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백작 2012.11.25 20:15
<강원도 평창에서 청동기시대 주구묘 발견>
문화재청(청장 김 찬)이 허가하고, (재)강원고고문화연구원(원장 지현병)에서 발굴조사중인 강원도 평창군 종부리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전기로 분류되는 주구묘(周溝墓) 무덤을 보호하기위하여 도랑을 두르고 중앙에 움[土壙]을 파서 시신을 직접 매장하는 무덤 형태와 수혈 건물지(竪穴建物地) 땅을 파서 만든 집터, 철기시대 수혈 건물지, 삼국시대 석실묘 등 선사와 역사시대의 주거와 분묘유적을 발견하고, 오는 10월 28일 11:00 평창 종부리 유적 발굴 현장에서 자문회의 시 공개할 예정이다.
강원고고문화연구원은 특히, 청동기시대 전기로 분류되는 주구묘에서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 ; 시신이 놓인 곳)가 토광목곽묘로 이뤄진 것을 확인했으며, 이는 이제까지 확인된 예가 없는 것으로 청동기시대 분묘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평창 종부리 유적은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종부리 일원으로 국도 31호선 영월-방림간 도로개설 구간에 대한 문화재발굴조사로 지난해 시굴조사를 거쳐 올해 7월 6일부터 10월 현재까지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발굴조사와 관련한 자세한 사항은 (재)강원고고문화연구원(033-743-8916),
위:-3구역 토광주구묘 내 토광묘 조사 후 전경(북쪽에서) >한국사연구휘보 제58호
아래:토광 목곽묘와 테두리 도랑
문화재청은 27일 강원고고문화연구원에서 발굴·조사 중인 강원도 평창군 종부리 유적에 대한 빌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전기로 분류되는 주구묘(周溝墓)와 수혈 건물지(竪穴建物地), 철기시대 수혈 건물지, 삼국시대 석실묘 등 선사와 역사시대의 주거·분묘유적을 다량 발견했다
평창지역의 선사문화는 도돈리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면서 확인되었다. 이후 평창읍 후평리에서 선식기 시대의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가 발견되었으며, 대화면 평창읍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인 민무늬 토기가 출토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인 고인돌은 유동과 중부, 상, 후 평, 계장, 임하, 주진리 등지에서 발견되었는데, 총 37기에 달한다.
▷ 평창 계장리 고인돌
소재지 : 강원도 평창군 계장리
현재 계장리에 남아 있는 고인돌은 1기뿐이나 원래는 20여기의 고인돌이 더 있었던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고인돌이 농경지 정리와 농로 개설 공사 등의 이유로 훼손되었다.
현존하는 고인돌은 기반식으로 석재는 편마암이 사용되었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240cm, 폭 117cm, 두께 20cm에 달한다. 고인돌 주변에서 다수의 민무늬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다.
▷ 평창 상리 고인돌
소재지 : 강원도 평창군 상리
아랫 상리에서 상리 2?3반으로 가는 길의 오른쪽 논 가운데 있다. 3기는 고인돌의 확실한 형태를 알아 볼 수 있으나 나머지는 2기는 자연석으로 추정된다. 고인돌군 옆으로는 평창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남천개가 흐르고 있다.
1호 고인돌의 덮개돌은 길이 285cm, 폭 378cm, 두께 40cm에 달하는데, 평창 지역 고인돌 가운데 가장 큰 편에 속한다. 덮개돌로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기반식이다. 2호 고인돌은 거정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역시 기반식이다. 3호 고인돌은 논 옆에 위치하는데 길이 150cm, 폭 197cm, 두께 35cm에 달한다.
▷ 평창 임하리 고인돌
소재지 : 강원도 평창군 임하리
계장리에서 건너오는 나루터에서 임하리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양쪽으로 총 7기의 고인돌이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 고인돌군을 ‘칠성바위’라고도 부른다. 1호 고인돌은 개인 집의 장독대로 사용되고 있는데 말이 땅속에 묻혀 있어 구조를 알 수 없으나 기반식으로 추정된다,
덮개돌은 화강암 재질로 규모는 길이 167cm, 폭 152cm, 두께36cm에 달한다.
