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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평창의 사서인 『길위의 역사책』 분석과 재정립

 

평창의 사서인 『길위의 역사책』 분석과 재정립

2,009년 평창문화원에서 출간한 『길위의 역사』( 글; 김진백.  공동답사; 정원대) 책의 발행에서 평창의 역사에 관심과 노고에는 감사를 합니다만,  동 책은 평창의 개괄적인 역사를 포괄한 것은 아니라  古城이나 역원, 도돈의 거슬갑산 답사와 이에 따라 문헌적 자료등으로 199쪽으로 서술한 역사책이다. 동 책은 2009년에 서술하였으나 10 여년 사이에 역사의 발전에의하여 새롭게 확정할 필요가 아니라 책의 대다수 평창 역사가 오류라는 점으로 이에 분석과 재 정립을 합니다.

역사는 시대의 발전에 의해 정보가 방대해지며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있게 되고. 새로운 유적과 유물의 발굴과, 또한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천문학의 이용과 방사선 연대측정의 정밀화. 유전자 감식 등 역사의 과학적 데이타를 근거로 현재는 새로운 역사로 다시 기술되고 있다.

이에 따라서 동 『길위의 역사』 책에  전문에서 저자는 "향토사에 상고사 문헌들의 검증된 자료가 없기에 평창의 상고사 서술에 미흡한 점은 지적되고 보완되어 바른 평창역사를 구현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전문을 상기하기 이전에 『길위의 역사』 책에 인용한 상고사 문헌들이 대부분 심각한 오류로서 평창역사를 왜곡시키는 문제를 가진 책으로서   이 장에서  『길위의 역사』 을 분석하여 평창역사를 새로운 연구로 조명합니다.

 

『길위의 역사』 책 본문 검토 부문 

1. 평창군상고사와 상고문화 (p 2)

<들어가는 말>에서 평창군 상고사는 정리된 자료기 별로 없어 잘못된 자료가 제시되면 검증없이 그 자료를 답습, 왜곡하는 경향이 생길 수 있으며 내용도 향토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검토가 필요하고 미흡한 면은 지적, 보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조법종은 강단사학자로 고조선, 고구려 강고사를 대륙에 있던 우리의 상고사를 반도안으로 이전 축소왜곡하는 현 학계의 중심의 학자이다. 따라서 우리 역사를 한반도 내로 주장하는 점들이 동 책에서 역력히  보인다.

『길위의 역사』 챡의 참고 문헌으로는 단재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 와 조법종의 『고조선, 고려사 연구/신서원』 을 인용하였다.  여기에  조법종의 『고조선, 고려사 연구/신서원』에서 조법종은 현 교수로서  이러한 주류학계의 박사, 교수들이은 일제 총독부 산하에 『조선사 편수회 에서  쓰다쇼키치. 이마니시류 등의 일인학자가 왜곡시키는 조선사를 만들어 해방후 이병도 (조선사 편수회 직원. 서울대 교수, 문교부 장관역임), 신석호 (조선사편수회 근무, 고려대 교수 역임)의 제자들이 현재까지 우리 역사학계(교육부, 역사편찬 위원화, 중앙민족학 연구원,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일제 황국사관에 의한 식민지 역사관을 가르치며, 현행 교과서에서도 고조선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서 우리의 역사를 한반도로 축소 왜곡하여 지금까지 잘못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그 예로 후당서등에는 고조선을 진국이라 하며 한(韓)은 세종류가 있으며 마한, 변한, 진한으로 진국의 영토는 사방 4천리라 하였다. 금수강산 3천리는 천리를 잘라 먹은 역사로,  강단사학은 식민사학이 만든 조선은 한반도로 평양을 중심으로 하며 강단사학자들은 현재의 학생들에게도 왜곡된 역사를 주입시키고 있다.

