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창의 인문지리책 비평의 서문>
지난해 출간된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책은 평창역사 조명에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기에 이 장에서 동 책을 집중 분석합니다.
정원대의 < 평창의 인문지> 책은 평창군 예산으로 증보판까지 발행했는데 동 책은 평창 역사책이 아니라 평창역사를 상당히 왜곡하고 있어서 평창역사를 저해하고 있다. 그것은 약 4~50개 오류및 오논술로 그러고도 자칭 향토사가라고 한다. 참으로 이러고도 평창이 발전하겠습니까?? 따라서 정원대가 떠드는 것은 평창역사가 아니고 오히려 평창역사를 저해하는 픽션이이란 점이다.
정원대는 그간 <평창의 지명지>가 오류라서 도에서 군청에 하달된 공문에 지명지에 쓰인 한문의 오류를 적어 주었다는 등 하며 지명지는 법적인 문제가 있기에 폐간해야 된다는 등 몇 삼년 떠들었는데 정작 이번에 자신이 만든 책은 수많은 오류와 오논술로 정오표를 붙일 수 없는 지경인데, 지명지는 오류로 인해 폐간해야 된다고 수천 번 떠들던 사람이 자신의 오류에는 함구하고 있는바 본인은 < 평창의 인문지> 책의 오류를 정확히 수정하여 평창 역사 왜곡을 바로 잡아서 역사를 바르게 규명합니다..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 책>의 비평
동 책은 평창의 인문과 지리지의 책인 바 평창의 인문과 지리지를 다루는 책이라야 함에서 인문과 지리의 성격적 모호함을 나타내고 있다. 동 책은 평창군 예산으로 만들어진 바 예산을 던져주고도 잘 되었는지에 대한 감사나 모더링이 전혀 없었고, 잘 했다고 이번에도 평창군이 예산을 오천만원 투여하여 지명지 책을 만들겠다고들 한다.
물론 평창의 역사를 바르고 밝게 조명하면 평창 역사문화에 기여를 할 수 있는 좋은 책이 될테지만, <평창의 인문지리>에서 논술력이나 역사적 사관을 볼 때 심히 의심되는 바이다. 평창군은 정원대에게 무엇의 측정치로 이렇게 일억 천여만원의 예산을 투입하는지 모르겠다. 항간에 말로는 평창군 예산을 눈먼 돈이라 먼저 체가면 된다더니 그 말이 거짓말은 아닌듯 하다.
정원대는 <평창의 인문지리> 책을 처음 출간하고 몇 개월내에 오류가 있다고 수정 책을 만들어야 된다고 군청엘 쫒아 가더니 책을 낸지 6개월도 안되서 추경예산으로 <증보판>이라고 책을 만들었다. 그런데 수정된점도 보이지 않고 오류만 너절하다.
동책 <평창의 인문지리 증보판> 책은 평창군 예산으로 작성되었지만 평창군은 눈과 귀도 없는지 그 오류를 알지 못하고 감사나 모더링도 없다면, 이제 이러한 평창군 역사의 궤멸과 예산 낭비의 문제는 평창군민의 몫으로 돌아가서 평창군민의 눈과 귀는 동 책의 오류를 질타하고 감시하고 올바른 평창역사 유산으로서의 문제를 바르게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시민들의 눈과 귀를 열고 동 책의 폐간과 감찰, 예산이 헛쓰인 구상청구권까지도 법적 책임을 따져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동 책의 사소한 내용으로서 정원대는 평창경찰서탑에 출전편으로 김진백, 정원대의 <길위에 역사> 책을 서술하는바 길 위에 역사책에서 무슨 내용을 말함인지 그 구체적 내용은 없습니다. 김진백이는 이 책에서 17번 인용하는데 내용은 하나도 없다. 동 책에 모든 장에서 출전, 증언등의 여러 단락으로 구분하는바 출전의 내용이나 증언자는 무슨 내용을 증언하는지에는 벙어리처럼 하나도 언급이 없는 미완성 책으로 밖에 볼 수 없다.
2024, 4,11, 김진백, 정원대의 <길위에 역사> 책의 오류들
1, 한국어와 중국어는 우랄 알타이어족중 우랄어족이다-- 우리는 초교시절에 알타이어라고 배웠다.
2, 평창은 예족이나 맥족도 아니다-- 예족이나 맥족은 고조선의 구성 민족으로 고조선은 예맥구리라 하고 이러한 민족적 개념이 아니라 고조선 이후 강원도는 예족(영동)과 맥족(영서)으로 구성되먀 이는 종족적 개념의 구분이다.
3. 평창의 역원 서술에 횡계역, 진부역, 운교역, 약수역은 그 위치가 틀리며 역이란 가도에 형성되는바 논 가운데에 설정이나 또는 여기다. 저기다 하고 단정적 서술은 역사에서 할수있는 가술은 아니다.
4. 도돈의 거슬갑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한다. 이 점은 현 백덕산이 거슬갑산으로 실록에 기록에서는 주천현이 기우제를 지냈다.
이와 모든 오류는 사이트에서 기재한다,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책 증보판. 2021,3,12> 오류 비평
1,동헌
◆ 제영편
<본문> 동헌 백과사전을 백과사전을 인용하여 일반적인 관아 건물 크기가 전면 6~7칸 측면 4칸이라 하였다.
<해석> 이는 28칸으로 전면5칸 측면 4칸의 월정사 적광전 보다도 크고 경복궁만한 크기로서 관아가 경복궁보다 크다면 그것은 백과사전에 오류이다. 현재 관아가 남아있는 전국의 4곳 정도의 관아건물은 2중 7칸은 있지만 이렇게 큰 곳은 없다. 따라서 <평창의 인문지리>책에서 평창관아는 은 경복궁 보다도 더 큰 건물로 기록하고 있다.
◉ 권두문군수의 호구일록에는 관아에 동상방과 서상방의 기록이 있으며, 구한말에 기록의 하나로는 평창관아가 가로 전면 3칸 (6m) 의 기록이 있다.
◆ 인물편
제영시의 어운해와 권람의 시보다 인물사편에 기록은 백과사전적 내용을 있는 그대로 뻬껴서 동책의 본문보다도 장황하게 길다. 어운해가 강원도사 역임 후 작은 고을인 평창군에 군수로 부임함에 일련의 좌천적 과정을 서술할 수도 있지만, 동 책에서는 이러한 점의 서술도 아니고 동 책의 형식은 본문은 단 한줄씩인데 평창역사에 관련이 없는 개인의 약사가 장황하게 쓰고있는바 참으로 책의 균형에 언밸런스를 가진다.
◆ 제영시
동 책에서는 평창의 제영시로 어운해와 권람의 시를 들었지만 어운해와 권람의 시는 실록이나 읍지등에서 제영이라 하지는 않았으며 조선시대 대표적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 평창 제영편에는 7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 평창 관아 앞의 정자를 <낙락정>이라 하였다. 그리고 몇 장 뒤에서는 관아 앞의 똑같은 정자를 <여사정>이라 기록하고 있다. 황설수설하는데 여사정이 바른 기록이다.
2, 평창객사
◆ 개설란에서 본문은 평창객사의 서술이 아니라 일반 백과사전적 기록을 하고 있다. 평창의 객사는 지형적인 특수성등의 고찰이 아니다.
◆ 증언편에서는 증언자 김규남과 김채남의 이름만 실려있지만 증언자들이 무엇을 증언하였다는 내용은 없다. 책에서는 벙어리 증언을 하고 있다.
◆ 해설편에서는 객사가 현 김채남의 집으로 옛 황호현의 집으로 1930년대에 대문을 증축한 것이다라는 기록에서 객사가 근자에 개인집으로 사용되기에 개인이 정비한것도 역사인가...이 점이 지정 문화재도 아니다.
◉<평창의 인문지리> 초판본에서는 황호현으로 나오고 그 두 장 뒤에서는 황우현으로 기재되었다 황호현이 맞다.
3. 권두문
◆ 본문내용에서‘ 권송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권담이고 아버지는 장악원 주부 권유년이고 어머니는 상원 권극제의 딸이다. 권두문은 어려서 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이름이 높았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많은 서적을 수장했으며,,, (이하 생략} ◉ 궈ㅏㄴ두문은 임진왜란 당시 평창군수를 역임했는데 동 책에서는 "권두문", “권두문 평창군수와 임진왜란”1과 “평창군 임진왜란 항전사 1”편의 3개 단원으로 나누어 있는데 이는 하나의 단원으로 해야 되며 평창항전사보다 권두문의 가정사가 더 길어 배꼽이 더 크다하겠다.
◆해설편에서 때는 비가 내리고~갈비뼈가 뿌러지는 중상을 당하기도 하였다에서 동 책은 이러한 개인의 모습을 담는 역사 기행책이 아니다. 제목에서 <평창의 인문지리> 책이라 하였으면 역사의 장면만 취급해야지 이러한 내용이 역사에 들어갈 내용은 아니다.
한 권의 역사서는 일반인이 읽어서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고, 일반적으로 역사서술은 편년체, 기전체를 주로 사용하지만 한 지방의 모든 역사를 관장하기 위헤서는 항목체가 이상적이다. 따라서 권두문이 평창역사의 주체어가 아니라 평창의 임진왜란사가 주체이고 그에 따르는 항목으로 뒷편에 <권두문 평창군수와 임진왜란>와 <평창군 임진왜란 항전사 1편>에 내용이 다시 해체하여 짜임세있게 조정되어야 이해가 빠를듯 하다.
4, 용연진
◉ 여기서도 본문 용연의 뜻은 없으며, 김세필의 시 한편과 생애사만 길다 . 주제어는 용연진인데 이러한 설명도 없고 김세필의 시 한편과 백과사전에서 베낀 생애사만 길다 세종지리지나 동국 여지승람에서, 고지도에도 나타나는 용연에 기록이 있는데 전체적인 조명은 못하였다.
◉또한 중요한 것은 용연은 현재의 서강인가 동강인가 현재의 위치에 대한 설명적 서술을 이루어야 하는데 이러한 서술의 언급도 없다. 그러면 동 역사서를 보는 초보자들은 용연이 현재의 동강인지 서강인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 하나의 예를 보면 현재 평창에 많이 배포된 「호구록」은 이용하( 평창군청 군무)의 번역본이고, 평창사람이기에 지역적 위치 설명은 명확하지만, 10여년전에 영주 권두문 군수 문중의 권태하, 권영식의 호구록「번역본」에서는 응암굴이 동강으로 번역되고 있다.
