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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平昌"이란 지명 유래의 분석연구

"平昌" 이란 지명 유래의 분석연구

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평창에서는 지금까지 3종의 지명지가 발간되고 이에 기초가 되는 읍면지에서 평창의 각 동리에 대한 지명의 연구에서도 평창 지명의 제일 기조를 이루는 “평창(平昌)”이란 무슨 뜻인가 하는 점은 연구는 없었다. 그러기에 이 장에서 "평창"이란 지명의 어원의 출처와 그 뜻의 고증을 합니다.

"평창"의 어원의 뜻은 공자의 고향 "창평"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에 평창의 향토사학자 엄기종님의 선행 연구기록이 있어서 <인용1, 2> 를 인용하며 분석합니다.

<인용1> 엄기종 07.01.13 02:51

 

◎ 평창(平昌)이란 地名 由來

平昌은 三國時代에는 高句麗의 領域으로 郁烏縣(일명 于烏縣)이라 불리다가 신라의 三國統一 이후 景德王 16년(서기757)에 白烏縣으로 改稱하여 奈成郡(現 영월군)의 嶺縣이었다.

王建이 高麗를 建國한 후, 각 地方 豪族들을 鎭靜시켜 어느 정도 太平盛大에 이룬 뒤, 太祖 23년(서기 940년)경 국가의 기구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당시 각 고을 현(縣)명칭을 개칭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때 이 고을을 이끌던 토반(土班)들이 이 고을의 山水와 地形地勢가 中國의 孔子 出生地인 魯나라의 四川省 曲阜고을 昌平부락의 形勢를 꼭 닮았다 하여 현재의 평창읍의 鎭山인 魯城山도 중국의 지명과 같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고, 평창강을 일명 사천강이라 불리어져 온 것도 중국의 사천성을 흐르는 강과 똑같이 닮았다하여 최근까지도 사천강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그때까지 白烏縣으로 불리어 오던 현(縣)명칭도 孔子의 出生地 마을과 똑같은 昌平縣으로 하여 朝廷에 縣名稱의 改稱 을 上申하게 되었으나, 당시 국가 조정에서『공자님의 태생지인 창평(昌平)을 그대로 모방할 수 없다"고 하므로 부득이 앞뒤 글자만 바꾸어 평창(平昌)현 으로 改稱하게 되었음.

平昌縣으로 改稱된 뒤에도 原州의 屬縣이었다가 忠烈王 25년(서기 1299년)에 와서 縣令이 派遣되고 原州로부터 分離 되었으며, 禑王 13년(서기 1387년)에 郡으로 昇格되었으나 다시 縣으로 降等되었다가 李成桂가 朝鮮을 建國(서기 1392년)한 후 太祖(李成桂)의 5代祖인 穆祖妃의 고향인 관계로 郡으로 다시 昇格되어 오늘까지 平昌이란 이름으로 불려오고 있음.(03.4.평창군홈에서)

<인용2>

*농산(農山) : 봉평 유림 하찬수씨로부터 운학정 증수 시 운학정 현판 후면에 “평창(平昌)의 배산(背山)엔 노산(魯山)이요, 앞에는 사수천(泗水川)이 흐르고, 사수천 건너 종부(鐘阜)가 있고 농산(農山)이 사수천으로 다가온다”라고 하였으며, 당시 그 구현판을 향교에 보관하였으나 지금 행방을 모르며, 중국 공자의 고향 창평현(昌平縣) 곡부(曲阜)에 “農山 이씨” 대성씨(大性氏)가 있으며, 지금의 종부리 삼방산에서 평창강으로 머리를 두고 내려오는 금구귀당(金龜歸堂)형 낙타봉을 농산을로 일렀다 사료됨.

◉ 분석적 이해

위 인용의 "평창" 지명의 유래에 <인용 1>은 평창군 홈피에 오류도 있지만평창군 지명에 매우 의미있는 연구자료 입니다. 이러한 연구에 감사를 드리며 여기에 이어서 분석적 고찰을 합니다.

1) 平昌이란 어원 뜻의 고찰

평창의 지명이 신라 경덕왕 때 백오(白烏)로 바뀌고, 고려 태조 23년(940년) 에는 평창(平昌)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새 왕조가 출현되고 기득권층 등에 통치 강화의 신 사조 문명운동으로 신라때의 “우오, 욱욱, 율오”등에서 백오로 바뀌었다.