◆ 강단사학은 이번에 취임한 동북아 역사재단 회장은 서울대 역사교수 출신으로 바로 어제 기자회견에서 고구려는 동북공정에 의해서 중국과 한국의 역사로 공유해야 한다. 또한 독도는 우리땅이 아니었기에 일본학자들을 초청하여 같이 연구회의를 하겠다고 일반인들이 들으면 분노하게될 상식이 없는 소리를 한다.  우리의 역사를 우리가 배운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가 한반도에서 시작되었다고 배웠고 현 학생들도 일제가 왜곡한 (한)반도사관의 역사를 베우지만 중국 25사등 많은 문서에서는 고구려 백재, 신라등 우리의 역사는 대륙(중국동부)에서 기록된 것을 왜곡한 역사를 배우고 있습니다.`

가. 조선 상고사의 검토 (p 4)

 단재 신채호에 의하면 고대 아시아 동부의 종족은 우랄어족과 중국어족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는데 조선족은 우랄어족에 속한다.

우랄어족과 중국어족 두 갈래 설은,  30년대 작성한 『조선상고사』이전에는 언어 계통학은 중국, 일본의 동양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인듯 합니다. 당시에 언어학 연구에는 방대한 범위의 언어 연구등에 한계가 있겠으며 이로서 동 책에서 서술한 조선(韓)족은 우랄어족이고 또한 중국어족이란 없으며 인도 유럽어족으로 분류한다. 이 문제는 학교에서도  우랄 알타이어족으로 배웠다

<우랄-알타이어족>

고조선 문명은 BC 2세기부터 BC 108년 고조선 멸망 후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단군민족은 12연방의 시스템을 가지기에 그중 일부는 서역으로 이동하여 훈족, 불가르족, 아발족, 마자르족, 위그르족, 튀르크족의 일부로 다시 이동하여 유럽 중, 북부유럽의 바스크족, 튀르크족, 에스토니아, 핀란드, 러시아, 수 많은 타타르 공화국 언어가 우랄 알타이어족에 속하게 된다.

여기에 학자들의 연구에 고조선문명의 고조선어가 우랄알타이어의 공통 조어의 기원이다. 흔히들 우랄- 알타이어족이라 하지만 우랄어족과 알타이어족은 언어학적으로 전혀 다르다. 한민족은 우랄- 알타이어 족이라하며 조선족(한민족)은 알타이어 족 퉁그스계라 한다. 

알타이어족의 특징은 교착어이며 모음조화, 두음법칙이 작용되고 또한 어휘의 성별이 없다. 한국어, 일본어, 아니누어는 현재에 대두되는 이론으로는 트랜스 유라시아에 속하며 유라시어 공통점은 교착어로서 주어+목적어+동사의 배열 구조의 언어이다.  

※우랄알타이어의 분석은 다음편 "트랜스 유라시아 어족" 편에서 세부적으로 합니다

 이는 논문에서 한국어, 일본어는 우랄알타이어족에서 초기에 멀어져 우랄알타이어족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트랜스유라시어로 구분하였다.

2.  <1-2장  상고사의 검토 방향>(P4~10)

(본문) 삼조선의 총론의 문제와 기원전 4세기경 조선이 분리되면서 삼조선이란 명사가 생겨났다.

 『길위의 역사』 <1-2장  상고사의 검토 방향>에서  (고)조선은 신조선, 말조선, 불조선의 삼조선이 있는데 신한은 대단군이니 왕이며 제사장이고 나마지 마한과 변한은 신한(진안)을 보좌하는 부왕에 불과 하였다. 또한 삼한(마. 진, 변환)을 지칭하는 것으로 기원전 4세기라 하고 평양은 막조선의 수도로 설명하고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 상고사 에서는 고조선을 삼한이라고 처음으로 밝히고, 다음으로 정인보도 고조선을 북삼한, 남삼한으로 구분하였다 여기서 전삼한이나 북삼한은 같은 내용으로 우리가 배운 한반도 남쪽의 마,진,변한의 후삼한과는 2천년의 시차가 있다.

