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슬갑산(琚瑟岬山) 의 위치 연구
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이 장에서 고찰로는 거슬갑산은 강원도 7대명산으로 평창읍 도돈리의 오도산이 거슬갑산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증적 고찰연구로 현재의 백덕산이 원래 거슬갑산이라는 점을 제시하며, 다음으로 수정산 조명시 수정산을 평창의 진산으로 보았슬 때 백덕산 (거슬갑산 )은 이에 대한 증조산이 되는 점으로 보아야 하는 문제에 거슬갑산은 수정산의 연구에 선행되는 문제이기에 먼저 거슬갑산에 대한 고찰을 합니다.
◆ 도돈리의 거슬갑산이란?
◎ 오도산이 거슬갑산으로 불리어지는 점의 이해
현재에 통용되는 거슬갑산(琚瑟岬山) 은 평창읍 도돈리 산 46번지로 해발 540m 이다, 산 정상에는 평창군에서 세운 오도산(悟道)이란 표지판이 있는데 오도산 아랫줄에 괄호속에 작은 글자로 거슬갑산이라 기명되어 있다. 평창에서는 이러한 거슬갑산이 강원도 7대 명산이라 한다. 거슬갑산이 강원 7대 명산이라 하면서 오도산이란 표지판에 아랫줄에 副名으로 쓰여져서 괄시를 받고있다면 과연 7대 명산이었던 위상은 무엇일까? 자못 궁금하다.
◎ 오도산 (悟道山) 의 뜻은 1620년경 평창 이씨 이진흡이 입산 수도하여 도를 깨우쳤다고 하여 오도산으로 불리어지고 있다.(출처: 평창읍지)
◎ 마을 주민들은 오도산 (거슬갑산)을 거슬치 (琚瑟峙), 또는 거슬재. 거스래재로 부르기도 했으며 산 정상에는 서낭당이 있다.
이곳의 지형은 평창강이 감입곡류 하천으로 큰 수태극을 그리며 둥그런 산세의 오도산을 감아돈다. 이 땅에는 과거 대야촌이란 지명을 가진 대상리, 대하리 마을이 오도산을 뒤로하며 천변으로 길게 형성되 있다. 이곳의 오도산이 과거 강원도 7대 명산이라 알려지고 있지만 지명이란 역사적 사건의 특이성이나 연형상등 여러 요인에 의해 발생되는데 이곳에 거슬갑산의 내력은 없는 듯하여 찾아볼 수가 없다.
◆ 강원도 7대 명산이란 이야기는 조선 초「동국여지승람」의 강원편 기록에 의한 것이다. 그 내용으로는 우선 아래에서 문헌속의 거슬갑산(琚瑟岬山)에 대한 문헌적 기록으로는 2건이 있다. 이 모두 인용한다.
◎ "동국여지승람 “ 강원도 산천조 (인용 1)
명산(名山)은 치악(雉岳)이 원주 동쪽에 있고, 거슬갑산(琚瑟岬山)이【속칭 백덕산 (白德山).】원주 임내 주천현 (酒泉縣) 북쪽에 있으며, 의관령(義館嶺)이 회양부(淮陽府) 북쪽에 있고, 금강산(金剛山)이【일명 개골(皆骨), 또는 풍악(楓岳)이라 한다.】 회양 임내 장양현 (長楊縣) 동쪽에 있으며, 오대산(五臺山)이 강릉부 (江陵府) 서쪽에 있고, 팔봉산 (八峯山)이 홍천현 (洪川縣) 서쪽에 있으며, 태백산 (太伯山)이 삼척부 (三陟府 ) 서쪽에 있다.
<원문> 名山曰 雉岳 , 在 原州 東, 琚瑟岬山 在 原州 任內 酒泉縣 北, 【俗號白德山。】 義館嶺 在 淮陽府 北, 金剛山 在 淮陽 任內 長楊縣 東, 【一名皆骨 , 一名楓岳。】 五臺山 在 江陵府 西, 八峯山 在 洪川縣 西, 太伯山 在 三陟府 西 。<세종실록 76권, 세종 19년 3월 13일 계묘 2번째기사 1437년 명 정통(正統 ) 2년>
◎ 인용2
(세종 19년 (1437)년 } 예조에서 악·해·독·산천의 단묘와 신패의 제도를 상정하다. 원주 관할 안의 주천현(酒泉縣) 거슬갑산(琚瑟岬山)은 사묘가 현내의 평지에 있고, 위판에 거슬갑산지신위 (琚瑟岬山之神位)라고 썼는데, 청하건대 ,‘위 (位)’자는 삭제하고, 다시 산기슭에 땅을 가려서 단을 설치할 것.