야기에 휜 白자는 고어에서는 백두산, 백덕산등과 같이 크다는 의미를 가지고 또한 미탄의 한치의 찰한(寒)자나 한림원 할 때의 翰, 홍성의 洪, 큰 德자, 말馬자등 대부분의 고어는 크다는 의미를 가지는 단어들이다. 고려가 개국하며 새로운 왕조의 출현에 다시금 기득권 층의 통제와 통치 강화를 위해 군, 현의 새로운 지명으로 개정하기에 평창군에서는 "平昌"이란 지명을 선택하였다. "平昌"이란 어원은 공자의 고향 " 창평향"에서 유래되었다 한다.(鄕은 당시 고을 단위) 이러한 연유로 말미암아 "平昌"이라는 지명도 문헌으로는 고려 초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공자의 고향 창평향이란 최근의 연구로는, 공자(孔子; BC551~BC479)는 춘추시대의 사람이지만 창평군의 이름은 이후 진나라의 상방(相邦)으로 본래는 초나라의 왕자(BC 270년대)이자 초나라의 마지막 왕인 부추(負芻)의 이복 동생의 이름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용1>의 설명에서 아래의 예문의 이해는 상반된다.

그때까지 白烏縣으로 불리어 오던 현(縣)명칭도 孔子의 出生地 마을과 똑같은 昌平縣으로 하여 朝廷에 縣名稱의 改稱 을 上申하게 되었으나, 당시 국가 조정에서『공자님의 태생지인 창평(昌平)을 그대로 모방할 수 없다"고 하므로 부득이 앞,뒤 글자만 바꾸어 평창(平昌)현으로 改稱하게 되었음.

고려 태조 23년(940년) 전국적 지명 정비작업의 일환으로 신라시대의 白烏에서 "平昌"으로 개정된 바, 이때 현 전남 담양군에 편입된 창평현은 757년 신라시대(景德王16年)에 기양현(祈陽縣)으로 개정하였다가 940년 고려시대(太祖23年)에는 창평현(昌平縣) 다시 개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 초 조정에서는 담양에서는 창평이란 지명이 수용되고 평창에서는 창평을 조정에서 모방할 수 없다 하는 점에서 담양의 경우에는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창평현으로 기록되고 있는 바, 이 점은 이해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평창에서는 공경하는 성현의 고향을 그대로 모방함은 예의가 아니란 점으로 “창평”을 “평창”으로 돌려 쓴 점은 겸손을 가진다 하겠습니다.

또한 <인용 1>에서 "평창강이 명 사천강이라 불리어져 온 것도 중국의 사천성을 흐르는 강과 똑같이 닮았다하여 최근까지도 사천강이라 불리게 되었으며"라는 문장에서 사천성은 양즈강 상류로 서해바다 산둥반도의 산동성의 곡부이며, 사천성은 내륙으로 일만리 떨어진 곳이다. 따라서 위 문장의 사천성은 산동성으로 바꿔야 한다.

2) 평창의 지명 중 종부리의 鐘阜의 지명고찰

평창읍 종부리의 鐘阜는 공자의 고향마을 曲阜에서 淵源한다고 한다.

◎ 취푸(曲阜/곡부)

곡부는 BC 6~BC 4세기에 춘추전국시대에 번창했던 작은 제후국인 노(魯, BC 1055~BC 249)의 수도였으며, 유교의 발상지로서 유교는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2,000여년간이나 儒家를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통치사상으로 삼아왔다.

중국 산동성 취푸(曲阜)시는 유교의 창시자이자 4대 성인의 한사람인 공자 (孔子, BC 551~BC 479, 72세 )가 태어난 곳이며, 전국을 주유하다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이다가 죽었다.

취푸에는 유명한 山과 江은 없지만, 니산(尼山)과 사수(泗水)가 있어 山水의 품격을 제대로 갖춘 곳이다. 니산(尼山)은 높지는 않아도 孔子의 출생지로 神이 있는 山보다 더 신령스러워 仁과 道德의 근원이며 사수(泗水)는 모든 지혜의 원천이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평창의 종부(鐘阜)는 이러한 취푸(曲阜)를 바 볘껴 쓴 점이 아니라 경각심을 가지고 모방하여 쓴 것으로 사료합니다.

