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平昌歷史 史觀定立

평창의 관문 용산정을 복원하자

평창의 관문 용산정을 복원하자

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용산정(龍山亭)은 주진교를 건너며 용산의 비경 위에 용산정이 있었습니다. 용산정의 유래는 아래에서 서술하듯이 임진왜란 당시 우리고장 출신  이여림(李汝霖) 의병장을 추모하는 누정으로서 이제, 우리는  다시금 용산정을 복원하여 이여림(李汝霖) 의병장이  목숨을 받쳐 조국을 구하고 한 숭고한 충정의 의(義)를 기리고 얼을 살리며, 이로서 평창인의 기상과 자긍심을 높이는 정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 입니다.

또한, 용산정은 뱃제(梨峙)를 넘어서 평창을 들어오는 관문(關門) 으로  평창을 내방하는 여행객에 용산정은 평창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고장이란 점의 상징으로 평창의 랜드마크를 만들어야 함은 좋치 않을까 합니다.

더 나아가서 절개된 용산의 양쪽에 구름다리를 놓고  레포츠의 소공원으로 만들고, 또한 지나는  사람들에겐 한번쯤 오르고 싶은 레져 평창의 이미지 효과를 창출함도 좋을 듯 합니다.

< 용산정(龍山亭)유래>

평창읍 후평리와 주진이 경계되는 작은 산정에 소재하였다.

이조 선조 25년에 의병장 이여림(李汝霖)이 모병하여 횡성에서 싸우다가 세 불리로 자결 하였던 바 이에 그의 애마가 그의 목을 물고 와서 울다가 龍潭에 빠져 죽었다.

이 사실을 목격한 부락민들 중 禹弼奎, 李元逸 등이 유생들을 모아 詩會를 조직하고, 여기서 기금을 조성하여 용담의 윗산 용산의 山頂에 용산정을 세웠다 한다. 이 亭은 용담부근의 절경과 어울러져 마치 날아갈 듯 서 있으나 6,25시에 요실되고 말았다.

◆ 출처 ; 1986년. 평창읍지. 206쪽.

(주진리 주나루 비의 명문(銘文)에도 위의 내용과 같은 이여림 의병장을 기록하고 있다)

< 호구록에 기록된 이여림(李汝霖)>

(호구록은 임진왜란(1492)년 당시 평창군수 권두문이 왜군에게 포로가 되어 원주 감령까지 끌려갔다가 탈출하는 과정을 기록한 일기첩 입니다)

◆ 호구록 9월 10일
모래고개(沙峴)(현재의 평창읍 입탄리 노래재)를 넘어 약수를 지나니 날이 훤하게 밝았다.
이여림(李汝霖) 의 집 길가 말머리에 내려 살아서 평창 온 것을 감사하는 큰 절을 하늘을 향해 했다. (중략)
그날 저녁은 향교에서 묵기로 하고 좌수(座首)도 함께 잠을 자기로 했다.

이여림(李汝霖)  의병장은 평창 호족으로서, 평창 역사서인  당시 권두문 군수의 호구록에서는  권 군수는  원주 관아에서 탈출하여 평창 읍내로 들어와서 이여림의 집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여림의 묘소는 주진리 장암산 자락에 있다고 한다.

<용산의 위치와 용산정의 전경도 >

( 용산의 평면 지도)

(평창을 들어오는 주진교 위치에서 보이는 용산정)

( 평창을 나가는 후평리 쪽에서 보이는 용산정)

( 주진리의 평창강과 용산의 秘境)

--------------

위 정자의 이미지는 김천 시내의 高城亭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