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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율곡 이이선생의 고향은 평창입니다.


[율곡 이이선생의 고향은 평창입니다]


 

< 비로봉( 비로=첫째) 정상에서 내려 보이는 오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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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선생에 관한 나의 생각을 쓰기전에 우선 이 시의 맨 아랫구절에

가소롭다 스님이 실상(實相)에 미여혹하               

 (無)자만 갖고부질없이 추구하네

 

아무리 詩라도 남을 펌하는건 아닌가??

우리가 그런 말을 하면 무식쟁이가 스님을 비아냥거린다 할진대 李珥선생은 왜 그런 詩를 썼슬까?? 

우선 이 야기부터 풀어 보도록 한다

 

李珥선생은 大 성리학자로 이 성리학( 주자학)은 무슨 뜻일까??

성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에서 주자으로 넘어가는 역사적 관점을 잠시 고찰해 는게 이해의 가장 빠른 길일 것이다. 

 

주자학은 고려말에 수입되어 조선 건국이념의 바탕이 되었는데, 불교의 사유에 의해 주도되고려 말기엔 심각한 사회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려말엔 귀족, 지방 호족, 사원등이 토지 겸병등의 농장의 확대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국가와  자영농의 토지어들고 국가의 재정은 궁핍해지고, 농민은 국가와 귀족에 이중적 조세수탈로 농민이 붕괴되어 계급과 계층간의 모순이 심화되는데, 그 피해는 농민뿐만 아니라 다른 계층도

있었다.

 

그들은 돈도, 권세도 없이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중앙관료에 등장한 신진 사대부들이다. 권세가들의 인사권 장악에  따라 신진 사대부들은 신분 상승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며, 또한  그에 조차도 잘 분급되지않는 실정에 사회적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성계주측으로 신흥 무장세력들이 을 감행하게 되는데...

 

여기서 당시 유학자들은 여말 사회의 문제점엔 불교의 멸 인륜적 경향, 즉 인륜을 무시하는  경향과 가경미치는 사원 경제의 해악성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불교는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통치자가 피통치자의 동의를 얻어 전체를 통제하는 시스템이 부족한 것으신진 사대부들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새로운 이념체계를 확립하는 것이 주자학이며, 윗 시에율곡(李珥)선생의 불교는 無자만 부질없이 추구한다는 말엔 그 주자학과

불교의 대립적 치의 비교가 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 잠시 또 주자학이란 무얼까??

주자학 즉 성리학은 남송의 주희에 의해서 집대성한 학문체계로 그 발생자체가 불교의 초 세간적 사유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으로 사람이 현실속에서 도덕적 규범으로 살아야 하는 목표를 형이상학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지면을 통하여 후세가 쓰고자하는 것은 주자학의 이론이나 주기론, 주리론의 이해나 "4단 칠정""인심도심"의 논쟁에 관한 어려운 생각의 글은 쓸 입장은 아니다.(그것은 이하 한국 철학서적들에 려져 있슬 이다)

 

다만 李珥선생의 일생에서  그의 마음과 수양의 고향이 평창땅이란 것과 유년시절 평창에서 그가 은 호연의 상을 보도록 한다.


그 호연의 사상속엔 성혼과의 십 년간에 아홉번 편지왕래의 인심 도심의 논쟁으로 성리학은 절정기를 맞이 데, 우리나라엔 여러 사조의 전환기의 논쟁들이 있는데 그중 초의선사백파선사문하에 르는 조사선논쟁에 추사 김정희의 오만스런 망증15조를 예로 본다그곳엔

예의란 송곳찌를 점만큼도 없고 오직 자기 것만을 다고 주장하지만 이 성리학논쟁들은 (4단 칠정론쟁 등) 예를 존중하학자로서 자기 학문의 연구에 발전을 기하는 논쟁이란 점이다.

 

 

 

 

<봉산서재 추계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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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의 출생과 성장시기의 연대를 대략 본다면,,,


율곡은 이원수공의 4남 3녀중 다섯째인 3남으로 어머니 신 사임당이 33세때 강릉 오죽헌에서 탄생하였고,

3세때 글을 읽기 시작했으며 

6세때 서울의 수진방(현 수송동과 청진동사이) 이사를 하였으며,

        (*주-어머니 신씨는 봉평 집을 정리고  시집의 살림살이를 관장하고져 서울로 이사함 )

7세때 어머니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스스로 문리를 깨우쳐 통했으며,

       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대학(大學)등을  어렵지 않게 스스로 깨달아 알았으며,


8세때 파주 화석정에 올라 시를 지었고 10세때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었다.