『길위의 역사』 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전기 삼한의 진, 번, 막조선으로 각기 수도는 부소랑(하얼빈), 오덕지(인시성), 백아강(평양)으로 인용하며 여기에서  후삼한의 이야기를가 섞여 전개하며 혼돈스러움을 가진다.

가령 일제에 조작된 식민사학을 추종하여 우리 상고사 모두 오류를 가지는  현 우리의 학계 강단사학의 반도사관에서 평양은 대동강의 평양으로만 인식한다. 하지만 중국 25사나 고서, 고지도서 대륙의 평양은 시기적으로 5~6곳 있있다.  그러기에 평양이 펴라는그 뜻이 아니라 하나의 어원설이다. 이러한 점에서 진국의 도읍지를 처음에 아사달이라 한 것은 아스는 하나란 고어이고 달이란 月로 땅을 가르킨다. 따라서 아사달은 조선의 최초, 중심 땅이란 뜻으로 카자흐스탄은 수도를 옮기고 수도 이름을 아스타나라 하였다  이 언어가 카작발음으로 아사달이란 뜻이다.( 후일 동이족편에서 카자흐스탄을 이야기 합니다)

또한  조선상고사』 에서 설명하는 기준의 기자조선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기자 조선은 실체가 없으며 고려 기록에는 불자가 열이면 아홉이고 유학자가 나머지라 하였는데 고려 후기에는 주자의 성리학자들이 많아지며 이 유학자들이 평양에 기자의 사당등을 만들고 기자조선으로 성리학자들의 중화사상에 기인하는 썰이 위증의  역사로 둔갑되었으며, 현재 우리역사의 , 고조선의 시원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기자에 대한 역사 기록은 그렇지도 않으며 이를 사마천의 사기에서  사실을 뒤집어 썼으며 또한 일본 학자들의 낭설과 현재도 조선때 유교사관의 중화론에 학자들은 이를 신봉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기자조선 주장의 증거자료들을 못가진다는 점이다.

 기자조선은 급 날조된 역사이기에 1964년에 교과서에서는 기자 조선을 삭제하기로 했다. 그리고 1974년 교과서 편찬에 논쟁에서 기자조선은 각주로 언급되다가 2010년 지금의 교과서에서는 기자조선이 완전히 빠졌다. 

동책 길위에 역사책은 2009년 저술하였는데 이러한 부분까지 당시에는 기자 조선에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점이 사학계의 쟁점사항으로 뉴스가 되는데 사학을 하는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그 내용을 알게 되는데 동 책은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오기록이다..

※ 조선의 삼한론은 결국 고조선을 뜻하며 다음편 글에서 이해력있게 세부적으로 합니다,  이 장에서 지난7~80년대 만주 요하지방에서 1200여 유적이 발굴되었으며 이 유적들은 9,500년전부터 계통적인 유적을 가지며 이중 4,500년의 하가점 하층 유적과 예, 맥의 십이대영자. 백금보 유적을 이해력있게 설명합니다.( 현 주류학회는 고조선을 부정하기에 이에 입장표명은 없는 상태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민족의 기원은 북방계라 하는데 과학적 연구논문에 의해서 이 문제까지도 포괄적으로 설명합니다.

3. 중국자료에 의하면 고조선을 예족으로 기록하고 고구려 세력은 맥족으로 기록한다. (P4~10)
◆ 고조선은 예 맥 조선이라고도 하며 예,맥이란 환웅족과 함께 민족으로서 제정일치의 사회로 고조선을 구성하였기에  중국자료에 25사와 그 외에도 고조선은 예족만이라고 기록한 책은 없읍니다.

민족과 부족은 다은 의미이다. 민족은 여러 인종의 다인종으로도 국가를 건설할때 민족이고 흔히 강원도에서 예맥이라 함은 혈연이나 지연의 부족을 이루기에 예족만이 고조선이 아니다. 고조선 멸망후는 고조선의 강역에서 고조선이 열국으로 나누어지며 강원도는 특히 예, 맥의 부족국가가 성립되었다.