3) 평창강이 사수천(泗水川)이란 점의 고찰

서강인 현 평창강은 이전에는 사수천으로 불리웠다. 사수천은 공자의 고향 곡부의 강과 똑같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정작 곡부에는 강과 산이 없다. 곡부의 위 3~4십리 위에 구글어스로도 확인되는 사수시내를 관통하여 흐르는 강이 사수천이다. 공자가 이 강가에서 후학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중국 태산아래의 공자의 고향, 곡부와 사수천의 위치)

                                                                  (원내는 사수천)

 <위 지도는 중국 산동반도 아래로 위의 검은 부분의 산은 태산이고 아래의 노란 원내가 사수현(泗水縣)이고 그아래 곡부는 창평현이었다. 이곳이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땅의 사지성의 사수란 단어가 유관하며, 신라의 땅이었으며. 고려의 강역이었다.

아래의 지도에 보면 낯익은 지명들이 여러개 보이는바 만주에서 양즈강 아래까지는 무수한 지명이 현재 우리의 지명과 동일하며 제야 역사가 한 분은 80년대 대만의 중국대사관이 폐쇄되기전 대사관을 찾아가 중국 지도를 하루 한 장씩만 복사를 하였는바 이 지도에는 중국본토에 많은 지명이 우리의 지명과 같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필자의 역사서 「평창역사의 이해」 책에서 평창의 지명 유래부분에서 사수천은 고려 실록의 사수현의 모방이란 점만 서술하였지 일반적으로 이해의 어려움이 있으며, 이곳이 고려땅이라고는 주장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은 현 우리 교육계는 왜정시대의 식민사관만 고수하는 강단사학으로 고려사는 현재 교단의 학생들에게 즉, 석, 박사 학위에 고조선 연구가 학위를 받지 못하고, 고려사는 연구하지 말라고 한다.

따라서, 이상하리만치 중국 대륙에서의 고려 중기까지 역사는 한반도로 왜곡 조작되어 우리의 역사처럼 고착화 되어 버렸기애 공자의 고향이 고려의 현이라고 서술하면 강단사학 제자들이 신고하는 등 말도 안되는 수선을 당하기 때문에 책에서는 자세히 서술하지 않았다.

이러한 강단사학의 현재까지 우리학계로 고구려 백재 신라는 한반도가 아닌 중국 동쪽이었지만 한반도로 왜곡하여 우리 민족 모두 왜곡된 역사를 , 즉 유리는 우리의 역사가 아닌 만화를 배운 것입니다.

아래의 고려 28현의 지명에 북한에는 3개이며 모두 중국에서 그 지명을 찾을 수있습니다. 이러한 고조선사에서 구한말까지 전부 왜곡된 역사로서 내년정도부터 간략하게 바른 역사로 서술할 계획입니다.

                                                       역사편찬위원회의 사이트에 고려사에 나오는 약 28현

공자의 고향 창평현과 사수현은 고려의 현이었다.

「고려사」에 기록에서는 "895년(성종) 가을 초하루에 종질 욱(郁)을 사수현으로 귀양 보냈다"고 기록하였던바 사수현은 중국 산서성의 태산 아래쪽의 공자에 고향이지만, 고려에서 다른나라로 귀양을 보내는 경우는 없을테고 창평현은 고려의 땅이다.

필자의 책 「평창역사의 이해」에서는 사수현은 중국 제닝시 공자의 고향 취푸 북쪽 위의 강으로만 기록하였다.

동 책에서는 사수현이 고려의 땅인가 하는 점에 설명은 하지 못하였다. 중국의 산서성 공자의 고향이 고려땅이었다는 주장은 아마 재야 사학자들도 부정적 견해를 나타낼 것이기에 단지 고려사의 기록만 처음으로 인용하고 말았다. 그라기에 현재 중국땅 공자의 고향 취푸위가 사수현으로 이곳이 고려사에서 귀양을 보낸곳이란 점에 대해서 기록합니다.

위 지명은 고려사에 기록된 고려의 縣의 지명으로 반도(조선)에는 4개정도 뿐이고 그외 24개 지명은 대륙(중국) 에 소재하고 있다. 고려사 139권은 그대로 보존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지금 우리의 역사와는 전혀 다르기에 식민사학만 추종하는 현 강단의 사학에서는 학생들에게 고려사는 공부하지 말라고 한다. 참으로 우서운 교육부 , 역사편찬위원회이다.

