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패이스 북에서 평창역사

오대산 적멸보궁의 비는 법신사리이다

오대산 적멸보궁의 비는 법신사리이다 

아래 사진의 비는 오대산 적멸보궁 영산전 뒤쪽에 있는 가라허(伽羅墟)의 비 입니다
이 비에 대하여 천년이 넘게 지금까지 무슨 목적인지 알지를 못하였으나 필자는 평창역사서를 집필하며 오대산 문수신앙의 성지를 서술하기에 이번 책에서 적멸보궁 뒤편의 비석의 내력과 그 이해의 연구를 피력합니다.

저의 월정사 연구에는 여러 부분에서 다른 이해가 상당부분 있지만, 그 점들은 후일 논문으로 밝히겠습니다만.. 이 비석은 글자의 기록도 없고 비문에는 오층 탑을 조출한 비석으로 지금까지는 그 이유와 비석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알지도 못 하였으며 이번 처음으로 비석의 연원을 작성하면서 연구한 견해이기에 혹 스님분들과 여러분의 고견을 기다립니다.


1) 지로봉의 정골사리(적멸보궁)

민지(閔漬) 는 1248년(고종 35) ~ 1326년(충숙왕 13)때의 고려후기 문인이자 관료로, 민지는 충렬왕 21년(1295)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의 비문을 지었고, 같은 왕 23 년「금강산 유점사 사적기 」와 31년「풍악산 장안사사 적기발 ·33년「보개산석대기」및「오대산 월정사 사적 (五臺山月精寺事蹟)」등을 썼다. ( 향언을 한문으로 번역함)

  《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       (민지의 기록 ; 오대산 사적 번역)
오대산을 지로봉에 올라 뇌의 정골사리를 봉안하고 가라허(伽羅墟)에 비석을 세웠다. (비석은 땅속에 감추어서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그 사적을 기록하고 이어서 월정사를 창건하고 13층 석탑을 세워 사리 37매를 탑심(塔心)에 봉안하였다.
여기서 가라허의 뜻으로 가는 가리욍산.가야산등 산을 지칭하고 라.허는 산 가장자리의 봉우리를 말한다

< 다른 스님의 기록>
전설에 따르면 그 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용의 형상이라 무거운 석물을 사용해서는 아니되었기에, 부득이하게 눈에 띄는 석물이 없이 진신사리를 땅에 묻었다고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도적이 진신사리를 훔쳐가지 못하도록 묻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 이야기에서는“전설에 따르면 그 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용의 형상이라 무거운 석물을 사용해서는 아니되었기에, 부득이하게 눈에 띄는 석물이 없이 진신사리를 땅에 묻었다고 한다.”라는 이야기는 이 비석의 의미에 대한 필자의 이해는 다릅니다. 또한 월정사 측에서는 마애불탑이라 하기도 하며, 아직 가라허의 비석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없다. 이 가라허의 비는 무엇인지 아래에서 필자의 견해로 해석을 합니다.


2) 가라허의 비석은 비석이 아니라 법신사리입니다.때문에 문자 기록이. 필요없는 것 입니다 (필자의 견해)

삼국유사 前後所將舍利조에는 643년에 자장법사가 佛頭骨, 佛牙 100과와 부처가 입었던 緋羅金點袈裟 1벌을 가져왔는데, 자장은 사리를 세 군데에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에, 하나는 태화사 탑에,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봉안 하였다 한다. 따라서 적멸보궁의 사리 봉안은 그 시기는 알 수 없지만 前後所將舍利조 이후의 시기로 설정된다.

위 민지의 글에서 가라허의 비는 가렸다고 기록했다.가라허의 비석은 사진에서 보듯 문자의 석각을 조출(造出)된 비석이 아니라. 비석 양면에 오층 탑 모양을 조각 하였다.
일반적으로. 비석은 연대와 내용을 기록하지만 동 가라허의 비는 앞, 뒤에 오층 탑을 조출하고 있는데 그 뜻은 무엇인가하는 점의 고찰로서 필자의 연구로서는 동 비석은 위의 언급한 법신사리에 해당된다.

법신사리의 목조탑을 석탑안에 넣은 점이지만 이 비석은 석재로 만든 이유는 , 위 인용문에서 진신사리를 사자암 뒤의 땅에 묻을때 오대산은 토산이기에 탑이나 통도사의 금강계단(戒壇)등의 장치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석존사리는 사자암 뒤에 산에 묻고 가라허에 비석은 비석이 아니라 법신사리이기에 일반적으로 소형 목재탑을 만들어 탑안에 넣지만, 오대산 적멸보궁은 외부이기에 목재 소탑의 대용으로 석재에 탑을 조출하여 땅에 묻어 보관하는 것으로(원문 ; 碑則隱而不現) 이러한 연유로 석각의 문자가 없이 오층 탑 문양만 새긴 것이다.

신라시대에는 ”무구광전대다라니경“이 경전으로 석가탑에 넣고 법신사리라 하였지만, 1970년 월정사 9층탑 해체 복원시에는 ”보협 인다리니경“이 출토되었다. 보협인다리니경은 후기 경전으로 가라허의 비는 이 시기의 법신사리로 이해한다.
또 어느 분은 "이것은 진신사리가 있다는 '세존진신탑묘 '이다 ."라고 하는데 탑묘란 이해로서는 탑이었다 하면 왜 隱而不現 합니까.
탑이라면 진흥왕 순수비도 감악산 정상의 비도 가라허의 비와 비슷한 크기인데 그들은 세워 놓았는데 가라허의 비들은 세워 놓았는데 적멸보궁의 가라허의 가라허의 비는 땅에 묻었는가요??

