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산" 사설의 아리랑은 미탄 아리랑이였다.
후세백작 2020. 02. 26. 02;50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 사설의 정선아리랑은 600년전 고려말 충신들이 부른 노래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사설이 고려말 충신의 노래라는 점은 위증이라는 여러 문제를 2013년부터 여러편을 제시하였었다.
아래에서는 이에 대하여(만수산 사설의 아리랑) 정선인의 책에 글을 인용하여서 해부, 비평합니다.
(1) 진용선의 <정선아리랑/2004> 책에서 만수산 아라리의 허상에 대하여.
진용선의 <정선아리랑>책 p28. 발췌인용
거칠현동의 발상지 문제는 칠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이들이 자신들의 심정을 한시로 지어 처음 불었을라는 "발상지"에 대한 지나친 애정때문이다, 이러한 애정은 정선 아리랑의 성립과정에서 구체화되었다.
시기적으로 본다면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부터라 할 수있다.이같은 사실은 1955년 정선교육구에서 펴낸 정선아리랑 최초의 가사집인 <정선민요집>을 살펴보더라도 알 수있다.이 책은 정선아리랑을 일컬어 "본대부터 지니고 있는 순수한 가락" 이라면서 조집도 수식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아리랑으로 규정하고 있다.
(중략~)
흔히 정선아리랑하면 1절로 여기는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도 이 책에서는 "비가 올라나 눈이 올라나 억수장마 지려나 비봉산 중허리에 실안개만 돈다"라고 되어있다.1968년 정선군에서 정선아리랑이 처음나오면서 고려충신 기원설이 처음 등장하였고, " 비봉산"이 "만수산"으로 바뀌어 첫머리에 나오게 되었다.
정선아리랑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당시 시대작인 분위기에 맞춰 정선아리랑의 역사성을 뒷받침하려다보니 학술적으로 채 검증되지 않은 이론과 견해가 여과없이 통용되었고, 그 결과 발상지 논란에서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결과를 낳았다.민요는 말 그대로 백성民, 노래 謠자이다.그것은 가장 민중성을 채색된 정선아리랑을 거칠현동에 머물었던 칠현들이 처음불렀다는 사설들은 (만수산 아리랑 사설을 지명함) 넌센스에 가깝다.
여기서 저자 진용선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정선아리랑은 일개 문중의 노래가 아니라, 정선의 산이 만들어낸 소리요, 강이 만들어낸 소리요, 자연이 만들어낸 소리다.정선아리랑의 발상지는 거칠현동도 아니요 그렇다고 아우라지도 아니다. 정선 땅 사람들이 힘겹게 살아가던 터 고통과 서글픔속에 한 많은 전 하나하나가 모두 발상지가 된다.
(이상 인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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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책에서 볼때 만수산 아라리는 비봉산이 바꿔치기 개작된 것임이 명백하게 서술되어 있다.
즉,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도 이 책에서는 "비가 올라나 눈이 올라나 억수장마 지려나 비봉산 중허리에 실안개만 돈다"라고 되어있다고 한다.
김연갑의 2006년에 출간한 「아리랑의 시원을 찾아서」라는 책에서는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의 시설이 600년전의 고려말 전오륜등 죽림칠현이 임금님을 사모하는 노래라 하며 전오륜의 외삼촌 이색이 오대산에 은거하였으며, 이색의 시들을 정선아리랑의 기원이라고 대입하였다. 이것이 정설이 될까?? 이래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근본적 비평을 하며, 그럼 "만수산 "이란 가사는 어디서부터 출발하였는가를 논하겠습니다.
2) 두문동 72현의 문제와 정선아리랑의 문제가 제시에서
정선에서는 위 진용선의 글에서 설명한 바 정선에서는 <도원가곡>이란 있지도 않던 詩를 발견하였다고, 검증도 없이 1985년에 "조양회"는 호들갑스럽게 정선역 광장에 큼지막한 도원가곡비를 세웠는데, 낙동리 마을의 두문동의 7현과 그 이름이 틀리자 이 비석이 문제가 되었다.
