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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에 대한 나의 이해

월정사탑에 대한 나의 미학과 예견

후세백작

2014.07.12 09:11

 

나는 일년전 월정사 8각9층석탑이 원래 조성 당시에는13층탑이 원형이었다는 이해력있는 가설의 글6편을

써서 인터넷으로 문화재청 신문고에 동탑의 원형은 13층탑이었다는 이의신청을 하였던 바 이 역사학자도

아닌 행정가인듯한 담당자가 배정되고 약 보름후에 그가 메일로 하는 말 왈,, 

 
개인은 문화재의 이의신청을 할 수 없고 지자체가 도 지자체로 신청하여야 하고 도 지자체가 문화재청에

신청할 수 있다하며, 또한 "동탑은 70년에 국보 제48호로 지정됨을 사료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답만 얻었슬 뿐.

 

글쎄요, "사료 바랍니다"라는 뜻은 한번 국보로 지정되어 수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리고 채택되지

않았슴의 소감을 묻길래...아니 채택된 소감이란 몰라도 괜스레 친절한척 불채택 됨의 소감물어야 좋치않을

소리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문화재청은 사전에 개인은 신청할 수 없다는 그러한 설명도 없었고 지금까지 인터넷을 통한 60여편의

신문고에 한건도 성사된게 없더라. 지자체에 의한 수정 문제라면 인터넷 신문고 자체가 있어서는 않될 문제라,

이러한 위증스런 기구로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고.

 

또 하나의 답으로 역사학자들은 동탑이 13층 탑이었다고 알았다면 개인이고 지자체이고 무슨 필요있는가?? 

그것이 옳다면 지체없이 수정을 하여야 될 것인데 국보이기에 사료하라면 역사학자들은 역사를 왜곡시키는 

역사의 능욕자들 아니겠는가??

동탑이 13층탑이었다는 나의 생각에 문제를 준 글은 정양호 선생의 "한국미술사상 월정사 八角石塔의 의의

" http://blog.daum.net/kkks1/203 라는 '70년도에 월정사 8각9층석탑 해체시에 작성리포트로 그 문장중 아래의

인용부를 발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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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부>

첫째, 상륜부찰주는 석탑의 9층에서 8층옥개석 밑까지 내려가서 박혔는데 여기에 鐵片으로 고정시키있다.

둘째, 탑신부제4층에서는 남북으로 2매석이며 다른 각층에서는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다제8층 옥개석과

       제9층탑신이 동일석으로 이루어져 8층옥개석 위에 9층탑신이 돌출된 형태이다

 

2) 석탑의 복원

탑신부 복원에 있어서는 석탑의 본래 석재들을 그대로 다시 사용하되 부득이 파손된 석재들은 새로 조성하여

완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제1층 옥개석의 2매석과 제2층 옥개석의 1매석, 제6층 옥개석 1매석, 제9층

옥개석 1매석 도합 4개 옥개석의 5개 석재를 새로이 조성하여 사용하였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평면이 4각형에서 벗어나 多角形으로 되고 층수도 多層으로 변하는 석탑이 유행하게 되는데

이 석탑도 그런 종류에 속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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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후일, 아마 수백년 후라도 나는 가고 없어도.,1970년대처럼 장구한 세월이나 6,25  전화와 같은 특수한 경우에

의하여 동탑의 마모나 파손등으로 안전에 문제가 있슬경우 또다시 동 탑을 해체하여 보강하고 복원공사가 필요한

시간이 있슬 것이다. 다시금 해체, 복원하는 바로 이부분에서 동탑이 13층탑이었다는 하나의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나 하는 가설을 제시한다.

 

동탑이 13층 탑이었다면 상륜부에 4,7m의 찰주에 메달린 철재장식을 옥개석에 구멍을 뚫어꼽고 천년세월에 풍화

작용과 강한바람에 장식부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철항을 지지하는 옥개석이 부서지고 파손되어 몇번이고 개,보수

하였슬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본인은 문제를 제기하며 이에 13층탑이었다는 해답을 구할 수도 있는 것으로 아래에서 이 문제

제기를 하여본다.