고려사에 기록된 사수현(泗水縣)을 한국학 중앙연구원에서 검색하면 어디인지 모른다고 서술하며. 다만 사수는 경상도 사천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필자는 알고 있기로는 사천문화원 책에서는 공자의 고향에 서 조금 떨어진 곳에 흐르는 강으로 공자는 이 강가에서 후학에게 강연을 하였다 한다. 그러면 한국학 연구원은 옛 규장각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역사단체는 무얼하는 곳인가?

고려사는 조선시대에 세종이 정인지에게 명하여 30여명의 학자가 6년간 집필한 책으로 139권인데 세종은 마음에 안들어했으나 문종 원년에 공표되었다. 약 3년전 고려사 원본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고려사에 지명에는 현재 중국의 지도의 지명들이 태반이고 또한 우리나라에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 다음으로는 우리나라 도시의 지명 절반은 중국에도 똑같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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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 기록된 사수현(泗水縣)을 한국학 중앙연구원에서 검색하면 어디인지 모른다고 서술하며. 다만 사수는 경상도 사천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사천문화원 책에서는 공자의 고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흐르는 강으로 공자는 이 강가에서 후학에게 강연을 하였다 한다. 그러면 한국학 연구원은 옛 규장각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역사단체는 무얼하는 곳인가?

고려사는 조선시대에 세종이 정인지에게 명하여 30여명의 학자가 6년간 집필한 책으로 139권인데 세종은 마음에 문종 원년에 공표되었다. 약 3년 전 고려사 원본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고려사에 지명에는 현재 중국에서의 지명들이 태반이고 또한 우리나라에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 다음으로는 우리나라 도시의 지명 절반은 중국에도 똑같은 지명을 가지고 있다.

사천군 지명유래 설명에서 泗水은 곡부 북쪽 인근의 강으로 그곳에서 공자는 제자들에게 설을 하고 가르쳤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점이 사수천의 이해이며 구글어스로 사수시의 시내를 관통하는 강이 사수천입니다.

 

4) 평창의 진산 노산(魯山)의 뜻과 의미는??

평창군 홈피에서 평창의 노산은 공자의 고향의 산과 닯았다고 하지만, 정작 곡부 부근에 노산(魯山)은 없습니다. 노산(魯山)은 중국 어디에도 없으며, 곡부 가까이에는 니산(尼山)이 있다.

공자는 태어날 때 머리통이 가운데는 낮고 가장자리가 높아서 그 모양이 니구산(尼丘山)과 닮았다고 하여 이름을 공구(孔丘), 자(字)는 중니(仲尼)라고 지은 것이라 한다. 이렇듯 공자의 얼굴 생김새는 노산(魯山)이 아닌 니산(尼山)과 닯은 꼴의 각별한 입장이다.

니산(尼山), 원명 니구산(尼丘山)은 산동성(山東省) 제녕시(齊寧市)의 곡부시(曲阜市) 동남쪽 30km경내,해발 340여m의 산으로 공자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공자의 고향 곡부(취푸) 인근에는 작은 산인 니산이 있으며, 공자의 모친인 안징재(安徵在)가 니구산(尼丘山)에서 기도를 올린 후 아들 공자가 태어났다. 지난해에는 니산에서 2021 중국(취푸·曲阜) 국제 공자문화제 제7회 니산(尼山)세계문명포럼이 열렸다.

이렇듯 공자와 연관이 있는 산은 니산(尼山)이지, 평창군 홈피에서 거명한 노산(魯山)은 어디에 있슬까??

곡부 인근에는 니산이 있으며 노산은 없다. 중국 전역 어디에도 노산(魯山)은 없다. 다만 곡부와 같은 산동성내에 산둥반도 아래의 청도에는 노산(崂山/ 라오산)이 있다.

                                                                      (곡부와 산동반도의 노산 위치)

◆ 위 지도를 보면 곡부는 지닝시에 위치하며 100여리 위에 타이안 시에는 중국 5악의 하나인 태산이 위치한다. 그리고 여기서 산둥반도로 370km떨어진 곳, 청도시에는 라오산(노산/崂山)이 있다.

노산(崂山)은 지리산 보다도 넓은 면적에 산 이름이 명명된 산봉우리는 38개가 있는데 그 중에는 영월의 진산인 태화산의 동명의 산도 있으며, 강(川)도 수십개 천을 만들며 해안선을 따라 90km를 산으로 병풍처럼 어우러진 바위들이 함께 어우러져 장관이다.

