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패이스 북에서 평창역사

오대산의 국가적인 불사(佛事)

오대산의 국가적인 불사(佛事)

오대산의 오대는 백만 군중을 호령하는 것과 같아 비로봉(毘盧峯)이라 한다. 아래로는 동에는 만월(滿月), 서에는 장령(長嶺), 남에는 기린(麒麟), 북쪽에는 상왕(象王)과 중앙에는 지로(地爐)가 있다. 이러기에 오대산이라 하는데 모두 여러 부처와 보살이 상주하는 곳이다.

옛날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을 친경하려 대송정(오대산)을 찾아간 이후 신라 왕자 정신과 효명 두 태자가 유람하다가 하서부(강릉) 성오평에 도착하여 형제 두 사람이 함께 이 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진덕왕 5. 651) 정신태자는 중대 남쪽 기슭 진여원(眞如院)의 터 아래에 초암을 짓고 거처하였고 효명태자는 진여원에서 동북쪽으로 가서 북대에 초암을 짓고 거처하였다.

형제 두 사람은 한마음으로 동대에 1만의 관세음보살 진신이 상주하는 것을 보았고 남대에 1만의 지장보살, 서대에 1만의 대세지보살 북대에서는 1만 미륵보살의 진신과 5백 대아라한을, 중대에 도착하여 비로자나여래를 우두머리로 하는 1만 문수보살의 진신이 상주하는 것을 보았다. 이로서 아침에 공경하였는데, 36가지 모습으로 변하여 출현하였다. 두 왕자가 이 신비로운 변화를 보고, 매일 아침 새로 물을 긷고 차를 달여서 1만 문수에게 공양하였다.

<민지(閔漬)가 기록한오대산 성적과 신라 정신태자.효명태자전; 오대산사적; 조선불교통사하편1>

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효소왕이 자식이 없어나라 사람들이 신문왕의 둘째 아들 김지성(金志誠)을 세웠는데, 33대 성덕왕이 되었다.”보천과 효명은 신문왕의 아들이다,

지금의 상원사(上院寺)인 진여원(眞如院)에는 문수보살이 매일 아침마다 다른 모습으로 화현하는 문수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705(성덕왕 4)에는 국왕이 진여원을 중창하고, 흙으로 문수보살상을 조성하였으며 화엄사(華嚴社)를 결성하였다.

보천태자와 효명태자의 오대산과 인연을 계기로 오대산 전역에 국가적인 불사(佛事)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오대산은 그야말로 화엄신앙과 법화신앙, 밀교신앙 등 신라불교 전성기의 다양한 신앙과 사상을 그대로 함축해 놓았다고 하겠다. 동대의 북쪽 관음방, 남대의 지장방, 서대의 나한방, 중대에는 문수를 모신 진여원, 보질도가 있었던 곳은 화엄사(오대산의 본사), 산의 6(六社)가 모이는 하원(下院) 등이 이때 본격적으로 조영되었을 것이다.

<다섯 봉우리의 옛 이름과 현재의 암자 이름>
만월봉 (동대) -- 동대산, 관음암
기린봉 (남대) -- 두로봉지장암
장령산 (서대) -- 상왕봉, 미타암 (현재 수정암)
상왕봉 (북대) -- 비로봉, 나한당 (현재 미륵암)
지로봉 (중대) -- 호령봉, 보천방 (현재 사자암)

조선조에 들어와 불교는 전조업의 당연한 과보로 억불정책을 당하여 극심한 타격을 입게 되지만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은 여전하여 왕가에서도 안으로는 불교를 숭앙하였던 터였다. 태조 이성계를 비롯하여 태종·세종·세조 등은 정치적으로는 배불시책을 단행하면서도 왕실의 개인적 신불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선초기의 오대산 불교는 국왕의 신불(信佛) 활동으로 오히려 전시대보다 활기차게 전개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으로 물러난 뒤 함흥에 있다가 태종이 즉위하자 서울로 돌아오는데 (태종 원년, 1401), 바로 전해에 오대산 중대 사자암을 중건하고 낙성에 친림하였던 일을 기문으로 남기게 명하여 그 글이신증동국여지승람 44, 강릉대도호부 불우 상원사 조에 실려 있다 .

조선 태종은 억불정책을 편 대표적인 왕이었지만, 1401 (태종 1) 봄 이 절의 사자암 (지금은 중대암 )을 중건 것을 권근 (權近 )에게 명하여 불상을 봉안하고그 해 11월 태종은 사자암에 행차하여 성대한 법요식과 낙성식을 베풀었다

이후 세조는 오대산 계곡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괴질을 치료받고, 고양이에 의해 자객의 습격을 피하는 등의 불은(佛恩)을 입었던 일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세조는 1465(세조 11) 상원사를 중창하도록 하여 역시 원찰로 삼았다. 오대산상원사중창기중창불사는 14653월에 시작하여 1466년에 끝마치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권근의 문집인 양촌집에 남아 전하는 사자암과 관음암, 수정암의 중창기는 그러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이번 2001~2년 대한불교 조계종 문화유산 발굴 조사단 조사 결과 11세기에 주조된 동전인 숭녕중보(崇寧重寶. 1102- 1106년 주조)10세기대로 추정돼왔던 이 탑의 조성연대는 12세기 이후로 수정이 불가피 해졌다. 또한 이번 조사를 통해 월정사는 세종 28(1446)에도 중창이 있었으며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의 이름을 새긴 암막새가 출토됨으로써 이들이 중창에 관여했음이 확인됐다. 요즘 사찰에 불사를 하기위해 기와에 개인의 이름을 적어 봉양하듯이 양녕과 효령대군도 월정사를 왕림하며 불사 중창에 이름을 남겼다.

조선초 왕실에서 상원사와 사자암을 원찰로 삼은 것은 고려 말 나옹선사가 북대에 주석하면서 메일 조석으로 지로봉의 부처의 진신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향해 공양을 드렸듯이 상원사나 중대 사자암은 적멸보궁 바로 아래에 위치하기에 조선왕조에서도 사리공양을 구현한 듯 합니다.

그리고 오대산엔 많은 고승들이 거처하였는데 청허휴정(15201604)은 오대산에 주석하였고, 휴정의 문도 사명유정(泗溟惟政,1544~1610), 특히 사명유정이 1587년 무렵 월정사와 영감암[靈鑑蘭若]에 머물면서1589년 월정사를 중건하였다. 5년간 중건 끝에 1590년 단오절에 낙성식을 올렸다.월정사 법당 개연소문의 글은 본 페이스북에 오대산을 사랑한 사명당이란 글로 게제하였습니다.

상원사

상원사

상원사(너와지붕)

북대

북대(너와지붕. 1968))

북대

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