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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송학루(松鶴樓)의 유래

송학루(松鶴樓)의 유래

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평창읍 종부리에 있는 송학루는 1928년 당시 조선 관아의 문루였던 대외루(大畏樓)가 헐리게 되자 이 지방 유생들과 유지들이 한 마음으로 성금을 모아 현 위치에 당시 모습 그대로 이축한 것으로 정면 3칸(7m), 측면 2칸(3m)의 누각으로 팔작 지붕으로 운치 있게 보이는 겹 처마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평창의 진산을 노산이라고 기록하기에 정자가 위치하는 남산은  시내를 건너 평창의 안산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푸른 송정의 숲에는  휜 학이 서산에서 날아들고  검푸른 사천(泗川)강은 더디소(沼)를 만들며, 휜 모래톱의 백사장을 돌아드는  언덕위에 세워진 송학정은 平昌 第一景의 자태의 아름다움을 드리우며 평창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사천강은 현 평창강이다)

 

< 사진 김종철 제공>

 

송학정 아래 강변의 바위들 중에 동쪽으로 높은 곳에 암반에 붙은 바위에 아래 사진의 금석문이 있다.석각은 한자 각 조금 넘는 크기로 "金泰東"과  작은 글씨는 "소화 3년"이라고 조출되어 있다. 해서체로 음각의 볼륨이 깊게 조식한 점에서는 능숙한 석공의 진솔한 성의가 드러나 보이는 조각이다.

 

예전에 이곳 바위장강 아래에서 물놀이를 하고 낚시하던 사람들은 이 이름을 자주 보았지만 지금까지 이 이름의 주인은 알 수 없었다. 따라서 필자는 평창군수 명단의 선생안을 여러 번 찾아 보았어도 알 수가 없었다. 석각 글씨는 예사롭지 않은 수준으로 이 이름엔 대체 무슨 역사가 숨어 있슬까 궁금증은 더해갔었다.

 

필자는 한 권의 평창 지리책을 만들기 위해 요즘 관심을 가지며 평창이란 지명 이해에 송학정이 관련되어 있기에 김영주(평창군 기획감사 실장 역임)님에게 혹  남산정이라 하는 송학루에 대해 아시는 점이 있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간 알 수 없었던 여러 이야기를 증언해 주신다.김영주님은 일제 말기 초교시절 (당시 초교는 평창중학교 자리) 남산 송학루에 올랐다 한다.

 

아래 사진의 석각의 이름의 주인은 본인(김영주님)의 큰 조부님의 존함이 새겨져 있고, 또한 송학루 2층 계단을 오르며 서편에 걸여 있는 현판은 송학루 준공의 기부금 내역의 명단으로 제일 첫 줄에 큰 조부 김태동님의 존함이 쓰여 있었고, 당시 제일 만은 2원을 기부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1원을 내신 분으로 유 ㅇㅇ(구 대창상회 조부)이고 그 외  50전등 기부하며, 많은 유지와 유생들이 송학루 공사 기금을 마련하였다 합니다.

 

김태동님은 향교의 전교(典校)와 도유사(都有司)를 하셨고, 정자각 아래의 금석문에 이름이 새겨진 점으로 보아 송학루 건립에 많은 공을 가진점으로 보이며, 이에  여러 지방 유지들은 감사의 표시로 석각으로 존함을 새긴 것으로 사료 합니다.

 

(남산 송학정 아래 바위에 세겨진 금석문)

 

김영주님은 또한 해방이후(1945~50년 사이)에도 송학루에 올라보니 이 헌액 현판은 그대로 있었으나,  6,25때 정자각의 외부는 오래되어 바래고 낡았지만 그대로인데 내부에선 현판도 떨어져 부서지는 등 파손이 심하였다고 증언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1950년 6,25에 파손된 정자를 1953년에 보수하고 1977년에 증수하였으며, 1993년에 다시 단장하였다,
1993년 새로 단장 함에는 송학루란 명문의 편액이 바래고 낡아 새로 교체하였다. 이때 새로 준비한 편액의 글씨는 우리고장 출신 서예가 일석(一石) 오이환 선생이 쓰시고 인간문화재 각자장 철재 오옥진 선생이 새긴 것이다. 새로운 헌액이 걸리며 종전의 헌액은 내려서 향교로 보내져  보관하였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한다. 