남연의 지리학자 안모는 “태산이 비록 높지만, 노산만 못하다.” 라고 하였고, 천하명산을 유람한 도사 구처기는 “5악 중 4악을 가보았지만 노산에 비할 수 없다.”라고 하였으며, 청나라 강유위는 “노산에 오르니 기암괴석이 온산가득 파도처럼 넘실거린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노산(崂山)은 노자(老子)가 창시한 도가(道家)의 산으로 여기에 노(崂)자는 옥편에 찾아보기 힘든 험준한 산악 “로”자로 아마도 이 노산(崂山)을 공자와 같은 시대의 출현한 魯나라의 노자(老子)의 魯山으로 바꾸어 썼는지는 모를 일이다.

이러한 노산(崂山)을 여기서 조명하는 이유는 평창의 지명에 강이 고부의 사수천과 닯았다. 하지만 魯山이 곡부의 산으로 평창의 魯山이 닯았다고 할 수는 없는 듯 합니다.

 

아마도 평창에 이러한 명칭이 도입될 시기인 고려 초는 중국의 무위자연의 노장사상과 공자의 유학사상이 발현한지 천오백년 지난 시대로 고려시대에 유교와 노장사상이 숭배되는 시기이기에 평창에서 이러한 지명을 발원한 土班들은 공자의 고향만 착원한 것이라기 보다 공자의 유학과 같은 산동성 내에 꽃피어진 노장(老莊)사상 까지에 대하여 성현들에게 경외심(敬畏心)을 가지고 평창을 공자의 禮와 노자의 무위자연 사상으로 인간성의 범주에서 삶의 이상적인 사회로 회기하고자 하는 철학을 바탕으로 사수천, 노산등의 지명에 종합적으로 담고 있다고 사료됩니다.

이러한 공자, 노자의 사상을 따라가고 싶은 당대의 평창의 지명은 타 군, 현의 어떠곳의 지명보다도 성현의 자취를 따라가고져 하는 취지로. 이는 밝은 사회를 조성하고자 하는 선별력있는 우수한 지명이었던 것으로 판단 합니다.

 

(곡부와 사수천의 위치)

구글어스 지도로 중국 산동반와 안쪽 태산의 아래 지닝시에 취푸(曲阜)가 창평현이고  그 위쪽에 쓰스이현(泗水縣)이  위치한다. 또한 곡부 (曲阜)나 평창 종부리의 鐘阜는 같은 의미를 가진다.

사수천은 시내를 관통하며 4개의 지류가 합하여 Sihe River(四合)의 강을 이루어 왼쪽으로 흐르며, 아래에 강의 표기에  Jihe River(지류)이다.

( 사수현에는 현재도 회사명에 사수의 지명을 사용한다)

<위 지도는 중국 산동반도 아래로 위의 검은 부분의 산은 태산이고 아래의 노란 원내가 사수현(泗水縣)이다. 이곳이 고려였으며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땅이었으며 고려의 강역이었다.

 아래의 지도에 보면 낯익은 지명들이 여러개 보이는바 만주에서 양즈강 아래까지는 무수한 지명이 현재 우리의 지명과 동일하며  제야 역사가 한분은 80년대 대만의 중국대사관이 폐쇄되기전 대사관을 찾아가 중국 지도를 하루 한 장씩만 복사를 하였는바 이 지도에는 중구본토에 많은 지명이 우리의 지명과 같음을 볼 수 있읍니다.

필자의「평창역사의 이해」책에서 평창의 지명 유래 부분에서 사수천은 고려 실록의 사수현의 모방이란 점만 서술하였지 일반적으로 이해의 어려움이 있기에 이곳이 고려 땅이라고는 주장하지를 않았읍니다. 그러나 고려사는 현제 교단의 강단사학에서는 학생들에게 즉, 석, 박사 학위에 고조선 연구가 학위를 받지 못하고 고려사는 연구하지 말라고 한다. 이러한 학계가 우리의 교육입니다. 이러한 강단사학의 문제는 다음으로 미룹니다.