13세때 進士 초시(初試)에 장원으로 올라 학문의 명성이 자자해지고,

16세때 어머니가 별세하며, 어머니 행장을 짓고 3년간 시묘(侍墓)를 하였으며,

19세에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가 불교에 심취한 바 있다.

       우계 성혼(牛溪 成渾, 선생보다 1년 위)과 도의의 사귐을 맺어 평생 변하지 아니하다

      ( 이부분은 아래의 글에 인용할 성리학의  완성이론에 다가고져 성혼과 사이에 인심도심 논쟁에 관해 쓰고져 함이다)

20세에 봄에 다시 속세로 돌아와 강릉 외조모(이씨)에게로 가다. 거기서『스스로 경계하는 글』(自警文)을 짓다

21세 봄에 서울 집으로 돌아오다. 한성시(漢城試)에 장원급제

22세때 성주목사 노 경린의 따님 곡산(谷山) 노(盧)씨에게 장가들다.

23세때엔 경상북도 예안(禮安)으로 35세 위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을 찾아가 뵙고 학문을 물으며,

        이해엔 별시에 장원급제도 하였다.
29세에 명경과(明經科)에 역수책(易數策)으로 장원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되다.


34세때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에 임명되어 7월에 서울로 올라오다. 9월에「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올리다

36세  홍문관 부응교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춘추관 편수관(春秋館 編修官)으로 옮겼으나,병으로 사퇴하고 해주 (海州)돌아가다.

       고산(高山)석담구곡(石潭九曲)을 구경하고 해가 저물어 돌아오다가, 넷째 골짜기에 이르러 [송애(松崖)]라 이름하고 기문(記文)을 지으며

       또 남은 여덟 골짜기에도 모두 이름을 붙여 기록하고, 드디어 은거할 계획을 세우다.

37세 3월에 병으로 사간원 사간과 홍문관 응교를 모두 사직하고 서울로 올라와 여름에 율곡(栗谷里)로 돌아가다.

       이때에 그 유명한 이기설(理氣說) 때문에 우계(牛溪) 성혼 선생과 론을 전개하기 시작하다

39세에는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지어 올려 시국을 바로잡기에 애쓰다. 3월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 에 임명되다.

       10월에 황해도 관찰사(觀察使)에 임명되다.

40세때엔 이른바 동서당쟁(東西黨爭)이 시작되다.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지어 올리다.

41세때 율곡리와 해주로 돌아가 42세때에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짓다. 그리고 또 향약(鄕約)을 만들어 고을의 폐습을

       바로잡고, 사창(社倉) 제도를 실시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제적으로 구출하기에 힘쓰므로 모든 국민들의 칭송을 받다.

43세때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짓고 44세때엔 소학집주(小學集註)를 탈고하다.

46세땐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오르다.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에 임명되다.

47세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다. 7월에「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지어 올리다.
48세, 시국 구제에 관한 의견 시무육조(時務六條)를써서 간곡한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불필요한 벼슬을 도태할 것,

      고을들을 병합할 것, 생산을 장려할 것, 황무지를 개간할 것,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어 있는 공납(貢納)에 대한

      법규를 개혁할 것, 성곽을 보수할 것, 군인의 명부를 정확히 할 것, 특히 서자들을 등용하되 곡식을 가져다 바치게 하고,

      노예들도 곡식 가져다 바침에 따라 양민으로 허락해 주자는 것들이다.

      그리고 또 국방을 든든히 하기 위하여 10만명의 군인을 양성해야 할 것을주장하다.

      6월에 북쪽 오랑캐들이 국경을 침략해 들어온 사실로 삼사(三司)의 탄핵을 입어 인책사직하고 율곡리(栗谷里)로 돌아

      갔다가 다시 해주 석담(石潭)으로 가다.

49세, 정월 16일에 서울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별세하다. 3월 20일에 파주(坡州) 자운산(紫雲山)에 장사 지내다.

    그리고 별세한 지 40년 뒤 인조(仁祖) 2년 갑자(甲子=1624) 8월에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다.