<원문> 原州任內酒泉縣 琚瑟岬山祠廟, 在縣內平地, 位版書琚瑟岬山之神位, 請削位字, 更於山麓, 擇地設壇 。
위 인용부에 강원도 7대 명산을 보면 오도산이 거슬갑산이라 하여 여기에 나열된 7대명산 대열에 속할 수 있슬까 의문이다. 또한 그 내용으로는 "거슬갑산 (琚瑟岬山 )이【속칭 백덕산(白德山).】 원주 임내 주천현(酒泉縣) 북쪽에 있으며" 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거슬갑산(오도산)은 백덕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니 여기에 무엇인가 잘못이 있다는 느낌이고 거슬갑산은 【속칭 백덕산(白德山).】이라 함은 무슨 뜻일까? 이 점에 대해서 연구, 고찰해 보기로 합니다 .
◆ 두 곳의 거슬갑산의 비교 연구
◎ 백덕산 (속칭 거슬갑산)의 고찰
백덕산(白德山)은 1,350m로 영월과 평창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영월군 무릉도원면 산 1-1 번지이며 바로 옆의 사재산은 평창읍 원당리로 갈라진다 .
백덕산은 백두대간의 중추적인 오대산에서 서편의 지맥을 타고 계방산 - 태기산 - 백덕산 - 치악산으로 내려 흐르는 산세에 위치하며, 백덕산은 사재산, 사자산, 수정산, 구룡대산, 갈산의 1,000m의 산으로 둘러쌓인 산지로 강원도 남서부의 지붕을 이루며, 이로써 백덕산은 그 정상부에서 안흥, 사자산, 수정산의 위쪽(원당리)와 아래쪽(입탄리)등 여러 방향의 길로 갈라진다고 한다 .
우리나라의 지형은 대부분 습곡산지 지형이기에 우리민족은 산 기슭에 터전을 마련하고 살아왔기에 양주동 박사는 단군은 산 위에 살던 민족이라고 표현할 만큼 산과 접하며, 산을 숭상하고 살아왔기에 산악숭배의 진산사상(鎭山思想)을 가지고 있습니다.
◎ 고지도에서 보이는 도돈리 오도산의 거슬갑산
조선조 모든 고지도에서 분명 백덕산은 빠지지 않는다 . 그리고 평창편에서는 남부인 지도 아래쪽에 거슬갑산이 명기되어 있다. 이 지도들에 의해서 오도산을 거슬갑산으로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지도들은 18C 중엽 이후에 정상기의 지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은 1530 년에 편찬되었다 (물론 성종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첫 장에 전국지도가 있고, 각 도별 첫 장에 도별지도가 있지만 여기서는 보다 좀 더 정보가 담긴 지도들을 말함)
고지도는 전통시대에 지도로서 축적과 윤곽을 중시하거나 회화적 표현을 하는 점에서 1,900 년대 이후 근대적 측량에 의한 정확성을 가지는 지도와는 거리가 있다. 그 예로서는 모든 고지도에서 홍천의 강은 다르게 그려져서 이후 필사본이다 다른 스타일의 모든 지도에서도 판박이로 오류가 되는 등, 대동여지도와 이후에 수정본 동여도에서는 백두산 부근은 강원도의 반정도의 면적이 부풀어 있다. 그러면 이를 근거로 중국에 내 나라땅 달라고 할 수 있을까 한다. 다만 고지도들에는 역사 地誌에 좋은 정보도 가지기에 이를 활용할 수가 있다.
(도돈 옥녀봉에서 보이는 백덕산과 수정산 )
평창읍에서는 백덕산을 서산넘어 뒷산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해동지도 (부분도)에서 보듯 모든 고지도에서 거슬갑산(백덕산)은 좌측 중간이 아니라 아래로 보이는 경향이 있다.
◆ 거슬갑산 (琚瑟岬山)의 뜻은 무엇일까 ?
일견에서는 거슬갑산은 고봉에 담긴 밥 같다고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주민들의 표현일 뿐이고, 백덕산은 신라시대에 단어이다. 평창군 지명인 우오, 백오에 뜻의 해석에서 白烏는 휜 까마귀가 아니고 白자는 고어로서는 크다(大)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였다. 그 예로는 백두산, 장백산, 장백이 마을 등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기에 백덕산도 마찬가지 뜻을 가집니다.
또한, 백덕산을 속칭으로 쓴 점은 원래 거슬갑산이란 이름을 사용 중 신라 경덕왕때 평창의 우오란 이름을 백오로 바꾼것은 신라가 평창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경덕왕때는 신라 전체 지명을 어렴풋한 형용사등의 뜻을 가지는 고구려 언어를 당시 시대사적인 신라의 언어로 바꾼 것이다. 이때 거슬갑산의 치장적인 단어도 백덕산으로 단순명료하게 바뀐 듯 하며, 그러므로 위에서 지적하는 백두산 장백산등은 신라 이후에 붙여진 이름으로 간주된다.