이때, 거칠현의 죽림칠현에 대하여 의문의 글을 제시한 김연갑에게 정선역앞의 도원가곡비에 대하여 마지막 공이 던져졌다. 이미 도원가곡이란 원래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 날조한 것의 진위를 조양회는 파악하고 있었기에 김연갑은 <도원가곡>이란 없다고 하여 철거되어 소공원으로 이전되었다. 물론 허위의 도원거곡에 대한 비문은 파괴되었어야 하는데 이를 소공원으로 옮겨놓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영문도 모르는채 관람을 하고 비석의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게시하는등 이러한 입장에서 정선으로서는 먼 후일 또 하나의 엉터리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의도를 가진 해석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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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조크로 지난해 대화 서울농대에서 강사로 어느 역사 박사의 평창의 임진왜란에 대한 강연에서 노산성에 있는 평창의 임진왜란 전적비의 내용은 오류로서 단 한 사람 후세백작(필자이 닉)만 임진란 평창전사에 대하여 바른역사를 제시하며 안 속고, 그외 평창 모든사람이 속고있다고 하여 강연중에 그럼 비문이 철거되든 왜 바르게 하지 않는가 하는 문의가 있었다 한다.(물론 박사와 필자는 전혀 모르는 사이이고 필자의 인터넷 글에 의한 이야기였다)
여기서 필자는 본인을 자랑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필자의 평창역사 연구에서 이러한 점은 자랑도 아니고 새로운 역사에 수 없는 글이 있기에 자랑할 수도 없다.
이후 박사는 평창 노산성을 답사시 평창임란사의 왜곡에 대한 이야기시 역사를 가장 훼손하는 곳은 정선이라 하였다.
( 여기서 평창임란사에 노산 전적비는 평창인들의 의도적 왜곡은 아니다. '80연대에 강원일보가 출판의 "태백의 설화"에서 평창의 일부 역사가 처음으로 조명하였기에 이에 의해서 " 평창군지"에서 평창의 임란사가 조명되면서 많은 오류를 빚는 것이다. 역사학자는 강원도 전 군의 역사를 조명하면서 평창을 답사, 연구도 없이 막연하게 오류를 하고 있는바 평창의 "국구사우" 편에서는 노산의 동쪽기슭에 국구사우가 있다고 서술한 바 평창 사라들이라면 노산성은 기슭이 없는 단일 융기된 산의 모습을 잘 알고있기에 평창을 다녀가지도 않은 점이 드러난다.
한데 정원대는 지난해 펴낸 <평창의 인문지리. 증보판>의 2권 모두에서 군지(郡誌)에 기록을 인용하여 국구사우는 노산 동쪽기슭에 있다라고 서술하였다. 참으로 우스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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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역의 도원가곡비는 이러한 내용으로 철거된 후 "만수산" 아라리가 고려말 72현중 7현의 기원이 아니라 했던 김연갑은 "만수산"가사의 기원에 대한 이론적 바탕을 요구받게 되자 김연갑이 들고 나온 이론이 오대산 상원사에 칩거한 이색의 시를 <만수산 아라리>의 기원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케이스 하나를 언급하면 김삿갓(본명 김병연)은 화순에서 객사하자 그 지방 양반은 그를 조금아는듯 후손이 찾아가게 가묘를 하였다가 3년뒤에 그의 아들 익균은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10여년전에 화순에서는 김삿갓이 이곳에 6년 살았다는 종영지 문화를 기획하여 예산을 투입시 반대이론이 거세지자 그 지방의 향토사가에게 진위에 대한 마지막 공이 떨어졌다. 이때 향토사가는 이러한 이야기의 고증은 없다라고 발표하자 그간 화순에서 기획했던 계획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그 후의 일들에 대해서 향토사가가 책임질 일은 없다. 그렇듯이 김연갑도 그러한 압박보다는 차라리 두문동과 7현에 대하여 역사적 사료를 고증할 수 없다 했어야 할것이다.
「아리랑의 시원을 찾아서」책의 저자 김연갑은 두문동 72현과 정선에 두문동(고한읍 2,3리)에 7인에 대해서 역사적 증명을 하지 못하고 근자의 이야기들만 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의 큰 문제는 정선에 거칠현의 7인이 남면 낙동리에 왔었다 하는바 이에 대한 역사적 고증은 없다. 지금까지는 여기에 역사적 근거가 없어 허위로 판명됨으로 사료된다. 그러기에 정선은 죽림 7현이라는 부당성의 논지는 이미 진용선과 김연갑에 의해 제기되었는 바, 명확한 역사적 증거를 제시하여야 한다.
