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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송계산은 원래 이름은 여름산이다

송계산은 원래 이름은 여름산이다

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평창읍의  장암산과 남병산, 청옥산을 잇는 삼각 트라이 앵글의 고원부에는 장바우가 있으며  장암산 능선에서부터 산등성이가 길게 이어지는 긴등의 산을 현재는 송계산이라 부른다. 하지만 송계산(松契山)이란 명칭은 일제 후기에 불리어졌으며 일제 초기까지도 동 산은 여름산(餘蔭山)으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따라서 아래의 여름산과 송계산의 분석 연구에 의하여 원래의 여름산의 산이름으로 다시 개정되어야 한다.

( 현 지명으로는 송계산으로 되어있다)

 

◆여름산의 고찰

1) 「평창군 지명유래」에서는 "송계산은 상리에서 주진에 이르는 산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 주;  「평창군 지명유래」  평창문화원 발간. (2,000, 12.) p 17.

2) 「평창군 지명지」에서는 여름산(여음산(餘蔭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 주; 「평창군 지명지」 평창문화원 발간. (2015. 06.) p115.

3) 「강원의 고지명 」 p 64  평창군 지명지와 동일본 내용임.

       * 주; 「강원의 고지명 」 강원도 문화원 연합회 발간 (2015,03)

4) "조선지지"자료 

(조선지지 자료는 54책의 필사본 지지(地誌)자료로서  일제는 1910년 이후 토지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조사한 기록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름산 고찰의 이해 

3) 항의 "강원의 고지명" 기록에서 지명으로 餘蔭山이고 한글명은 여름산이라 했다. 여기서 한문의 餘蔭山의 발음은 여(餘)자에 자음이 없어서 자음접변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발음상으로 여음산이 되지 여름산이 되지 않는다.

4) 항에 "조선지지" 자료는 1910년대 기록으로 조선 말기에 餘蔭山(여름산)으로 불리고 있었다고 이해되는 기록이다.

 3) 강원 고지명의 기록은 4)항의 조선지지에 자료의 기록으로  餘蔭山을 여음산으로 표시하지 않고 여름산으로 기록한 점에서 보면 이 뜻은 여름산인 것이다. 그리고 한문으로 "름"자의 값이 없기에 소리값(음의 값)으로 餘蔭山(여음산)을 표시한 것으로 이해된다. 야기서 蔭(그늘 음)이 음으로 사용되었지만 그늘 음은 "여름"이란 뜻과 관련이 있기에 여름산의 여름은 계절을 뜻함을  이해핳 수 있다.

 그래서 여름산이란 계절 용어인  "여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송계(松契)의 연원 

우리의 전통사회는 대부분의 촌락은 산을 비롯한 생산수단을 공동 소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촌락사회가 산을 공유하는 목적은 연료, 즉 땔감과 목초(木草)를 확보하고 이용하기 위해서이다. 연료는 온돌구조를 한 한옥에서 필수생활 요건이었고, 목초는 화학비료가 없었던 시대에 퇴비마련과 가축사육에 필수였다. 개인이 산을 소유하지 못한 촌락성원에게는 특히, 동리산에서 이들 생활요건을 조달해야만 하였다.

따라서 마을 주위의 산림은 공동이용의 대상이었고, 공동이용자들이 산림의 훼손을 막고 스스로를 상호규제하기 위하여 송계가 필요하였다. 산림보호에 대하여는 수령도 책임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송계를 적극 장려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어느 정도의 형벌권도 허용하였다. 그리하여 도벌자나 송금(松禁)을 게으르게 한 자에 대해서는 태형(笞刑)이나 벌금형까지 가하였고, 심한 경우에는 고관징치(告官懲治)도 하였다.

송계산의 산림을 도벌하다가 발각될 경우 제재를 받게 되는데, 보통 과중한 벌금을 물게 하며 그 벌금은 계의 기금이 된다. 송계는 연중 일정한 시기에 모임을 가지고, 그 해의 결산을 보고하고 다음해의 유사(有司)를 선출하며 식림(植林) 등의 관리문제를 논의한다.

송계는 1917년 면제(面制)가 발포되어 동유재산 및 계의 공유재산이 면유재산으로 몰수되고, 「계취체규칙 契取締規則」으로 동 단위 자치조직으로서의 계가 급속히 쇠퇴함에 따라, 많은 지역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출처: 한국 민족문화 대 백과사전 (송계(松契))]

 

◆평창의 송계산 

평창의 송계산은 일제 강점때 땔감으로 인한 훼손에 나무 보호를 위한 송계를 실시한 바 이에 연유하여 송계산이라 한다. 조선조부터 전국적으로 송계나 동계(洞契)를 실행한 산은 많아서 송계산은 일반 명사이나 평창에서는 송계산을 동 산의 고유명사로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평창의 송계산은 이 고장의 정체성을 갖지 못한  지명(산이름)이다.