<연구과제>

적멸보궁에 유일한 기록인 민지의 「봉안사리, 제1 조사전기」에서도 가라허(伽羅墟)에 비석을 세웠다. (비석은 땅속에 감추어서 보이지 않는다.) 라고 원문에서도 立碑於 (伽羅墟 碑則隱而不現 以紀其蹟因) 라고 비석을 세웠다고 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필자의 연구로서는 사리를 봉안하는 사리탑의 탑신사리이기에 ”碑則隱而不現 “ 즉 보이지 않는 땅 속에 묻었다라고 기록함에 이 가라허의 비는 당시에 보관 장치가 없기에 감추었다는 표현을 쓴 것으로 이해하기에 이 비석은 비석이 아니라 법신사리이기에 다시 땅에 묻는 것이 원안이라 사료합니다.
지금까지는 이에 대한 연구가 없었던 바 여러 고증을 통하여 연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 사리의 이해>

◎ 사리는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사리는 부다의 실제 유해인 진신사리와 상징화 하는 법산사리이며, 승려들의 승사리로서 사리는 3가지로 구분되며, 진신사리를 보관하는 곳이 탑(인도어로는 스투파)이다. 그리고 승려들의 다비장에서 나오는 사리의 보관장치는 부도라 한다. 그리고 법신사리의 이해는 아래에서 한다.

◎ 법신사리의 이해

법신사리는 불법(佛法, 불교의 가르침)이 부처의 또 다른 몸이라 하 여 불경을 사리처럼 간주하는 것으로,“석가모니 진언의 내용을 탑에 안치하고 예배하면 큰 공덕을 쌓으리라.”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불탑에 (현존 불탑은 약 1,200여기이다)이 있으며 여기에 진신사리는 한계가 있기에 한국 불탑들은 금강경을 진신사리로 삼아 대체하여 넣은 경우가 많다.
신라시대에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안치한 탑이 많은데, 불국사 석가탑이 대표적이다. 또한 여러개의 석탑 내부에 작은 목조탑이 출토된 바 탑이란 석가의 진신사리를 넣는 장치이기에 일반적으로 소형 목탑을 석탑내에 넣어서 법신사리로서 대체한 것이다.

◎ 진신사리는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진신사리는 뇌사리(정골사리), 아(牙)사리. 육사라(육신사리)로 구분된다. 이 3가지 형태에서 골사리(骨舍利)는 하얀색, 발사리髮舍利/ 일본식 표현)는 검은색, 육사리(肉舍利)는 빨간색이라 기록 하였다. 출처 문헌 ; (출처 ; 諸橋轍次, 「佛舍利」, 漢和大辭典권3, 大修館書店, 1985)
따라서 적멸보궁의 정골(뇌)사리의 색은 동책으로 따르면 髮舍利로서 검은색이어야 한다.
또한, 민지의 조사전기에서 월정사 13층 탑을 세우고 사리 37매를 탑심에 봉안하였다 한다. 이후 1,970년에 동탑 월정사 9층석탑의 해체복원공사시 14과의 주색(朱色) 사리가 출토되었다.
랍의 사리 구분으로 주색은 육신사리에 해당된다.

3) 가라허의 비석을 찾아 다시 세우다.

위 “조사전기”에서“ 지로봉(地爐峰)을 올라 부처님의 뇌 정골사리를 봉안하고
(가라허의 비석은 보이지 않도록 감추었다. 즉 비석은 땅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이 비석을 1,950년 상원사에서 입적한 한암선사가 땅에서 찾아 세웠다 한다. (금몽암 무용 스님의 글)
현재 적멸보궁 뒤쪽에 세워져 있다. 월정사 측에서는 5층 마애불탑이라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의 이해로는 가라허의 비는 법신사리로 해석한다. 따라서 민지의 조사전기의 기록에 “立碑於 ”에서 탑을 새웠다는 표현에서 부터 필자는 다른 견해를 가지는 것이다.

※ (필자 주) 가라허(伽羅墟)란 단어의 뜻은 伽는 가라왕산, 가야산등 향음으로 산을 지창한다. 따라서 기라허는 한문 뜻 풀이로 주변 가장자리의 봉우리를 뜻함. ( 일제때 ‘오대산 석존 정골사리탑묘 찬앙회를 개최하는 것은 한암 스님이 가라허의 비를 찾아 세운 것에 연유하는 것으로 추정함)

4)‘오대산 석존 정골사리탑묘 찬앙회 취지문’과‘발기인 명단’

발기인은 교정 방한암외 53인, 역원은 회장에 중추원 부의장 후작 박영효, 법주에 방한암, 평의원에는 용주사 주지 강대련등 총 45인이다. 취지문 찬성자는 당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육당 최남선, 중추원 참의 남작 박기양등 138인으로 당시 권력자, 정 재계, 학계, 언론계, 불교계등 시부대중이 대거 동참했다.
석존의 진신사리는 경배의 대상으로서 불자들에게는 최고의 신앙심을 자아낸다. 따라서 ”석존사리탑묘 찬양회“는 위에 언급한 한암스님이 가라허의 비를 땅속에서 찾아 파내어 세우기에 이는 법신사리로서 당시 우리나라 정계, 재계 학계의 모든 사람들이 찬양회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라허의 비>                               < 오대산 석존 정골사리탑묘 찬앙회 취지문’과 ‘발기인 명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