◀ 전오륜의 묘를 합천에서 정선 남면 낙동리로 이장하고 거칠현동이라하며 마을에 칠현비를 세웠다. 여기에 비문에 칠현의 이름은 전오륜. 김충환. 이수생.신안. 변기수. 최문환, 김위가 세겨져 있다.
▶ 최문환의 후손에서 도원가곡이 발견되었다고 그 문서를 정선으로 가지고 와사는 검증도 없이 도원가곡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칠현은 전오륜, 이색.최문환. 서견. 원천석. 구홍. 길재로 두 비문에 칠현 이름이 다르게 되어 말이 나오자 조양회는 대전에 사는 최문환의 후손이 만든 도원가곡은 위서란 점을 확인하였다.
<만수산과 두문동 72현이란?>
<화해사전>에는 72현이 기록되어 있지만, 고려말 <충렬록>에는 절신으로 42인이 수록되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50여명에서 117명 혹은 400여명<고려 숭의 열전>을 거론한다.
두문동 72현은 개경의 북쪽 고개마루에 조의와 조관을 걸어놓고 만수산으로( 현 개풍군 광덕산 기슭) 들어가 은둔하던 곳을 두문동 72현이라 불렀다. 하지만 두문동의 유래로서는 그보다 천년전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이와같은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두문동 어원은 뒷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려말충현록>에는 전오륜만 고향 정선으로 간 것으로 되어있다. ▶ 정선에 거칠현동의 비에서 칠현이 이곳에 살았다는 기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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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고려말 낙향한 사람으로는 조선왕조의 추존 4대조 목조비의 고향 평창이씨의 장손 이천기와 영원성( 치악산)에 은거한 원천석의 예가 자장 중요 인물로 볼 수 있다.
* 이천기는 장수로서 명나라에 가서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와보니 동료 장수들은 이성계 일파에 모두 죽임을 당했고 이들의 대장인 이원계는 이성계의 이종형으로 스스로 자결하였다. 중국에서 돌아온 이천기는 동료들이 모두 죽자 아들을 데리고 개풍군으로 낙향하였다. 이러자 태조 이성계는 평창이씨 제사는 지내는가 묻자 사손이 없어 제사도 벌초도 안한다고 합니다 하고 보고되자 그럼 국구사위의 사당을 짓고 일년에 3명절 제사를 영세토록 지내라고 명하여 구한말까지 제례가 이어져 왔다.
* 원천석은 태종 이방원의 스승으로 이방원은 정종의 왕이 되자 사부로 모시려 하였지만 원천석은 치악산으로 들어가 칩거하며 조선의 역사 6권을 서술하여 돌 함에 넣고 죽은뒤 묘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며 후손에 힘있는 자가 나오기전에는 파보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손자들이 시제를 지내며 힘있는자가 나오기 전에는 파 보지 말라는 유언에 무언가 큰 것으로 알고 그 자리에서 파보았다. 조선 개국의 역사였다. 이것이 소문나면 3족이 멸한다고 그 자리에서 불태우고 모두들 함구하였다. 이후 원천석은 원주 원씨의 중시조가 되었는데, 조선 개국의 당 시대에 인물로, 그것도 사관적으로는 비아를 바라보는 아 (我)편의 비아(非我)로서 역사사실을 그린바 이마도 이 역사책이 오늘날 전하면 기전체일듯하며 사마천의 <사기>를 능가하는 역사책이 되었슬 것이다.
이렇게 원천석과 이천기는 조선개국에 조선왕조와는 유대의 고리를 가진 선비들로 조선 개국에 등을 돌린 선비들인데 이천기는 72현에 들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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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절요>와 <경원사지>엔 전오륜은 서운산 (정선 남면) 에 은거했다 나오지만 서운산에는 다른 이름은 기록에 없고 두문동이나 두문산도 아닌 서운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 <두문록>이나 <부조연현지록>에는 김충안, 고천우, 변귀수 김위등이 지금의 황해도 봉천군 배록동으로가서 조선왕조가 주는 녹을 거부하고 살았다 한다.
