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쯔강의 여정 / 한국사의 나아가야 할 과제 구글어스로 상하이 주변과 양즈 하류가 과거 신라였기에 구글어스로 이를 검색하는데, 황해 주변의 푸동공항 아래에 양쯔강이 유입되는 황하 갯벌에는 너무도 정교한 그림들이 즐비하였다. 어느 화가가 바닷가 갯벌에 그림을 그려 놓았슬까 의아한 마음에 구글을 확대해 보았더니 그림을 그린 화가는 다름아닌 양즈강물이었다. 나무의 가지에서 뿌리까지 적나라한 나목들이 그려져 있다. 어쩌면 양쯔강물은 천산의 빙하속에서 시작하여 여러 시냇물이 꼬불꼬불 흐르며 서로 합하고 한때는 천하를 품는 큰 강을 이루었으나 세윌을 맞으며, 크나큰 동해(황해)바다로 흘러들어 짜디짠 소금물에 몰살당하기가 아쉬웠던지 한 많은 자신의 역사를 나무의 오브제로서 그림을 남겨 놓았다. 일찌기 이태백이 천하를 호령하던 양즈의 말로를 보았다면... 천하의 영웅호걸도 한 시대이지만. 또한 천하도 한 세월이라... 무엇을 탓하겠는가? 하고 읊었으리라. 그런데 후세가 읊으니 들려오는 메아리소리는 시끄럽다 한다. 그러나 저러나 ..ㅍㅆㅍㅆ.... ( 아래 사진들은 상해 푸등 공항아래쪽의 양쯔강하류의 황해(동해)의 해변 모래톱에 물이 흐른 흔적으로 구글어스 캡쳐 이미지 입니다) 많은 지류들이 흘러 내리며 큰 양쯔강을 만들었지만 끝내는 황해바다의 소금물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양즈강의 슬픈 역사를 자신의 물로 기록하는 듯합니다. < 상하이 주변은 신라였다고? > 삼국유사 기록에 김유신은 금산에 장사지냈다고 기록하였는데 그러면 연상이 가는것은 충청도 금산일텐데 김유신이 금산과 무슨 관계일까 으문이 남는다. 하지만, 구글어스로 상하이 일대를 검색하면 그곳 지명이 나주, 금성, 광산, 상주, 양주, 월성, 김해, 진해 등의 지명이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한 곳에 밀접되어있고 김가촌은 여러곳의 지명이다. 상해 일대에는 金庾信 의 유신이란 지명으로 유신도로, 유신북가(庾信北街) , 유신남가(庾信南街)등 김유신의 지명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일반적으로 유신의 유(庾)는 곳집 유자로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글자이지만 삼국사기에 유신으로 이름을 정한 이유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상해 지역에는 또한 왕이 죽자 시호를 선덕(왕)이라 하고 신라 낭산( 상해 부근)에 장사지냈다 기록하고 있다.(삼국유사) 그러나 국사편찬위의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에 김유신을 검색하면, 신라 김유신은 당나라 소방정을 죽이고 그들을 구덩이에 묻었다라는 삼국유사 번역을 하며 그 위의 타이틀 옆에 "하지만 믿기 어렵다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자는 국사편찬위의 번역자로 자신의 이름도 없이 역사 번역에 이런 말을 남기는 무식함을 가진다. 더 무식한것은 "삼국사기"에 서기 700년경 당나라와 신라는 7차 전쟁을 하여 신라가 모두 이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당나라 수도 시안(장안)은 섬서성에 있고 신라 경주와의 거리는 구글어스로 바다를 직선거리로 제어도 17,000km 즉 4,500리이다. 당과 신라는 무슨 원한이 맺혔기에 배로 황해( 중국애서 관점으로는 동해이다. 따라서 중국사서들의 동해는 현 황해이다)를 건너고 말로 달려가서 당나라 군을 무찌른다면 수백필의 말을 싣고 군량미도 어마하게,,,이러한 전쟁이 당시에 가능하자면 요즘처럼 군용기로 다녀야 할 것이다. 중국 25사는 물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을 현재 우리의 한반도에 적용하기 어렵다. 하지만 중국 대륙에 옛 지명들은 모두 우리나라에 있는 전주, 나주 등 모두 한국지명이다. 