고대사의 유적과 유물에서 가장 기초적인 고고학은 무덤의 양식과 그엔에 출토되는 부장품에서 구분지어진다. 따라서 맥족은 석관묘이고 예족은 토장묘의 구분은 확연히 다르다, 고조선의 맥족은 소수맥, 양맥, 대수맥, 춘천의 맥국이 있었으며 우두동은 맥국 마가, 우가, 구가, 저가의 한 부족체로서 춘천 중도 유적의 고인톨은 석관묘로서 맥족이었으며 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의 돌넘 무덤도 맥족으로 구분된다.

평창청동기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에 고조선의 비파형 청동검이후양식인 세형동검 출토와 옥구슬, 환옥은 고조선 유물양식으로 이는 고조선의 후예인 고리라는 멕시코 아즈택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맥족과 예족에 대하여서 다음에 고조선과 중도유적, 평창 하리 유적이 동일한 문화라는 점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기록한다.

4. 조선 상고사의 기록에서 한반도 이주설은 3갈래로 요약하는데 남방계 종족은 韓族이다. (P4~10)
 韓族 은 남방계 종족이 아니다. 현재 재야 사학자들은 여러 주장에 그에 공통점은 바이칼 호수 서편의 부리야트족과 동편의 코리족에서 시원을 찾는다. 예,맥, 환웅족과 고조선이 하얼빈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그 추운곳에 왜 살았을까 의문을 갖지만 4천년전의 만주의 환경등 다양하게 고조선 편에서 서술합니다. 또한 3년전 네이쳐지에 소개된 세계 40여 학자의 유전자 언어학등 다양하게 인류의 기원을  파헤친 가설에 의해서 그간의 학설보다는 과학화론에 의한 우리민족의 기원을 다루어 다음 글에서 민족 기원설을 조명합니다.

<바보온달> 고구려에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에서 온달은 누구인가에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는 부리야트 족으로 부리야트족도 동이족의 선비족으로 사슴등 고기만 주식으로 하기에 체격이 180cm넘는 장신들이라 한다. 평강공주의 부친 평원왕이 사위로 삼았을때 그는 용맹도 했겠지만 바보가 아니었고 다만 언어소통이 안되자 바보 바보하고 이야기 한듯 하다.

● 조선은 신, 말, 불 삼조선이 있는데 진, 마, 변 삼한이라고 기록한 것이며 모두 하나의 조선으로 진한이 대단군이니 제사장이고 마, 변 두왕은 신한을 보좌하는 부왕에 불과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 조선이 분립되면서 삼조선이란 명사가 생겨났다.  신(진)조선 , 불조선 (기자조선), 말조선(마한)은 평양에 위치하며 압록강 이남은 마한의 소유였다. 그 후 남쪽의 월지국으로 도읍을 옮겼고 월지국은 웅천(공주)이니... 

 동 책에서는 평양을 펴라라는 뜻으로 전달하는데 평, 원. 양은 넓은 뜰을 가르키며  양양, 안양. 평양 등으로 양자를 쓰는곳은 배산임수이 지형으로 살기좋은 곳이란 뜻으로 사용하였다.

길위에 역사책에서 인용한 윗글은 전기 삼조선으로 고조선을 이야기 하며 여기에 붙여쓴 소서노와 백제,  마진, 변한의 삼조선은 고조선 후기 열국시대의 삼한을 이야기 한다.

신채호 선생이  우리 역사에는 고조선이 하나가 아니라 삼한이었다고 처음으로 밝혔으며, 따라서 전 삼한과 후삼한으로 서술하였으며,  정인보 선생도 북삼한, 남삼한이라 하였으며 단군-기자- 위만 삼한이 아니라 고조선- 부여- 고구려로 기자동래설을 부정하였고 백제의 요서 경략설(중국 요서를 공략하여 백제 땅으로한 기록이 중국 문헌에 있다)을 밝혔다.