* 신안은 평산의 황의산으로 이수생은 율리로 가서 은거하였다 한다.
* 최문한은 강릉으로 갔다라고 한다.
이렇게 진용선은 「정선아리랑」 책에서 <두문록>등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 칠현비와 도원가곡비에 나오는 칠현의 실제 행적이 의문시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의 실제 행적을 찾아보아도 이들이 두문동에서 나와 은거지를 찾기위해 이곳저곳 옮겨다니는 과정에서 정선에 잠시 머물렀다는 추측 가능하지만 현실성이 없다. 도원가곡은 몇 해 전 일개 문중위주로 포장된 것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80년대 합천댐으로 전오륜의 묘가 정선으로 이전되며, '8년대 한시절 대통령의 동생 새마을운동 본부장이 헬기로 정선전씨의 시제를 지내려 왔슬 당시 사람들은 구름떼처럼 몰려들고 하는 옛날 권문세도가 같은 이미지가 거칠현동이나 도원가곡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리고는 간과하기 어렵다 할 수 있다.
* <진용선>
진용선은 신동읍 출신자로서 젋은시절 정선아리랑을 채록한 사람으로 평창의 정원대의 이야기를 빌면, 남면지서에 근무시 진용선을 자주 보는데 가슴속 주머니에 뭔가 넣고 다니기에 경창의 직업적인 일 일수도 있지만 "그게 뭐요" 하고 물어보니 녹음기라 한다. 녹음기를 가지고 정선 모든곳을 다니며 아라리를 채록라였는데, 진용선의 이러한 노력에 의해 오늘날 정선 아리랑의 조명을 가지게 한 장본인으로서 그는 칠현이나 도원가곡에 대해서 그 이전의(거칠현동이나 도원가곡) 상황도 잘 알고 있다는 듯 이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객관화 되는 기록을 남긴다.
* <김연갑>
정선 아라리에 아리랑 박사로 통한다는 김연갑은 청원출신으로 정선아리랑에 매료되어 정선 아리랑 책을 여러권 쓰고 있는바 필자의 이해로 그는 학자는 아니다.
저자의 이러한 생각에 대해 필자로서 유감은 저자는 거칠현이나 정선교육구의 <정선아리랑> 제 이론에 대하여서는 날카로운 지적이나 문경 아리랑에 박달나무에 대해서도 질타론이 두번이나 신문에 게제되었다. 그의 이러한 연구는 학자적인 연구가 아니라 정선아라리의 향수자라고 지칭하겠다. 이러한 점은 아래 글에서 체크 합니다.
김연갑은 동책 「아리랑의 시원을 찾아서」에서 아리랑은 어원과 시원의 문제에 있어서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 문제인 만큼 소홀히 다루어서는 않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김연갑은 문경아리랑에 대하여 박달나무론의 올를 과거 두 편의 신문기사에서 상세하게 비평하였는바, 이렇게 남에게는 정확하자고 하는 김연갑은 「아리랑의 시원을 찾아서」보더 먼저의 책 「정선아리랑」에서 연규한 (전 정선부군수)에게 '눈이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가사보다 더 상한대의 아리랑은 무엇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연규한은 답이 없었다.
그럼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가사가 정선아리랑의 시원입니다 라고 글을 쓰고있다. 남은 문제가 되고 본인은 정답인가??
참으로 없는것을 물어 답을 요구한다는 자체가 특정 목적을 가진 언행이고, 만수산 노래가 600년전의 가사로 아리랑의 시원이 되겠다는고 생각하는 자체가 독설의 단정으로 그건 돈키호테적 발상이란 점이다.
2) 김연갑의 <아라리의 시원설 연구>책의 허상
김연갑의「아리랑의 시원을 찾아서」라는 책보다 2년전에 정선에서 출간된 진용선의 「정선아라리」책에서 <정선민요집>에 "비가 올라나 눈이 올라나 억수장마 지려나 비봉산 중허리에 실안개만 돈다"라는 문헌 기록이 실려있다.