5, 국구사우
◆ 개설에서
◉국구는 왕의 장인이고 사우는 신주를 모시는 곳이라 서술하였는바 이는 국구와 사우에 대한 사전적 용어 풀이이지 평창의 국구사우 개설이 아니다. 개설이란 평창의 추존 목조비 효공왕후의 부친으로 목조의 국구에 대한 사우를 말하는바 이러한 설명은 없다. 따라서 초보자들은 이 글로이 무엇인가 이해에 어려움이 많다 하겠다. 동 책의 대부분의 단원들은 모두 이러하듯 제 논술에 문제를 가지고 있다.
◆p38페이지에 1872년 오면지도를 한 부분만 오려서 인용한 바, 이 오려진 지도 자체가 오면지도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지도는 평창군 지도(부분 발췌도)라는 태그를 달아야 한다. 아직 책의 기술 방식의 태크니컬의 부족함을 보이고 있다.
◆ 해설편에서
◉(인용) 국구사우는 평창읍 중리 노산성 동쪽기슭에(오면지도 참조) 위치하였으며 일제 강점기때 사라졌다.라는 서술에 노산성은 현 극락사 부근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동쪽에는 기슭이 없다. 정원대는 평창에 살면서 눈으로 보면서도 왜 이러한 기슭이란 표현을 썼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이 표현은 원본은 ‘70년대 말 김영기란 학자가 강원도 전 郡의 역사를 조명하여 「태백의 설화 4」평창군편. (강원출판사 출간)로 “국구사우는 노산 동쪽 기슭에 있다”고 서술하여 편찬에서 춘천학자가 강원도 전 군의 역사를 쓰기에 평창에 답사도 없이 문헌 몇 점을 인용하여 각색한 역사서로 이문장이 2003년판 평창군지에서 "국구사우"는 노산성 동쪽기슭에 있다라고 서술되었으며, 2009년 김진백의 「 길위의 역사책」에 그대로 카피되어 실었고 이를 정원대는 「평창의 인문지리」에서 카피하여 실었다. 똑같은 역사를 반복하였는데 여기에 문장적 오류도 개속 된 점을 볼 수있다.
◆ (본문 인용) 극구사우는 과거 제사를 지내던곳(고제) 그리고 군사(郡詞재) 옆에 짓도록 했으며 평창군 오면지도에는 국구사우는 객사및 군사 옆 동쪽에 있으니 현재 그 자리에 있는 건물은 극락사와 요사채 뿐이다. 4칸 반의 문과 묘가 있던 곳이라 더 이상의 추가자료가 없다면 현재까지의 기존 자료와 가장 일치하는 곳이다. 2008년 길위의 역사책에서 요사채 뒤의 땅이란 주장을 철회하고 가능성 있는 위치를 극락사 터라고 적는다.
◉ 국구사우가 그곳에 있었다는 지정을 하려면 군사옆 동쪽에 있다는 문헌적 고증은 없는데 어디에 기인한 것인가 정확한 출처나 사료자체가 없다, 이는 개인적인 주장일뿐인데 이러한 주장을 하기에는 문헌적, 또는 유물이나 상황적 가능성이라도 제시하지 않고 여기. 저기. 현재까지 세곳을 옮겨 다니며 국구사우터라 주장하는데 이에 정확한 논지가 없다.
◉ 더 이상의 추가자료가 없다면 현재까지의 기존자료와 가장 일치하는 곳이다에서 현재 기존 자료는 여러가지로 만아서 무엇이고 무엇과 일치하는가?? 혼자 횡설수설한 느낌이다. 여러곳의 예시에 대한 상대론도 없이 혼자만 돈키호테식 떠벌이 이고 남들의 추정치는 전혀 모르는듯하다.
기존 자료라 하면 여기다. 저기다가 아닌 논리성을 가진 논문으로 2018년에 이경식의 “국구사우 당위성”의 논문이 있다. 필자의 위치터 주장인 평창중학교 운동장의 지번에 “사사지”라는 문헌적 기록이 있다. 이 기록자료는 이미 그 위치터를 추정하고 있는데 현재까지의 기존자료와 일치하는곳이라 한다면 참 웃기는 글이 된다.
◆ 또한 이 돌은 극락사 초석돌로 볼 것인지 극락사 재건 이전에 있던 초석을 활용했는지 알 수 없다 라는 서술에서 극락사 재건시에 타 건물 석부재를 유입하여 초석으로 사용하였다는 정확한 지정의 단서가 없어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되는 말이다.
◆ 이러한 석물은 <평창의 인문지리> 초판본에서는 면상이라 하였다. 이것은 본인은 그 석물안에 둥그런 모양의 조각을 안상(眼像)이라 발표하였던바 안상을 만상으로 오기술하였다. 추가본 책에서는 이 지적에 안상이 아니라 극구사우 초석으로 쓰고 있다. 이렇게 역사의 기술에서는 초석이 아닌것을 초석이라 논한다면 문양의 양식의 역사의 의미는 사라집니다. 진짜 황당한 사람이다 .
(동 사진은 필자의 사진임)
동 책에 P40 페이지의 사진 두 장의 보이는 “ㄴ”자형 가공석의 석재를 국구사우의 주춧돌로 추정하고 있다.
◉ 이 석부재는 두개가 한쌍인데 미완성형으로 석공은 초보자고 정(釘) 또한 미약한 쇠로하여 제대로 조각이 않되었다.이러한 문양이 있는 석부재가 초석은 아니란 점이고, 이 석물은 창의적이 아니라 어디엔가 무엇을 보고 흉내내 깍았슬 것이란 점에 필자는 이 석물이 현재는 없는 석물이기에 무엇인가 찾아보기에 2년후에 아마도 현관 입구 개단 한쌍의 양측 마구리 대로서‘노니“라는 석물을 세련되지 않게 깍다가 치운듯 보인다고 논고하였습니다. 하지만 국내에 어떠한 건축물에도 이 양식의 부재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6, 노암석탑
◆출전편에서 조선고적도보중 석탑명에 평창동북오중석탑으로 기록되어 있다. 증언편에서는 박주봉은 동탑에 무슨 증언을 하였는가 내용도 없다.
◆ 위치에서는 중리 32번지에 노암석탑이라 하였다. 그리고 탑의 답사는 2차에 걸쳐 경찰서 화단에 답사하였다.박희도의 증언에 67년에 일신중학에서 5층탑을 보았다 했는데 이후 경찰서 신청사에 이전되기까지 4층의 조합의 탑이었다. 노암석탑이 평창장 여관에서의 탑도 아니고 평창경찰서 탑이 아니다. 정원대의 단순생각이다.
◆ 분명한 것은 평창 동북오중석탑의 기록은 본인의 기록이외에는 없다. 고적도보는 15권으로 중고 책도 100여만원할 당시에 필자는 15권에 6천매 사진속에 순서도 없는데 그 사진들중에 동북오중석탑, 서남오중석탑(유동리 탑) 과 월정사 탑등을 찾아 스캔을 받아 게시하였다.(지난 해부터는 국가 자료에 pdf파일로 열람할 수 있다) 그리고 정원대는 고적도보며 동북오층 석탑을 어디서 알았는가?? 박주봉의 증언은 내용이 무엇인지 실체도 없는것이다.
필자는 이를 주장하자는 바가 아니라 오층으로 쓰길래 오중석탑으로 기록되었다 하니 그건 조선 문화 말살정책이라 하다. 그래서 한일 합방당시엔 일본넘들은 조선이 일본땅이 되었다고 생각했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25년 기점으로 민족문화를 말살하였다고 하였으며, 그래도 향토사학자라 떠들것인가 되 물었다. 그랬더닌 이제는 오중석탑에 ”중“자는 일본에서는 탑신석이 없는 옥개석만의 탑을 ”중“자를 쓴다고 궤변을 한다.
일본은 탑의 문화가 없고 화산재에 의한 3천미터 산이 30여개 있는 목재에 의한 불상이 발달하였다. 참으로 스스로 향토사학자라며 알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떠든다.
후세백작의 글에 평창역사에 최초로 조명하며 이에 설명도 다 있다.
이 증언은 5층탑이 4층탑이라하는 말 자체에 위증이 된다. 그리고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5층 탑을 보았다 했다. 이 증언에는 하나가 아니라 다른 탑이란 증언이 된다.
정원대는 아무 증언이나 맞지도 않은 증언도 싣는 점은 이렇게 노력하고 있소 하는 이야기의 자랑외엔 의미가 없다. 그 실증의 하나로 초판본 책에서 국구사우편엔 그 500m앞 마을에 느릎나무도 증언에 수록하였다. 누가 보아도 관련이 없는 마을 건너있는 나무가 아무 관련이 없는데도 증언이라고 올린 점이 자기자랑 방식이란 점이다.
◉ 가나안 학교의 석탑은 경찰서 탑에 아무 연관도 없는데도 또 증언으로 올렸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대단한 향토사가러고 느낄 것이다. 그 이전에 박희도 증언에서도 경찰서탑은 아니란 증언을 가지는데 왜 평창경찰서탑에 결부하는가??
참으로 정원대는 돈키호테다.
◆주장이란 함부러 독단이 아니라 고증의 과정을 분석적으로 서술하여 타당성을 가져 타인의 비평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때 역사적 사료가 되는 것이지 혼자 독단으로 아무리 주장하여도 지금의 이 위치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곳이다.
평창경찰서 탑과 가나안 농군학교의 탑과 노암석탑은 별개의 탑입니다.
◆ (부록 2) 아래아 언더라인의 링크는 평창경찰서탑에 대하여 필자가 밝히는 글입니다.
7, 평창관아 호적고
◆ 문장 내용중에 비석이 있었다 하는데 관아 호적고는 비석을 세우는가 하는 점에 전국 어디에도 그 예를 제시하라. 또한 일부에서는 이곳을 형옥이라고도 하는데 오면지도에 있다고 바로 이곳이라고 지정하는것은 잘못이다.