2호 고인돌은 임하리 2반 55번지에 위치해 있다. 기반식으로 추정되나 역시 땅속에 일부가 묻혀 있어 확실하지 않다.
3호 고인돌은 둥근 화강암 덮개돌을 가진 고인돌로 크기는 길이 166cm, 폭 140cm, 두께 30cm에 달한다.
4호와 5호 고인돌도 본래의 위치에서 벗어나 있거나 개인의 담 또는 땅속에 묻혀있어 확실한 모양을 확인하기 어렵다.
▷ 평창 종부리 고인돌
소재지 : 강원도 평창군 종부리
종부 1리의 종부교를 지나 약 200m 거리의 왼쪽 밭에 1기가 있고, 종부2리 양지말 가운데를 흐르
는 개울을 따라 10여기에 가까운 고인돌이 배치되어 있다.
밭에 자리한 고인돌은 화강암 재질로 되어 있으며 기반식이다. 크기는 길이 120cm, 폭 80cm, 두께 40cm에 달한다. 종부 2리에 자리한 고인돌군은 대부분 기반식으로 재질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낮은 언덕 위에나 논 또는 밭 가운데 위치해 있는데, 대부분 하부구조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2호 고인돌의 덮개돌에는 지름 5~8cm의 성혈이 18개가 새겨져 있다.
▷ 평창 후평리 고인돌
소재지 : 강원도 평창군 후평리
후평리 고인돌은 후평리 1반 영림서거리 마을에 위치하며 ‘칠성바위’라고도 불린다. 과거에는20기 이상의 고인돌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6기만이 남아 있다. 덮개돌의 재질을 살펴보
면 대부분 화강암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5호 고인돌은 반암, 6호 고인돌은 편마암이 이용되었다.
고인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5호 고인돌로 길이 104cm, 폭 310cm, 두께 30cm에 달한다. 6기의 고인돌은 모두 기반식이다.
강원도 고인돌 특징은 대부분 개석식이며 370여기중 북한강은 인제등보다 충적지가 발달된 춘천에 많으나 남한강에서는 하류인 영월과 원주지역보다는 상류인 평창과 정선 지역에 많은 수의 고인돌이 밀집 되어 있다.
이는 전곡리 유적과 비슷한 지형으로 수심이 낮고 강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중상류 쪽이 청동기인들이 생활터전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한강 유역에서는 대규모 군집을 볼 수 없고 다만 2~5기가 모여 소형군집을 이루는 것이다.
*구석기 유물로 도돈리 유적에서 단면찍개,주먹대패,망치돌,긁개,밀개,찌르개, 몸돌, 찍개등 출토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평창읍 후평리에서3점채집,유동리에서 2점채집.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와 석기:대하리, 대상리, 응암, 도돈, 천동, 유동, 종부, 상. 중.하리,
여만, 후평, 계장, 임하, 다수, 주진, 뇌운, 고길, 조동리등 평창강 대부분 유역에서 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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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천동, 도돈을 굽어흐르는 평창강유역은 마치 전곡리 유적의 한탄강 굽어흐르는 지형은 비슷하고 고대 선사인들은 주거지엔 물이 가까운곳이어야 하며 양지바르고 야산의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한듯 합니다.
구석기. 신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 시대라 하면 그 이전의 철기시대가 있었으며 이 철기는 그 제련법이 지금까지의 제련법으로 오직 고대 바그다드의 힛타이트 족이 발명한것으로 실크로드를 타고 들어왔으나 화목으로 철을 녹이기엔 온도가 작아 어려움이 있었으므로 그보다 제련법이 어려운 청동기시대가 일찍 다가온 점이고 위에서 청동기초기시대라하면 구석기 말끼쯤으로 이해하면 될것 같습니다
위의 뉴스와 레포트에서 보듯 평창강 일대엔 선사유적에서부터 철기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가 형성되었었슴을 볼수있다.
문자를 사용하는 역사시대 이전에 문자가 없는 선사시대, 즉 우리의 조상들 이 한반도에 정착하여 살기에 이곳 평창은 태고이래 가장먼저 정착하여 살았던 곳중의 하나의 길지임엔 틀림없다.