다음으로 기자조선은 고려말 유학자로부터 이이 이황 정약용 학자들이 숭배한 점은 당시 허위 문헌인 중화론적인 자치통감에  의한 지배사상이 되었기 때문이며 이를 일제 식민사학자나 현 강단사학도 이를 억지 인용하고 있다.

허위의 이론도 함께 합니다. 가령 예송논쟁에서 남인들은 왕은 3년상이라 주장하는데 서인들은 1년 복상에 주장에 서인들은 왕은 중국의 황제 아래이기에 왕을 인정하지 않는 뜻으로  식민지 이후 오늘까지도 노론게열이 나라를 만치는 점이다.  그러기에 기자 조선은 유교정책하의 가공의 역사란 점으로 다음 글에서 해석합니다.

나. 조선상고사로 정리한 평창지역 (p8)

 2)에서 중요한 것은 평창과 횡성은 맥국이나 예국의 영토도 아니라는 것으로 태기왕이 피신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마한이나 백제의 통치 밖의 영역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는 객관화된 사실로 결론을 하여야 하는데 이 점은 동 책 저자의 주관적 결정으로 역사를 단정하여 오류를 범한  것이다.

5. 평창과 황성은 맥국이나 예국의 영토도 아니라는 점. (P4~10)

◆ 이 내용은 틀렸고 평창은 맥국이다.

평창은 맥국이나 예국의 영토는 아니란 점이다는 서술자의 주관적 결론으로 역사는 주관적 단정은 금물이다. 다만 현 학계에서는 열국에 대한 한 줌의 책도 찾아보기 힘들고 고조선은 부정하면서 강단사학자에는 자칭 고조선 1호 박사라 스스로 자랑하는 명문대 선생이 다년전 개천절 앞전 어느 행사에서 연사로 하는 말왈,, 개천절은 역사가 아니라 픽션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고조선 박사도 있지만 현행 교단에서 고조선 논문은 석, 박사 심사에서 자동 탈락된다.

이렇게 우리 역사가 부진한 탓에 고조선 이후 마 , 진,  변한, 동예. 예맥,  읍루, 말갈, 물길 등 열국시대에 대한 책도 없으며 또한 학자들의 논문도 많치 못한 점은 열국시대의 강역등 가장 어려운 역사이다.

현재도 강원도 예맥에 대하여 논문은 아마 한 두편으로  평창의 예맥의 구분은 쉽지 못하다. 따라서 동 책의 편찬연도인 2009년에는 신석기 유물이라는 공렬토기가 고조선에 해당하며 또한 사진은 볼 수 없는데 용황리에서 발굴된 미송리 토기는 고조선 토기로 압록강상의 대수맥의 지역쯤에 미송리가 있다. 또한 동첵이 2009년에 저술하였는데 이미 만주에서는 요화 문명의 여러 유적, 그 중에서도 고조선시대에 맞닿는 하가점 하층 유적의 발굴로 우리의 상고사는 새로운 역사로 서술되고 잇는 시기이다. 다만 교권의 주류인 강단사학은 고조선 자체를 부정하기에 교과서에는 아직도 아이들에게 거짓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다음 글에서 상당한 분량으로 예백, 조선에서 맥족과 예족,, 맥족의 분포와 춘천 중도의 맥족 유적(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신석기 유적으로 이곳은 문화제법에 의거 개발제한역역인데  무지한 강원도지사는 문화재청에 법을 바꾸어 자기 생색을 조상들의 고인돌 주거지등을 모두 파댕기고  놀이터로 만들었다)

춘천에는 우두동이 있다. 이는 고조선의 마가 우가 구가 저가등 부족국가의 하나이다. 여기서 문제는 평창이 맥족국가 성원인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 많은 부분으로 맥족임을 밝힌다.

