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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강원도 고적대장」의 평창 기록 (1부)

「강원도 고적대장」의 평창 기록 (1부)

* 출처 – 국립 중앙박물관의 조선총독부 자료내에서 발췌함

 위 강원도 고적대장의 내용중  문서에 기록한 1)진부면 탑상리 탑  ,2)진부면 수항리사지 탑 5). 중리탑. 6) 상리 탑. 7} 하리 탑 9)  유동리 탑에 관한 기록. 그리고 5층탑이 아래의 문서에서는 3층탑이라 하는데 이러한 문제는 월정사 8각9층 석탑과  이 문서에서는 탑상리 탑과 상리탑이 3층, 5층으로 각각 기록된 바 아래에서 이 문제를 연구토 합니다.

 이어서 마지막 장에서는 월정사 8각 9층탑이 원래는 13층 탑 아니었던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빈틈없이 연구합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10여년전 필자의 블로그에 남긴 게시글을  이번 한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 평창 지리 정보의 모든 것을 논하며 이 점의 연구를 기록합니다

탑 박사들은 정영호 박사는 월정사 탑의 팔각형은 덩 탑 조사서 리포트에서  고구려 목조 팔각탑의 승계라 하였지만 필자는 정형탑이란 이름의 신라 4각탑에서 고려 초 팔각 탑의 출현은 고구려가 아니라  송나라 선진문화 유입이라 하였으며 3년전쯤 임용고시 문제에 팔각탑에 정답은 고구려가 아닌 송나라입니다. 박사들 앞에서 이름도 없는 초라한 본인이 더 밝았습니다.

그의 제자 박경식 박사는 수항리 세미나 논문 전체에 수항리 탑에 곤한 문장들은 모두가 오류임에 이것은 어떤 논고이 다른 견해가 아니라 탑의 제원산출등 자 하나만 가지면 다 밝히는 점이기에 오류라 단정합니다.

아래서 연구하는 이런 점은 탑의 역사가들은 문외한이라 관심도 없는 연구입니다. 다만 그들은 탑을 역사 기록 등의 연대순의 역사로 꿰 맞추기 식이지 도형으로 환산해 보는 등 조형론은 갖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필자는 아래서 논고할 수항리사지 논문에서 이러한 조형론을 스스로 공식을 세워서 탑의 원형을 찾아 간 것입니다.

국립 중앙박물관의 ”조선총독부자료“내 평창의 탑 기록

◆ 탑의 이해

(강원도 고적대장의 기록순으로 탑의 분석적 연구를 합니다)

1. 진부면 탑동리 3층 석탑

위 문서의 일제때 ”강원도 고적대장“에서는 진부면 탑동리 탑은 5重석탑으로 표시하였고, 所有항에는 사유지로 되어 있다.  면적은 약 100평으로 주변에 주초석과 와편이 산재해 있다 한다.그러나, 아래 사진에 보이는 동 탑은 3층 탑으로 5층이라 한 점은 2중 기단석까지 포함하여 잘못 헤아린 점이며,현재는 3층석탑으로 강원도 유형문화제 제 26호로서 ”전국 문화유적총람“등에 등재되어 있으며 현재는 사유지가 아닌 마을회관에 위치한다.(진부면 탑동리 234-1번지) 이 곳은 ”田“이 될 수 없는 지형이기에 현재로서는 이전된 상태로 판명된다.

탑동리 사원지의 고찰

탑동리 탑은 인터넷 상에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모든 이야기들이 추정의의문으로 일관되기에 이 장에서는 이러한 부분들을 연구합니다. 탑동리 탑의 원 위치에는 두 곳의 위치에서 이전설이 있으며 위에 설명한 필자의 견해로는 진부면 탑동리 242-1번지에서 이전된 것으로 사료합니다.

(탑동리 폐사원지 추정지 위치)                                       (추정지 탑동리 242-1번지 전경사진)

우측의 사진은 사원지 추정지로 경지 정리가 된 곳은 약 70여 평이고 축대 위는 2-30평 정도이며 공간을 가지며 그 위에도 축대를 쌓아 올린 점으로 보아 이곳과 아래 경지정리가 된 땅에 탑과 법당, 요사채등의 사원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축대 위의 땅으로 분리되며 위에서 내려오는 길은 서편(사진에 우측)에 축대를 쌓아 올리며 계단도 만들었다. 축대는 앞으로 나오면서 감실같은 공간을 만들며 곡각으로 쌓아 올리면서 마감을 하였다.

