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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평창지리지 총람」에 대하여

「평창지리지 총람」에 대하여

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1960년대 근대 도시하의 경제발전 속에 도시로의 이촌향도의 공간적 재편이 급하게 이루어졌으나 이주한 산업도시는 그냥 살아가는 공간이 었슬뿐, 삶의 애착이 깊게 스며든 장소는 아니었다. 또한 이후 세대는 도시가 고향인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1990년대에 지방자치제가 되면서 ‘80년대의 권위주의적 수동적 생활상에서 민주주의의 생활상으로 지방자치제의 실시는 삶터의 인식에 다른 전환점이 되었는데(지방 자치단체는 ’50년대에 이승만정권시 실시되다가 이후 중단하였지만)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자기 권역의 역사와 문화적 상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첫째, 해당 권역의 역사를 조명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군지(郡誌)의 간행이 되었고, 역사 유적에 대한 조사와 발굴 및 복원 사업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또한 자치단체의 오랜 역사성을 상징할 수 있는 장소, 풍경, 건축물, 행사를 적극적으로 개발하여 주민의 화합과 정체성 향상 및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제 지방화 시대의 30년의 새로운 흐름 이 땅에 주인은 이곳에 살고있는 우리로서 전국의 보편적 역사속에서 내 고장의 산하의 특수성 속에 역사의 방향은 결정되며, 이러한 보편률속의 특수한 환경속에서 살아온 이땅의 선인들의 역사는 평창역사로서 고유적인 정체성을 자아내기에 이러한 정체성을 밖히고 활용하는 것이 인문지리로서 이 지방 문화의 방향을 결정짓는 기초 소요로서 그 중요성을 가집니다.

그런데, 평창의 역사에서는 아직도 해결해야할 큰 과제의 하나로서는 조선시대까지의 평창군은 군내면, 남면, 북면, 동면, 미탄면 (현 평창읍, 미탄면, 신동읍의 3개면지역)의 체제로 존속된 작은 고을이었으며, 1906년에 전국적 단위의 행정개편에 의하여 강릉 도호부로부터 대화면(방림리 포함), 진부면, 봉평면을 이속받았으며, 신동읍(동면)은 정선으로 이관시켰다.

그리고 1930년에 정선으로부터 도암면이 이속받아 당시 평창군은 6개면에 대화면에서 분할된 방림면을 포함하여 7개면 체제(현 8개읍면)로 재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에 따라 대화, 진부, 봉평, 도암면의 역사는 과거의 강릉도호부 산하에 흩어져있는 역사였지만 지금은 평창의 정체성을 가지는 역사이기에 그 주인인 평창군의 역사로 재편되어서 바르게 인식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번에 출간하는 「평창의 지리지 총람」은 (출간예정) 과거 조선시대에 세종실록 지리지(동국여지승람)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등에 평창군(5개면체제)과 방림, 대화, 진부, 도암, 횡계(대관령면)은 강릉도호부로서 두개 지역체제속의 역사를 현재 평창군의 역사로서 한 권의 책으로 합본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평창역사의 지리지와 이에 따르는 고지도에서 건치연혁 속에 읍치역사 전체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으로 종합적으로 설명하여, 이를 통하여 합일된 평창 역사의 정체성을 밝혀서 지역사회단체나 지방민들의 역사의 이해와 활용에 도움이 되고져 함입니다.

지금까지 평창에서는 문화적 연구에 대화, 진부, 봉평, 도암은 강릉도호부 땅이었기에 평창역사조명에서 소홀하였던 점을 보입니다. 그 실증적 예로 2013년에 평창군은 월정사와 함께 주관하여 현 ”수항리사지“가 ”수다사“였다는 점을 밝히는 세미나를 하였다. 여러학자들이 평창예총에 모여 다섯파트로 나누어 수항리사지에 대하여 많은 역사를 조명하였지만 수다사로서는 신종원교수가 발견한 ”多“자가 새겨진 명문기와 조각편과 이곳에서 출토되어 춘천박물관에 보관된 ”테백곡 수다사“가 새겨진 청동촛대 한 점만 조명되었습니다

.이 유물들은 유동성을 가지는 유물인 반면에 필자는 유적으로 세종실록의 지리지 편에서 강릉도호부 편에서 청심대 아래 ”水多洞“이라는 문헌적 기록과 고지도 ”지승“ 등 4편에서 이곳에 ”水多“라는 지명을 찾아 게시글을 발표하였습니다.