이제 평창은 암사 선사유적, 또는 전곡리 유적처럼 박물관과 그에 따르는 학습체험장과 또한 고고학 후예들을 위한 현장견학및 사학도를위한 모텔, 캠프촌, 현장실습등 다양한 콘텐트를 개발하여 다가오는 시대를 준비함이 좋을듯 합니다.
**********************************************************
그리고 어제는 정선군수왈,,,
평창동계올림픽에 정선 아리랑을 평창동계 올림픽 주제가로 선정할것에 노력을 다한다는데....평창주민들은 어떤 생각입니까??
저,,, 후세백작은 웃기지도 않는 넘들 아리랑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넘들이 올라탈라 그러는가??
그러지 않아 아리랑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고무적이라 왠 구라들이 그리 많은지...
이에 일침을 가하는 글을 쓰던 중인데 아리랑 하단에 평창 아라리와 정선 아라리의 구분 한판 써 보이겠습니다. 어느 쪽이 옛 원음인가?? 그래서 정선 아라리를 이론적 배경으로 설명하는 모든 연구가들은 학자들은 편견밖에 않되는 아류라는 점이다. 그들은 가증스런 정선 아라리에 자기 이름 생색 내려는 반골들인가??
두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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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지역의 선사문화는 도돈리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면서 확인되었다. 이후 평창읍 후평리에서 선식기 시대의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가 발견되었으며, 대화면 평창읍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인 민무늬 토기가 출토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인 고인돌은 유동과 중부, 상, 후 평, 계장, 임하, 주진리 등지에서 발견되었는데, 총 37기에 달한다.
▷ 평창 계장리 고인돌
소재지 : 강원도 평창군 계장리
현재 계장리에 남아 있는 고인돌은 1기뿐이나 원래는 20여기의 고인돌이 더 있었던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고인돌이 농경지 정리와 농로 개설 공사 등의 이유로 훼손되었다.
현존하는 고인돌은 기반식으로 석재는 편마암이 사용되었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240cm, 폭 117cm, 두께 20cm에 달한다. 고인돌 주변에서 다수의 민무늬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다.
▷ 평창 상리 고인돌
소재지 : 강원도 평창군 상리
아랫 상리에서 상리 2?3반으로 가는 길의 오른쪽 논 가운데 있다. 3기는 고인돌의 확실한 형태를 알아 볼 수 있으나 나머지는 2기는 자연석으로 추정된다. 고인돌군 옆으로는 평창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남천개가 흐르고 있다.
1호 고인돌의 덮개돌은 길이 285cm, 폭 378cm, 두께 40cm에 달하는데, 평창 지역 고인돌 가운데 가장 큰 편에 속한다. 덮개돌로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기반식이다. 2호 고인돌은 거정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역시 기반식이다. 3호 고인돌은 논 옆에 위치하는데 길이 150cm, 폭 197cm, 두께 35cm에 달한다.
▷ 평창 임하리 고인돌
소재지 : 강원도 평창군 임하리
계장리에서 건너오는 나루터에서 임하리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양쪽으로 총 7기의 고인돌이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 고인돌군을 ‘칠성바위’라고도 부른다. 1호 고인돌은 개인 집의 장독대로 사용되고 있는데 말이 땅속에 묻혀 있어 구조를 알 수 없으나 기반식으로 추정된다,
덮개돌은 화강암 재질로 규모는 길이 167cm, 폭 152cm, 두께36cm에 달한다.
2호 고인돌은 임하리 2반 55번지에 위치해 있다. 기반식으로 추정되나 역시 땅속에 일부가 묻혀 있어 확실하지 않다.
3호 고인돌은 둥근 화강암 덮개돌을 가진 고인돌로 크기는 길이 166cm, 폭 140cm, 두께 30cm에 달한다.
4호와 5호 고인돌도 본래의 위치에서 벗어나 있거나 개인의 담 또는 땅속에 묻혀있어 확실한 모양을 확인하기 어렵다.
▷ 평창 종부리 고인돌
소재지 : 강원도 평창군 종부리
종부 1리의 종부교를 지나 약 200m 거리의 왼쪽 밭에 1기가 있고, 종부2리 양지말 가운데를 흐르
는 개울을 따라 10여기에 가까운 고인돌이 배치되어 있다.