6. 지명에 대하여. p3
● 우오(于烏)는 上의 개념으로 높다라는 뜻의 글
●  (필자의 해석) 고구려때의 평창군 최초의 지명으로 우오의 于가 上이라는 개념은 합리성을 가지는 설명이며 당시 평창은 예맥 후기의 남부어나 마한어권에 속하였으며 옛날에는 大. 小의 구분에서 대부분의 단어들은 단어의 확장력을 가지지 못하고 단순하게 크다, 넓다등  위(上)의 개념의 의미를 가지는 단어들을 가졌으나 小자 개념의 작다,  좁다 등의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오(于烏)에서 于자도 上의 의미를 포함한다 하겠다. 따라서 동 책에서 이 의견은 연구 의미를 가진다 하겠다.
ex; 白(높다 계열) - 백두산. 백덕산. 백록담. 장백산 등
       洪 (넓다) - 홍수. 홍성 
       翰 (상위) - 한림원. 
       呑 (삼킬 탄) - 백제고어로 우렁찬의 뜻. 미탄
       寒 (추울 한) -마한어로  높다의 뜻. 한치 뒷산 
 위 보기에 보듯 옛 언어들은 크다, 높다, 넓다란 계열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길의의 역사책에서 우오등의 단어의 한문표기는 이두문자 표기일 가능성이 높다 하는데 고려초기까지 모든 한문은 이두음(음차문자)로 사용하였다.
음차문자의 예로 필자의 책에서는 송계산을 여름산(우리말)을 음의 한자로 표시할때 餘陰山으로 표시되는 것이다.

7, 평창의 봉수( p40)

p 43  페이지에 조선 봉화도는 조선 전역의 봉화도는 아니다. 봉화란 서울에서 위급사항을 평창, 영월 등지에 알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큰 임무는 전시체제 준비로 조선은 당시 일본은 국가도 형성되지 못하고 지역적 막부체재로 조선은 물론 대만등까지도 약탈이 심하였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원주, 횡성, 평창등 강원 내륙에는 실록에서 봉수대 기록이 없다고 하는데 이 점은 이러한 봉화는 국가 위급사항시 각 변방에서 조정으로 보내는 신호로 43페이지 지도에서는 왜구 출현이 심한곳은  남해안과 동해안으로서 봉수는 부산에서부터 동해안을 따라 원산까지 올라가 함경도 봉수와 만나서 서울로 연결된다.

다만 방림등 산 정상에 봉수시설로 보이는 석담등은 봉화로 지역적 전달의 약정을 가졌는지는 몰라도 조선 중, 후기에 강원도 반의 강릉부는 인구가 2만 8천이었고 원주목은 주천까지의 범위로 2만 2천명이고 방림.대화. 진부는 강릉부 산간지방으로 인구가 적었기에 지역적인 봉화가 가능한 상태로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석축들은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8. 평창의 역원고찰(P58~85)
◆ 역원제는 고증도 좋치만 역원취락의 형성이 선행되었기에 사람과 말이 다녀서 길을 내었기에 현재까지도 그곳이 도로 옆이어야 한다.  그 예로 동 책에서는 역수역을 도로에서 들어거서 농터를 약수역이라고 확정, 단정하였는데 그 증거는 없다. 그곳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위치선정으로 보이는바 역사서술을 개인의 사관으로 단정하는것은 기만이다. 항상 역사는 새로운 문헌, 유적이 발굴되어 역사는 새롭게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사료가 없으면 평창은 예맥국이 아니다. 또한 여기가 역이다 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횡계역은 선자령을 올라오는 횡계 3리가 가능성을 가지며, 대화역도 그 건너에서 강무행사를 치렀다는 실록의 기록으로 대화 3리가 위치로 추정되며 진부역은 마평이라 하는데 마평은 역원이 아니라 마방이고 역은 진부시장이다. 여기애는 증언도 따른다. 이로인해 정원대의 책에서는 마평이 진부역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여 진부인들이 이에 의심이 되자 필자는 진부인들에게 진부역 고증을 설명하였다.