오대산 중대는 “高山第一 月精寺라는 말처럼 오대산은 문수신앙의 성지입니다. 여기에서 수다사의 중요성은 중국에는 아미타, 보타락가등 4대 성지가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200여년전 자장에 의해 문수신앙이 오대산으로 들여옴으로 오대산권역의 50여개의 사찰 및 암자는 문수신앙의 성산으로 여겨져 옵니다만, 그 실상은 지금까지 오대산에는 자장율사의 유적이나 유물은 한 점도 없습니다.

자장에 대한 오대산권의 한가닥 역사로서는 삼국유사 ”자장 정률조편“에는 자장은 말년에 명주 수다사에 거처했다는 기록이 있는 바, 이곳 수항리사지가 수다사라는 점을 밝혀서 문화재청에 등재하여 법정명 ”수다사“로 부각시켜서 오대산 불교권이 문수신앙의 성지라는 점을 귀착할 수 있도록 현 수항리사지가 수다사지로서 자장율사를 조명 시켜야 하는 역사적 소명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 책 「평창의 인문지리 총람」의 구성 내용에서는 역사속의 지리지. 고지도의 총람과 그 이해를 넘어서 읍치 지리의 이해에 중요점으로 도로고와 그 해설을 실어서 과거의 도로와 그에 따르는 평창의 역참(驛站)과 역원취락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이야기는 방림역. 대화역, 진부역, 횡계역의 구간 거리를 한참이라고 하며, 우리는 거리를 나타내는 말로 ”한참“이라는 용어에서 한참 간다라고 할 때 그 뜻이 오랜시간 간다라고 느끼지만 실상 한참의 어원은 역과 역 사이를 표현한 말로 보통 40Km라고 하지만 실상은 역원제는 걸어서 다니는 보도를 주로삼는 행정으로 하루에 3~40십리 걸어서 가는 거리이며, 또한 우리는 마패(馬覇)란 암행어사의 표시로 말의 수를 나타낸다고 알고 있지만 실상은 마패의 말의 숫자에 따라서 관원들이 신분차이로 빌릴 수 있는 af의 수를 이야기하는 것이 마패입니다.

그러면, 방림역에서는 몇 마리 말을 보유하고 있었을까요?? 이러한 점의 평창의 지리 이해에 모든 것을 망라하겠습니다.

또한, 조선 선비들의 금강산 유람은 대부분 단발령을 넘었지만, 오백 편이 넘는 전국 유람기속에 10여명의 선비들은 관동 8경 구경후 대관령을 넘으며 평창을 지나며 기행을 남기고 있는데, 모노치란 뜻도 지금은 와전되어 있는바 이러한 기행문속에 평창 유적의 표현등을 모두 발췌하였습니다.

이러한 遊山記 속에서 조선 선비들의 우통수 기행은 13편이 남아 있으며, 또한 당시의 옛길은 진부에서 청심대를 돌아 모노치 재를 넘어 대화로 다녔습니다. 이 점에 여러 선비들의 기행문속에서도 서술되었지만, 김홍도의 관동팔경 유람에 한양에서 관동대로에 올라 제 1첩으로 청심대에서 오대산 월정사, 중대등을 그리며 평창 마지막은 7첩은 대관령 정상에서 바라보는 동해바다의 그림까지. 이 모두가 옛길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홍도는 임금 정조에게 관동팔경 구경을 갑니다 하고 아뢰자 정조는 부러운 듯 나는 갈 수 없으니 관동팔경을 그림으로 그려다 주게하여 47첩을 화폭에 담아 진상합니다. 그중 재밌는 그림은 대관령 정상의 그림으로 우리도 예전에 아흔 아홉구비 구 도로로 대관령을 넘을 때 정상에서 저 멀리 아른하게 내려다 보이는 강릉과 경포바다를 감상하였듯이, 홍도도 평생 처음으로 내려보는 동해바다에 심취하여 한폭의 그림을 남긴 것입니다. 이러한 기행 자체가 평창의 역사로 남으며 때로는 평창역사의 고증자료가 되는 점입니다.