오면 지도는 스케일의 좌표로 그린것이 아니기에 지도에 이러한 내용이 있다고만 확인해야하며 이곳이 호적고였다는 정확한 증거는 아직 없다. 형옥은 관아 내에 있어야 한다.
8. 권두문 평창군수와 임진왜란
◆ 문헌자료- 호구록. 남천일기의 두개로 자료라 하였는데 남천문집이 상위의 문집으로 그 속에 호구록이 있다. 남천일기라 함은 호구록의 별칭으로 사용할 수는 있어도 이러한 문헌은 없다.
◆ 내용에서는 임진년 3월 평창군수로 부임하고 그해 4월 왜란을 당하다라고 기록한 바 4월에 평창난을 당한것이 아니기에 부정확한 서술을 하고 있다. 여기서는 평창의 임진란 시기와 호구록에서 기록한 날짜등의 전체 윤곽을 그려야 한다.
◆ 이동경로 (탈출경로)라 하는서술에서 임진왜란의 전 과정이 포괄적으로 그려져애 정상일텐데 임진란의 이야기는 없고 (뒤의 항쟁사 편에서 나온다) 탈출경로만 서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더 웃긴다.
내용애서는 무슨말인지 이해하기 힘들며 이러한 서술은 자기 노트 정리방식이지 책자에 기록함으로는 일반적 이해가 부적확하다.
◆ 사오질은 노릿재를 말한다 하는데 호구록의 문장상엔 위배되며 필자는 인터넷상에 이 부분의 설명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기에 검색바람.
◆ <초가삼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앞장에서 어운해나 권람의 생애사에 대한 각주는 반장을 넘게 주워 쓰면서 이 문장 이후이 평창역사는 자신의 노트필기처럼 요약되어 이해가 곤란하다.
9. 형승과 정자
◆ 증언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에 선조 1580년 4월 15일에 선비 지대명등이 건립하였다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무엇을 건립하였는지 주어가 없다. 그러면 상위의 글 문헌자료나 위치에서도 언급이 없다.
◆ 또한 선조 1580년은 없다. 선조 몇 년(1,580으로 쓰던가 1,580년(선조시대)로 써야 한다.
정원대는 평창문학 부회장을 10년 연임하면서 이렇게 논술이 엉망이다.
10. 약수역 정자
약수역 정자는 역사유적이라기엔 미약하며 약수역을 조명할때 동반되는 기록일진데 약수역은 조선 말기엔 보안도 길로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지 세종지리지나 신동국여지승람 지리지에 기록이 있는바 여기서는 역사로서 우선 약수역이 조명되고 약수역 정자의 특이사항이 있다면 항목으로 조명하든가 아니면 누정편에서 조명해야지 이러한 점까지 평창의 역사로 들고 나올때에는 형평에 맞는 역사 전체를 균형있게 조명함에 많은 문제를 가지게 된다.
11. 노산 성황사
◆축문
< 평창의 인문지리 책 인용>
<마을 지켜주시고 질병악귀 몰아내어 무병장수 비나이다. 성 아리 백성들의 만가지 소원을 비오니 우리의 정성 받아 주시옵고 우리의 뜻모아 소지 올리오니 올 한해도 태평하고 무탈 비나이다.>
++++++++++++++
이러한 위 예의 축문은 일반 동제의 마을 서낭제에서 가능한 축문이지 노산성황사는 국사(국행) 성황사로 전국 군, 현에 설치하여 고을 태수는 君(임금)을 대신하여 국가 기원제를 드리는바 태수를 대신하여 제사장이 둔전을 가지고 경비를 충당하여 郡의 안녕을 위해서 유교국가인 제를 올리며 ”국태민안“의 제를 드려 기원하던 곳이다.
제례법은 삼단 일묘제로 일묘는 석전대제, 삼단은 여제단, 사직단, 국사성황사로 모두 기제사를 지낸다. 기제사란 조상의 기리에 제상를 지내는 것으로 신성하게 지내지 악귀몰아내고 무병장수 비나이다라고 소리하며 조상제사 지내는 사람 있는가? 이러한 책을 만들고 스스로는 평창제일의 향토사학자라고 지찬한다.
평창의 국구사우 세미나 리포트에서도 국문과 교수인 장정룡은 중리 서낭제시에 농악대가 장군당(국사성황사)에 올라 농악 한마당의 접신을 했다고 이만년의 증언을 기록함에 현대에 와서 국사성황사에 올라 농악 한마당 할 수야 있지만 이것을 접신이라 함에는 상당히 거리감이 있는듯 하다.
우선 아래에서 마을의 동제와 국가성황제의 뜻을 이해한다.
◆ 위 예의 축문은 일반 동제의 마을 서낭제에서 가능한 축문이지 노산성황사는 국사(국행) 성황사로 전국 군, 현에 설치하여 고을 태수는 君(임금)을 대신하여 국가 기원제를 드리는바 태수를 대신하여 제사장이 둔전을 가지고 경비를 충당하여 郡의 안녕을 위해서 유교국가인 조선이 유교적 방식으로 제를 올리며 ”국태민안“의 제를 드려 기원하던 곳이다.
위 서술이 국사성황사의 개념에는 타당치 않으나 현재 국내 학계에서 조차 이러한 국사성황사의 개념은 정확하게 취급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평창의 국구사우 세미나 리포트에서도 국문과 교수인 장정룡은 중리 서낭제시에 농악대가 장군당(국사성황사)에 올라 농악 한마당의 접신을 했다고 이만년의 증언을 기록함에 현대에 와서 국사성황사에 올라 농악 한마당 할 수야 있지만 이것을 접신이라 함에는 상당히 거리감이 있는듯 하다.
우선 아래에서 마을의 동제와 국가성황제의 뜻을 이해한다.
◆ 노산성아래 잿배기(잣백이)란 지명이있다. 여기서 잣이란 순수 우리말로서 城에 대한 신라의 고어이다. 따라서 잣배기란 마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단어로 성 뒤편에 존재하며 평창만의 특수지명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일반적 지명이다.
(부록3) 평창의 국사성황사 이해
12. 평창군 임진왜란 항전사 1
◆ 호구록과 응암지 8월 7일 기록에서. 왜적이 대관령을 넘어 뱃재로 들어오고 한 떼는 미탄으로 쳐들어 왔다라고 서술하였다.
이 문장에서 왜적이 대관령을 넘었다는 기록은 어디에 있는가?? 단연 역사에서 왜구는 대관령을 넘지 못했다. 왜적 4번대 모리야스나리 부대는 강릉으로 남하하자 강릉 부사는 잠적하고 민중들은 삼척 두타산으로 피난하였다
왜구는 삼척 두타산에서 삼척 부대와 강릉 피난민 지역 두 곳 모두 격파하고 울진으로 남하시 본국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4번대장 모리길성에게 강원감사 자리를 명하여 남하 부대중에 2개 부대가 백봉령을 넘어 정선군수 정사읍은 넙죽 항복하고 평창군수 권두문은 군만을 데리고 항전하다 포로가 된다. 그리고 당시 영월 군수는 기록은 없는데 이하 기록들을 보면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르는 중 군수부재로 감원감사 신점(아니면 유영길)은 권두문 평창군수에게 영월군 행정을 위임하여 평창과 겸행하였다.
모리부대가 영원산성을 치고 원주 감영을 접수후 3일내로 곡식을 구하여 황선까지 다녀왔고 그 이후에 강릉이 곡창지라 강릉으로 진출하여고 문제를 넘어 방림으로 들어왔다 이때 강릉부사 이원준은 잠적에서 나타나 군사를 끌고 진부(당시 강릉부 관할지)에 넘어와 대항하여 모리부대는 강릉을 재 침공 못하고 원주로 돌아갔고 이후 모리부대는 공략을 받을까 원주진영에서 6개월 머물다 서울로 빠져 나갔다.
이러한 기록에서 혹 방림에 왜적 출현이란 이야기는 나오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뱃제를 넘어 평창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다.
평창은 후평 중리, 하평등지에 넓은 논을 볼 수 있지만 이들은 1920년대 제방공사로 만들은 논으로 제방공사 이전에는 평야지대가 아니기에 소출이 천수답등으로 미비했슬 것인데 방림에서 이러한 궁휼한 평창으로 넘을 필요도 넘을 필요도 없는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 8/7일 권군수 일행은 정동에서 배를 타고 매화굴로 들어간다라고 기록은 오류이다.
권두문의 호구록에서는 강녀와 고언영등 4~5명을 배로 먼저 들게 하였다. 그리고 권군수는 품관등과 평창시내 군만 모두를 데리고 굴로 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군민모두를 데리고 城이나 진지등으로 피난가는 것을 청야(淸野)라 한다. 권군수는 군민모두를 데리고 청야를 하였다
여기서 권군수의 子 권주의 평창일기 기록에서는 강녀는 그날밤 응암굴 절벽넘어 혜정스님의 암자에서 하루자고 다음날 굴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장지리를 잘 아는 일행이 있었는지 정동(현 천동)에서 내려 중도마치까지 2~3km 걸어서 500정도 구릉을 내려가서 혜정스님의 암자에 당도한 것으로 사료된다.
즉, 권군수는 강녀일행을 먼저 배로 보냈으며, 권 군수일행은 걸어서 갔다.
그러기에 동책에서 정원대는 권군수가 정동에서 배로 응암굴로 갔다고 하는 서술은 왜곡하는 것이다.
아마도 평창군민 백여명과 관군들도 중도마치에서 절골(이치골은 불명확함)로 내려와 하험굴로 들어갔슬 듯 하다
청야전법이란 적의 침입에 모든 물자를 파괴하고 피난가는 것으로 6,25때 전국 사찰 소각령에 의해 월정사, 오대산 사고가 소각된것도 그 예이다)
◆ 또한 이 부분 서술에서 초판본 인문지리책에서는 ”정도“라 하여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증보판에서는 ”정동에서 배를 타고 응암굴로 들어간다“라고 정도를 정동(천동)으로 수정하였다.
평창의 지리를 잘 아시는분들은 관연 천동에서 배를 타고 몇 백미터 여울을 내려가 정동굴로 가겠습니까 그보다는 응암(매화)에서 응암굴로 건너 가야 정상일듯 합니다.