(석벽에 6~70 cm의 공간을 만들었다)                             (출토한 사방 연속무늬 와편)

이 동네에는 큰 자갈들이 많아서 밭 가장자리로 이러한 돌들을 만이 볼 수 있으며 경작지를 만들었기에 건축물을 만들었던 부재의 돌들이 서측 측벽에다 무져 버렸기에 석벽의 모양은 가리고 있다. 또한, 경작지 주변애서는 지금도 와편(瓦片)이 출토된다.

탑동리 탑이 5층탑인가 3층 탑인가에  대한 분석연구

동 탑을 일제때 ”강원도 고적대장“에서는 5층(5重)석탑으로 기록하였으나 이후 ‘전국 문화유적 총람”등 모든 문헌상에서는 3층탑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에 필자로서는 어느쪽인가 하는 분석도표로서 아래에서 연구합니다.

위 탑의 오른편의 임의의 노란 사선은 1,2,3층 기단석의 상부와 탑의 상륜부 노반의 상부와 임의 사선에 일렬로 배열하고 있다. 여기서 만약 오층탑이라면 위로 2개층의 옥개석과 기단석이 더 올려지기에 5층의 기단석은 노반의 상부 점보다 작아져서 임의의 사선 안쪽으로 배열되기에 5층탑이 아니라 삼층 탑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면 가령 일제 당시에는 3층 석탑을 기단석의 갑석과 받침석까지 헤아려서 5층 탑이라 하였슬까??

이러한 문제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비근한 예로 단원 아래에서 별도로 월정사탑의 문제를 인용합니다.

(탑동리 삼층석탑)

위 사진에서 탑동리 탑을 언뜻 보기에도 초층 탑신석, 초층 옥개석에서부터 모든 부재들이 모두 수평 수직이 조금씩 일그러진 점을 보인다. 또한 상륜부의 노반과 복발은 다른 쪽 방향에서는 중앙에 자리 잡지 못하고 한 면으로 치우쳤다.

이 점은 탑의 옛 사지에서 이곳으로 이전시 탑의 통석으로 된 각 부재들이 서로 원래의 방향으로 맞추지 않고 엇박자로 물려 맞추었기에 위 사진에서 2층 탑신석과 2층 옥개석 사이들엔 조금씩 뜬 공간을 볼 수 있다. 이 점의 원인은 아래 초층 기단석이 똑같은 방향으로 못 맞추었기 때문이다. 지금 사진에 보이는 초층 기단석의 직각으로 다듬지 않았는데 이러한 이유는 다음에 있다.

탑을 만들기에 원석에서 첫번째로 가공해야 할 부위는 바닥면이다, 바닥면의 사각을 잡고 수평면을 다듬는데, 석재를 가공하기에는 비문등 2m 정도의 넓은 면을 연마하기엔 두껍고 무거운 석재를 위에 올리고 축력을 이용해 윗 돌을 연자방아처럼 굴리며 숫돌로 이용해 연마해야 하는데 작은 부재들은 이런 점이 아니라 석재를 정으로 쪼아 평탄면을 만들기에 각 부재들의 접합부위는 고르게 연마하지 않는 경향을 가지기에 처음에 조각된 각 부재들을 위 아래를 부재를 맞추어 보고 수직을 맞추기 위해 접합부위를 부분적으로 깍아 맞추어 다듬었기에 부재 하나씩은 직각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접합하여 수직과 수평을 맞춘 상태이기에 탑이 이러한 틈을 가지는 탑은 해체 복원이나 이전시 같은 발향으로 못맞추었기 때문이다.