거슬갑산의 슬(瑟)자는 거문고를 뜻하며 이러한 점은 시대적 사회유행을 반영하기에 고구려때 만든 신 악기나 조선 때에도 거문고의 슬(瑟)자를 쓰는 용어는 보편적으로 사용치 않습니다, 이 의미는 고구려 시대의 신문물로 유행하기에 지명에도 거문고 슬 자를 쓴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지명의 예로는 예맥의 예족이 북방계열 강릉은 당시에 하슬라라고 하였다. 그러기에 신라때 백덕산으로 개명하기 전에 거슬갑산으로 불리워졌다고 사료합니다 .
거슬갑산에 사전적 의미로는 거(琚)는 패옥 거자로서 패옥은 왕, 문무백관의 조복을 입을 때 좌, 우로 늘이던 장식. 슬(瑟)은 큰 거문고를 뜻함. 갑(岬)은 산허리 갑.
※ (주) 학자들의 일부 논문에서는 거슬갑산을 거슬압산이라고 쓰고 있는 바 이는 押자는 감독할 갑, 또는 누를 압자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논문에서도 한글로 압자로 쓴 예도 가끔 보이는데 , 이 점은 이해하기 곤란하다.
※ 동국여지승람 강원편에서는 산허리 갑(岬)자를 사용하였으나, 조선 말기 모든 고지도에서 거슬갑산은 押자를 쓰고 있다. 원문을 못 따르고 강원도 예맥지방에서는 押의 지명을 다수 쓰고 있기에 오기한 듯 하다. 押자는 예, 맥지방에 많이 나타나는 지명으로 嶽(큰 산악)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물론 押자는 예맥어로 백제 (삼한의 마한)이 고착된 언어로 강원지방에서는 押자를 썼던 지방이 여러지역에 보인다.
산에서는 임하쪽으로가는 길과 입탄으로, 또 사재산으로 가고 빙 둘러지는 사자산(주천 법흥사)이나 안흥길등 산마루 대(帶)가 여러 겹으로 둘러져 있으며, 거슬갑산의 사전적 풀이로 琚자는 임금의 복식에 구슬을 내려뜨리는 패옥의 형상같은 느낌이란 점이다 즉 琚자는 주름을 내려뜨린 모습으로 이해 하는 것이다.
평창 도돈리의 오도산은 구한말 쯤에 만들어진 이름인 듯하고, 그곳이 거슬갑산이었다는 전설이나 유래도 없고, 또한 거슬갑산의 의미로는 어떠한 역사적 내용이 있어서 7대 명산에 속했는지 알 수 없기에 필자로서는 다년간 찾아보는 평창 역사속에서는 그러한 기록이 표출되지 않기에 설령 어떤 내용이 있었다 하여도 큰 의미를 갖지 못하고, 위 두번째 인용부 “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산천조” 편에서 거슬갑산의 사묘가 평지에 있는데 위판을 수정하여 산 기슭에 단을 설치하라는 예조의 명은 그 기록이 있다면 당시 실록에 주천현 편에 기록될 사항이며 평창군 실록에는 그러한 기록은 없다.
여기서 단을 설치하라는 기록으로 보면 거슬갑산에는 시산제를 지내는 연원으로 보이는 바, 지금 평창읍 도돈리의 오도산 (거슬갑)에서는 이러한 시산제의 기록은 없고 동국여지승람에 최초로 기명하는 백덕산(속칭 거슬갑산)은 기우제를 지낸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백덕산과 수정산 양쪽에서 모두 기우제를 지낸다면 두 개의 체제 행정관할인 듯, 백덕산과 수정산이 각기 기우제를 지내는 모습의 기록도 구분해 볼 수 있다 .수정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기우제란 서낭제의 변형으로 기제사 식으로 지내는 제(際)이고, 수정산은 평창의 진산이란 기록에서, 진산이란 용어나 기우제도 넓게 보아서는 조선사회는 풍수적 사상이 저변에 깔려서 진산이란 용어가 실록의 지리지에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우리는 풍수라 하면 금시발복의 명당론으로 누구나 이야기도 많겠치만, 풍수는 자연속에 살고있는 인간으로서 자연을 합리화 하려는 생각을 추구하는 과정입니다.
수정산 편에서 진산이란 용어의 설명은 결국 풍수사상에 입각하는 설명으로 밖에는 없습니다. 평창의 지형과 수태극까지도 폭넓게 조명해 보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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