◆ 임진왜란과 평창은 모리길성 휘하 2,000명과 윤동우병 휘하 병력 500명이 처 들어왔다고 하는 점은 유재춘 교수의 견해를 인용한 것인데 이토 스케다카(유동우병)은 철원지역으로 들어 갔으며 4번대 지대장수들은 500명 단위로 서술된 부대는 없다.
(부록4) 平昌의 鎭山, 魯山과 魯山城에 대하여 (1부)
13, 평창군의 독립운동 항쟁사 2
◆ 들어가는 말(인용부)
1) 18894년 10월 동학농민군과 민보군의 봉평 사리평 11월 3일 평창읍 후평리의 전투를 기술하였다
2) 1905년 원용팔 의진 참모종사 추성구등의 항일운동을 기술하였다.
◆ 1919년 독립만세 항쟁사(인용부)
이 항목에서 1919년 독립만세라 하지는 않고 일반적으로 독립운동이라 지지칭한다. 이 항목 (독립운동 항쟁사)단원에서는 1, 결의 2, 피고자 명단 3, 재판 판결, 4, 추서의 목차로 구성하고 있는바 가장 중요한 부분인 전개방향의 중요한 내용은 누락되어있다,
◆평창군 독립항쟁사 2에서는 참으로 이상한 조명을 하고 있다.
들어가는 말 1)에서는 동학운동이 끝나고 북접교주 최시형이 영월 직동으로 잠적하여 강원 남부, 충청, 경상도권으 동학도들이 이 고장들의 탑관오리들을 숙청하고 강릉으로 쳐들어가는 과정에 민보군의 대항으로 일어난 동학 2차 항쟁이다.
또한 2)에서 원용팔 의진은 을미(을사)의병의 하나로 이 당시 을미의병에는 많은 의병부대들이 평창, 주천, 영월등지에 서로 교차되며 항일운동을 전개시 원용팔 의진은 주천, 영월 ,정선을 거처 봉평에 들어올때의 이야기로 원용팔 의병은 을미의병의 일부이다.
을미의병은 유중교 사망에따라 방림에있던 의암 유인석 부대는 수안보로 이동시 영월에서 위병장으로 추대되고 이때부터 을미의병은 여러 의진에 의해 전개되며 평창지역도 주무대였다.
◆ 서론으로는 들어가는 말에 1) 동학운동의후평리와 사리평 전투를 이야기 하였고 2) 원용팔 의진의 참모종사 추성구 의병을 조명하였다
그러면 본론엔 이러한 내용의 연장선이 아닌 전혀 다른 ”1919년 독립운동 항쟁사“를 이야기 하고 있다.
더욱 웃기는 점은 3,1운동은 항쟁이라 표현하지 않고 독립운동사라고 규정하고 잇는 점도 모르고 즉흥적 판단을 하고 있다.
14. 동학농민군 전적지 고찰 3
이 장에서는 봉평 사리평 전투와 평창 후평리의 전투를 담고 있으나 이 단원들은 하나의 장으로 구성하는 것보다 평창의 독립운동 항쟁사 주제에 맞기에 그 장에서 병목체로 기술되었어야 한다.
즉 윗장의 <평창군의 독립운동 항쟁사 2>에서 들어가는 말 1)에서 대하여 본문에서 설명했어야 한다.
15, 동비토론(東匪討論)
동비토론이란 동학운동난에 평창전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당시 동학운동이란 전라도에서 발생한 동학이 서울 궁궐을 목표로 진격시 공주 우금치에서 무장해제되고 2대 교주 최시형은 영월 직동으로 숨어 들어 옵니다. 이를 감춰주는 것은 사형감이지만 강원도 인심에 최시형은 포교를 하여 이후 홍천 서석에서 전투에 차기석 기포의 부대등 동학도 700명이 지평 민보군에 사살되었으며 평창및 강원 남부와 인근 경북, 충청도까지의 동학도들은 탐관오리의 척결을 위해 강릉으로 쳐들어갔으니 강릉부사를 했던 선교장의 이회원은 민보군을 결성하여 관군과 함께 동학군을 대항하여 전투를 합니다.
이 단원에서는 제목의 동비토론에서 匪자는 비적匪자 입니다.
비적(匪賊)이라 하면 무기를 지니고 떼를 지어 다니며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도둑을 말합니다. 무장공비할때 쓰는 비자이며, 토(討)는 토벌하다, 정벌하다, 처 죽이다는 뜻입니다.
즉 강릉의 민보군이 평창에 몰려든 동학군을 비적으로 보고 토벌하겠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역사는 아<我)와 비아의 투쟁이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의 동학운동에 대해서 그 내용은 다를바 없지만 보는 관점에서 평창의 동학도를 공비로 몰아 죽이겠다는 제목을 하고 있습니다.
동 글의 출전으로 김진백, 정원대의 <길위의 역사>란 책을 들고 있는바 그 유령같은 책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동 책의 출전에서 그러하다면 평창의 입장에서는 원수가 아니라 할 수 없다.
동학당시 아전출신이 평창군수까지 오른 엄문환이 평창사람 20여명을 죽였다고 하여 을미의병은 엄문환을 체포하여 숙청하자 그의 동생은 머리를 꺽고(상투를 자르고) 일본으로 도망갔다 한다. 그러면 정원대는 엄문환을 찬성하는 자인가 묻고싶다.
16, 옹달샘
* 문헌자료의 출처가 없다.
* 옹달샘은 관아가 먹고 잣배기마을 옹달샘은 서민이 먹었다는 구슬은 정확한 구분이 아니다.
* 무슨 논지도 없고 정확치도 못한 이야기이나 필자의 글에서는 평창시내 관아 양쪽에는 석회암지대로서 두 개의 옹달샘이 있으며 풍부한 양이 샘물이 있었기에 평창시내 일원에는 우물을 파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에는 시간이 오래되어 우물도 마르는 것이 아니라 노산성위의 활터장 매립으로 돌리네를 메우서 우물이 말랐다고 인위적 문제라고 서술하고 있다.
17, 약수리 고자대감 묘
◆ 약수터 위치에서 조선시대 약수역 “군 서쪽 10리에 있다”라고 서술했는데 “군 서쪽 10리에 있다”라는 기록의 출처가 없어 알 수 없는 내용이다.
18. 하리 비파형 동검
◆제목으로 하리 비파형 청동검은 부적합하다 히겠다.
이곳에는 고조선식 청동검과 함께 우리나라 最古의 전신상 유골이 발굴되었기에 이 제목은 하리 청동기 유적이라야 타당하다.
그리고 그 내용으로 고조선 평양식 청동검과 돌널무덤(최초의 적석총)에 전신상 유골이 발굴되었다라고 기술해야 타당할 것이다.
◆(인용문) 개설에서는 판석조 석관묘, 청동기시대 추정.
◆ (인용문) 형태에서는 비파형 동검 길이 26,3cm, 3,8cm이다.
무슨 문장이 전후 연결 고리가 없다.
◆출전- 김진백, 정원대의 길위의 역사 2019년 증보판이란 기록에서
길위의 역사란 책이 평창역사책이라면 인문지리 책도 역사 책이기에 매번 출전이라 성가시게 자랑해야 되냐.
또한 길위의 역사책 증보판은 무슨 내용인지 최소한 책이라 하면 평창의 대화. 평창, 진부도서관에 공공의 열람으로 비치되어 있어애 할진데 50권 복사한 유령책으로 이렇게 지면을 지저분하게 하는가
길위위 역사책의 구술도 동책 인문지리의 책의 오류한계 수순을 벗어나는지는 모르지만 동 책에서보면 과히 자랑할만한 책은 못될듯하다. 역사를 서술해야지 자랑을 할것인가??
◆보도자료
* (유골은) 화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D.N.A분석도 가능하다고 한다.
* 문화재청은 9일 오후 2시에 설명회로 현장을 공개한다는 내용의 인용글에서 제반 문제로서 동 평창의 인문지리 책은 2021년에 출간되었고 김진백 정원대의 <길위에 역사 증보판.은 2019년에 출간되었다.
여기에 하리 청동기 유적은 1016년에 강원고고문화원이 시굴조사하여 2018년에 문화재청은 D.N.A 분석검사자료등을 발표 하였다
◆D.N.A분석은 부산 동안대 김재현 고인골 팀의 분석으로 표가 녹아서 표피만 남아서 긁어 시료를 채집할 수 없기에 D.N.A분석은 실패하였다.
청동검은 평양식으로 찬소연대 측정값은 2,600년전(기원전 600)으로 판명되었다.
따라서 그 내용은 당시에도 필자의 블로그에 상세하게 기록한바. 설명회 현장을 공개한다나 D.N.A분석도 가능하다고 한다.라는 표현안 알맞은 표현은 아니다.
19. 대상리 안정사(岸井寺)
◆ 岸井寺라 함에 지금까지는 安井寺 또는 안정말사지로 쓰고 있었다
본인의 인타넷 기록을 다시 조회하여 보면 지금까지 안정사(安井寺) 로 아래 문헌 모두에서 기록하고 있다.
*「한국지명 총람 2」 1967년 한글학회
*「평창군 역사의 유적」강원대학교 박물관 1987
*「전국문화유적 총람」에서 안정말사지.
*「평창군 역사와 문화유적」 평창군 발행 1999.
여기에 필자는 정원대의 안내로 안정사지 탑재의 문제를 파악하려 답사하였다.
사원지에서 70m아래에 현 군청이 설치한 표지판에서는 워낭소리의 움물이라 적혀있는 바 이 우물에 연유하여 岸井寺라고 쓰인 점을 알게되고 스님들이 편안할 安자를 쓴 사찰이름은 없다. 그러기에 安井寺라는 한문 지명은 오류로서 언덕안(岸)자를 써서 岸井寺라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동 우물은 도로 3m 아래에 골이 파여져 있기에 그 아래서 보면 언덕 안(岸)자를 써야 맞고 사찰에 스님들은 편안할 안(安자)자를 쓰지 않는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쉬운 예로는 해안선할때도 언덕 안자를 씁니다.
岸井寺라는 필자의 게시글의 주장에 정원대도 맞다고 동조하였지 아직 일반화 되지도 않은 이론인데 정원대의 인문지리책의 단원으로 올라있는바 이것은 오류라 하겠다.