따라서 평창의 인문지리인가 하는 책을 가지고 아직도 방림역은 방림삼거리이고  한치등의 설명이 맞지않는 바 이에 필자는 몇 번인가 답을 해준적도 있다. 단 동책에서 방림역을 천재당쯤의 민가주변으로 비정하는바 방림역은  삼거리 안골로 이전되었으며 그 전에 방림역은 상, 중 방림의 도로가 아니라 엤날에는 보편적으로 하천을 따라 도로가 생기는데 이는 식수공급과 현 도로가 다닐 수 없는 상태로 절벽이 없는 방림지형에서는 하천가가 자연상ㅌ태에서는 더 다니기 좋았기에 천변을 따라 도로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천재당 아래가 쉬어가기 좋은 위치로 역이 형성될 수있는 가능지역이란 점이다.

( 역원제에 대하여서는 필자의 <평창역사의 이해 >책에  평창의 역원제 편을 정확하게 참고바랍니다.)

◆ 계촌리에 향교터가 있다고 증언을 받아 고찰하였는데 향교터의 주장은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향교는 조선시대 각 군현에서 3단 1묘제로 1묘가 향교로 그곳에서 춘추로 석전대제를 올린다. 그러면 계촌은 조선시대에 군이나 현이었어야 한다. 향교는 공자의 사당으로 조선은 유교의 구가로 왕보다 공자가 더 위에 모셔지기에 성균관에서부터 군현에 인가를 받아야 하는 양식으로 계촌리는 강릉도호부 대화면에 지역으로 향교의 설치는 불가한 것이다.

현재 이곳이 향교라고는 많이들 알려지지만 이는 주민의 증언으로 모든 증언은 형식과 규격에 맞는가를 판단해야 한다.

 각 군현에서 향교를 자리잡기에 향교터는 대부분 해당 관아에서 제 1의 명당을 찾아 공자의 사당을 잡는데 평창의 관아도 명당이라고 회자되고 있는 곳이다. 여담인지는 모르나 일설로 안미벌은 넓지만 향교자리는 나오지 않는다 한다. 물론 1906년 방림, 대화는 명주에서 평창으로 이관되어 위 설명은 맞지는 않지만 향교는 명당자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들은 이야기 한토막에서 조선 구한말 왕족 한 분이 재산쯤에 낙향을 하였다 한다. 후손은 아직도 그곳에 산다.

그분 말에 의하면 선대 할아버지가 말을 타고 방림을 지나 이곳 계촌을 가다보니 빨래하는 처녀가 마음에 쏙 들어 그길로  촌장에게 이야기하여 그 처녀에게 장가를 갔다한다. 이 분은 왕족이라 처가쪽에 대궐집을 짓고 살았을 수도 있으며, 또한 사당을 지을 수도 있다.  왕족이기에 왕보다 위인 공자의 사당을 짓든, 어떠한 신위를 모실수 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에 공자를 모셔도 사당과 향교는 구분된다.  

9. 평창의 국구사우 p94

문헌고증은 좋은 사료입니다면  94쪽에서 중리 동북쪽 곧 노산성 동쪽기슭에 (평창군 오면지도 참조) 일제시대때 태워졌다고 기록한바 이는 국구사우의 터를 이야기하는듯 하지만 증명할 정확한 사료는 갖지 못하고 단정하였다.