그러면, 김연갑은 「아리랑의 시원을 찾아서」책 서두에서 비봉에 비문을 풀어쓴다고 하였는 바, 정선에서 문헌적 기록은 1955년에 정선교육구에서 펴낸 <정선민요집>이 최고 상한대의 기록이기에 비봉의 비문 아리랑 기록은 1955년 이후인 "77년에 정선아리랑의 조명시 기념으로 세운듯하다. 이를 풀어쓴다는데 여기엔 옛 기록이라 할 수 없기에 그럼 근자에 변형된 개산조를 풀어서 쓴들 그것은 정확한 사료가 안 된다는 점이다,
◆ 김연갑은 동 책「아리랑의 시원을 찾아서」 서문에서 3개항의 취지를 설정하고 있는데 필자는 여기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1, 아리랑이 강원도적인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정선아리랑만이 특화 불리는 그 전승기반 견고한 이유는 역사적 개입의 것으로 상정한다.
2, 정선지역에서 주장하는 정선아리랑은 여말 선초 고려 유신들에 의해 신원된 것인가 아니면 이미 있어온 노래가 유신들의 개입으로 확산된 것인가?? 두문동 72현의 문제와 정선아리랑의 문제가 제시할것이다.
3, 시원과 어원의 문제에 이색의 "수지"시 문제와 청산별곡과 관련된 문제를 살핀다라고 김연갑은 말한다.
(※ 위 3개항에 대하여 필자는 다른 견해 제시)
1) 정선아리랑만이 역사적 개입의 서사적이란 점에 대하여.
아라리 사설은 역사기록의 정선아리랑은 역사적 개입에 의해 정선아리랑은 특화되었다는데, 필자의 이해로서는 특화란 점은 독설이라 하겠다.
동 책에서 김연갑은 후렴이 본래의 가사에 첨가되었다고 하였다. 그것은 윗글에 연규한의 이야기로 미루어 이해할 수 있는 바, 그렇다면 정선아라리는 개산조임에 고형으로 특화된 점은 아니란 점이다. 그러기에 동 책에 이렇한 수식의 미세부분까지도 이해학가 곤혹스럽다. 후렴의 문제는 다음장에서 다시 논하고 이 단원에서는 아리랑의 사설에 가삿말에 역사적인 사건이 들어가는 서사적 가삿말도 있습니까?? 여기에 대하여 논고합니다.
만역에 태백산맥 영서 산간지방의 아라리에 서사적인 가사가 있었다면, 이곳 영서지방에 가장 큰 정서의 하나는 영월로 유배 온 단종애사이다. 그래서 아리랑이 서사적으로 가사가 쓰여졌다면 단종은 백말을 타고 태백산으로 올라가 神이 되었다는 설화나. 만수산으로 들어간 선비들처럼 단종의 시신을 청령포에서 건져장릉으로 가져가 죽음을 무릎쓰고 몰래 묘를 쓴 엄흥도의 충신의 이야기까지 君, 臣에대한 지방의 민초들의 가슴을 부여잡는 단종애사의 가사는 육백마지기 아리랑보다 더 많은 사설을 가졌어야 할 것인데 단 한 점의 사설도 없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아라리는 역사성을 가지는 서사적 가사는 전혀 없고 민초들의 일상에서 자아내는 서정성의 노랫말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리랑에 이러한 면의 연구는 없었는 바 이는 아리랑의 실체적인 모습을 찾아가지 못헸고 지금까지 아리랑은 선율에 의한 것으로만 해석하는 점에 편견적인 이해만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영서 산간지방인 이 지방 민초들의 君과 臣의 관계에서 임금에 대한 민초들의 심정은 단종애사의 슬픔과 비애에 대한 감정의 표현은 이 지방민들의 정서의 일부였슬텐데, 왜 한 점의 가사도 없는 것일까?? 상당히 의심스럽기도 하다.