증언이고 해설란에 이러한 본인의 주장의 언급도 없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자랑하자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동책의 부록편에서 지명의 시대적 변천에서 대상리 안정사는 岸井寺에서 安亭寺로 바뀌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필자의 주장인 岸井寺의 원래 기록의 출처는 어디에 의존하는가 하는점이 분명 있어야 한다. 그렇치 않은면 岸井寺라 함은 하나의 주장일뿐 월래에도 安亭寺였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저자는 정확한 고증이 있어야 한다.
◆ 출전편에서 대상, 대하리 지역을 대야로 표기되어 있다.하지만 필자가 알기로는 대야란 구한말시기에 대상리와 대하리 사이의 지점을 대야리라 하였기에 대상, 대하리 지역을 대야리로 표기한 것은 다시금 고찰을 하여야 할 것이다.( 본인은 대야의 기록도 미미한 기록이기에 아직 수슬하지 못하고 있었다)
20. 노산성(魯山城) 성지(城池)
◆ 城池란 표현은실록 지리지에 단 한번 나온다 하지만 이후로는 城地와 발음이 혼돈되어 일반적으로 성의 우물, 연못 또는 수조지로 표현하지 성지라 표현한 예는 없다. eF서 가장 흔한 예로 성의 우물이란 표현이 수운 이해이다.
21. 공소
하일리 공소/ 하일리 물푸레공소/ 유동리 공소/산너미공소/발린 천주 학쟁이 공소/평창군 최초 예배당(하안미)/개수리 황골 공소/고인돌 공소/서내 공소/ 선내 수림대등 공소에 많은 기록을 하고 있는데 우선 공소라는 어원적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있어 사전적으로는 두가지 풀이인바 보통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단어로 그 뜻을 이해하기 힘들다 하겠다
22. 봉산동계
위치-미탄면 평안 1리 산 102번지
형태- 규모 가로810mm*세로 1,850mm인용에서형태는 무엇의 형태인지 서술도 없다
23.평안역1
◆위치
*(인용)-평안1리 727-1.764-5
◆문헌자료편에서
*(인용) 환취루는 객사앞에 있다.
평안역에서 환취루는 평창 객사앞의 누정으로 평안역에서 조명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24. 평안역2
◆ 문헌자료
*(인용) 역승이 3인이다
*(인용) 보안도 승이 관할하는 지역이 20이다
*(인용) 대창도 승이 관할하는 지역이 28이다.
위 3편의 인용기록은 평안역의 역사기록이 아닌바 정원대는 아직 지리지 즉, 세종지리지나 동국 여지승람등의 지리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느듯 하다
25. 아라리
◆ 이 장에서는 아리리란 단어는 최 연년이 처음 사용하였다는 말뿐이다.
이러한 내용이 왜 미탄에 오르는지 이해할 수 없다.
본문을 보면 미탄에 대함 설명은 하나도 없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겠다.
◆ 최영년은 아리랑 전문학자도 아니고 우리의 민속학의 시작은 1950년대 월하 송석하로부터 출발하지만 그보다 반세기전에 최영년은 우리의세시충속을 잘 표현하고 있는데 아라리란 여기에서 언급된 문장이다.
최영년의 자 최찬식은 신소설의 태두에 “추월색”을 지은바 이효석의 “영서시대”에는 평창공립학교 입학전 봉평거주시 병풍뒤에서 찾아온 “추월색” 책을 새엄마가 읽어주었다 한다. 오히려 이 광경이 더 평창적이고 역사적이다; 왜냐면 새엄마는 1910년대에 한글을 아는 신여성이었고, 또한 어린 효석이 문학적 소양을 간파하고 추운 겨울 이불 속에서 책을 읽어주던 모습에 후일 평창을 대표하는 한국 지성의 문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26. 육백두락(六白斗落)
◆六白이라함은 음양수로 금성을 말한다.도한 六百은 600의 수를 말한다.
본문에서도 일반인의 뜻인 볍씨 육백 말을 뿌릴 수 있는 단위의 六百이 아니라 금성을 뜻하는 六白을 제목으로 쓰고 있다. 이러한 六白의 본인의 주장에서 본인과 정원대 두 사람 뿐이다.
여기서 문제는 용어해설에 밭 한나절갈이 하루갈이이 논 두락들의 설명은 六百(600마지기라는 넓이 단위의) 설명이기에 제목 六白과는 맞지 않는 설명이 된다.
◆또한 출전에 출전에 대동여지도와 평창군 오면지도라 했는데
아래에 오면지도에 기록된 미탄면의 위치는 다음과 같고 육백마지기는 기명이 없다. 대동여지도도 기명되지 않았다.
(味呑峙, 頭萬山, 黃腸山, 平安驛, 평안역, 星摩嶺, 白雲里,平安里,會洞里)
참으로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점은 오류도 아니고 사기성높은 기만이라 하겠다.
◆ 참고자료에 박경원의 이야기는 육백마지기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 따라서 미탄 송어를 이야기한다면 모를까
(부록, 육백마지기 고찰)
< 平昌歷史의 理解 4> (3) 미탄면 청옥산 육백마지기 어원의 이해
26.두만산 극락암
◆두만산 극락암 해설에서 현재는 두만산이 아니라 청옥산이다. 따라서 청옥산으로 표기하든 아니면 그 설명이 있어야 한다. 두만산이란 현재 평창읍 송계산도 두만산으로 불리었다
◆ (인용) 이 산에는 삼한시대의 사찰인 극락암이 있었다 한다.
이 문장은 오류이다. 삼한시대는 삼국시대 이전의 마,진, 변환을 삼한이라 하며 김원룡박사는 원삼국이라 한다.
불교는 초교때 배운 기억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312)년에 국교로 승인되며 신라는 법흥왕때 이차돈의 순교로 되었기에 불교는 삼한시대가 아닌 삼국시대에 들어왔다.
즉 불교는 삼한시대가 아닌 삼국시대에 전래되었다.
◆ (인용)동여도, 팔도분도. 해동지도. 조선지도 여지도. 청구요람. 조선팔도지도 대동여지도등에 표시되어 있다.
이 내용도 모두 허위의 오류이다. 위 기명된 어느지도에도 <두만산 극락암>은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위에서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점은 오류가 아닌 사기적 기만이라 하였다.
◆ 동책 단원 <한치>편에서는 1872년 평창군 오면지도를 보면 극락암 아래에 한치가 있다고 서술하면서 정작 극락암의 이 단원에서는 기억력이없는지 오면지도는 누락되었고 있지도 않은 여러지도에 있다고 날 조작하였다.참으로 여러 가지 양상의 오류를 자행하고 있다.
[◆아래 지도들에는 극락암이 표시되지 않았다]
(동여도) (대동여지도) (해동지도)
◆[1872년 지방지도, 평창군 오면지도]
부록 6 평창군 오면지도와 그에 따른 필자의 설명
27. 뱃재
◆ 개설에서
(인용)<1872년 지방찌도> <해동지도> <여지도> <지승>에서는 梨峙로
<대동여지도>와 <팔도분도>에는 梨峴으로 표시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해동지도>에서만 이치로 되어있고, 지승, 여지도(필사본회화식)팔도분도에는 이현으로 되어 있며 1872년 지방지도와 대동여지도에선 이치, 이현의 기록은 어느 것 하나도 없다
자칭 고지도 전문가라 하면서 평안역, 두만산 극락암에 이어 이 장에서도 서투른 짓거리의 오류를 자행하고 있다.
28, 방림역
◆위치
(인용) 방림2리 아랫거리
이 지역은 역원취락이 가져야 하는 공간이 부족하고 또한 정종이 모노치 강무행사시 방림역이 소상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조선선비글의 금강산 산수유람중 방림을 거쳐가며 쓴 기행의 형용내용에서도 방림역이 정확히 묘사되고 있기에 부록편에 필자의 글, 정원대의 <방림역에 대한 위치 보정>을 싣는다.
부록7) 정원대의 방림역 위치에대한 보정
29. 운교석량
◆정원대, 징검다리
이 글을 시라고 쓴 모양인데 시보다는 서정글같은데 일단 개인의 시가 왜 <평창으 인문지리> 역사책에 오르는가 하는 점이다. 그렇게 자랑하고 싶으면 기행문으로 써야 한다.
30, 계촌리 봉수
계촌리 봉수에 대해서 처음 발굴하는 인상의 글인데 봉수 이미 그 이전에 글도 있었으며, 또한 횡성군에서 그보다 먼저 언급하였다.
31, 판관대와 율곡의 고향
◆해설편에서 이원수, 신사임당의 자녀를 여섯명으로 서술하였는 바 이것은 오류이다.
4난 3녀의 7명이다.
필자와 함께 세미나까지 한 사람이 책한권도 않읽고 세미나를하여서 발표에서도 무록관은 과거를 합격했는지 않 보았는지 모른다고 하는 웃지못할 세미나를 하고서도 관련도 없는 창만가지고 떠들더니 역시 율곡의 남매까지 오류를 합니다.
과가 박도식, 장정룡 교수가 같은 세미나를 하였슬 때 질의 시간에 무슨 세미나를 하나교 두 사람이 난타 했다고 같이서 서로 자랑하시더니 그 교수들은 제반 많은 자료를 준비했으며 또한 상대 박도식 교수쪽에서도 언젠가 불미한 듯 이야기가 전해오더만,, 본안은 그렇게 잘 세미나를 했습니까?? 또한 남을 호통치는데 정작 동 책에서 가장 기본인 율곡 형제들까지도 오류를 합니다.
필자의 세미나 리포트 한번 보십시오, 언 박사들도 못따라올만큼, 영원한 고전을 만들고 있습니다.
율곡의 아래 여섯째 여동생의 기록은 시중의 책에서 내용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건대박물관 소장의 율곡남매 분재기에서 여동생 본인이 직접 수결(싸인)까지 서명한 500년전의 분재기의 기록으로 부록에서 입증합니다.
부록 9)에서 울곡 남매 4남 3녀의 이야기
32, 진부역과 진부창
◆진부역 위치
(인용) 진부면 거문리 1반 (오대천로 1482-6)
진부면 거문리 교포건너 진부토마토 선별장 아랫집을 마방집이라 부른다. 이곳이 진부역터다.