또한 노산성 동쪽이라는 표현에서 현 극락사 위치에서 노산을 오르는 길도 없고 수직의 산으로 오를수도 없는데 기슭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수사적으로 맞는 표현이 아닌데 따라서 정원대의 인문지리에서도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98년 평창군지에도 동일한 기록으로 이의 출처표시가 없는 표절로서 이 문제가 아니라 이 표현은 아마 75년도 강원출판사 발행의 태백의 설화 평창편에 기록으로 당시 이 책의 서술자는 강원도 26개 전지역을 답사도 없이 읍면지등을 참고로 서술함에 노산이라하니 자연 산 기슭이라고 표현한듯 하다.

 이 표현을 평창사람들은 눈으로보면서도 기슭이라 따라 표현하는 표현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10. (5-2) 거슬갑산(P97~105)

 『길위의 역사책』 에서 기술하는 거슬갑산의 단묘등 실록의 기록은 원주목(현 원주시)의 기록이며 당시 주천현은 영월이 아닌 원주관할지였기에 주천현에서 기우제를 지낸 것이다. 동 책에서는 이러한 세종실록에 나오는 기록의 기우제를 평창군의 기우제로서 도돈의 거슬갑산의 정산에서 단묘자리라 하는 점은 오류이다.

원래 거슬갑산은 백덕산으로 개명되고 이후 1~2 백년후  고지도가 그려지는 시기에 고지도에서 평창 서남부에 거술갑산이란 지명을 쓰게되어 현 도돈리 옥녀봉의 산을 거슬갑산으로 지칭하게 된 것이다.

필자가 기록한 거슬갑산의 위치연구란 글에 정확히 설명되어 있으며, 여기에  거슬갑산의 뜻에서 갑자는 허리 갑으로 옛날 정승들의 옷은 길게 단이 허리까지 주렁 주렁 몇 겹으로 올라오듯한 형상의 느낌을 갑이라 하는데 해발 1350m 의 백덕산 둘레에 1000m급 산으로 사자산, 사재산, 수정산등 여러 산이 허리 둘른 모습의 뜻 한문이란 점이다. 따라서 도돈 옥녀봉의 거슬갑산은 그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또한 백덕산으로 개명하는 점은 백두산, 장백산등의 백자는 크다(大)의 요소를 가짖는 단어로 백덕산도 같은 의미입니다. 과거에는 크다라는 개념은 있었으나 작다(小)의 의미는 사용하지 않았읍니다

ex; 洪 - 홍성 등

       呑 - 삼킬 탄 . 미탄 등 마한의 고어로 지명에 여럿 사용되었다.

       翰 - 한림학사등 모두 크다란 요소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 분석은 아래에 링크한 필자의 글로 대신 합니다.

거슬갑산의 위치연구  https://kkks1.tistory.com/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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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대는 『평창의 인문지리』란 책에서 (출전; 김진백, 정원대의 『길위의 역사』)란 책을 17번 출전이라 하며 인용하였다. 하지만 『길위의 역사』은 위에서 지적한 책 전반의 문제를 내포하는바 이를 19번이나 내용도 없이 출전이라고 제목만 인용한 『평창의 인문지리』책에서 이와 같은 문제를 가짐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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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1, 조선 상고사와 민족의 기원등과 고조선의 특징문화
2, 예, 맥,조선의 고조선과 이후 열국시대에 강원도는 예멕이라고 하는 점에 예맥이란 어떤 역사인가와 고조선과 중도유적 평창유적의 공통점과 상관관계로 서술합니다.
물론 현행 교과서도 없고 특히 예맥에 대하여서는 논문도 2편 정도이지만 전체적인 이해로 서술합니다. 이는 필자는 다년간 혼자 공부하였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역사는 진한시대 즉 고조선에서부터 대륙(중국)에서 시작되었기에 우리가 배운 역사는 대부분이 잘못 알고 있기에 이러한 점과 또한 고조선은 세게로 확장되었고 또한 많은 문명과 문화로 세계 학자들은 문명의 최초 발상지로 보고 있으며 그 중 하나로  다뉴세 문경은 현재 과학과 공학으로도 못만드는 유물입니다. 후일에는 이러한 고조선의 찬란한 문화도 설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