 

철거한 구 현판에 뒷면에는 평창의 지명 유래에 대한 설명의 기록을 하고 있다고 하며 이를 한학자 하찬수 선생께서 풀이한 문서를 향토사학자 엄기종님이 증언해 주셔서 필자는 지난 글 "평창의 지명 유래" 편에서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https://blog.daum.net/kkks1/1917  "平昌"이란 지명 유래의 분석연구

 

이 부분에 다시 고찰해 볼 문제는 1928년 송학정이 세워지며 편액의 뒷면에 천 년전부터 사용한 평창의  유래를 기록했다면 그 기록자는 당시 김태동 전교께서 송학정 건립에  중심에 있었기에 혹 당사자이거나 이 기록의 전모는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입니다. 따라서 혹 지금도 문중에 어떠한 평창역사의 책이나 문서 기록이 전하지  않았슬까 궁금하였지만  경찰서 뒤에 있던 자택은 이후 전소되었다 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더 이상 평창 역사가 존재할 수 있슬 것이란 희망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송학루 실내 현판>ㅣ

이상 평창의 선대인들의 아름다운 평창가꾸기의 하나로 남산 송학루 이야기를 전합니다.

당시 평창인들은 모두가 하나의 마음으로 모두가 협력하여 후대에까지 아름다움을 전하는 송학루를 건립하였던 것입니다. 

 

ssssssssssssssssssssssssssssssssssss

 

<아래는 예전 필자의 글중에서 발췌합니다>

********* [ 남산 송학루와  평창예찬!! ] *********

후세백작  작성일16-08-24 16:29

 

어린시절 남산 송학루 아래엔 서산 미륵땅 어디에선가 백학이 날아들고, 선비들의 기개를 자랑하는듯한 청송의 숲과 하얀 백사장 아래에 뚜꾸뱅이 노니는 검푸른 사천강물은 평창 서정의 대명사라, 평창 낭만의 제 일의 절경으로 물과 산이 어우러지는 아룸다움을 자랑하였건만 이제 옛 정취는 찾을 길이 없었다.

 

< 송학루 아래의 평창강>

 

그 옛날 이빨을 하얗게 드러낸 백사장의 모래는 이제는 드문드문 있으며, 그 사이로 여울이 흐르고, 기억에도 없는 바위 몇 개가 덩그러니 나동댕이 친다.  왜 그럴까 자세히 보니 철망에 돌을 넣어 다졌던 종부 수중보가 남산을 관통하는 터널의 수로로 대체되고, 백사장은 군 수입이란 미명하에 골재 체취로 마구 파 뒹겨 졌으며 가두리 수중보는 허물은 탓에 지금의 송학정 아래의 더디沼는 사라지고  떠내려가는 배 "舟"자 형상으로  어수선하고 빈촐한 강물은 넉넉함을 갖지 못하여 산과 강은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굳이 풍수적이지 않더라도 물이 가득차면 만유(滿流)의 사천강은 시각적으로도 넉넉하고 여유있고 富하게 보일 것이다.

 

 송학정 아래로 이르는 곳엔 낙차가 큰 만큼 여울이 커져서 (위의 사진이 여울이 없어질 높이만큼 물이 차 올라야 남산 백사장은 다시금 우리에게 滿裕의 여유로움을 선사하지 않을까??
지난번 고향 방문때 이른 아침에 남산 정자각에 올라 평창의 풍치를 감상 하노라니 평창강 아래엔 평창강 개발사업이 한창인듯 하다.