◆ 거문리 진부역은 오류로서 거문리에는 마방까지 있는 즉 마굿간과 건초까지 준비된 바방의 거역홀점으로 지명되고 있으며 필자가 여러 고증 문헌을 통하여 진부역을 아래 부록에서 조명합니다.
부록 10) 정원대의 <평창의인문지리>책에 진부역에대한 위치보정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 책"에서 진부역 위치의 보정
33. 송계산을 주진이라한다.
34. 평안역의 번지수로 확인결과 산 꼭대기로 나온다
SSSSSSSSSSSSSSSS
부록편
부록편은 필자가 이해하는 필자의 글로서 부록 2등 번호가 빠진것은 본문아래 링크된 필자의 블로그 글로 대신 합니다.
부록 1) 동헌의 제영시
(제영시)
세종때 동국여지승람에 오류가 있다고 하여 신동국여지승람을 편찬시 노사신이 동문성의 시집을 만들어 성종에게 보여드리자 성종은 신동국여지 승람에 각 읍치에 제영시를 담으면 좋겠다고 명하여 제영시가 신동국여지승람편찬에 각 군현에 제영시가 발췌 수록됩니다.
이후 조선말 영조때에도 읍지 편찬에도 제영시를 담고있으나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의 지지(地誌)에서는 제영편이 건치연혁에서 빠지게 도고 고산자는 순수한 지리지를 편찬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아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평창군(平昌郡) 제영편 기록임.
【제영】
◆ 정탁(鄭擢)의 시에,
“산을 베개하고 골짜기에 깃들인 백성들의 집들이 있는데,
옛 고을은 몇 리에 걸쳐 쓸쓸한 모습이로구나.
세월이 오래니 이미 자취는 기와집을 봉(封)하였고,
비가 개니 아지랑이의 푸르름은 뜰에 가득하게 서린다.” 하였다.
◆ 윤홍(尹弘)의 시에,
“비 온 뒤의 무성한 풀은 마을길에 가득하고,
구름을 거두니 푸른 산은 지붕의 모서리에 당했네.” 하였다.
◆ 정귀진(鄭龜晉)의 시에,
“우연히 흐르는 물을 따라 근원의 막다른 곳까지 와서,
공연히 복숭아꽃 비단 물결 겹치는 것을 볼뿐.
동학(洞壑) 속의 신선의 집은 어디에 있는고.
흰 구름이 일만 그루의 소나무를 깊이 잠궜네.” 하였다.
◆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중원(中原)의 서기(書記)는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옛 고을 쓸쓸한 옛 산의 모퉁이로다.
문 앞에 땅은 좁아서 수레 두 채를 용납할 만하고,
하늘이 낮아 재 위는 겨우 석 자의 높이로구나.
가을이 깊어 가니 벼 이삭은 모래밭에 흩어지고,
세월이 오래된 솔뿌리는 석벽에 얽혔네.
이곳의 길이 험난하기는 촉(蜀) 나라 길보다도 어려우니,
집에 돌아가는 기쁨이 금성(錦城)의 즐거움보다 났겠네.” 하였다.
◆ 남긍(南兢)의 시에,
“노을은 경치 좋은 곳을 표시하여 돌벼랑을 덮었고,
구름은 위태한 봉우리를 호위하여 푸른 벽을 뚫는다.
말을 타고도 오히려 가는 길이 험난한 것을 노래하며,
사람을 만나면 시험삼아 돌아가 농사짓는 즐거움을 물어본다.” 하였다.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빨리 달리는 역마(驛馬)를 타고 머물 겨를 없어,
바로 산 그늘의 넓고 먼 곳에 이르렀다.
사마천같이 멀리 유람함은 아직 그치지 않았고,
진등(陳登) 같은 호기는 일찍이 없어지지 않았노라.
시름을 씻는 데 병에 술이 없을 수 있으랴.
기이한 것을 구하는데 도리어 상자에 글이 있구나.
이번 유람의 기절(奇絶)함이 평생에 으뜸되니,
좀 먹은 책 속의 좀벌레 같은 생활이 우습기만 하여라.”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어제 일찍이 큰 재[大嶺]로부터 왔더니,
회오리바람에 의지하여 만리를 양각(羊角) 속에 돌아서 온 것 같구나.
매단 것 같은 벼랑에 끊어진 돌계단은 돌기가 겁이 나고,
고목과 창등(蒼藤)은 지척이 아득하네.
다리 밑에 이젠 이미 평탄한 길을 찾은 것을 알건만,
꿈속에는 아직도 파란 절벽을 기어오르는 꿈을 꾼다.
백 가지 시름을 노성의 봄에 흩어버리니,
술 마시며 높은 소리로 담소하여 즐겨하노라.”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부록3) 평창의 국사성황사 이해
◉국사성황사의 이해
<국사 성황사>는 조선이 태동하며 유교국가라 불교적이 아니기에 기원제를 지내는 대상체의 神적인 존재가 없자 고려말 북제에서 전래된 성황사를 수급하여 전국에 군현에 국사성황사를 설치하고 기원제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조선초에 국가 주도의 국사성황제를 각 군현에서 지낼때 여제단의 제사도 시행하였습니다.
여제잔이란 당 사회에는 무연고 사망자들이 많아지자 관에서 수습하여 장사를 지낸 공동묘지인데 조선조 학자 권근은 여제단에 대하여 상소를 올립니다.
상소에 여제단에 神들은 무연고라 후손들이 없어 제사를 드리지 않아 굶게 되닌 제사를 지내주어 제밥을 먹게 해여 합니다라는 유교적 논리의 상소를 올려 여제단은 고을 수장이 제를 지내게 되엇습니다. 이렇게 여제단은 고대로 부터 내려온 풍습이 아니라 유교주의 국가의 한 형태로 발전하였르며 국사성황사도 이러한 맥락에서 유교주의적 중엄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교적 교리에 따르는 행사로 이와 같이 국사 성황사도 유교적 교리에 입각한 제를 지냅니다.
국사성황사나 마을의 동제는 같은 성황제이지만 그 내용적 기준이 다른 것입니다. 가령 우리는 유교국가로서 모든 사람이 부모의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 비나이다라고 합니까?? 이렇듯이 국사성황제도 유교적 굘에 입각한 신성한 제사를 지냅니다.
이에 대하여 국사성황제가 신성한 기원제라는 점에 대한 평창의 국사성황제 이야기 하나를 채록하여 올립니다.
◉ <김택용씨의 증언>
마지막 제사장 김학수옹의 子 택용이 필자에게 한 증언에서 초교 저학년때 부친을 따라 정월 보름 이전에 날을 잡아(*아마 대보름의 마을 동제보다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인듯 추정 합니다) 참례를 했는데 저녁에 여러사람들이 제수용품을 들고 노산에 올라 한참을 기다렸다가(* 11시~01시의 자시 사이 제를 지냈다 합니다.
지방은 국테민안이라 써 있엇으며 어느해인가 제를 지내는데 뒤에 호랑이가 있었다고 여러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기에 제사장 김학수 옹은 다음날 다시 제수용품을 마련하여 다시 제를 지냈다고 증언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제사장은 평창군의 제사장으로 군(임금)을 대신하여 평창군민의 국가의 평온과 군민의 안전을 기원하는 신성한 제를 지낸것입니다.우리는 호랑이는 영물로서 제사를 지냄에 그곳에 찾아왔다면 제사를 보호해주는 아주 염험있는 일이라 자랑스러워 할테지만 당시 제사장 김학수옹은 그 신성함에 누가 되어 평창군민의 평온과 안녕에 누가 될까봐 대시 제수용품을 마련하여 장정들을 불럼모아 성황제를 다시 지낸것입니다. 이러한 성황제에 비나이다라는 문구가 통용되었슬까요??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위에 축문에서 비나이다라는 무속적 주술의 단어들과는 좀 거리가 있기에 제사장들이 혹 이러한 축문을 사용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제사장의들 오류로 보이기에 재 연구가 필요하다.
제사장의 소요경비는 국사성황사 아래에 밭 약 800평의 둔전을 경작하는 것이며 하리 황완택씨는 매번 참석하였다 증언합니다.
(*황완택씨의 부친은 구한말 평창의 유림이었습니다)
(*본인은 평창의 유림으로 양반가문은 봉평의 신교선씨 문중으로 신범선생과 그의 부친 신석우, 400년전 선대로는 율곡의 문인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신석위의 해장집에는 청심대의 시가 한편 전하는데 아직 번역이 않되어서 고전번역원에 의뢰하여 평창의 명문가로 조명하겠습니다.)
◉ 노산의 국사성황사가 장군당이라 불린다.
평창의 기상 2019. 2. 10.
(부록5) 지리지 속의 역원취락 고찰
◆보안도(保安道)는 조선시대의 41역도(驛道) 가운데 하나로, 고려시대의 춘주도(春州道)·평구도(平丘道)·명주도(溟州道)에 속한 일부 역들이 세종 연간에 하나의 역도로 재편되면서 성립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이때 보안도에는 보안역(保安驛)·인람역(仁嵐驛)·부창역(富昌驛)·원창역(原昌驛)·연봉역(連峯驛)·천감역(泉甘驛)·연평역(延平驛)·약수역(藥水驛)·평안역(平安驛)·여량역(餘粮驛)·창봉역(蒼峯驛)·갈풍역(葛豐驛)·오원역(烏原驛)·벽탄역(碧呑驛)·호선역(好善驛)·안흥역(安興驛)·유원역(由原驛)·신흥역(新興驛)·양연역(陽淵驛)·단구역(丹丘驛)·신림역(神林驛) 등 21개 역이 소속되었으며, 역승이 관리하였다.
1455년(세조 1)에는 강원도의 역로가 조폐할 뿐 아니라 역승의 직급이 낮고 경력이 부족해 역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자, 보안도를 대창도에 통합하고 찰방을 파견하였다[『세조실록』 1년 12월 3일].
그 뒤 1462년(세조 8)에는 병조의 건의에 따라 다시 역로를 정비하면서, 강원도의 역도를 보안도·은계도·평릉도·상운도로 개편하고 보안도와 은계도에는 찰방을, 평릉도와 상운도에는 역승을 파견하였다.