물론 고구려, 백제, 고려도 중국지형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 가령 백제의 사비와 웅진은 25km 사이로 천도할 이유가 무엇이었고 그곳에 있어야할 황산은 현 백제 지명에는 없다. 황산뻘이라도 산이 있어야 한다, 중국 공산당의 문화혁명시 낙양산의 묘들을 전부 정리할때 의자왕 묘와 당나라의 장수가 된 흑치상치의 표지석이 나왔다. 의자왕은 포로가 되어 중국 시안 옆의 낙양에 묻혔다. 우리는 죽으면 낙양에 묻히길 원하는데, 당나라는 승전국으로 백제 땅을 빼앗았는데, 의자왕을 바다건너 사천리 길을 끌고갈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 천년 고도를 경주라 한다, 그러면 경주에는 천 년간 여러 개의 왕궁이 있어야 하는데 그 주춧돌도 하나 없다. 문무왕은 감포 앞바다 수중 대왕암이라 하는데, 상식적으로 바다에 묘를 쓴 기록은 역상데 없는 비 상식적 이야기이다. 중국 기록에 동해는 현 황해였고, 수중이 아니라 큰 암자란 뜻으로 하남성에 위치하는것으로 지목된다. 그러면 고려는 3경중 개성을 수도라 하지만 개경이다. 그리고 평양은 서경으로 묘창을 서경천도를 하는 주장으로 김부식에게 죽었다. 평양은 어떠한 기준으로 서경이고 개성과 평양은 100여리에 북진을 위해 서경천도를 하자는 이야기와 이를 김부식이 죽였는데 이 지역차이로 죽일 이유 있는가? 재야 사학에서는 북경이 고려땅으로 현재도 고려영이란 지명이 남아있다. 그러기에 현 교육부 산하의 강단사학자들은 당연 이도 인정하지 못할것이기에 삼국 사기의 여러 역사의 난해함을 가지고 위서다라고 주장하며 138권의 고려사 정본이 있는데 제자들에게 고려사는 공부도 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고려의 수도는 개성이고 서경은 평양이라 합니다. 그리고 묘청의 서경 천도는 개성에서 수도를 평양으로 옯기자는 건의였다고 배웠다. 그러나 고려의 삼경에 개경이지 개성은 아니다. 또한 서경을 평양이라 하면 그 기준점은 수도인 개성에서 북쪽의 평양을 서경이라 하는 것이고, 묘청은 개성에서 여진이 내려옴을 방비코져 서경천도를 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국사편찬위에서는 당시 방위로 북을 서쪽이라 했다는 말 밖에는... 그리고 개성에서 100여리 길에 평양으로 펀도하면 궁궐및 조정에 따르는 역사를 하여야 하는데 백리 이동에 따라 북진 정책이니 여진 방어니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현재 역사편찬위 동북아 재단, 한국학 중앙원, 교육부등 주류 역사학계는 일제하의 조선사 편수회의 이마니시류등 일본인이 조선을 민족 정기를 없애고져 외곡한 역사를 해방 75년 이후 현재까지 우리 학게는 친일의 황국사관에 의한 엉터리 역사만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를 강단(교단) 사학이라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교육은 모두 만화를 배운것이지 사실의 삼국사나 고조선사를 배운것이 아니다. 따라서 전과목이 우수하여야 장학금받고 좋은 대학에 가기에 역사는 만화공부 잘 하는자가 장학금받았단 사실이다. 처음 접하는 독자는 하루아침에 참 이상한 기분이 들겠지만 현재 역사 전공에 박사과정의 논문으로 고조선, 단군 등의 논문은 석, 박사 학위를 주지 않기에 연구를 못하는 실정이고., 또한 제자들에겐 고려사는 엉터리라고 배우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 고려사는 정말 엉터리일까?? 필자는 지난해< 평창역사의 이해> 책을 집필하면서 <평창의 지명 유래> 편에서 평창은 공자의 고향 곡부는 중국 태산 아래의 곡부인데 어곳은 창평이기에 여기에서 우래한다고 서술하였지만. 