필자로서는 이러한 한 조각의 역사이야기도 모두 찾아서 평창지리지 총람을 구성하여 앞으로 평창의 이야기 역사책으로, 또한 평창연구를 하는 모든 분들에게 쉬운 이해의 자료를 제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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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이해>

◆ 모노치재는 관동대로의 옛길이었습니다.

모노치재가 옛 관동대로의 길로 그 이해가 필요한 점은 현재 많은 사람들이 옛 역사를 서술함에 특히 규장각 관장까지 지낸 서울대 역사교수도 「신사임당 전」에서 판관대는 신사임당이 서울을 오가는데 쉬었다 가는 별서라고 표현하였고 모든 판관대 이야기들 에서 판관대는 율곡의 부친 이원수공이 과거를 보러 다니기에 쉬었다 가는 휴게공간이나 또는 별서라고 지칭하였습니다.

이 부분에서 과거제의 초시는 지방의 향시이고, 여기에 합격한 유생들이 3년에 한번 임금 앞에서 본과인 대과를 보는데 이원수공은 초시 합격도 없는데 과거를 보러 한양 다녔다는 점은 오류이지만, 필자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판관대가 별장식의 언급은 현재의 장평 인터체인지에서 2km의 가까운 거리에 있기에 쉬었다 간다고 서술하는 점은 오류이며 옛길은 청심대 돌아 고개를 넘는 첩경(지름길)로 다녔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고지도들에서는 진부에서 봉평으로 가는 길이 있는 바 왕복 백여리를 다녀야 하는데 그러면 엣 길로는 한참(역과 역사이) 의 단위에서 백여리는 2~3일 소요되는 바 이곳 판관대가 쉬엇다 가는 별서인가 하는 점에서는 자못 그 이해가 곤란합니다.

그러기에 유산기나 김홍도의 금강사군첩까지 옛 길은 모로치 고개를 넘어 다였다는 점의 기록도 중요한 평창의 역사라 하겠습니다.

◆ 역과 역사이, 한참을 가다.

조선 선비들의 금강산 유람기에 여러 기록에서는 말(馬은)은 하루 70리길 가는데 역간의 사이가 30리 는 도보행정에 걸어서 가는 길을 하루 30리로 잡았던 것이다. 이에 이정표로 오리마다 오리나무가 있어 거리를 알렸다 한다. 이러한 기준도 여름철 우기에는 하천을 건널 수 없기에 상당한 부분 산 허리로 돌아다녔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도로가 없었고 사람들은 산마루를 올라 능선을 타고 다녔습니다. 이점은 도로는 신작로를 처음으로 하여 강을 따라 발달하지만 강은 산을 돌아가기에 과거에는 산의 능선을 타고 다닌점음 몇 배정도 구간이 단축되기 때문입니다.

그 한 예로 평창읍 도돈리의 거슬갑산엔 옥녀봉 뒤로 구길이 있는데 2~3백m 더 올라 넘어가면 대상리와 판운사이의 지점으로 내려가는바 이 거리는 도돈-대상리- 대하리(옛 대야리) 거리가 3~4베 단축되는 길이다. 이러한 점이 고지도와 도로고에서 이해 하여야 할 사항입니다.

관동대로라 함은 경강로(京江露/ 서울-강릉)을 말하며 언제부터인가는 이를 울진사람들은 평해로라고 주장하고 있다(당시 관동대로의 끝은 평해는 현, 울진으로서 당시 평해로 강원도의 꼬리부분으로 있다가 경상도로 이관되었다)말하며, 지금도 횡계에서 일반 구도로를 오르면 아스팔트 바닥에 경강로로 표시되어 있다.