탑의 조각은 동시에 4면이 함께 맞아야 하는 어려움을 갖기에 아래에 논고할 수항리 사지탑도 부재를 도난후 다시 올리기에 평면이 아닌 동시 4면이 함께 맞아야 하는 지점을 찾지 못해 이러한 틈의 이격을 보이고 있다. 수항리사지 탑은 탑신석이 면석으로 맞추기 더 어려움을 가지기에 사면 접합이 완벽하세심한 주의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한점의 특이 사항은 아직까지 이 문제를 관찰, 발견하지 못했기에 조명을 받지 못한 점으로 옥개석 전각의 면에 문양을 조식(彫飾) 하고 있다.

(탑동리 탑 3층 옥개석 전각부분 사진)

탑의 면을 치장하기 위해서는 삼산화 문양이나 양복련의 문양을 조식하지만 사진에서 보듯 전각이 타원 곡선을 가지기에 기하학적 무늬를 새긴 듯 보이기에 이 점에 확실한 연구가 요구된다.

우리나라 1,200여기의 탑에서 옥개석의 전각에 전각에 문양을 조식한 탑은 하나도 없고 단 한점 승탑인 원주 법천사의 지광국사의  현묘탑(승탑)에서만 존재 합니다.

(원주의 국보 2점은 지광국사의 부도비와 101호의 지광국사 현묘탑입니다. 동 탑은 일제초 오사카까지 팔려나갔다 돌와와 지금까지 수난만 격고 대전 문화재청에서 정비가 끝났으나 법천사지  구간정비 관계로 110년이 넘도록 자기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속에 혹시 한가지 의문점은 이 정도 조그마한 사찰에 비해 탑은 크지 않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과연 이 깊은 산속 절에 신도들도 없슬텐데 화주승이 보시를 받아온다 하여도 곤궁스런 강원도 산간지방이라 신도들도 별반 없슬테고 탑을 만드는 재원도 없슬텐데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 점에서 조선시대는 유교주의를 지향하여 사찰은 화주승이 보시로 시주를 받는 점이 일반적이고 특이한 점으로는 조선 선비들이 평생 가고싶어 하던 금강산 유람을 당시에는 휴일도 없고, 여행 휴가란 더욱이 없어서 말년에 관직을 하직하고 여행을 떠난다. 이미 연루하여 걷기가 힘들어 말을 타고 가며 산에 오를때를 위해 견녀등 가마를 가져간다.

금강산 유람시엔 말을 타고 하루 70리 정도 이동하다가 단발령을 넘으면 고성 군수가 금강산 사찰에 연락하여 약 열명정도의 스님이 내려와 대감을 가마에 태우고 교대로 산길을 오른다.

재미있는 일화 한점을 소개하면 조선시대 내놓으라 하는 육창(창자 돌림의 육형제)중에 둘째 창협은 오대산기에서 한 대목엔 가마를 들고가는 젋은 중들 중에 한 명이 대감 나으리 다음에 오대산 오실때는 가마를 가져 오지 마세요라는 기록도, 가마를 4인조로 들고 각 암자까지 돌아다니는 힘든 산행이지만 부역이 아니라 노임을 받아 절간의 살림에 든든라게 보탬이 되는 것이다.

조선사회의 사찰들은 궁핍한 재정난을 겪지만 고려는 불교 국가로 불교중흥에는 사찰에는 수조지라는 사원지를  내려주며 노비도 갔게 하였다. 이러한 재정상의 도움에 고려는 불국토로 많은 사찰에 석탑및 많은 불교 문화유산까지 남기게 돤다. 이러한 배경속에 깊은 산속의 조그만 사찰일지라도 佛心을 나타낼 수 있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주) 5중탑은 3층 석탑에 2중 기단석까지 합하여 센 것이라고 필자로서는 이치에 맞게 설명하지만 또 다른 케이스가 있다. 그것은 ”70년 월정사 8각9층 석탑을 해체 복권공사 감독 정영호 박사와 당시 기록관 홍사준(부여 박물관장 역임) 두 사람의 복원공사 리포트에서는 월정사 9층 석탑이 일제때 최남선이 감수한 이능화선사는 “조선불교통사”에서 월정사 탑은 12층 탑이라 한 점은 기단석까지 포함하여 센 것이라 단정하였다. 여기에는 필히 문제가 있기에 필자는 문화재청까지 이견(異見)을 제출하였었다.

이 점은 맨 아래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