기실 창평현은 고려의 지방 현이며, 평창강의 옛날 이름이 사수천은 곡부위 사수현을 가로 지르는 강이름으로 현재 구글어스에서도 사수시로 나오며 아기에 "사"자는 백제 사비성이 있던 곳의 지명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보물 고려사에 기록된 고려 28개 지명으로 반도에는 교하, 해주만 반도에 있으며 모두 현 대륙(중국)에 지도에서도 확인이 되는 지명이다. (충청도의 청주는 淸州로 한문에 차이가 있다) 고려사 139권은 세종때 편찬되어 원문이 남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위에서 보듯 고려사 지방 명칭에 한반도내의 지명은 해주, 교하정도일 뿐 이 많은 지명을 한반도에 꿰 맞추지는 못한다. 그러나 중국 지도에서는 현재도 많은 지명이 남았다. 그런데 현재 재야사학에서도 이러한 범위까지 연구는 못나가기에 개인의 논문도 아닌 역사 책에서 고려는 북경 어래까지라고 주장하기에는 그 이해도가 없을 것이고 또한 강단사학의 언 박사 제자들은 이러한 점을 보면 오류라고 고발까지 하여 예산을 환불하라고도 한다. 실제 언 박사가 북한학자의 고조선책을 보았다고 국정원에 고발하고, 또한 언 고조선 연구단체가 연구비를 지급받자 연대 골똥 박사는 감사원에 가서 연구 보조금 환원하라고 고발하고 한국학 중앙연구원에서는 다수의 재야 사학자에게 연구비 반환하라는 최고장을 날리는 등 역사의 바른 연구는 아랑곳없이 역사를 훼손시키고 있다. <우리 상고사 이야기> 우리의 역사는 일제때 민족 역사의 정기를 끊고자 위에서 보는 예시처럼 모든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축소 왜곡하는 반도 사관으로 왜곡한 역사가 해방이후부터 지금까지 교육부, 역사편찬위 등의 황국 식민사관을 추종하기에 해방후 70년이 넘게 아직도 한국사는 일제 식민 왜곡사관만은 추종하는 바 이들을 강단사학이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상고사는 세계적으로도 위대합니다. 우리는 일본에서 먼저나온 우리 민족사 환단고기 열풍도 불었습니다만, 현재 위서라고 한다. 하지;만 80년대 요동에홍산일대에 1,200여 뮤적의 발굴에서 4,500년전인 하가점 하층 유적은 바로 고조선이고 이 요하 문명은 9,300년까지 올라가기에 어쩜 환단고기의 역사와 같은 시간대의 유적이라고 볼 수있습니다. 요하문명의 고조선사는 현재로서 재야사학자들이 많이 연구합니다만 개개인의 연구라 많은 문제도 가지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의 역사도 반도가 아닌 중국에 있었다고만 얘기할 뿐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점에서 지난해에 출간한 필자의 책 <평창역사의 이해> 에서 평창의 유래는 중국 태산아래의 공자의 고향 곡부가 창평현이기에 여기에 유래한다고 하였지만, 기실 곡부는 공자시절에 불린 지명이고, 창평현은 고려의 정사인 고려상데 4기록한 고려의 현의 지명이다. 공자시절에 창평이란 용어를 쓴 정확한 기록은 찾지를 못했고 곡부라 한다. 그리고 평창강이 사수천 - 사천(강)으로 사수천은 공자의 고향 곡부 3~40리 위의 사수현의 강이름이다. 현재 구글어스로 보아도 사천시가 확인된다. 즉 사수천은 공자가 당시 곡부는 큰 마을이 아니고 사수현에 강가에서 제자들에게강의를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사수천의 " 사"자는 백제의 사비성이. 있던 지역으로 이러한 역사는 현재 재야사학자들의 범위도 넘어가기에 필자의 책 (평창 역사의 잏)에서는 이러한 서술은 하지 못했다. 이 점은 현재 우리의 역사애서 이해는 어렵고 또한 강단사학 xx박사 제자들은 특명을 받았는지, 이러한 글을 보면 고발을 하기에 필자는 평창과 사수천의 유래를 구체적으로는 밝히지 않았다. ******************* 우리가 배운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삼국역사와 고려사는 중국 대륙에서의 역사 기록으로, 강단사학자들은 으싸으싸만 하러 다닌는듯 하지만,,, 요즘 정보화 사회에 정보량이 많아지고 DNA 등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재야사학에서 우리의 역사는 밝혀지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일제이후 70년간에 오늘까지도 학생들은 강단사학자들이 왜곡된 소설을 역사라고 배우고 있으며 우리들 모두도 그렇게 배운게 현실이다. 