강원 관찰사와 관동대로

동 책에서는 거론하지 않았지만 중종때 고형산 강원관찰사는 관동대로의 강원도 길을 정비하였습니다. 고형산은 정 2품의 우찬성으로 전국적으로 알려진 인물인데. 당시 시골 노모가 편찬으시기에 관직을 벗고 고향 횡성으로 낙향하자 조정에서는 다시 3품의 강원도 관찰사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조선시대에 각 고을의 군수는 임기가 3년이지만 팔도의 관찰사는 모두는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의 권한을 병행하기에 조정에 폐단이 생길까봐 조선 내내 그 임기를 1년으로 제한하고 있어 고형산 어른은(필자의 16대 조) 일년간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며 자비를 들여 관동대로를 정비하였습니다.

이후 병자호란때 청나라 군대는 주문진 항에 내려서 도로가 좋아서 쏜살같이 한양으로 당도하여 궁에 쳐들어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중종은 대노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둔둔리(소초면)의 고형산의 묘는 봉분이 파헤쳐지는 등 수모를 당하였다. 이후 10년후쯤 관동대로의 도로로 인하여 동~서 교역량이 증가되고 국가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고 중종은 고형산에게 사방 십리의 사패지를 하사하였습니다. 여기서 관동대로에서 방림, 대화, 진부역은 강원도 보안도 길에서 가장 큰 역으로 지칭되기에 아마도 평창을 지나는 관동대로는 이때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도로를 정비하였다고 사료됩니다.

지금도 항간에 우리나라는 외국의 침략을 방지하려고 도로를 만들지 않아 서 도로가 없었다는 말은 관찰사 고형산의 도로정비 예에서 파생되는 이야기라고 사료됩니다.

◆ 마지진의 이해를 위해서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은 습곡지형으로 육지보다는 동력을 이용치 않는 수운이 발달하였으며, 조운에 있어서 역사기록에 하나로 7대 진(津)의 하나로 ”마지진“이 들어 있는 점을 보아서 남한강 물길의 가항수로는 남한강의 수계는 영월 잣밭나루까지 올라오지만 물이 조금 불면 평창과 정선까지 올라온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조운에서 평창의 조세미는 원주의 흥원창에서 경창(용산창)까지 실어 나릅니다. 흥원창에는 원주, 평창, 영월, 정선, 횡성등지의 세곡을 나르는 창고로 이때 배는 바닥이 평편한 평저선으로 쌀 200가마 싣고 나르는데 한번에 다섯척이상이 다닙니다,

남한강은 평창으 서강과 동강이 영월서 합류되어 단양을 거쳐 목계나루(충주)의 충청도 가홍창을 거쳐 흐르는데 가홍창 위의 상류지역은 여울물을 가르기 위해 바닥이 양면으로 뾰족한 소선이 다섯척씩 다니는데 평창강에는 가항수로가 가능한 시기에 다니며 최소한 쌍선 이상이 다니며 여울을 오를때에는 밑배가 밀어주고 윗빼가 끌어주며 오르는 것입니다.

◆고지도의 이해

지리지 중 고지도의 또 하나의 이야기로서 해동지도는 전국을 대상으로하는 군사용 목적으로 작성되었던 바 지도에는 사면의 고을 거리 표시가 나타나고 고을의 총 호수와 인구수가 기록되어 있으며 속오군등의 숫자가 기명되었도 또한 평창편에서는 성마령은 大路로 표기하고 강릉대도호부 편에서는 대관령은 험준하기에 가마도 겨우 오르는 中路라고 표기 하고 있습니다.

