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백작
◆ 평창 최초의 군명(郡名), 우오(于烏), 욱오(郁烏), 백오(白烏) 의 해석
위의 역사 기록들에서 평창의 최초의 지명인 고구려때의 욱오현(郁烏縣), 于烏縣(우오현), 신라때의 白烏縣(평창군 평창읍)의 고구려 때 평창군의 이름값의 고지명의 기록들이 나온다. 弓裔傳에 나오는 鬱烏城은 郁烏縣을 가리키는 것이다.
1) 지금까지 평창에서 이루어진 우오, 욱오, 백오에 대한 설명은 엄기종님의 글에 있다.*주 1)
우리 고향의 최초 이름이 우오(오!태양), 다음 욱오(광채태양), 다음 백오(밝은태양)로 고려 전에는 계속 삼족오*주3)(태양의 흑점)를 우리군의 이름으로 썼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이러한 우오, 욱오, 백오의 뜻의 해석은 평창의 향토사학자 엄기종님에 의해 강원대 사학자의 저서 “평창역사의 개관” 책에 의해서 설명되고 있다한다.
(2) ”강원 고지명 연구”에 평창군 사례편 *주2)
또, 한 학자의 평창지명 연구 예를 본다. 평창의 최초의 군명“ 우오, 욱오, 백오에 대한 다른 견해의 해석으로는 ”강원 고지명 연구”에 평창군 사례편에서 아래의 내용을 인용한다
고구려 때 평창군 고을 이름의 한자 표기는 욱오(郁烏) 또는 비슷한 소리의 우오(于烏)였다. 이렇게 소리가 비슷하면서 한자가 다른 두 개의 표기가있는 경우 일반적으로 고구려말의 이름을 한자의 소리를 빌려 표기한 것이다.
신라에서 백오(白烏)로 고쳤다는 것은 경덕왕 18년(759) 전국적으로 고을명칭의 한자 표기를 바꾼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욱오(郁烏)와 우오(于烏)가 한자의 소리를 따서 표기한 것이라면 백오(白烏)에서 백(白)은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백(白)의 일반적인 뜻인 ‘희다’보다는 ‘아뢰다’의 뜻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성군(奈城郡)의 영현으로 삼았다’는 것은 상하 관계가 분명한 신라의 주-군-현 체제에서 후대의 영월군인 내성군의 통제를 받는 현(縣)이었다는 의미다.
(3) 평창군명에 대한 해석으로 필자의 견해
평창 최초의 군명(郡名)인 고구려시대의 욱오(郁烏)와 우오(于烏) 신라시대의 백오(白烏) 의 뜻에 대한 해석을 합니다
◆ 인용부 : (삼국사기 원문 번역문)
◉ 삼국사기 제35권 잡지 제4 지리(地理) 2. 백오현(白烏縣)
본래 고구려 욱오현(郁烏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평창현(平昌縣) 이다.
[역주:1] 욱오현(郁烏縣)
신라 溟州 奈城郡 白烏縣(평창군 평창읍)의 고구려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于烏縣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50 弓裔傳에 나오는 鬱烏城은 郁烏縣이다.
[역주:2] 백오현(白烏縣)
신라 溟州 奈城郡(영월군 영월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江原道 平昌郡 平昌邑.
[역주:3] 평창현(平昌縣)
신라 溟州 奈城郡 白烏縣(평창군 평창읍)의 고려시대 지명. 白烏縣을 고려가 平昌縣으로 이름을 고쳐 原州의 屬縣으로 삼았다. 충렬왕이 縣令을 두었고, 우왕이 知郡事로 높였다가 뒤에 다시 縣令으로 낮추었다. 조선 태조가 다시 郡으로 높였다
◉ 삼국사기 제35권 잡지 제4 지리(地理) 2, 백오현(白烏縣)편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오현(白烏縣)은 본래 고구려 욱오현(郁烏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 [고려]의 평창현(平昌縣) 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제35권 잡지 제4(三國史記 卷第三十五 雜志第四) 신라명주.
