지난 노무현 정권때 돌려받았는데 원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의견으로 이북으로 돌려 주었다.

(정문부는 임진왜란때 함경북도 북평사로 3천여명을 거느리고 왜구 2번대 가토 기요사마(가등청장)의 부대를 무찌른 전승비로 러일전쟁당시 일본은 훔쳐갔으며,  이 기록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발췌 기록되어 있다.)

(*재미를 위해--- 지난해 여름 평창전사를 위해 연려실기술 보았습니다. 왕세자 순화군은 40여명을 죽이는 우리나라 최고의 악마이고, 도요토미는 청나라 사신 심유경에 암살 당하는 이야기들,,, 다음으로)

 

아렇게 정치의 입김을 타면 원 소장처로 찾아가고 힘없으면 변명에 당하고 있어야 하는가??

일자로서는 아래에 인용하는 이번 환수위가 필요하다면 기부체납도 용의있다고 하는 발언등은 옹졸하다는 느낌이다. 이것이 주제어가 될 수 없고 다만 그 비중은 환수실행과정에서 부대적으로 체크될 수 있는 문제삼아야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원주권을 다시 이야기하면 원주시장이 엉뚱한 것에 예산을 쓰고 신경을 쓴다고 일부 시민은 얘기하지만, 기실 원주의 역사문화는 평창만큼도 없다. 예산이야 다시 쓰면 되는것이고 한정적인 역사를 찾기에 국보 101호의 법천사지의 " 지광국사 현묘탑"의 환수를 위해 음악제 패스티발등 갖은 노력을 다해서 2019년에 법천사지로 돌아가게 결정이 되었고 앞으로 법천사지 정비가 끝나는 2~3년후 돌아가게 되면, 원주의 역사문화 자산으로 국보는 두개가 된다(지광국사의 현묘탑에 대해서는 일전 평창경찰서 탑의 예문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 문화가 하나씩 더해질때 원주의 가치관을 자아내는 징표입니다.

 

현재 평창으로는 국보가 4개 있으며 실록은 국보이기에 오대산본이 환수되면 평창군은 국보 다섯개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조선시대 기록유산의 정수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일제에 의한 수난기의 굴곡진 역사를 담고 있어 그 상징적 존재로 더욱 그 의미가 깊다. 그러기에 오대산 사고본은 한낮 수장되어 있어서는 않된다.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원자리로 돌아와 교육학적, 역사문화적으로 민족의 얼과 긍지를 함양함으로써 기상의 충만함을 기려야 할 것이다. 이에 평창인 모두가 화합하여 노력을 경주하여야 한다.

어려움은 없을것입니다. 같이 노력들 하시면 원주 지광국사탑비처럼 곧 성취 될것입니다.

감사합니다.

 

&amp;amp;amp;amp;amp;lt;오대산 사고본 환수추진위의 결정문&amp;amp;amp;amp;amp;gt;

<별첨1>

군산 동국사, ‘오대산석존정골탑묘찬앙회취지서’ 기증 2014.12.03

군산 동국사(주지 종걸 스님)는 12월3일 대웅전에서 ‘오대산석존정골탑묘찬앙회취지서’ 원본을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에게 전했다.

‘오대산석존정골탑묘찬앙회취지서’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 일본으로 강탈해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기록)

 ‘취지서’에 따르면 “1914년, 정부(총독부)의 명에 의해 동경으로 이송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조선총독 사이토 마고토(齋藤實)가 서명하기도 했다. 

‘월정사 사적기’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1914년 3월3일, 총독부 소속 관원 및 평창군 서무주임 오케구치(桶口) 그리고 고용원 조병선(趙秉璇) 등이 와서 본사(월정사)에 머무르며 사고와 선원보각에 있던 사책(史冊) 150 짐을 강릉군 주문진으로 운반하여 동경제국대학으로 직행시켰다. 그때 간평리의 다섯 동민이 동원됐는데, 3일에 시작하여 11일에 역사(役事)를 끝냈다”고 ‘사적기’는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취지서’에는 월정사 창건유래 및 중수, 적멸보궁 중수 기록이 담겨 있다. 

월정사 변화양상을 살피는 중요자료인 셈이다. 

‘취지서’에 의하면 ‘석존정골사리탑묘찬앙회’는 5대 적멸보궁 중 하나인 오대산 중대사자암에 있는 진신사리탑을 정비하기 위해 1931년 1월 결성된 단체다. 

찬앙회는 막대한 빚으로 허덕이는 월정사를 구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취지서’는 단체의 취지, 규약, 발기인, 찬성자 명단, 임원 등도 실려 있다. 

오대산석존정골탑묘찬앙회취지서’ 뒷면.

발기인은 ‘교정 박한영’을 비롯해 방한암 외 53인, 임원은 회장 중추원부의장 후작 박영효, 법주 교정 방한암, 평의원 용주사 주지 강대련 등 총 45인이다. 

찬성자는 조선총독 자작 재등실(齋藤實)과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육당 최남선,중추원 참의 남작 박기양, 평남지사 원전관(園田寬) 등 138인으로 당대 정재계는 물론 학계, 언론계, 불교계 등 사부대중이 대거 동참했다. 

 

2012년 겨울 경매에 나온 자료를 낙찰 받아 확인한 결과 월정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록임을 깨달았다. 

스님은 조길문 중앙승가대 교수 권유로 월정사 기증을 결정했다. 

종걸 스님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은 본래 있던 자리인 오대산 월정사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정념 스님은 “종걸 스님 노력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된 귀중한 유물인 ‘오대산석존정골탑묘찬앙회취지서’가 월정사로 돌아오게 되어 기쁘다”며 “‘취지서’에도 언급되어 있듯 규장각과 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있는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과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가 제자리인 오대산으로 돌아오는 귀중한 첫 걸음”이라고 감사함을 전했다​. 

 

(아래 주소는 오대산 사고를 만든 사명당 이야기입니다)

 월정사를 사랑한 유정 사명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