이러한 의문에 답은 아리랑은 서사적이 아니라 서정성의 가사로 아리랑이란 일인칭 단수 본인의 이야기로 창자(唱者)가 청자(聽者)라는 듣는 사람도 가창자 본인이란 점의 독백조의 메나리조 산의 아라리에서의 근간을 가진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3장 아리랑이란 무엇인가에서 다시 분석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지금까지 고숙경(숙대), 이보현(C.D 음원 기록 보유자)은 아리랑에 대하여 선율이 아름답다는 정선 아라리의 해바라기성 예찬자로, 고숙경은 졸업논문에서 이슈적 언어로 사용하였슬 것이고, 이보형은 음원 수집가로서 아리에서 선율의 매력을 취함은 당연하겠다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모든 아라리 연구자들은 선율만을 이야기하였지 아리랑의 근본인 사설의 가삿말 의존은 무시한 기형적인 모급을 가지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접근 이해를 하기에는 아직 아리랑 연구에서 한번도 거론된 점이 없는 가설이기에 부분적인 이해의 설명으로는 할 수 없는 상태로서 이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원적으로 아리랑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기층 문학이란 점을 댈입하지만 아리랑은 선율이 아니 사설의 가사에 의존되는 노래란 점의 이해를 하여야 한다.
이러한 이론을 제시하면 기존 아리랑의 제반 사항에 역설처럼 보이지만, 기실 역설이 아니라 현재까지 아리랑의 모든 학자들은 아리랑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리랑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또한 아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의 이론적 설명은 아래 2부에서 (3)장으로 발표, 제시합니다.
3) 시원과 어원의 문제에 이색의 "수지"시 문제와 청산별곡과 관련된 문제를 살핀다
아리랑의 시원 즉 처음 아리랑의 발생, 즉 출생의 기원과 어원 즉, 아리랑의 훈(訓)의 뜻을 살핀다며 고려말 충신 이색이 오대산에 칩거하여 쓴 시를 아리랑의 기원과 연관짓고 이로서 전오륜 패거리들의 만수산 아라리가 아리랑의 기원을 이룬다 하는데 민요의 발생에 요즘 가요처럼 작곡가가 있고 작사가가 있다는 발상에서 억지춘향의 심사를 느낄 뿐이다.
우선 만수산 아라리와 이색의 수지 시의 시간대를 살펴본다면 전오륜은 고려말 고향 정선으로 갔으며, 이색은 당시에 오대산 상원서에 칩거하였다. 이색의 시가 당 시대에 노래로서 불러질만큼 시간적 축약성을 가졌다는 것은 논리부족이고, 또한 이색이 전오륜의 외삼촌으로서 동서의 사망시 정선을 다녀가지 않았냐고 추정하는데, 다녀갔다고 하더라도 인척의 장사집에서 이러한 시 한 수 전할것인가?
정선은 원천석의 詩 한수를 제영시로 삼고있는데. 원천석이 정선을 다녀갔다는 기록도 없고, 또한 그 詩는 일반적인 서정성을 나타내지 정선적인 특이 사항이 없다, 또한 시에서 묘사하는 가리왕산은 기암괴석 운운하는데 정작 가리왕산은 토산이다. 즉 원천석은 치억산에 은거하며 답사도 없이 가리왕산의 한 단어를 삽입하여 詩를 지은 것은 아닌가??
이렇듯이 이색의 수지시나 율창설등 많은 논거는 아라랑을 연구하는 과정상의 고 문헌만 뒤지고 아리랑의 전임 연구와 비교하는 천편일률적인 매러리즘에 빠지는 문제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우물속의 시소게임을 탈피하고 문하사적, 세계사적인 민요로서의 이해 연구를 가져야 한다.
보다 근본적으로 아리랑의 연구에 음악담론이나 구비문학 아시아 음악의 이해나 고대 희랍의 디오니 소스 축제에서 와디푸스로 알려진 희곡은 봄철의 동 축제의 희극에서 기원하지만 겨울철 밀을 심고 기원제에서도 노랫말을 만들어 사용하엿다. 이러한 문제는 인류사적으로 인간의 발생학적 문제는 유사한 점을 기인하여 여기서도 아라리의 공통적, 심리적 특성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기에 다반사적으로 연구가 있어야 좋겠다.
김연갑의 「아리랑 시원설」에서 아리랑의 경우 어원과 시원의 문제가 많은 이들의 궁금해 하는 문제인만큼 소홀히 다루어서는 않된다라고 말하였는데 필자는 이러한 의미는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에 더 나아가서 아리랑의 신성염곡설은 이해 할 수 있으나 김연갑의 요염할 염의 염가설이란 이해하기 곤란하다.