그 과정에서 보안도는 보안역·인람역·부창역·원창역·연봉역·천감역·창봉역·갈풍역·오원역·안흥역·유원역·단구역·신림역·신흥역·연평역·벽탄역·호선역·안창역·안보역·양연역·여량역·약수역·평안역.운교역·방림역·대화역·진부역·횡계역·고단역·임계역 등 30개 속역으로 대폭 확대 편성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이후 성종대의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서는 보안역·안보역·감천역·인람역·원창역·부창역·연봉역·창봉역·오원역·안흥역·단구역·유원역·안창역·신림역·신흥역·양연역·연평역·벽탄역·호선역·임계역·고단역·횡계역·진부역·대화역·방림역·약수역·평안역.갈풍역·여량역·운교역 등 30개 역을 관할하였다.
보안도에 소속된 30개 역에 역리 380명, 역노 743명, 역비 481명과 역마 120필이 배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초기에는 역승(驛丞)이 주재하였으나, 이후 찰방(察訪)이 파견되어 역무를 맡아보았다.(찰방은 조선시대 각 도의 역참(驛站)을 관리하던 종6품 외관직.)
역승은 조선시대에 각 역도(驛道)에 파견되어 속역(屬驛)의 감독을 담당한 종9품 문관직으로 역승의 주요 직무는 역도를 순행하면서 역마를 관리하고 역속을 감독하여 각 역의 업무를 원활하게 운영하는 것이었다『경국대전』에 수록됨으로써 역승 및 찰방의 정원에 관한 규정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하여 조선전기에는 역승과 찰방이 병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중종대에 이르러 역승 혁파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면서 역승과 찰방이 병존하던 상황은 변화를 맞게 되었다. 1506년(중종 1) 12월에 시강관 최숙생(崔淑生)이 역승의 작폐를 지적하면서 역승을 혁파하자고 주장한 데 이어, 1511년(중종 5)에는 유순(柳洵)의 건의에 따라 역로가 소복될 동안 임시로 역승을 혁파하고 그 대신 찰방을 임명하게 하였다.
보안도(保安道)는 조선시대의 41역도(驛道) 가운데 하나로, 고려시대의 춘주도(春州道)·평구도(平丘道)·명주도(溟州道)에 속한 일부 역들이 세종 연간에 하나의 역도로 재편되면서 성립하였다. 한때 대창도(大昌道)에 통합되기도 했으나, 1462년(세조 8)에 역제(驛制)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은계도(銀溪道)·평릉도(平陵道)·상운도(祥雲道)와 더불어 강원도의 역도가 되었다.
◆보안도 초기에는 역승(驛丞)이 역무를 맡아보았으나, 세조대부터는 찰방(察訪)이 관할하였다.
보안도는 1,춘천을 중심으로 홍천과 원주를 잇는 역로(驛路),
2) 원주에서 진부·횡계를 넘어 강릉으로 연결되는 역로,
3) 그리고 원주에서 평창과 정선을 지나 강릉에 이르는 역로 등으로 구성되어, 경기도와 강원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황준량 금계집
(평안역에서 사흘 동안 비 때문에 머무르면서)〔平安馹滯雨三日〕
강물처럼 푸른 하늘에 기러기 나는 가을 / 碧天如水雁飛秋
한 잎 서늘한 소리 역루에 가득했네 / 一葉寒聲滿驛樓
한밤중 느닷없는 비에 시냇물 불어나니 / 半夜無端溪雨急
사흘 동안 강물에 막혀 시름 깊은 나그네 / 隔江三日客窓愁
[주-1] 평안역(平安驛) : 강원도 평창군에 있었던 역참 이름이다.
[주-2] 한 …… 소리 : 오동잎을 가리킨다. 《광군방보(廣群芳譜)》에 “오동나무 잎 하나 떨어지면, 세상이 다 가을이 온 줄 안다.〔梧桐一葉落 天下盡知秋〕”라고 한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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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도(保安道) : 소속역참 수 (30). 원주(原州)
* 保安道察訪一員 館在原州丹丘 屬驛三十
단구(丹丘)ㆍ유원(由原)ㆍ안창(安昌)ㆍ신림(神林)ㆍ신흥(神興)ㆍ갈풍(葛豐)ㆍ창봉(蒼峯)ㆍ오원(烏原)ㆍ안흥(安興)ㆍ연봉(連峯)ㆍ천감(泉甘) 원창(原昌)ㆍ보안(保安)ㆍ인람(仁嵐)ㆍ안보(安保)ㆍ부창(富昌)ㆍ양연(楊淵) 연평(延平)ㆍ약수(藥水)ㆍ평안(平安)ㆍ벽탄(碧呑).호선(好善)ㆍ여랑(餘浪)ㆍ임계(臨溪)ㆍ고단(高丹)ㆍ횡계(橫溪)ㆍ진부(珍富)ㆍ대화(大和)ㆍ방림(芳林) 운교(雲交)
*역리(吏) 2백74명 노(奴)1,372명. 비(婢) 7백44구. 말(馬)1백20匹
◆조선조 찰방 고(朝鮮朝 察訪 考)
참고 자료
1 만기요람.
2 신증 동국여지승람.
3 여지도서
4 연려실기술.
찰방(察訪)은 조선시대 각 도(道)의 역참(驛站)을 관장하던 문관(文官) 종육품(從六品) 외관직(外官職)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 이르는 중요한 도로에 마필(馬匹)과 관명(官員)을 두어, 공문서(公文書)를 전달하고 공용여행자(公用旅行者)에게 숙소제공·마필공급 등 편리를 도모하는 기관(機關)을 역참이라 하였는데, 약간의 역참(驛站)을 1구(區)로 하여 이를 역도(驛道)라 칭하고, 그 구간의 마정(馬政)을 맡아보는 관직(官職)을 마관(馬官)이라 하여, 교통로(交通路)를 이용하여 정보수집(情報蒐集)도 하였는데 고려 후기부터 역승(驛丞)이라고 하다가 1535년(중종 30)부터 찰방(察訪)이라고 개칭하였다.
경국대전에 보면 조선 초기 전국에 23명의 찰방과 18명의 역승(驛丞)을 두어 총 537역을 관장케 했는데, 1535년(중종 30)에는 역승을 없애고 전국의 큰 역에 40명의 찰방을 두고 이를 찰방역이라 하였다.
경기도(京畿道)에 6원, 충청도(忠淸道)에 5원, 경상도(慶尙道)에 11원, 전라도(全羅道)에 6원, 황해도(黃海道)에 3원, 강원도(江原道)에 4원, 함경도(咸鏡道)에 3원, 평안도에 2원을 두었다. 작은 역에는 역장을 두어 찰방이 이를 관장하였는데, 중요한 요소에는 겸찰방(兼察訪) 12원을 두어 찰방의 비행(非行)을 감시하게 하였다.
찰방은 문과. 무과 급제 출신자이거나. 사마시(생원, 진사) 출신자 중에서 선발하였고, 유현의 후손 중 재행이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였고.찰방을 지낸 사람 중 성적이 좋은 사람은 고을 원 으로 발탁하였다.
대역(大驛)에는 일수(日守) 20명
중역(中驛)에는 일수(일수) 15명
소역(小驛)에는 일수(일수) 10명 을 두었다.
* 일수(日守) : 지방 각 읍과 각 역에 배속되었던 서반 외아전(外衙前) 으로 원래는 관원의 출장에 따른 접대를 맡았으나. 널리 잡역에 종사하였다. 일수는 건장한 양민 중에서 뽑았다. 양반은 아니나, 속칭 일수양반(日守兩班)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 사람을 칭할 때 관직(品官)이 있는 사람은 원(員). 이속(아전)은 인(人). 군졸. 노(奴)는 명(名). 비(婢)는 구(口)라 하여 구분하여 칭하였다.
◆역체(驛遞)
공무를 수행하는 관원과 이속(吏屬)등에 대하여 병조에서는 등수에 의하여 증서[帖]를 발급하며, 상서원(尙瑞院)에서는 국왕에게 아뢰어 패(牌)를 발급한다. 관찰사와 절도사는 모두 역마 발급 패[發馬牌]를 받는다.
경기 감사는 3마패 1ㆍ2마패 1ㆍ1마패가 5, 수사는 2마패 2. 충청 감사(公忠監司)는 3마패 1ㆍ2마패 2ㆍ1마패 9, 병사는 2마패 2ㆍ1마패 6, 수사는 1마패 3. 전라 감사는 4마패 1ㆍ3마패 2ㆍ2마패 5ㆍ1마패 6, 병사는 1마패 5, 좌수사는 1마패 3, 우수사는 2마패 2ㆍ1마패 5, 제주목사는 2마패 1ㆍ1마패 6. 경상 감사는 3마패 1ㆍ2마패 3ㆍ1마패 6, 좌병사는 1마패 6, 우병사는 1마패 6, 우수사(右水使)는 1마패 3, 통제사는 1마패 11, 상주목사는 1마패 3, 안동부사는 1마패 4, 동래부사는 1마패 5. 평안감사는 2마패 6ㆍ1마패 6. 황해 감사는 2마패 2ㆍ1마패 6. 강원 감사는 3마패 1ㆍ2마패 2ㆍ1마패 7. 함경 감사는 2마패 2ㆍ1마패 18, 남병사는 3마패 1ㆍ1마패 10, 북병사는 1마패 5. 대체로 아뢸 것이 있다든가 진상(進上)이 있으면 역마를 발급한다. 제주자제(濟州子弟)ㆍ공물을 운송하는 사람ㆍ진장(鎭將)ㆍ역관(驛官)ㆍ연변의 가족을 대동하지 못한 수령(守令)ㆍ긴급한 군사사정ㆍ각 능의 제물 운반ㆍ비변사의 회람 공문을 전달하는 낭청(郞廳)ㆍ군졸을 징집하는 공문을 휴대한 장교ㆍ각신(閣臣)으로서 휴가를 받아서 가는 데에는 모두 역마를 발급하되, 외람되이 함부로 타는 자는 남승률(濫乘律)로, 역관은 사여률(私與律)로 논죄한다. 역에는 대로(大路)ㆍ중로ㆍ소로의 구별이 있어 국왕의 명을 받은 사절 이하는 길을 구별하여 왕래하는 데, 위반한 자는 관찰사가 규찰(糾察)하여 조정에 보고한다.