 < 이상 위의 연표는 사단법인 율곡학회의 이이선생의 연보를 간추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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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신사임당의 연표에서


19세때 덕수(德水) 이(李)씨 원수(元秀)공(이때 22세)에게 출가하다.출가하고 시댁으로 갈 준비차 친정에 물러 있던 중

         11월 초7일에 친정 부친 (이때 47세)이 서울 본가에서 마침내 별세하다

21세> (中宗) 19년 서기 1524년)한성에서 시어머니 홍(洪)씨 부인께 신혼례를 드리다.

        9월에 한성에서 맏아들 선(璿)을 낳다.  다시 이로부터 10여 년 동안 혹은 파주(坡州) 혹은 강릉, 혹은 봉평 (蓬坪;

        지금의 평창군 봉면 백옥포리(白玉浦里)으로 옮아 다니다

33세>(중종(中宗) 31년 서기 1536년)

      이른 봄 어느날밤 꿈에 동해에 이르니 선녀가 있어 바다속으로 부터 살결이 백옥같은 옥동자 하나를 안고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 주는 꿈을 꾸고 아기를 배었고, 다시 그해 12월 26일도 검은 용이 큰 바다로 부터 날아와 부인의 침실에

        이르러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조금 뒤에 아기를 낳으니 그가 율곡 (栗谷) 선생이요 그래서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고 하다.(다만 전설로는 봉평에서 배어 강릉 친정에서 낳았다고 함)

38세>강릉 친정에서 어머니께 하직하고 한성(漢城)으로 올라오며 대관령(大關嶺)에서 시를 읊다.<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

       望親庭)>서울 수진방(壽進坊;지금 수송동·청진동)에서 시집의 모든 살림살이를 주관하다.

       (*주-이때에 봉평 백옥포리 집을 정리함)

47세>부군 이원수공이 수운판관(水運判官) (지방으로부터 나라에 조세로 바치는 곡식을 실어 올리는 선박 사무를 맡은

        從五品 벼슬)이 되다.

48세>여름에 부군이 세곡(稅穀)을 실어 올리는 일로 평안도 지방으로 내려가다.(이 때 아들 선(璿)과 이(珥)가 동행하다)

      5월 17일 새벽, 병으로 누운지 2, 3일만에 홀연히 별세하다. 바로 그날 부군과 두 아드님이 배를 타고 서강(西江)에 도착

      부인의 별세한 소식을 듣다.(이 때 부군은 51세, 맏아들 선(璿)이 28세, 맏딸 매창(梅窓)이 23세, 둘째아들 번▷,

      둘째 딸▷, 셋째아들 이(珥)가 16세, 셋째딸▷, 넷째아들 우(瑀)가 10세였음)

      파주 두문리(坡州 斗文里) 자운산(紫雲山, 지금 파주군 천현면 동문리= 坡州郡 泉峴面 東文里)에 장사 지내다.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증직되다


    * 주; 서강- 영월서 동, 서강이 갈려 주천, 평창, 봉평 흥정계곡까지 이르는 강을 말함.


< 이상 신사임당의 연표는 사단법인 율곡학회의 연보를 간추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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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연표를 보면은 사임당 신 씨는 이원수공에게 19세에 출가하지만, 친정 부친이 그 해에 별세하자 3년상을 치른 후 21세때 서울 시댁의 시어머니에게 혼례 상을 올린 후 맏아들 낳고 이때에 친정이( 오죽헌으로 신 사임당의 외가) 가까운 백옥포리에 집을 마련한 듯하다.

 

사임당이 출가시 아버지 신명화 공은 사위 이원수에게 당부하길 내 딸을 시집 보내도 가르칠 것도 많고 고명 딸이라 멀리 못 보내겠다 하였던지라 출가 3년째인 21세 때부터 가정을 사임당은 본집을 백옥포리에 정하고 병환홀어머니가 계신 오죽헌과 파주 본댁을 10년간 드나들며 되었다.


사임당의 봉평 백옥포리에 본가엔  12년째 해에 이율곡을 잉태하여 친정인 오죽헌에서 출생하였위의 연표에서 율곡이 6세때 (사임당연표 38세때)  백옥포리의 18년 정든 집을 정리하고 서울 수진동으로 이사하여 시집의 모든 살림을 주관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봉평면 백옥포리는 어린 시절 여섯 살까지의 율곡의 고향임엔 틀림없다,

 

*주 ; 당시의 봉평면은 평창군 관할이 아닌 강릉부 소속이기에. 또한 봉평의 신 사임당 집은 강릉 최씨네 문중땅을 얻어 집을 지었다는 기록도,,,

       (봉평은 1902년 명주에서 평창으로 이관되며,  정선의 신동읍(사북,고한지역)은 평창에서 정선으로 이관되었다.