나성군(奈城郡)은 원래 고구려의 나생군(奈生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영월군(寧越郡)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자춘현(子春縣)은 원래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영춘현(永春縣)이다. 백오현(白烏縣)은 원래 고구려의 욱오현(郁烏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평창현(平昌縣)이다. 주천현(酒泉縣)은 원래 고구려의 주연현(酒淵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 삼국사기 제 10권. 궁예
경복(景福) 원년 임자년(진성왕 6: 892)에 북원(北原)[현재의 원주시]의 도적 양길(梁吉) 에게 의탁하니 양길이 잘 대우하여 일을 맡기고 드디어 병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으로 땅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에 선종[궁예]은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머물면서 주천(酒泉)[현재의 주천면], 나성(奈城)[현재의 영월읍], 울오(鬱烏)[현재의 평창군 평창읍], 어진(御珍)[현재의 울진읍]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 고려사지리지 평창현(平昌縣)편
평창현(平昌縣/평창군)은 본래 고구려의 욱오현(郁烏縣)【우오현(于烏縣)이라고도 함】으로 신라 경덕왕 때 이름을 백오(白烏)로 고치고 내성군(柰城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에 들어 지금 이름으로 변경하고 내속시켰다. 충렬왕 25년(1299)에 현령을 두었다. 우왕 13년(1387)에 왕이 총애하는 환관 이신(李信)의 내향이라 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현령으로 강등시켰다. 별호는 노산(魯山)이다.
◉ 이러한 기록이 고려의 역사서에 의한 평창기록이다.
삼국사기는 평창에 대해서는 가장 먼저의 기록으로 인종 13년 서경에서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원수로서 이를 진압하고 문하시중의 수상직에 오른 김부식은 인종 20년(1142) 수상직에서 은퇴한 후 국왕의 명에 의하여 삼국사기 50권을 편찬하여 바쳤다.
-----< 이상 실록 지리지 및 역사서 인용 끝>----
◉ 처음 지명인 고구려시대의 우오(于烏), 욱오(郁烏)에서 우선 “于와“郁”이 무슨 뜻인가부터 고찰합니다.
우오(于烏), 욱오(郁烏)에서 그 단어적 의미는 音을 차용하였지만, 우선 “于와 郁”에서 사전적 뜻의 해석으로“郁”은“향기롭다. 성하다. 문채가 나는 모양”의 뜻 입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위의 인용인 삼국사기 10권에 궁예가 평창을 함락시킨 점의 서술에서 평창의 지명을 울오(鬱烏)라 하였다. 울오의 울(鬱)자의 사전적 의미는 수풀이 무성하다. 막히다, 성하다라는 뜻으로 욱(郁)의 뜻인 성하다, 문채가 있는 모양이란 뜻과도 동일선상의 한문이란 점이다.
◉ 우오(于烏), 욱오(郁烏)에서 烏자의 해석
물론, 고구려시대는 이두문자로서 한문의 소리음(音)을 차용하기에 한문의 뜻(訓)으로 이해하기에는 거리감이 있으며, 이러한“郁”자뒤에 까마귀“烏”자를 붙여 욱오라 했슬 때, 천손사상의 숭배에서 태양의 불을 먹고사는 세발달린 까마귀 ‘삼족오(三足烏)“의 모습을 그려낸 점인가 하는 점에서 의문을 가진다.
만약 郁자 대신으로 旭(아침 해돋는 욱)자를 사용하였다면 이는 확실한 태양을 이야기 하는 점이 되는데 동일한 음으로서 태양에 더 확실한 한문을 나두고 郁, 于를 썼다는 점에서 그 이해는 녹녹치 못하다.
또한. 까막귀 烏자를 썼다고 특별한 조건이 붙지 않는한 일반명사로서 까마귀를 말함이지 삼족오라고 지칭할 수도 없다.까마귀를 길조로 여긴 듯 고구려 시대에는 지명에 까마귀 烏자를 다수 사용하였다. 제37권(卷第三十七) 잡지(雜志) 지리(地理) 4에서 춘천지명의 변천 춘천의 지명은 맥국(貊國)-오근내(烏斤乃)-주양(走壤)․우곡성(牛谷城)-우수주(牛首(頭)州)로 변천과정중에 오근내라는 지명을 사용하였던 적이 있다. 또한 멸오(滅烏)는 용인, 오사함달烏斯含達은 황해도 금천, 오아홀등 다수 지명이 나타난다. 평창의 고구려 지명, 우오, 욱오, 울오도 삼족오라는 표기는 없었기에 이러한 지명의 하나라고 사료한다.