대군(大君)과 의정(議政)7필. 정2품 6필. 종2품 5필. 3품 당상관 4필. 6품 이상 3필. 9품 이상 2필. 상사(上使)와 부사(副使)3필. 서장관(書狀官)2필. 어사 3필. 통신사(通信使)3필. 종사관(從事官)2필.
◆역위전(驛位田)
각 역에서는 역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역참에 소속된 전답을 주어 노비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였다. 이 땅을 역위전이라 하였다.
대로(大路) 20결(結) 황해도에는 25결을 증가하며, 양계(兩界)에는 10결을 증가한다.중로(中路) 15결 양계에는 7결을 증가한다.소로(小路) 5결. 양계에는 3결을 증가한다. 장(長) 2결, 부장(副長) 1결 50부(負), 급주(急走) 50부, 대마(大馬) 7결, 중마(中馬) 5결 50부, 소마(小馬) 4결. 요긴한 길이면 급주에게는 50부를 증가하며, 대마에는 1결을 증가하며, 중마와 소마에는 각 50부씩을 증가한다.
◆발참(撥站)
선조(宣祖 30년(1597년)에 파발제도(擺撥制度)를 설치하여 변경의 공문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 기발(騎撥)은 25리마다 1참(站)을 두었고 1참마다 발장(撥將) 1명, 군졸 5명,
말 5필.
* 보발(步撥)은 30리마다 1참을 두었다. 참마다 발장 1명, 군졸 2명.
* 각도 속역(各道屬驛)및 방면
대로로는 경기에 12역이며, 중로로는 경기에 9역, 충청도에 24역, 전라도에 4역, 경상도(慶尙道)에 5역, 강원도에 6역, 황해도에 11역, 평안도에 13역, 함경도에 37역이며, 기타는 모두 소역(小驛)에 속한다.
◆ 강원도 찰방
* 강원도(江原道) (4員)
(부록10) 율곡 형제는 4남 3녀의 논고
450여년 전인 1566년 5월20일, 율곡 이이의 형제자매들이 이원수. 신사임당의 재산을 상속하기 위해서 사리원에서 한자리에 모였다. 셋째 아들인 이이를 비롯, 4남3녀 7남매다. 아들들은 본인이, 딸들은 남편이 대신 참석했다. 첫째딸 매창은 임란시 원주로 피난가서 왜구에게 죽어 남편을 사별하여 부분이 참석하였으며, 셋째 딸은 남편이 죽어서 본인이 직접 참석하였다.
7남매가 어렵게 모인 것은 아버지(이원수·1501~1561), 어머니(신사임당·1504~
1551)가 남긴 재산을 배분하기 위해서다.
이날 있었던 7남매의 유산분배 내용은 상세히 기록한 문서로 전해진다. 보물 제477호인 ‘율곡 이이 남매 화회문기(和會文화회문기는 상속자의 사후에 자식들만 모여서 상속을 이루는 경우를 화회문기라 함)’다.
건국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화회문기는 7남매와 더불어 서모(아버지의 첩) 권씨 몫도 기록, 모두 8명의 재산분배 결과를 담고 있다.
◇ 첫째 아들 생원(生員) 선(璿)의 몫
◇ 첫째 딸 강절 교위(康節校尉) 조대남(趙大男)의 처 몫(호-매창)
◇ 둘째 아들 유학(幼學) 번(璠)의 몫
◇ 둘째 딸 충의위(忠義衛) 윤섭(尹涉)의 처(성명미상) 몫
◇ 셋째 아들 좌랑(佐郞) 이(珥)의 몫
◇ 셋째 딸 고(故) 홍천우(洪天佑)의 처(성명미상) 몫
◇ 넷째 아들 유학(幼學) 위(瑋)의 몫
※ 필집(筆執)
맏형[長兄] 생원(生員) 이선(李璿) [수결(手決/싸인)]
매부(妹夫) 강절 교위(康節校尉) 조대남(趙大男) [수결(手決)]
둘째 아우 유학(幼學) 이번(李璠) [수결(手決)]
둘째 매부(妹夫) 충의위(忠義衛) 윤섭(尹涉) [수결(手決)]
셋째 아우 이조 좌랑(吏曹佐郞) 이이(李珥) [수결(手決)]
셋째 매부 고(故) 학생 홍천우(洪天佑)의 처 이씨(李氏) 수결
넷째 아우 유학(幼學) 이위(李瑋) [수결(手決)]
※ 상속문서는 자식중 아들과 사위가 수결함이 원칙이나 셋째 매부 고(故) 학생 홍천우(洪天佑)의 처 이씨(李氏)가 직접 수결하였다.
이 사료는 1566년(명종 21년)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집안에서 작성한 분재기이다. 분재기란 재산 상속을 기록한 문서이다.
이 문서의 크기는 가로 257㎝, 세로 48㎝로 현재 보물 제477호로 지정되어 있다.
분재기 오른쪽에 수결( 왼쪽에서 두 번째 아래 작은 글씨가) 여섯째 ( 4남 3녀중 3녀) 본인이 직접 싸인 한 것이다.
※ 율곡남매 분재기는 건대박물관에 비치되어 있으나 아직 오죽헌등 학술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필자가 아마도 처음으로 조명하는 것이다.
오죽헌에는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씨가 신사임당 다섯 형제와 봉사조, 배사조에 대한 유산 상속의 용인이씨 분재기가 있다.
이 분재기에 노와 비는 173구(노비는 구라 함)이었으며 신사임당은 32명, 율곡은 봉사조로 노비 5구와 서울 집한 채를 상속받았다.
이후 율곡 남매 분재기에서는 노비 119구중 율곡은 15구의 노비와 파주 논 20마지기를 상속받았는데 서울대 명예교수들은 신사임당은 부군 이원수가 술로 가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밤새 알바로 자수와 뜨개질을 하다가 건강을 헤챠서 일찍 죽었다는등,,친국가 들렸는데 말년의 율곡은 떼거리가 없었다 하는등ㅇ의 역사 교수들의 이야기가 맞는가 아니면 필자가 밝히는 율곡남매 분재기에 이야기가 맞을까 하는 점은 숙제로 남기고 있습니다.
450여년 전인 1566년 5월20일, 율곡 이이의 형제자매들이 이원수. 신사임당의 재산을 상속하기 위해서 사리원에서 한자리에 모였다. 셋째 아들인 이이를 비롯, 4남3녀 7남매다. 아들들은 본인이, 딸들은 남편이 대신 참석했다. 첫째딸 매창은 임란시 원주로 피난가서 왜구에게 죽어 남편을 사별하여 부분이 참석하였으며, 셋째 딸은 남편이 죽어서 본인이 직접 참석하였다.
7남매가 어렵게 모인 것은 아버지(이원수·1501~1561), 어머니(신사임당·1504~
1551)가 남긴 재산을 배분하기 위해서다.
이날 있었던 7남매의 유산분배 내용은 상세히 기록한 문서로 전해진다. 보물 제477호인 ‘율곡 이이 남매 화회문기(和會文화회문기는 상속자의 사후에 자식들만 모여서 상속을 이루는 경우를 화회문기라 함)’다.
건국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화회문기는 7남매와 더불어 서모(아버지의 첩) 권씨 몫도 기록, 모두 8명의 재산분배 결과를 담고 있다.
◇ 첫째 아들 생원(生員) 선(璿)의 몫
◇ 첫째 딸 강절 교위(康節校尉) 조대남(趙大男)의 처 몫(호-매창)
◇ 둘째 아들 유학(幼學) 번(璠)의 몫
◇ 둘째 딸 충의위(忠義衛) 윤섭(尹涉)의 처(성명미상) 몫
◇ 셋째 아들 좌랑(佐郞) 이(珥)의 몫
◇ 셋째 딸 고(故) 홍천우(洪天佑)의 처(성명미상) 몫
◇ 넷째 아들 유학(幼學) 위(瑋)의 몫
※ 필집(筆執)
맏형[長兄] 생원(生員) 이선(李璿) [수결(手決/싸인)]
매부(妹夫) 강절 교위(康節校尉) 조대남(趙大男) [수결(手決)]
둘째 아우 유학(幼學) 이번(李璠) [수결(手決)]
둘째 매부(妹夫) 충의위(忠義衛) 윤섭(尹涉) [수결(手決)]
셋째 아우 이조 좌랑(吏曹佐郞) 이이(李珥) [수결(手決)]
셋째 매부 고(故) 학생 홍천우(洪天佑)의 처 이씨(李氏) 수결
넷째 아우 유학(幼學) 이위(李瑋) [수결(手決)]
※ 상속문서는 자식중 아들과 사위가 수결함이 원칙이나 셋째 매부 고(故) 학생 홍천우(洪天佑)의 처 이씨(李氏)가 직접 수결하였다.
이 사료는 1566년(명종 21년)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집안에서 작성한 분재기이다. 분재기란 재산 상속을 기록한 문서이다.
이 문서의 크기는 가로 257㎝, 세로 48㎝로 현재 보물 제477호로 지정되어 있다.
분재기 오른쪽에 수결( 왼쪽에서 두 번째 아래 작은 글씨가) 여섯째 ( 4남 3녀중 3녀) 본인이 직접 싸인 한 것이다.
※ 율곡남매 분재기는 건대박물관에 비치되어 있으나 아직 오죽헌등 학술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필자가 아마도 처음으로 조명하는 것이다.
오죽헌에는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씨가 신사임당 다섯 형제와 봉사조, 배사조에 대한 유산 상속의 용인이씨 분재기가 있다.
이 분재기에 노와 비는 173구(노비는 구라 함)이었으며 신사임당은 32명, 율곡은 봉사조로 노비 5구와 서울 집한 채를 상속받았다.
이후 율곡 남매 분재기에서는 노비 119구중 율곡은 15구의 노비와 파주 논 20마지기를 상속받았는데 서울대 명예교수들은 신사임당은 부군 이원수가 술로 가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밤새 알바로 자수와 뜨개질을 하다가 건강을 헤챠서 일찍 죽었다는등,,친국가 들렸는데 말년의 율곡은 떼거리가 없었다 하는등ㅇ의 역사 교수들의 이야기가 맞는가 아니면 필자가 밝히는 율곡남매 분재기에 이야기가 맞을까 하는 점은 숙제로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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