대동여지도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에 의해서 스케일이 조직적 근거로 작성되고 또한 지도의 이해는 그에 따르는 지리고에서 설명하고 있으나 평창에서 여러 학술조사에 가장 많이 이용되는 고지도는 1872년 그려진「전국지방지도, 평창군 오면지도 」입니다. 이 지도는 병인양요후 쇄국을 하는 대원군이 전국에 명하여 각 고을의 지도를 작성하라고 명하여 그려진 지도로 후편의 고지도편에서 동 지도에 현재의 동리까지도 대조하는등 지도 이해에 관한 모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만, 동 지도의 특이성은 각 고을에서 그려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당시 평창에서는 뛰어난 화공이 제작하였던 바 평창의 읍치를 중심으로 사방은 비례적으로 축소하며 球를 평면에서 그리듯 어안렌즈적 효과넓은 면적을 조명하는 지도를 작성하여 평칭읍치의 이해에 있어서는 중앙부의 노산에 읍치성황사가 그려지고 후평리와 읍치 송림과 서산백림이 우거지고 임진왜란시 평창군민이 청야를 간 역사를 가지는 응암굴도 담는 등 평창의 많은 정보를 입체적으로 담고 있는 우수한 회화식 지도 입니다.

특히 고지도에 중요한 문헌적 기록은 고지명의 한문기록의 시대적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점입니다.

필자의「평창지명 변천의 이해」라는 게시글에 보면 고지명은 한문의 소리의 音을 차용하는 이두음과 뜻(訓)을 빌어써서 그 뜻을 나타냄과 조선조에 시기에 한글이 창제되자 한문 혼용의 시대를 지나며 조선 후기에는 풍수적 사상에 기인하는 지명의 한문으로 변용되는등에 대해서 고지도에 기록된 한문의 사용의 용례를 추적해 보는 좋은 사료입니다.

 오대산은 문수신앙의 성지

이 문제의 단적인 예를 하나보면, 평창의 오대산은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모셔온 사리에 의해 확립되는 寶宮신앙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중국불교에서는 <문수신앙의 성지>인 오대산과 <보현보살의 성지>인 아미산, <관음보살의 성지>인 보타산과 락가산, <지장보살의 성지> 인 구화산의 대승불교의 4대 성산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산 전체가 성산인 곳은 오대산과 <법기반야성지>인 금강산 의 단 2곳만 있슬 뿐이다.

한국의 오대산은 중국의 오대산의 영향으로 자장에 의해서 개착된 곳이지만금강산이 성산이 되는것에는 한국 오대산의 영향으로 고려후기 원 간섭기에 성립된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한국불교 원류는 오대산이라 할 수 있다. 자장에 의한 오대산의 개착은「오대산 사적기」의「대산본기」편에 「대산오만 진산」과「제1 조사전기」에 기록을 통하여 확인된다.

오대산 중대는 통도사와 더불어 “高山第一 月精寺, 野山第一 通度寺”라는 말처럼 현재 우리가 쓰는 적멸보궁이란 말은 오대산 중대의 보궁에서 처음으로 사용되고 일반화 된 점은 오대산이 문수신앙 성지로서, 또한 보궁신앙의 원류라는 점을 알게해 준다.

오대산 산문은 이러한 문수신앙의 성지로서 또한 조선시대에는 나옹문중의 청허(서산대사)나 사명당, 한암, 탄허등 여러 스님들이 오대산 불교조를 중흥시켰으며 조선조 시대에 궁중의 불교권으로도 자리 잡았지만 정작 문수신앙의 성지로서 오대산엔 자장의 기록은 전혀 없다.

하지만 “민지”의 기록이나 삼국유사 “자장 정률조편”에서는 자장은 말년에 명주땅 수다사에 거처하였다 기록하고 있는바 현재 진부면 수항리사지는 자장의 오대산에 거처한 유일한 기록으로 밝혀야 한다. 이에대한 노력으로 10여년전 평창군과 월정사의 주관으로 평창예총에서 세미나에 5개 부분의 파트로 연구한 10여명의 학자가 모여 세미나를 개최하며 그간 밝혀진 것은 현 춘천박물관에 있는 청동촛대의 명문으로 “1188년 태백곡 수다사”라는 명문과 기와 와편에 “多“의 명문으로 이곳이 수다사였다는 점을 밝힙니다.