◉ 신라시대의 평창군 지명, 백오(白烏)
신라시대에는 백오(白烏)라 하였는데. 백오는 휜까마귀이다, 또한 휜(白)자를 밝음으로 번역하고 있는 점에서도 문제를 삼는다. 고구려시대에 우오, 욱오에서 우. 욱은 본 뜻(訓)이 아니라 이두음화의 해석(音)이었는데 신라 경덕왕떼 백오는 휜 백자는 音이 아니라 訓으로 해석하여 그 뜻에 맞는 휜색, 즉 밝음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에 문제가 있음을 제시한다.
여기서 주목해 볼만한 예로서 “長白山脈”이라하면, 사람들은 그 뜻을 확실히 모르면서도 아마 산맥중의 으뜸으로 연상한다. 또한 “장백이 마을”은 우리나라 부락중에 다수가 있는데 이를 휜 백의 밝음으로 번역할 수는 없고 처음 또는 최고라는 뜻으로 통한다,(처음이나 최고는 같은 값의 의미를 내포한다) 더 나아가서 “장백이“ 란 단어는 일행중에 제일 연장자를 의미한다. 즉 일행중에 제일 연장자는 한 사람일테고 이는 제일 우두머리의 처음(上)이고, 장백산맥도 산중에 최고의 산이란 점으로 가장 높음(上)의 개념으로 장백을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평창 발원의 근간인 백덕산의 白자도 휜백자가 아니라 태백산맥의 내지산맥에 사자산, 수정산등을 닛는 가장 높은 산이란 점이기에, 이렇게 볼 때 휜 白자는 밝음과는 거리가 있으며, 위에 또는 먼저라는 상(上)의 개념의 뜻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예문 (1)에서 우오(오!태양), 욱오(광채태양), 백오(밝은태양)로 고려 전에는 계속 삼족오(태양의 흑점)를 우리군의 이름으로 썼다는 점은 史家의 주관적 견해일뿐, 역사로서는 위에 인용한 삼국사기 인용문에서 우오, 욱오, 백오란 지칭밖에 그에 해석은 없다.
예문 (2)에서 보면 백오라는 뜻은 영월의 속현으로서 아뢰다라는 뜻을 가진다고 하였지만 위의 필자의 설명으로 白자는 밝음이 아니라 위(上)이란 개념으로 밝혔듯이 “아뢰다“라는 뜻으로는 문장적 근거나 이해적으로도 맞지 않는 사안이다.
신라 경덕왕때는 신라 전국의 지명을 바꾸었습니다. 여기서 당시 영월의 속현*주4) 3곳의 지명을 고찰해보면 于烏, 郁烏의 평창을 白烏로, 영월은 고구려때 나생군(奈生郡)을 나성군(奈城郡)으로, 영춘은 고구려때 을아단현(乙阿旦縣)을 자춘현(子春縣)으로, 주천은 주연현(酒淵縣).에서 주천현(酒泉縣)으로 바뀌었다. 신라 경덕왕때에는 고구려에서 유입된 땅*주5)에 대한 고구려식 발상과 발음의 혼돈스러움을 정비한 듯 하다.
지금까지는 평창의 초기 郡名에 대한 두 가지 학설과 그에 따르는 문제를 보았는 바 그럼 우오, 욱오, 백오에 대한 가장 바른 평창군의 이름값은 무엇이었슬까 하는 점에 대해서 논합니다.