밭에 자리한 고인돌은 화강암 재질로 되어 있으며 기반식이다. 크기는 길이 120cm, 폭 80cm, 두께 40cm에 달한다. 종부 2리에 자리한 고인돌군은 대부분 기반식으로 재질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낮은 언덕 위에나 논 또는 밭 가운데 위치해 있는데, 대부분 하부구조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2호 고인돌의 덮개돌에는 지름 5~8cm의 성혈이 18개가 새겨져 있다.
▷ 평창 후평리 고인돌
소재지 : 강원도 평창군 후평리
후평리 고인돌은 후평리 1반 영림서거리 마을에 위치하며 ‘칠성바위’라고도 불린다. 과거에는20기 이상의 고인돌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6기만이 남아 있다. 덮개돌의 재질을 살펴보 면 대부분 화강암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5호 고인돌은 반암, 6호 고인돌은 편마암이 이용되었다.
고인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5호 고인돌로 길이 104cm, 폭 310cm, 두께 30cm에 달한다. 6기의 고인돌은 모두 기반식이다.
이는 전곡리 유적과 비슷한 지형으로 수심이 낮고 강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중상류 쪽이 청동기인들이 생활터전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한강 유역에서는 대규모 군집을 볼 수 없고 다만 2~5기가 모여 소형군집을 이루는 것이다.
*구석기 유물로 도돈리 유적에서 단면찍개,주먹대패,망치돌,긁개,밀개,찌르개, 몸돌, 찍개등 출토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와 석기:대하리, 대상리, 응암, 도돈, 천동, 유동, 종부, 상. 중.하리, 여만, 후평, 계장, 임하, 다수, 주진, 뇌운, 고길, 조동리등 평창강 대부분 유역에서 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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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천동, 도돈을 굽어흐르는 평창강유역은 마치 전곡리 유적의 한탄강 굽어흐르는 지형은 비슷하고 고대 선사인들은 주거지엔 물이 가까운곳이어야 하며 양지바르고 야산의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한듯 합니다.
구석기. 신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 시대라 하면 그 이전의 철기시대가 있었으며 이 철기는 그 제련법이 지금까지의 제련법으로 오직 고대 바그다드의 힛타이트 족이 발명한것으로 실크로드를 타고 들어왔으나 화목으로 철을 녹이기엔 온도가 작아 어려움이 있었으므로 그보다 제련법이 어려운 청동기시대가 일찍 다가온 점이고 위에서 청동기초기시대라하면 구석기 말끼쯤으로 이해하면 될것 같습니다
위의 뉴스와 레포트에서 보듯 평창강 일대엔 선사유적에서부터 철기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가 형성되었었슴을 볼수있다.
문자를 사용하는 역사시대 이전에 문자가 없는 선사시대, 즉 우리의 조상들 이 한반도에 정착하여 살기에 이곳 평창은 태고이래 가장먼저 정착하여 살았던 곳중의 하나의 길지임엔 틀림없다.
이제 평창은 암사 선사유적, 또는 전곡리 유적처럼 박물관과 그에 따르는 학습체험장과 또한 고고학 후예들을 위한 현장견학및 사학도를위한 모텔, 캠프촌, 현장실습등 다양한 콘텐트를 개발하여 다가오는 시대를 준비함이 좋을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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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제는 정선군수왈,,,
평창동계올림픽에 정선 아리랑을 평창동계 올림픽 주제가로 선정할것에 노력을 다한다는데....평창주민들은 어떤 생각입니까??
저,,, 후세백작은 웃기지도 않는 넘들 아리랑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넘들이 올라탈라 그러는가??
그러지 않아 아리랑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고무적이라 왠 구라들이 그리 많은지...
이에 일침을 가하는 글을 쓰던 중인데 아리랑 하단에 평창 아라리와 정선 아라리의 구분 한판 써 보이겠습니다. 어느 쪽이 옛 원음인가?? 그래서 정선 아라리를 이론적 배경으로 설명하는 모든 연구가들은 학자들은 편견밖에 않되는 아류라는 점이다. 그들은 가증스런 정선 아라리에 자기 이름 생색 내려는 반골들인가??
두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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