하지만 이 두가지 유물은 유동성이 있는 사안에 비하여 이후 필자가 밝힌 글에는 세종지리지에 수항리가 청심대 아래의 水多洞(수다 골)이란 실록속의 문헌을 찾았으며 또한 해동지도등 4개의 지도에서도 청심대 아래에 水多라고 표기된 고지도를 찾아 밝히며 수다란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중요한 기록도 동 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근거로 현 법정명의 수항리사지가 삼국유사에 전하는 자장율사의 말년의 거처지 수다사지였다는 점을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다사지는 강릉의 등명락가사라고 그곳 지방학자들의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으로 인터넷상에 모든 일반인들도 그곳이 자장율사의 수다사로 통합니다만, 수항리사지는 위치적으로 오대산 비로봉에서 정선 나전까지 이르는 해발 천 여m에 높은 산이 다섯봉이 자리잡은 수항골에 위치하지만 수항리사지는 만여평의 넓은 들판에 위치한 점은 자장이 중국에서 들어와 선덕여왕때 대국통으로 황룡사 9층탑도 창건하지만 이후 선종이 들어오며 골품의 교종들이 선종을 배척하자 서라벌에서 먼 강원도 산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 시기에 사찰들은 서라벌의 평지에 많았듯이 수항리사지도 그러한 관점으로 물이 돌아 굽는 평지의 위치터를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 ”법정명 수다사지에 대한 이해”의 논문으로 쓸 계획입니다)

 제영(題詠)이란

동국여지승람(세종 지리지)이 편찬되고 미비한 점을 알게되자 세종, 세조, 성종때까지 이를 보완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게됩니다.

이때 많은 학자들이 참여하고 첫 장엔 조선전도를 그려넣고 팔도의 첫 장마다 각 도의 지도를 작성하고 각 군현의 내용을 수록합니다.

이때 노사산의 시를 지어 「동문선」이란 시집을 성종에게 진상하자 이를 본 성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각 군현의 시를 넣으라고 명하여 각 고을의 태수를 지내며, 또는 다녀가며 선비들이 남긴 詩들을 찾아서 군, 현지지(地誌)의 건치연혁에 제영편을 마련하고 제영시로 올립니다.

이로서,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창군 제영편에는 7인의 詩가 수록됩니다.

이후 영조때의 여지도서등 관찬지나 신지지등의 사찬지에도이 7인과는 다른 선비들의 詩가 제영편에 오르며, 이번에 편찬된 “평창읍지”에는 “누정제영“이란 단어까지 유행합니다. 하지만 ”제영“이라 함은 역사가 아니라 주관적 견해이기에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 따르는 ”대동지지“에서는

수록되지 않습니다.

◆ 따라서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책에 두 편의 평창제영 시는 신동국여지승람의 원래의 제영시도 아닌만큼 그 출처를 평창신지지에 수록된 <제영>이 아니라 그 명칭은 <동헌제영>명기해야 함이 타당하건만 동 책은 저자에 대해선 사관적 견지도 갖지 못하고 역사소명의 제문제를 간파하지 못한 책이라 하겠다.

지난해 출간된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책에 오류도 만치만 그 이전에 논술방식에 문제점도, 또한 역사의 인식과 사관적 견지가 전혀 없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평안역에 역승이 20이요, 3이요 하는 논지에서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한사람의 역승이 각 역도에 역을 관리하였지만 역승은 종 9품이라 원만하지 못하여 종 6품의 찰방으로 변경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강원도 도로는 모두 보안도라하며 춘주(춘천)에 찰방이 한 명으로 보안도 전체의 관리 및 노비 9천여명을 관장하는 시스템을 가집니다.