치산치수라,, 강물도 깨끗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깨끗한 평창, 아름다운 평창의 가꿈인 것이다.
그 사업의 전반적인 플랜은 잘 모르지만 예전에 홍수로 인한 제방의 안전을 위해 보를 이전하고 허물고 백사장도 파딩기고, 강물이 곧바로 빠르게 직류로 내려가게 하였지만, 이젠 좀 여유로운 세상이라 급급했던 현실에서 차원을 달리하여 격을 높여서 이왕 평창강 개발사업에 가두리 수중보를 만들어 물이 넘치는 풍광의 정취와 수중보의 다목적 이해로 황쏘가리의 본고장을 자처하듯 깊은 물에 사는 고기들도 다시금 찾아와 노닐게 하면 따라서 또한 학들도 먹잇감이 풍부한 송학정으로 몰려 들것이다.


지금처럼 강물을 그냥 빈촐히 떠내려 보내지 않는 滿裕의 풍족하고 넉넉한 수량은 강은 물론이고 산까지도 균형잡아 아름답게 비쳐지며, 또한 그것에 연계되는 동, 식물군의 번성은 또한 얼마나 즐거우랴.


송학정 아래 검푸른 물과 하얀 백사장의 모래톱에 뛰노는 아이들,,
푸르다 못해 싱그런 청송의 숲속 송학정에 노니는 천년 신사 백학.
이 모든 것이 평창의 가장 아름다움이요, 평창의 서정으로 푸른 평창의 활력소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또한 평창인들에게 주어진 소리없는 과제는 아닐까요??
선비들이 즐겨하는 소나무로 가득찬 남산의 송학엔 그 옛날처럼 천년 학이 날으는 모습을 재현하는 노력은 어떨까??


언제보아도 산과 물이 충만한 나의 고향 平昌!!
군민 여러분들의 노력과 수고로 잘 가꾸어진 남산과 평창!!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자연은 자연다워야 한다.
그러기에 남산 송학정에 걸맞게 매치되는 푸른 강물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램 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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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전쯤인가 평창강에 수중보를 만들어 졌다.

필자는 가물막이로 넉넉한 평창강을  보자 기분이 좋았습니다.

물론 이러한 공사는 제방이나 도로공사등 일반적인 공사가 아니기에  혹 지탄의 대상이 될까 공사부처는 고민도 있었겠고 저의 글도 보았슬 듯 합니다 .

 

가물막이 수중보는 우리 평창사람들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으나 평창을 내방하는 사람들에게 내려다 보이는  만유(滿流)의 평창강을 아름답다고 표현할 것입니다.  더욱이 야경에 비취는 강물은 더욱 정취를 더합니다.

내방자의 평창 첫 인상은 그냥 ok 입니다.

 평창의 관문의 첫인상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것이 외래 방문자들의 가슴에 남는 평창 이미지 입니다.

 

남산 송학루가 평창 제 일경으로 자리하기엔 만유(滿流)의 평창강과 푸른 청송의 남산과 송학루는 하나로 잘 가꾸어 져야 하는 것입니다. 

 누정이란 그곳에서 놀며 시도 한수 쓰지만 또한 누정의 정자는 보는 아름다움을 가집니다.

그러기에 지금 청송의 숲은 좋치만 최소한 시내에서 송학루가 언뜻 보일만큼은 곁가지를 치는 점은 어떠한지요 

 

그러면 아쉬운 점 한가지 더 이야기 합니다.

평창을 벗어날 때 후평에서 주진 다리를 넘는 야산은 용산으로  예전에는 산 위에 용산정이 있었다 합니다.

이번 증언에서 김영주님은 옛날에 용산정에도 오르시고 그 위치를 정확하게 말씀하시는데 아마도 용산정은 평창을  방문시 주진교 윗 산 위에 아름다운 정자가 보였슬 것이고 또한 반대로 평창을 나갈때도 후평에서 보여서 양 쪽 모두가 보이는 산 정상에 자리하였슬 듯 합니다.

 

이로서 용산정은 평창의 관문처럼 평창을 상징하는 문화가 숨쉬는 랜드마크였습니다.

이러한 용산정을 다시 복원하여 평창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평창사람들은 용산정에 올라 시 한수 짓는 여유스런 문화의 고장임을 다시 빛내는 점은 어떨까요?

이상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