평창의 선인들의 지혜는 지명에서도 잘 나타나는 바 그 예로 성마령이나 육백마지기(금성마루)는 별을 이야기 하는 지명으로는  전국에서  유일하고,  또한 여름산(餘蔭山)은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의 여름을 지명으로 사용함에도 전국적으로 유일하다.

 

평창의 송계산은 마치 말(馬)머리의 강인한 목처럼 긴등을 길게 드리우며 힘차게 달려 내려와  산 기슭을 갖지않고  마치 명당이라하는 월정사 뒤의 동대산처럼 상리교에서 힘을 뭉쳐서  멈춰선 산세는 진취적인 평창인들의 기상을 연상하는 듯 하다.  이러한 동 산이 과거에는 여름산으로 불리는 연유에는 아마도 여름과 관계가 깊었던 듯 합니다.

 

여름산 아래에 강변은 노람강변(갱변) 또는 노람버덩이라 하며 '6~"80년대에도 평창인들은 이곳 강변에 천렵이나 야유회를 하며  물놀이의 시원한 여름을 보낸 노스텔지어(향수)가 어린 곳으로, 먼 옛날에도 평창인들에게 시원한 여름을 만들어 주었기에 여름산이라 불리게 되지는 않았슬까 사료합니다.

 

평창의 송계산은 일제 후기부터 불리어진 산 이름이지만 여름산은 1910~20년대의 기록에서 보듯 조선시대부터 불리어진 산 이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여름산은 평창의 선인들의 지혜가 담긴 산 이름으로  지역적 특색의 정체성을 가지는 산이름으로 전승하며 아름다운 평창에 일조가 되어야 합니다.

 

 

(참고) 노람강변/ 노람버덩은 蘆(갈대노) 濫(넘칠람)이다.

 

 위 필자가 언급하는 노람강변은 모든 지명지에서는 노암 뜰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노암사(魯庵寺)에서 파생된 단어라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평창사람들은 노암뜰이 아니라 노람강변으로 불었었다.

여기서 노암뜰은 노람으로는 발음되지 못한다. 그것읜 위의 예시처럼 자음접변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암'자가 '람'자로 발음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필자의  어린 시절 "70년대엔 노람강변에 소풍도 가고, 천렵도 가는 등 노람강변은 평창사람들에게 뜨거운 한여름에 시원함을 더하는 정겨운 장소였다. 이러한 노람강변의  단어적 순수한 뜻은 본인의 예전 게시글 평창의 "가을서정" 편에서 이미 밝힌 바 노람버덩은 蘆(갈대노) 濫(넘칠람)와 나무는 없고 풀만 우거진 곳을 버덩이라 하는 합성어로 갈대가 우거진 강변의 뜻으로 옛 시절의 정취 어린 평창 말로 노람 버덩이라 하여야 옳은 뜻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노암사 때문에 노람이란 단어가 생겼다는 기록은 필자의 이해에는 상반된다.

따라서 필자는  노암뜰이 아니라 노람강변/ 노람버덩은 蘆(갈대노) 濫(넘칠람)이다라고  기록합니다.

 

이번에  송학루 이야기를 증언하신 김영주 옹(전 평창 부군수)에게 노암사 탑을 보여 드리면서 이 탑은 보신적 있습니까 문의 하였더니 왜정말에 중리 현 돌 체험관 아래쪽에서 보았다고 생생히 증언하는데 이 탑이 노암사 탑입니다 하고  말씀 드리니 노암사란 이름은 처음이라 하신다. 이렇듯 중리분들에게도 노암사란 절은 생소하며 아래 사진에서 보면  사찰은 없고 탑만 남았으며 주변은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는 바 이러한 사찰이름이 들어가는 노암뜰이라 하는 점은 필자로서는 이해가 곤란하며 필자는 평창인으로서  지난 10년간 평창역사를 바르게 정립했듯이 앞으로도 평창역사를 바르고 아름답게 손질 하겠습니다.

 

다음 이야기로는 평창의 제 일경  검푸른 사천강과 남산 송학정!!

 송학정의 유래이야기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노암사 탑 , 1912~15년경 세키노 다다시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