 

위의 예문에서 상륜부의 4,7m의 철재장식이 달린 찰주를 꼽기위해 동탑의 8, 9층의 탑신및 옥개석에 찰주끼워

있는 구멍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위의 예문에서 8층 옥개석에 9층 탑신이 붙은 하나의 돌로 조각하였고 9층

옥개석은 파손이 심하여 로이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면 이때 8층 옥개석과 9층 탑신이 붙은 한장으로 된 석조각은 원래 재작당시의 돌이기에 그곳에 찰주를 끼우는

구멍은 제작당시의 구멍이어야 한다.

바로 이 8층 옥개석을 위에서 또는 뒤집어 아래에서의 찰주를 꼽는 항(자로 인터넷이나 작은 옥편엔 없슬 것이다)

 

즉 구멍이란 뜻을 임의의 갱도이라 명명하며 이 찰주를 꼽는 구멍이 원작당시의 항(구멍)인가 아니면 천년 후인

1920년대 전후쯤(이 시기는 상현거사 이능화씨가 쓰고 육당 최남선이 감수한 "조선불교통사"에서 석가사리 봉안처

10곳4번항에 오대산 월정사 8각13층 석탑)이라는 글이 있기에 아마 당 시대 이후에 상층부 10,11,12,13층의

옥개석이 파손되고 불안정하여 9층으로 개,보수하였지 않았슬까 하는 의문을 가진다.

 

http://blog.daum.net/kkks1/708 에서 동탑이 9층이 아닌 13층탑이었다는 여러가지 가설들 중에,, 동 탑의 상륜부

철재장식은 9.8층 옥개석면까지 철편으로 박혔다는데,,

그럼 이 후세백작이 월정사 8각 9층이 아닌 13층 석탑이란 것을 예언한다.
동 리포트에 의하면 상륜부의4,3m 철재장식을 부착키 위해 9층, 8층까지 구멍을 장식부를 뚫어 꽂고,,,

그러면 '70년대처럼 탑신에 노후화 문재로 후일에 동탑을 해체복원 공사가 진행될시에는 8,9층의 옥개석을 면밀히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상륜부의 철재장식을 꼽기위해 2개층에 구멍을 내고 편철로 고정하였다는 정양호선생의 리포트에서 이러한 정양호

선생같은 조사와 보고서로는 않된다.

후일 조사엔 과학적이고 다양한 실험을 깃들여야 할 것이다.

옥개석등 외부는 1,200년 세월의 풍화작용에 그 각을 잃어 가지만 내부의 찰주항의 구멍은 조각의 날과 각이 그대로

보존되 있슬 것이다.

 

이 부분들의 비교의 탄소연대 측정은 물론 그 구멍과 외부 조각의 차이를 검토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검토엔 조각양식은 물론 조각기법 까지의 차잇점을 구분해야 하고 그 조각의 도구의 정(釘)의 날의 차이도,,,

9층 옥개석은 새로 만든것이라 해당이 않되지만 8층 옥개석은 원래의 것이고 이곳에 상륜부 철재장식을 꽂기위해

파낸 항(처음 제작당시의 구멍인지 아니면 "조선 불교통사"란 책 편찬 이후인 1920년이후에 다시 뚫은 구멍인지를

면밀히 살펴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천년전의 원래의 구멍과 13층이 무너지고 8,9층에 상륜부 철재장식을 꽂기위한 후일의 구멍이라면   그 흔적 차이도

날테지만 조각의 기법, 즉 정(釘)의 차이에서 부터 이 정(釘)의 혁신은 돌의 쪼갬에 속력의 차이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이집트 피라밋을 쪼는 정은 철로 된 정이 아니라 이 시기엔 철의 생산이 어려워 구리의 정이었다.

 
나는 가고 먼 후일 2-3백년 이후라도 다시 동 탑을 해체, 보강공사시엔 정양호 선생같은 대강의 리포트가 아닌 합리

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8층 옥개석을 그 구멍과 비교하며 또한 뒤집어서 보면 더 빨리 파악할 수 도 있슬 것이다.