 

우리가 더잘 알고 있는 오죽헌 몽룡실과 율곡의 이야기모르는 친구 없겠지만 나는 친구들과 이야기 중엔 가끔 하는 말엔 율곡의 고향이 어덴 줄 아냐?? 하고 물으면 친구덜...넌쎈스인줄 알고 재빨리 엄마 뱃속, 그러니까 신 사임당 뱃속. 이런 무식한 넘들,,,

오죽헌인 줄 다 알면서 엉뚱한 답을 하냐?? 하지만 오죽헌이라... 그건 오답이죠, 오죽헌은 외갓집이니??

그럼 율곡의 고향은 어데이지?? 하고 물으면 시간이 정지된 듯 한참 말들이 없다. 그건 어디에그런 글이 없다, 그래도 그의 고향은 있슬거라는 생각들에 머묻거리긴,,,,,

 

그러나 당시 기록들엔 봉평은 강릉부 관할이기에 평창이란 지명의 기록이 없는 것이다. 봉평의 팔석정에 양사언은3일간 놀며 석대투간(고기잡기 좋은곳)에 앉아 유람한 것도 강릉부사강릉 임지내 이기에 가능 하다고나 할까??( 봉평은 1906년 강릉에서 평창군으로 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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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 엄기종님 까페>에서 발췌한 아래의 글을보면 위의 연표와 동일한 점을 볼 수 있다.

 

<발췌내용 간략>

율곡 이이는 어머님의 수기를 기록한바 있는데 어머니는 1504년 임영(강릉0에서 출생하시고 1522년 출가하셨으며 1524년까지 서울에서 사시고 그 후에는 봉평에 사시면서 강릉을 다니시다 1541년 다시 서울로 돌아오셨다

18년을 혹 고향 강릉을 다녀오셨다며는 사임당의 사색과 이율곡의 교육의 장은 율곡선생님이 밝히신 바와같이 서이래동거요 음양의 태극이 휘도는 백옥포리 지 바른 어디쯤 양택 명당의 터가 분명합니다.


당시의 백옥포리는 강릉 행정구역이었으며, 물좋고 산세 좋고 역전이 없는 양반의 터로서 호하던 주거지 였슬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만 백옥포리 땅이 거의 강릉 최준집씨의 땅이었다가 지금은 소유주가 바뀌습니다.

 

봉산서재는 신 사임당이 이곳에 18년간 거주하면서 율곡을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후세에 전하고 리고자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이율곡 선양사업을 펼쳤다는 통문(通文)과 유림의 명단이 적힌 고 문서가 진부에서 발견되어 봉산서재의 역사이야기를 사실로 받침하고 있다.

 

그라고 또한 백옥포리 논에서 기왓장등이 출토되었다는데 잊혀지고 없어질 그의 현장의 검증이 아쉽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이상 엄기종님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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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윗 詩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첫번째시 바람에 옷자락 스쳐 허공에 드날린다
또한 두번째 시에 선방(禪房) 방석에 앉으니

                         새벽 종소리에 깊은 반성 떠 올라

                    담담한 심정 나도 어쩔 줄 모르겠네

이 두편의 시에는 불교와 도가적인 이미지가 흐르는듯,

율곡이 19세에 어머님 삼년상을 탈상 후 그 충격으로 불교와 도교에 까지 관심을 가지고 금강산에 입산하여 공부한 적이 있으며 일 년만에 다시금 성리학의 품으로 돌아오며 그 첫번째 시는 33세때 쓴 것으로 불교적 색채도 지니고 있는 듯하고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이 선생은 오대산을 자주 찾것이고  33세때는 청학동 소금강도 다시 찾아 탐방하였다.  

오대산 넘어에 소금강엔 그 소금강이란 이름도 율곡이 짓고 식당암의 너럭바위를 비선암(秘仙岩)이라 고치, 이 일대를 천유동(天遊洞)이라 하고, 바위 바로 아래에 있는 못을 경담이라 하고 이곳 전체를 청학동이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젋은 나이의 9번 장원급제시기에 식당암 바위에서 책을 읽었다는 기록들도 오대산에자연을 벗삼아 수학한 듯 하다

아래 시 3편은 그가  병환과 탄핵등 여러번 아마 송강 정철, 또한 허균보다도 더 많이 벼슬버리고 파주 율곡리 향리와 처가쪽인 해주로  돌아갔단 년표만 있지만 이 시에서 보면 그는 아마 시간이 날적마다 오대산을 찾은 듯하다.