그리고 재야 사학자들의 고조선의 많은 연구는 활발하지만 전체적으로 체계있는 연구가 아니라 이러한 삼국시대나 고려의 강역, 유적 연구는 간헐적이고 미흡하며 대부분 북경의 위의 만리장성 끝인 산해관 위쪽으로만 연구하지만 북경은 고려의 서경으로 지금도 고려의 여러 지명들이 남아 있으며 우리 역사를 사실의 역사로 다시 정립하기엔 많은 인원과 많은 시간이 걸릴듯 합니다. 이에 일반적인 이해의 조선 상고사. 그리고 우리가 잘 모르는 구한말의 식민사등은 세계사의 시각인 그레이트 게임에서 보아야 하지만 우리 국사계는 그르치지 않는, 그래서 삐뚤은 사관을 만드는 점은 후일 이해적인 글로 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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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사수천의 본문에서  사수는 고려의 지명이다라고만 하였다. 사수현은  중국 제닝시 공자의 고향 취푸 북쪽 위의 강으로  고려사의 기록으로  895(성종) 가을 초하루에 종질 욱()을 사수현으로 귀양 보냈다고 기록하였던바 사수현은 중국 산서성의 태산 아래쪽의 공자에 고향이지만, 고려에서 귀양을 중국으로 보내는 경우는 없을테고   이곳은 고려의 땅이다 라고만 기록하였다.

동 책에서는  사수현이 고려의 땅인가 하는 점에 설명은 하지 못하였다.  중국의 산서성 공자의 고향이 고려땅이었다는 주장은 아마 재야 사학자들도 부정적 견해를 나타낼 것이기에 단지 고려사의 기록만 처음으로 인용하고 말았다. 그라기에 현재 중국땅 공자의 고향 취푸 위가 사수현으로 이곳이 고려사에서 귀양을 보낸곳이란 점에 대해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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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 기록된  사수현(泗水縣)을 한국학 중앙연구원에서 검색하면 어디인지 모른다고 서술하며.  다만 사수는 경상도 사천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필자는 알고 있기로는 사천문화원 책에서는 공자의 고향에 서 조금 떨어진 곳에 흐르는 강으로 공자는 이 강가에서 후학에게 강연을 하였다 한다. 그러면 한국학 연구원은 옛 규장각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역사단체는 무얼하는 곳인가?

고려사는 조선시대에 세종이 정인지에게 명하여 30여명의 학자가 6년간 집필한 책으로 139권인데 세종은 마음에 안들어했으나 문종 원년에 공표되었다. 약 3년전 고려사 원본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고려사에 지명에는 현재 중국의 지도의 지명들이 태반이고 또한 우리나라에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 다음으로는 우리나라 도시의 지명 절반은 중국에도 똑같은 지명을 가지고 있다.

사천군 지명유래 설명에서 泗水은 곡부 북쪽 인근의 강으로 그곳에서 공자는 제자들에게 설을 하고 가르쳤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점이 사수천의 이해입니다.

4) 평창의 진산 노산(魯山)의 뜻과 의미는??

평창군 홈피에서 평창의 노산은 공자의 고향의 산과 닯았다고 하지만, 정작 곡부 부근에 노산(魯山)은 없습니다. 노산(魯山)은 중국 어디에도 없으며, 곡부 가까이에는 니산(尼山)이 있다.
공자는 태어날 때 머리통이 가운데는 낮고 가장자리가 높아서 그 모양이 니구산(尼丘山)과 닮았다고 하여 이름을 공구(孔丘), 자(字)는 중니(仲尼)라고 지은 것이라 한다. 이렇듯 공자의 얼굴 생김새는 노산(魯山)이 아닌 니산(尼山)과 닯은 꼴의 각별한 입장이다.

니산(尼山), 원명 니구산(尼丘山)은 산동성(山東省) 제녕시(齊寧市)의 곡부시(曲阜市) 동남쪽 30km경내,해발 340여m의 산으로 공자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공자의 고향 곡부(취푸) 인근에는 작은 산인 니산이 있으며,  공자의 모친인 안징재(安徵在)가 니구산(尼丘山)에서 기도를 올린 후 아들 공자가 태어났다. 지난해에는 니산에서 2021 중국(취푸·曲阜) 국제 공자문화제 제7회 니산(尼山)세계문명포럼이 열렸다.

이렇듯 공자와 연관이 있는 산은 니산(尼山)이지, 평창군 홈피에서 거명한 노산(魯山)은 어디에 있슬까??

곡부 인근에는 니산이 있으며 노산은 없다. 중국 전역 어디에도 노산(魯山)은 없다. 다만 곡부와 같은 산동성내에 산둥반도 아래의 청도에는 노산(崂山/ 라오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