따라서 필지도 평창 역사서에 공자의 고향 곡부가 창평현이라 한 것은 고려의 현이었다고 현재 중국을 고려라고 쓰기엔 이해도 부족하거니와 에산으로 쓰여지는 역사이기에 강단사학자들의 방해도 고려해야 하여 이러한 상고사는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삼족오의 현 우리햑계의 명확하지 못한 국수적인 단군사관을 넘어서 범 유라시아 역사적인 견해로 서술하였다. 가령 하리 청동기 유적의 글에서 사진에 환옥은 신의주의 수암옥이고 옆사진의 환봉은 요하문명 고조선 유적에서는 기록이 없지만 멕시코 아즈텍 유적에서는 같은 수암옥의 환봉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서술은 일반의 이해에 분별이 혼란해지기에 싣지 않았습니다. 필자는 내년부터는 평창 지방사를 떠나서 고대사부터 근현대사까지 바른 해석을 합니다. 고조선은 80년대에서부터 만주의 요하문명 1,200여개 유적이 발굴되며 9,300년전부터 고조선은 4,500년 전의 하가점 하층 유적이다. 하지만 현 학계는 고조선은 대통강유역이라고 일제 왜곡사관에 못을 박고 낮잠만 자는지 요하문명이니 홍산유적 등 연구도 없다. 올해는 평창역사에 평창아리랑의 제 이론( 평창아리랑은 후렴이 없다. 이는 어느 학자도 설명하지 못하는데 문제는 현제까지 아리랑의 이해와 설명이 바른 정곡을 찌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산성은 모두들 김광복이 증축하였다는 기록만 있는데 노산성은 석성으로 雉가 달려있고 남면과 서면은 이질적인 다른 축조의 연대도 보이고 있다. 아래 사진은 요하 문명의 삼좌점 석성으로 이는 5,500년전 우하량 유적으로 여기서부타 치의 양식이 발현되어 고구려, 고려로 이어지는 예,맥, 구리의 고조선 시대의 맥족의 산성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평창읍 노산성은 고조선 말기 400년 전인 하리 청동기 유적과 고리를 가질 수 있는 범위도 있고, 서편은 마치 옥수수처럼 다듬은 돌은 고려 중기 이후 읍치관아의 성의 특징을 가지며, 이는 읍치 관아의 위상을 가지듯 노산성은 읍치성은 아니지만 이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추정에서 노산성은 퇴마식 산성이지만 방어나 전투 목적의 실용성을 가지는 성은 못된다. 이하 생략. 제빼기 동네는 성아래에 성으로 오르는 마을로 잣배기등으로 전국에 만은 곳의 지명을 가진다. 삼좌점 석성 (고조선 천년 윗대로 5,500년전) 우리가 중, 고등시절 배운 역사는 역사가 아닙니다. 따라서, 필자는 평창역사를 마무리 짓고 내년부터는 고조선은 왜 그 추운 만주에 살았는가, 중국의 화화족은 재야 사학에서는 인정하지만 DNA 유전자로 나타나는 우리민족과 천문학자 박창범 교수에 의한 삼국사기의 67개 일식기록은 고구려는 만주, 백는 황하, 신라는 양즈강 일대로 판명되었다. 현재 나사의 일식 앱으로(천체는 정확하게 운행되기에) 여러분도 환단고기에 4천년 전 일식기록을 어느지역( 만주로 판명)에서 일어났는가 확인해 볼 수있고, 3년뒤에 평창에 일식이 일어나는가 시간을 돌려 체크해 볼 수 있는 과학입니다. 우리는 한(韓)민족이라 합니다만 또한 한(하나)의 민족이란 그래서 하나가 아니라 단일민족이라 그러는지는 몰라도 우리민족은 예, 맥족, 환웅족의 3부족 연맹체의 탄생이 고조선입니다. 요하문명 홍륭와 유적에서는 무덤에서 곰의 뼈도 출토되었고 기원전 2세기에는 적봉에서 곰, 호랑이, 새의 부조판도 발굴되었는데 이는 고조선의 3부족 연맹체라는 뜻입니다. 평창에서 김진백, 정원대 공동답사의 <길위에 역사>란 책에서 평창은 맥족의 기록이 없기에 맥족이 아니고 당시 평창사람들은 다른곳에서 피신해온 무리라고 서술하였습니다. 촌넘의 자식들... 고조선이 열국(10국)으로 나누어저 마한, 동예, 옥저, 예, 맥등의 종족으로 분리되는데 다른데서 도망와도 예맥 구리의 종족이다. 맥족의 기록이 없는데 다른데서 피신해온 종족이라고 하는 점은 타당한가? 