 

그렇다, 오대산은 율곡 이이의 출생지의 정기를 품은 곳이기도 하지만 그의 평생의 마음을 다스리는 마음의 고향인 것이다.

 그래서 율곡 李珥 그는 평창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후세는 십 수년전  당시 군청의 관광문화과에 재임하던 동창의 말끝에 무이리 "국립 청소년 수련원"을" 율곡 수련원"으로 이름지으면 좋치 안냐하는 말을 한적이 있다.

 처음 들을때는 어색할지라도 이런 뜻을 알고 자주 부르면 그곳은 지금 율곡수련원이란 이름이 붙고 모두들 율곡의 고향이 백옥포리란 점을 기억하게 될것인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은 다시금 생각하며 옳고 좋은 지점의 좌표를 선택하는 현명함을 기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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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선생과 쌍벽을 이루던 이황선생, 17세기 조선시대를 밝혀주던 성리학의 이이선생과 이황선생의 매화사랑의 詩와 이 주자학 이후 정조 모친의 3년 복상문제의 예학의 대두와 그리고 이 성리학의 객관화에 염증을 느낀 양명학이 반전하는 속에 18세기에 실학의 계파를 묶은 정약용 선생의 매화를 통한 자식사랑의 애절한 사랑의 詩를, 그중 이황선생은 죽어서 만나는 두향과의 사랑의 이야기를 ....

 

서양엔 로미오와 줄리엣의 청춘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있다면 시대는 달리하지만 사랑을 매화꽃으로 승화시키는 우리에겐 점잖은 듯 평생을 잊지못할 사랑을 매화를 통하여 품어내는 사랑 이야기를 그려 보이겠습니다.             

 -------------- 終


율곡 이이의 <유 청학산 탐방기>와 오대산에 대하여 읊은 詩 다섯편을 소개해보면

            [재유 오대산석 간답설(再遊 五臺山石澗踏雪)]                                                                        

                                                                                율곡  이이

           4월의 산속에 눈 비탈길 걷노니

             바람에 옷자락 스쳐 허공에 드날린다

             뭇 산봉우리 온통 푸르러 소리 없이 고요한데

             소나무 밑 그윽한 샘물이 사람향해 속삭이네

              *************************!!!!!!!!!!!***************************************

 

               [유남 대서대중대숙우상원(遊南臺西臺中臺宿于上院)]

                                                                                                     율곡 이이

 

                 깊은 산골에 날씨 활짝 개었는데

                바위에 흐르는 물소리 맑기도 하구나

                오대산 가는 곳마다 흥취에 끌리어

                이끼 길에서도 발걸음 가볍다

 


                다래덩굴 휘어잡고 절정에 오르니

                휜 구름 추른 벼랑에 피어 일고

                옹기종기 작은 산들을 굽어보니

                여기저기에 연기낀 나무들이 펀펀하네

                돌 틈에 흐르는 우통수의 차가운 샘물

                답답한 심정 나도 어쩔줄 모르겠네

 


                한번 마시니 세상일 다 잊고

                선방(禪房) 방석에 앉으니

                새벽 종소리에 깊은 반성 떠 올라

                담담한 심정 나도 어쩔 줄 모르겠네

             ********************!!!!!!!!!!!!!*****************************

                [중유월정사(重遊月精寺)]

 

             쓸쓸한 숲속에서 걸어가는 나그네 길

                석양의 풍경소리 세상절간에서 들려온다

                스님네들 묻지마오 다시 찾아온 뜻을


                바위에 흐르는 물 말없이 대하니 일 어둡네

            ***************!!!!!!!!!!!!!!!************!!!!!!!!!!**************** 

                [장입내산우유(將入內山遇雨)]

 

                벼슬 버리고 돌아오니 묻일이 홀가분해

                오대산  절경이 가장 저에 쏠리네

                산신령이 뿌린 비 손님이 싫어서가 아니고

                숲속의 샘물 늘려서 더욱 맑게 함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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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산인(贈山人)]

 

                오대산 밑이 월정사라

                문 밖의 맑은 냇물 쉬지않고 흐르네

                가소롭다 스님이 실상(實相)에 미혹하여

                무(無)자만 갖고서 부질없이 추구하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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