= 윗 글에서 “郁”은“향기롭다. 성하다. 문채가 나는 모양”의 뜻이며, 울오의 울(鬱)자의 사전적 의미는 수풀이 무성하다. 막히다, 성하다라는 뜻으로 욱(郁)의 뜻인 성하다, 문채가 있는 모양이란 뜻과도 동일선상의 한문이란 점이다. 여기에 우오(于烏)와 유사한 于자의 쓰임새를 가지는 우통수(于筒水) 와 우산국(于山國)을 비교해보면 이 두 단어에서 于자는 오! 나 아! 하는 감탄사로 쓰임새는 아님을 볼 수 있다.
우통수(于筒水) 는 한강의 시원을 나타내는 의미로 조선의 유람기에 어떤 선비는 천하제일 우통수라고 표현하였던것처럼 “于”라는 단어는 상(上)이란 개념속에 포함되는 듯 하다.
上이란 단어적 의미로 상하의 위란 뜻만이 아니라 최고와 최저에서 최고의 개념도 上位의 개념이고 시작과 끝에서도 시작이 최초라는 상위의 개념으로 통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통수는 최초의 발원지라고 해석이 가능하며 또한 우산국은 동해바다 최초의 섬으로 통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신라때 평창지명이 백오라 한 점에서 인용 (1)에서 백오가 휜 까마귀라 하는 점에 대해서 백오의 문헌적 기록은 하나도 없기에 그 연원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위의 장백산맥이나 장백이 마을의 분석을 통해볼때 “白”자는 휜색을 지칭하는 점이 아니라 장백산맥은 최고의 으뜸 산으로 장백이 마을은 연장자로서 우두머리로 통한다. 이런 점은 오대산의 비로봉에 비로란 뜻은 불교용어적 최고라 하는 점처럼 이해할 수 있다.
고려 개국전 궁예는 강원 남부지역의 주천, 영월, 평창등 20여개 마을을 제압하며 대관령 정상에서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동해의 하슬라(강릉)으로 내려가지 않고 다시 돌았다. 또한 조선시대에 율곡의“때화산중”이란 詩엣는 폭이 좁은 길에 마을이 없어 인척이 없다 하였다.
이 점에서 이해로는 평창은 사람이 살지않는 산중으로서의 표현에 욱오나 울오의 의미처럼 산중에 원시림만 무성한 곳으로 표현함은 아닐까 한다. 따라서 우통수는 샘물로 한강의 첫번째이고 우산국은 동해바다 최초의 섬이란 이해처럼 우오는 당시 국가적 영토 범위에서 태백산맥의 높은산 아래 첫번째 동네라는 의미로 이해되는 것이다.
결론으로 우오, 욱오, 울오, 백오를 지금 시점에서 하나의 단어로 지칭한다면 그 정확도에 불찰이 생길 수 있기에 위에서 언급한 최초, 최고, 으뜸이란 “상위”의 개념으로 이 범주속에 내제하는 의미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로서 필자의 평창 고지명 우오, 욱오, 백오에 대한 분석적 이해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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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우오(于烏) 관련에 붙이는 글 玄空 嚴 基 宗
주2) “강원 고지명 연구”. 이기붕. 국립 중앙박물관 학예사. 2009.
주3) 삼족오(三足烏)’의 ‘오(烏)’는 세 발 달리고 머리에는 볏을 가지는 검은 형상(烏)의 새라는 세발달린 까마귀 모양으로 홍산문화에 조형관식처럼 있어서 새의 숭배사상을 나타내는 문화이다.
세계 최고의 문명 요하문명에서 나타나는 태양속에서 태양의 불을 먹고사는 세발달 린 삼족오는 천손사상과 밝달 사상으로 요하문명으로서 동양역사의 중심을 이루는 한민족에게 삼족오는 고유의 신앙이자 창조된 삶을 가능케한 원형질이었다.
주4) 속현이란 자체적으로 지방관을 갖지못하고 지방관이 있는 주현의 범위에 소속됨을 말한다.
주5)‘80년대 미술사학자 정호영이 영춘에 고구려 온달산성을 밝힘으로서 영춘등 고구려의 남하의 중원문화는 고구려 땅에서 신라로 변함을 알게 되었으며 평창도 이와 같이 고구려에서 신라로 유입되며 고구려식 발음을 신라식으로 바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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