이렇게 본 월정사 탑의 8층 옥개석을 뒤집어도 보면 그 옥개석의 항()내의 정과 끌의 맛의 차이의 다른점을 구분해

볼 수 있다. 이 말은 이 구멍의 앞,뒤를 구멍 공(孔)이라 말하지만 이 구멍의 연결의 벽면인 항()의 깍아낸 기법과

그 끌과 정은 천년전과는 다른 속도와 강도의 맛을 보여주고 있슬 것이다.

 

물론 화강암을 쪼기위해서는 구리나 청동 주석으로는 힘들고 주철의 정과 끌이 필요하다. 그것은 천년의 시간차의

철기문명도 차이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서 그 항과 텁의 면의 조각 시간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면 이는 원형엔 9층탑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동 탑이 9층탑이 아니란 사실이 파악되면 이탑은 원작이 11층도 아닌 13층탑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된다.
이것이 나의 예견이기에 위의 글을 남긴다. 

 

 

[ 또한 아래의 사진을 비교해보자 ]

 

 

 

 

맨 왼쪽은 현존 8각9층석탑이고 가운데 사진은 가상의 월정사 8각13층탑 석탑이다. 그리고 오른쪽은 묘향산

보현사의 8각13층 석탑이다.

위 사진들을 비교해볼때 보현사 13층석탑과 비슷한 꼴의 월정사 탑은 9층보다 13층이 더 자연스러움을 볼 수

있다. 맨왼쪽의 9층석탑의 맨위층, 9층의 옥개석면의 넓이가 상륜부 앉힘보다 넓어 자연스러움의 통일성을 갖지

못했슴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감상으로 비교해 보더라도 월정사 8각9층 석탑의 원형은 13층 석탑이었슴을 이해할수 있는

것이다. 

이점은 다음으로 월정사 8각탑의 살아있는 선의 아름다움이란 미학적 글에서 논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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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교시절 부터 월정사를다녀가며 동 탑의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역사책이나 인터넷을 검색해 보아도 이 월정사 8각9층석탑은 북방형이라는 짤막한 수식어 이외엔

아무것도 더 따라붙지 못한다.

그러나 감은사지 탑이나 고선사지 탑은 통일신라 3층석탑의 정형의 완성품으로 빼어난 경지로 가장 한국적이란

평을 받는다. 

어찌보면 이 3층 석탑들은 단순하고 무사적인 미를 느낄 수 있지만 월정사 8각9층석탑은 팔각의꽉 들어차는 

느낌의 장중미와 또한 화강암으로선 더 이상의 곡선을 나타낼 수 없는 현란함의 극치를 보여주는여유롭게 보이는

이 아름다움의 미를 왜 북방형이라고만 지적하고 말았슬까?? 

이러한 의문의 해답을 오늘 풀어 놓는다.

 

위의 "한국미술사상 월정사 八角九層石塔의 의의"란 리포트에서 정양호선생은 책임성 없이 자기가 알지 못하는

동 탑의 팔각을 미루어 보아 고구려 옛것들의 북방형이란 어렴풋한 이해의 설명을 남겼다.

그에 연유되어 지금 월정사탑등 국내 고려말 조선 중기시기의 팔각탑들이 북방형이다라는 짤막한 설명만으로

홀대를 받고 있는것이다.
이것의, 즉 탑의 옥개석이 팔각이란 것에 대한문헌상으론이 리포트에서 북방형이란 설명이후 팔각탑들은 오래

북방문화의 차입처럼 단순하게 설명되고 만것이다.

 

그러나 이 후세백작은 2부에서 고려중기의 사회 문화적 사상과 정치적여건, 그리고 월정사의 지리적 여건등 복합적

이고 다양함속에 이 팔각탑들의 탄생의 의의를 설명하며 또한 현존의 월정사 8각9층석탑이 현존우리의 탑파양식에

가장 아름다운 최고봉이란 점의 미학을 그려 보이겠습니다.