김연갑이 주창하는 정선 아라리가 어리랑의 시원설로 대두되는 것은 애향심의 발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는 하지만, 그럼 김연갑은 정선 교육청의 교과활동 프로그램에 600년전 조선 촉에 여말 임금님을 사모하는 불사이군이 정선으로 오면서 부른 충절의 노래라고 가르치고 있는것을 잘못된 이야기로 더 확산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기고를 하면서 어원과 시원의 문제는 소홀히 다루어서는 않 된다면서 만수산 아리랑 가사는 에색의 수지(誰識)시에 못박는 다는 점은 논리 전개에 부적격성을 가진다.
이렇게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아리랑은 생성되고 또한 그 언급하면서, 다만 하나의 說로서 주장하여야지 이색의 시에서부터 아리랑의 시원이 되었다고 못박아서는 않된다 하겠다.
이색과 관련된 설도 하나의 관점으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모든 아리랑 연구자들은 매냥 내가 옳니, 시대가 어떠하니등만 따졌지 아리랑의 의미는 무시되고 도외시되었으며 그 누구도 아리랑이 자기관점이란 기본공식을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아리랑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눈이 올라나 비가올라나"아라리에 대하여 김연갑은 <아라리의 시원설>이란 책의 발표한 바 시원설이라는 제목부터 바른 표현이 아닌 책이란 점이다.
김연갑의 <아리랑 시원설의 연구>란 책은 태백산맥 영서의 영, 평, 정의 지정학적이고 시간적 방향이 동질이란 점의 사색의 관념이란 없고 오직 편향적으로 경직되어 정선아라리가 아리랑의 고형이라하며 정선아라리만 이야기하는 바 , 그것은 아라리의 연구에 방향성을 잃고 멈추게 되며 다른 방향으로 굴절되는 것이다.
<정선아라리의 시원설> 책이라 하는데 동 책은 논지가 전혀 맞지 않고, 학술적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책이다. 만수산 아라리에 대하여 600년전 고려 충신이 부른 아라리라고 김연갑은 주장한다면 필자는 예전에 <만수산 사설의 아라리>는 평창군 미탄의 "육백마지기 고원에 올라 나물 뜯을때"의 아라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하여 정선 아리리 향수자 모든 분들은 필자의 주장이 맞지 않다면 한판의 "아라리 논쟁"을 불사 합니다.
아래에 링크된 만수산 아리리에 대하여 잘 읽어 보시고 정선 아라리 향수자들은 눈이 있고 머리가 있다면 본인과 한판 아리랑 논쟁을 합시다
논쟁이란 루카치의 미학 논쟁을 빌지 않더라도 우리 역사에는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태극논쟁, 유불논쟁, 사칠논쟁( 이이와 이황의 사단칠정론 논쟁), 초희와 백파선사의 3종선 논쟁(간화선, 의리선, 격외선등 제자들까지도 이어지는 논쟁입니다) , 심설논쟁( 화서학파의 유중교와 김평묵)등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논쟁이란 제 이론의 비평을 통하여 諸 이론의 모순을 규명하여 논리성을 가지는 새 모습의 이론으로 합리화 하는 과정으로 제 이론을 더욱 돈독히 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입니다.10여년전에 학부 연구자 김창주는 아리랑 논고를 통해 정선 아리랑이 확산에 부당성은 이미 논술되었듯이 아리랑 이론자들에겐 모순덩어리 아리랑으로 남으며서 문와한들에게만 세뇌되는, 도한 성마령의 비문같은 독설의 아리랑 이론을 만들지 마시고 보다 가치있는 연구를 통하여 제 논리에 맞는 이론으로 다가가야 함이 올치 않습니까??
"만수산" 이라는 사설의 아라리는 정선 아라리의 시원이 아니라 평창아리랑이다.
https://blog.daum.net/kkks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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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산" 사설의 아리랑은 미탄 아리랑이였다
< 1부>
(1) 진용선의 <정선아리랑/2004> 책에서 만수산 아라리의 허상에 대하여.
(2) 김연갑의 <아라리의 시원설 연구>책의 허
<2부>
(3) 아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4) "만수산" 사설의 아리랑은 미탄 아리랑이였다
2부에서 3, 4항의 이야기를 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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