그러기에 내넘들은 사실의 역사를 쓰는게 아니라 네넘들이 공부는 안하고 마치 하느님처럼 절로 역사를 안다고 함부로 찌꺼리는 돈키호테란 점이다.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책과 <길 위에 역사> 책은 내용 대부분이 오류이기에 평창의 역사로 인용은 주의바랍니다. 이 점은 언제나 답해 드립니다. 그러면 그 추운 만주지방에 살았슬까? 제야사학에서는 중국 25사의 기록이나 홍산문명의 여러 연구는 하지만 이러한 고조선이 추운곳에 왜 살아는가에 다는 의문은 단편적 이야기들이 있다. 현재 인류는 만년 전 홍수신화때( 성서의 노아의 방주는 유라시아에서 이야기로) 파미르고원에서 내려와 만주지방에 9.300년전 유적이 있으며 4,500년전 예맥구리의 고조선때는 홍산일대의 만주는 살기종은 곳으로 여러 종족들이 몰려드는 국제도시였습니다. 당시의 기후는 현제보다 4~5도 높았으며 해수면은 10m 상승했기에 만주는 기후적으로 좋은 환경이었으며 또한 만주는 눈강평원 등 3개 평원으로 우리나라 면적보다도 넓은 평원이다. 그리고 물은 아무르강에서 송화강의 여러 지류들이 잘 발달하여 비옥한 토지를 형성하였다. 그러기에 주변의 여러 종족들이 찾아오는 국제적인 부락들을 형성하여 예,맥, 환웅족이 서로 화합하는 연맹체를 맺고 맥족과 웅족에서 태어난 단군 왕검이 제사장이란 점이다. ◎ (왕검이 이름의 고유명사이고 단군은 왕의 명칭으로 고대시대에 왕은 제사장으로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강력한 임금이다.) ◎ ( 여기서 환웅족을 하늘에서 내려온 종족이라 하는 점은 국뽕들의 편견이고, 환운을 결부하느서는 안되고 바이칼 호수 주변의 부리야트 족 등처럼 북위 66도권역에서 내려온 종족이다) ◎ (세계 4대 평원은 우크라평원, 아르헨티나 팜파. 미국 중부의 미시시피 유역, 그리고 만주평원이다) 하지만 현재 만주는 기후가 변해서 차로 하루종일가도 옥수수 밭이다. 이러한 상고사. 근대사 내년부터 약 1~2백편을 하기로 하고... 물론 상고사, 삼국사는 일제때 왜곡하였지만 이후 우리가 왜곡하는 근 현대사.. 요즘 회자되는 75명을 죽였다는 김구,, 김원봉, 홍범도, 고부동학과 안중근,,, 이러한 이야기에 시작은 일제의 식민지는 당시 세계사 조류에 의한 것으로 우리가 베우지 않는 그레이트 게임과 현재 인도(서남아) - 벨트는 세게사에 제 2의 그레이트 게임입니다. 그런데 일제가 침략했지만 조선을 말아먹은 것은 노론계이고 이에 우암 송시열부터이며 이완용이 나라를 어떻게 팔아먹습니까...일본은 짱구입니까.. 이완용은 꼭두각시이고 고종이 나라를 팔아먹는 역사들... 현재 잘못된 역사들,,, 내년부터 합니다. 당시 황해( 중국 역사 기록에서는 동해이다) 만 만년설이 녹아서 10m상승했기에 산둥반도도 섬이고 중국 동부의 평치에 많은 호스는 당시에는 큰 호수에 아열대 기후로 코끼리, 코뿔소, 원숭이등,,, 우리의 12지간에 동물들은 조선 반도에서 보는 동물이 아니고 하는 아마도 세게사에 가장 위대한 고조선의 문명사에서 구한말의 우리가 배우지 않는 세계사의 중심역사인 그레이트 게임은 오늘에도 제 2의 그레이트 게임이 인도( 서남아)- 태평양 라인이란 점에서 그레이트 게임을 알아야 일제 식민사를 이해할 수 있으며 안중근의 친필로 동학을 평정하기에 동학도를 때려 잡았다고 하는데 대체 무슨 영문인가 등,, 최소한 필자의 책에< 평창동학>에서는 동학이 어쩌서 혁명인가에 대한 반론은 없지만 동학을 애기하며 누구도 함구하는 고부민란)정음 동학에 결과로 텐진조약에의해 일본군이 들어와 청일전쟁이 이땅에서 일어나고 다음해 민비시해와 일제식민으로 가는 계기가 된 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역사는 원인과 경과 결과가 잇어야 하는데 동학의 결과 일군에 의해 식민지로 가는 역사를 아무도 서술하지 않지만 이러한 사실을 배우고 바르게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 한국역사는 한 부분씩 이해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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