많은 인력을 가지는데 평창은 방림, 대화, 진부, 횡계역은 각 역에 관리가 40면 역노 奴)가 20. 역비 (婢)가 20명이하등 대략 70여명씩이고 운교, 약수, 평안역은 약 50명 이상으로 500여명이 역원제에 종사하였으며 금성현의 한 역에서는 함경도길목의 단발령을 넘기 전이라 180여명의 인력을 가지고 있는등 조선시대에 역원제는 국토를 연결하는 동맥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정원대는 인문지리 책에서 진부역은 고지도에 마방이 표시되어있는 거문리를 진부역으로 조명합니다. 그래서 이점도 본인의 글에의한 진부역 고찰을 3자가 아무리 설명해도 자인하지 않는 듯 하는데, 여기서 마방은 사설 마굿간으로 개인 말들에게 먹이인 건초등이 준비되어 있는 곳으로 가령 주점등은 역원취락내에서도 사설이고 조선 선비들의 산수유람기에서도 누구네 집에서 잤다는등 원의 시설은 관급용이라서 사설 인(inn)에 투숙하였다는 표현입니다.

관리가 역에서 마팰ㄹ 보여주고 빌린 말들은 각 역에서 초료라는 여행증을 보여주고 말들에게 먹이들 먹인다한다. 그럼 개인 시설인 마방에선 초료를 보여주고 마굿간에서 말먹이를 주는게 불가능할 것인데 정원대는 마방이 있다고 진부역이라 우기는 듯 하다.

더욱 가관은 제 3자가 본인의 방림역 고찰을 정원대에게 설명하다가 역효가가 빚었는지 3자에게 본인의 논지가 맞소 아니면 정원대의 논지가 맞소 하고 물으니 정원대가 방림은 3대천이고 하는 설명에 정원대가 지목하는 방림 검문소자리가 방림역이 맞다고 한다.

지랄할 넘들,,, 3대천은 사추거리 여울(灘)과 중방림, 또 하나는 운교에서 내려와 합수되는 것으로 이들은 대천도 아니고 탄이다.

고 지리서에서 방림 대천이라 하는데 대천은 큰 강이 아니다. 하천의 종류로는 당시에 지리지에 업격히 적용한 것으로는 江, 다음으로 작은 지천을 川이라 하고 여울을 灘이라 하였다.

필자의 지명 변천에서 또 셉쳐갈까봐 설명은 안했지만 味呑의 呑자는 고 지명에서 흔히 사용하는 탄자이며 이것이 구한말 용어개정에서 미탄은 작은 여울이라는 灘자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방림 대천은 강이 아닌 작은 지천이란 점이다. 그리고 필자의 글에서는 조선 선비의 유람기 속에 방림역은 상수리나무가 장관을 이룬다 하였는데 평지에 방품림 효과를 가지는 것이고 또한 선비는 과거에 평창관아들 다녀간 듯

이곳(방림역)에서 보이는 앞산은 (무동산) 평창관아의 뒷산이라는 표현까지 인용했는데 정원대는 이러한 필자의 글을 다른 견해 입니다.

필자는 남이 어찌하던 신경쓸 이유는 없지만 필자가 다년간 밤새 평창역사를 바르게 찾아 서술하고 많은 역사를 새로히 창출하는데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책은 필자의 역사론에 이해를 상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규명함에는 각기 다른 견해를 나타낼 수 있지만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책은 그러한 문제가 아니라 오류와 오 논술로 점철되어서 본인이 밝히는 평창역사를 가리고 있다는 점이다.

◆ 필자가 이러한 평창역사의 한 단면으로서 평창, 명주의 지리지와 지도을 합본방식으로 편저자로 출간하려는 의도는 물론 지리지와 고지도는 한 고장 역사의 기초로 지형과 지물의 특이성을 가지는 점에서 인문의 역사는 그 정체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인문적 역사에 앞서서 고증해야 될 부분이며 우리는 조선시대 두 개지역이 합일된 평창군을 아직도 하나의 단원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편찬동기를 가집니다.

◆ 그것은 평창군명의 글에 고 지명인 우오, 욱오, 백오, 울오만 해석하였는데 이후 기록에는 노산(魯山)도 기명하였으며 오늘날의 군명인 평창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는가 하는 점들,,, 여기엔 평창의 향토사가 엄기종님의 증언 이야기 이외엔 아직 어떤 기록도 연유도 없기에 그에 대한 서술까지도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